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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umn

꿈과 욕망 사이, 청년 정치

글 신지예

입력 2022.03.05 10:30:01

지난해 공직선거법 개정으로 국회의원 선거와 지방선거 피선거권자 연령이 18세로 낮아졌습니다. 나이로만 따지면 청년 정치의 가능성이 한껏 높아진 환경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요.
식민 조선의 서른 살 청년 안중근은 조국의 해방과 아시아의 자유를 꿈꿨습니다. 대개의 사람들에게 한낱 몽상이었을 뿐인 그 꿈이 모두의 현실이 되기까지 걸린 시간은 35년입니다. 시간이 흘러 1970년, 청계천 평화시장 스물두 살 청년 전태일은 노동해방을 꿈꾸며 제 몸에 불을 놓았습니다. 그로부터 50년 넘는 세월이 흘렀지만, 그의 꿈은 여전히 이뤄지지 않고 있습니다.

꿈이란 것이 그렇습니다. 애당초 이뤄질 것을 알고서 꾸는 꿈이란 없을 겁니다. 자신의 이익, 처지와 상관없이 현실의 모순과 비루함을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사람들이 공동체의 더 나은 미래, 옳은 방향을 위해 한발 먼저 내딛기 시작할 뿐입니다. 그런 이유로 꿈을 꾸는 사람에게 “너는 그 꿈을 이룰 자신이 있느냐”고 묻는 것은 무의미한 일입니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 삶을 들여다보면 모두 누군가의 꿈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당장 몸에 와 닿는 최첨단 기술은 물론이고 공기처럼 변해버려 그 소중함을 잊은 자유민주주의 환경도 30여 년 전 대부분의 사람에겐 결코 이뤄질 수 없을 것으로 보인 꿈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 사회엔 꿈을 꾸는 사람을 몽상가라 부르며 “현실의 엄중함을 외면한다”고 비난하거나 “경험이 적어 저렇다”며 어설프게 취