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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LTURE

column

한국 미술의 삼중 통역자, 화가 박래현

성지연 에세이스트, 국문학 박사

2022. 11. 16

한국 미술계에 큰 족적을 남긴 운보 김기창의 배우자 박래현은 ‘삼중 통역자’를 자처했다. 청각장애인 남편을 위해 영어와 한국어, 구어(口語)를 자유자재로 사용해야 했기 때문이다. 이제 시대는 그를 회화와 직물 공예, 판화를 통역해낸 미술가로 기억한다.

우향 박래현.

우향 박래현.

무언가를 이고 든 4명의 여자가 한 방향을 보며 걸어가고 있다. 이른 아침, 물건을 팔러 어디 시장이라도 가는 것 같다. 한 여자는 닭을 안고, 한 여자는 등에 아이를 업은 채 다른 아이의 팔을 잡고, 한 여자는 계란 꾸러미를 들고 있다. 보따리를 인 다른 한 여자가 한 걸음 뒤를 따라간다.

화가 박래현의 ‘이른 아침’(1956)이다. 6·25전쟁 직후 고단한 삶을 담고 있다. 그런데 작품의 분위기가 어둡기보다 어딘가 정겨움이 느껴진다. 전통적이면서도 새로운 감각을 표현한 그림이다. 크기가 253x194cm이니 전시장에서 봤다면 압도됐을 것이다. 오래전 작은 도판으로 봤던 기억이 남아 있다.

이 외에도 ‘노점’ ‘달밤’ ‘노’ 같은 작품을 어디선가 봤다. 당시엔 화가의 삶에 대해 관심을 가지지는 않았다. 박래현을 다시 주목하게 된 것은 그의 배우자가 김기창인 걸 알고 생긴 호기심 때문이다. 운보 김기창이라면 워낙 유명한 화가 아닌가. 민화에서 영향을 받았다는 ‘바보산수’가 강렬했다. 어려서 장티푸스를 앓은 뒤 청각장애를 갖게 됐다는 사연과 역경을 뚫고 이루어낸 독보적인 세계가 인상적이었다. ‘친일인명사전’에 오를 만큼 김기창의 뚜렷한 친일 행적 또한 널리 알려져 있다.

삼중 통역자, 박래현

부부 화가인 우향 박래현(왼쪽)과 운보 김기창.

부부 화가인 우향 박래현(왼쪽)과 운보 김기창.

2020년 작가 탄생 100주년 기념으로 국립현대미술관이 ‘박래현, 삼중통역자’란 전시회를 열었다. 뒤늦게 같은 제목으로 국립현대미술관이 펴낸 화집을 구해 도판을 봤다. 기억 속에 남아있는 그림 말고도 다른 많은 작품이 있었다. 다양하면서도 인상적이었다. 한 사람의 창작물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여러 화풍을 담은 작품이 공존했다.

책에 실린 글들도 좋았다. 박래현의 작업을 시대 풍경이나 미술사의 맥락 속에 놓아둔 해설들을 읽으니 작품 안에 담긴 의미가 풍부하게 드러났다. 박래현의 삶과 예술을 이해하는 데 훌륭한 길잡이가 됐다.



박래현은 1920년 평안남도 진남포에서 출생했다. 부유한 집에서 태어나 사범학교에서 공부하고 2년간 교사로 일했다. 1940년 화가의 꿈을 품고 일본 도쿄에 있는 도쿄여자미술전문학교에 입학했다. 1943년 ‘단장’이란 작품으로 제22회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총독상을 수상했다. 이 작품은 까만 기모노를 입은 소녀가 빨간 경대 앞에서 단장을 하고 있는 사실주의 화풍의 그림이다.

‘박래현, 삼중통역자’에서 먼저 눈에 띈 글은 미술사학자 강민기의 것이다. 그는 인물화를 중심으로 박래현 그림의 궤적을 돌아본다. 박래현은 앞서 그렸던 도회적 인물화풍에서 벗어나 1950년대 서양 입체파를 접목시켜 동양화의 현대화를 시도했다.

1946년 최초의 규수 화가 개인전을 열었을 때만 해도 박래현은 일본화의 영향을 보인다는 비판을 받았다. 그런데 1956년 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서 대통령상을 받은 ‘노점’과 같은 해 대한미협전 대통령상을 받은 ‘이른 아침’ 이후엔 피카소와 브라크가 이끌었던 입체파적 화풍으로 나아간다. 이후 박래현의 인물화는 번지기나 점묘 같은 새로운 기법을 도입한 반추상화 경향을 보였다.

뿌리가 있는 코즈모폴리터니즘

1973년 미국 밥 블랙번 스튜디오에서 판화를 만들고 있는 박래현.

1973년 미국 밥 블랙번 스튜디오에서 판화를 만들고 있는 박래현.

‘박래현, 삼중통역자’의 또 다른 필자, 미술사학자 김경연은 박래현의 코즈모폴리턴적 성향을 주목한다. 박래현은 일제강점기에 일본 유학을 한 동양화가다. 광복 직후 미국 유학을 계획할 정도로 세계 미술에 대한 동경을 갖고 있었다. 박래현·김기창 부부는 동양화의 현대화 및 세계화를 부단히 추구했다. 결혼 후 박래현은 김기창과 같이 국내외에서, 특히 미국에서 부부 전시회를 적잖이 열었다. 서양 미술계에서 인정받고 싶었던 열망이 반영된 것이다.

흥미로운 점은 이 부부의 해외여행이다. 두 사람은 1965년 미국의 미술관과 아메리칸 원주민 유적을 탐방한 다음 프랑스, 이탈리아, 인도, 태국을 방문했다. 귀국 후 부부는 기행문을 쓰고 여행 체험을 담은 작품들을 발표했다. 여기에 미국 원주민 유적과 공예품은 물론 이집트, 인도, 태국 등의 고대문명과 문화유산에 관한 관심이 담겨 있다.

박래현은 고대문명 유산을 간직한 지역을 하나의 문화 권역으로 바라봤고, 동시에 동질감을 느꼈다. 예를 들어 미국 뉴멕시코주, 푸에블로족이 사는 지역에 갔을 때는 우리나라 시골을 찾아간 듯 친근감을 느꼈다.

박래현의 관심은 전통 회화에 머물러 있지 않았다. “예술은 본디 마음의 휴식처를 제공하고 주변 환경을 좀 더 아름답게 발전시킬 수 있어야 한다”며 장식미술과 생활미술 또한 높이 평가했다. 그래서 중남미의 토기, 아메리카 원주민의 편물, 중국 고대 청동기의 문양을 우리의 백자, 토기, 소반, 맷방석, 떡살과 같은 아름다움으로 바라봤다. 이런 박래현의 태도를 김경연은 ‘뿌리가 있는 코즈모폴리터니즘’으로 이름 붙인다.

이 해석은 ‘박래현, 삼중통역자’ 표지인 ‘작품’(1966~67)을 좀 더 깊이 이해할 수 있게 한다. ‘작품’은 맷방석 시리즈 혹은 엽전 시리즈로 알려진 추상화 중 하나다. 황토색 줄이 겹겹이 직선 또는 곡선으로 쌓여 있는 것이 마치 추상무늬가 담긴 다른 나라 원주민의 편물을 보는 것 같기도 하고, 우리나라의 전통 맷방석을 보는 것 같기도 하다. 친근한 문양을 반복한 것이 복고적이고 회고적이라기보다 창의성과 생동감을 느끼게 한다.

그런데 삼중 통역자란 어떤 의미일까. 책을 기획한 김예진 학예연구사에 따르면 삼중 통역은 김기창을 위한 통역, 실험미술가로서의 통역, 한국의 민족성을 예술의 현대성 및 국제성과 매개하는 통역을 뜻한다.

구체적으로 보자면, 김기창을 위한 통역은 그에게 입 모양으로 의미를 전달하는 구어(口語) 통역만이 아니라 새로운 미술을 전달하는 통역이다. 실험미술가로서의 통역은 동양화 재료, 추상화 양식, 판화 기법을 매개하는 통역이다. 세 번째 통역은 앞의 코즈모폴리턴적 면모에서 설명한 대로 한국적인 것을 다른 문화와 연결 짓고 다시 현대 추상화로 옮겨놓은 통역이다.

삼중 통역자는 원래 박래현이 스스로를 지칭한 말이다. 박래현은 미국을 여행하면서 영어를 듣고 우리말로 번역한 뒤 이를 다시 구어로 옮겨 청각장애인 남편 김기창에게 설명했다. 그러니까 영어, 한국어, 구어를 오가며 언어를 통역했다는 의미다. 미국 여행을 동행했던 시인 모윤숙은 온몸을 움직여 대화하는 박래현의 행동을 무용가에 비유하기도 했다. 참 이채로운 예술가다.

예술과 가정의 공존

“아침 6시쯤 일어나 기저귀 빨기, 밥 짓기, 청소하기, 아침 식사가 끝나면 이것저것 치우고, 닭의 치다꺼리, 아기 보기, 정오면 점심 먹고, 손이 오면 몇 시간 허비하고, 저녁 먹고 곤해서 좀 쉬는 동안에 잠이 들면 자 그러면 본업인 그림은 언제나 그리나.”

1948년 박래현이 쓴 에세이 ‘결혼과 생활’에 나오는 구절이다. 1947년 결혼 후 장녀가 태어난 지 1년 뒤다. 가사 노동은 고되고 여유 시간을 허락하지 않는다. 거기다 그는 그림까지 그려야 했으니 일상은 빠듯하기만 하다. 지금 읽어봐도 일과 가정 사이에서 동동거리는 마음이 전해온다.

박래현의 삶을 상세히 전하는 것은 김예진의 글이다. 박래현은 밝고 사교적인 성품으로 손님맞이와 요리를 즐겼다고 한다. 아이들의 옷을 만들어 입히는 소박하고 알뜰한 주부였다. 박래현의 막내딸은 엄마가 그림을 그리다가도 언제든 반갑게 맞아주었다고 회상한다. 광복 직후 찾아온 산업화 시대에 요구됐을 ‘여류화가’로서 또 하나의 일상이었다.

박래현의 이런 모습은 그 시절 유명했던 것으로 보인다. 1974년 박래현은 대한주부클럽연합회로부터 신사임당상을 수상했다. “남편의 말문을 연 사랑과 예술이 인간 승리의 기록”이란 수상 소감을 남겼다고 하니, 장애를 가진 남편을 돌보고 1남 3녀를 키워냈던 것에 대한 수상이 아니었을까.

‘삼중 통역자’란 삶의 고단함이 묻어 있는 말이다. 살림을 하고 아이를 키우고 그림을 그리고, 게다가 구어로 무용가처럼 춤을 추듯 대화를 했다니 슈퍼우먼이었던 게 분명하다. 하지만 말이 슈퍼우먼이지 그 이면에는 감당하기 힘든 삶의 무거움이 놓여 있었을 테다.

“시달릴 대로 시달린 인간들의 마음을 부드럽게 어루만져줄 수 있는 손길이 항상 가정에 있기를 원하는 마음은 누구나가 바라는 것이다. 예술이 우리 마음속에 줄 수 있는 것은 오직 이 역할을 다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주는 일이다.”

박래현이 1959년에 쓴 에세이 ‘가정에 있어서의 예술의 위치’에 나오는 말이다. 박래현이 전하려는 예술의 역할은 생활에 시달린 우리 마음을 어루만지고 따듯하게 하는 것이었다.

이런 박래현의 견해가 본인이 원래부터 가졌던 예술에 대한 생각인지 아니면 자신을 둘러싼 조건과 타협한 결과인지 궁금하다. 박래현은 본업에도 뚜렷한 성취를 이룬 동시에 훌륭한 가정을 꾸려냈다. 만약 가정을 조금 등한시하고 본업에 더욱 몰두할 수 있었다면 더 큰 성취를 이루었을까.

박래현이 대단한 사람이라 그렇지 보통 사람들에게는 사회생활과 가정생활 둘 다 잘 꾸려가는 게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많은 경우 사회와 가정 중 하나에 주력하고, 나머지는 소홀하게 된다. 특히 살림과 육아를 여자의 몫이라 생각하는 사회에서 일을 중심에 둘 것인가, 가정에 신경을 쓸 것인가, 아니면 둘 사이 타협이냐의 선택은 여성에게 매우 중요한 문제다. 박래현은 타협을 택했지만 둘 모두에서 최선을 추구했다.

박래현의 독특한 작품 세계는 바로 이런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박래현은 예술을 전문가들만이 향유하는 것으로 보지 않았다. 박래현의 작품들은 실생활의 감각을 미술 세계 안으로 끌어들여 독창적인 미감을 창조했다. 박래현의 독창성이란 이중적이다. 서양적 미술과 동양적 미술의 공존이 그 하나라면, 일과 가정의 공존이 다른 하나이지 않을까.

생각해보면 예술과 일상의 거리는 멀지 않다. 밥 짓고 빨래하고 아이를 돌보는 일상은 예술의 한 원천일 수 있다. 박래현은 이를 실천한 드문 미술가였다. 21세기적 시각에서 보면 이런 박래현의 삶과 예술은 공감과 거리감을 동시에 느끼게 한다. 일과 가정을 공존시키려는 박래현의 삶이 공감을 안겨준다면, 바로 그 삶을 위한 초인적 노력은 다소의 거리감을 불러일으킨다는 게 솔직한 내 심경이다.

다시 만난 박래현

박래현이 완전한 자유를 얻은 것은 미국 유학에서였다. 1969년 박래현은 쉰 살을 맞아 미국 뉴욕 프랫 그래픽 아트 센터에서 판화 공부를 시작했다. 남편은 혼자 귀국했고 큰딸과 함께 남았다. 이때부터 박래현 삶의 무게중심은 미술에만 맞춰졌다. 당시 박래현이 주력했던 작업은 추상 판화였다.

그런데 그에게 비극이 닥친다. 1975년 7월 암이 발병한 것. 김기창은 박래현을 한국으로 데리고 왔다. 그리고 박래현은 1976년 1월 56세로 서울 성북동 자택에서 세상을 떠났다. 너무 일렀다. 평생 끝없는 변화를 추구해온 박래현의 미술 세계는 돌연 이렇게 마감하게 됐다. 짧았던 자유의 시간이 안타깝기만 하다.
박래현의 작품 중 ‘자매’(1956)가 인상적이다. 종이에 채색한 것으로, 한복을 입은 자매가 어깨동무를 하고 있다. 언니는 동생을 무덤덤하게 바라보고 동생은 엷은 웃음을 짓고 있다. 그림에서 엄마의 사랑이 느껴진다.

21세기 현재의 관점에서 일과 가정을 공존시키려는 박래현의 노력은 여성에게 무거운 짐이다. 하지만 이 작품만 보면 마음이 애틋해지고 따듯해진다. 박래현보다 50년 후에 태어난 나는 20세기적 여성일까, 아니면 21세기적 여성일까. 박래현의 삶과 예술은 어느새 나이 쉰을 넘긴 내게 이런 질문을 던진다. 그를 다시 만나게 된 충분한 이유가 됐다.

#박래현 #삼중통역자 #성지연 #다시만난그녀들 #여성동아

사진 동아DB 뉴스1 
사진제공 국립현대미술관문화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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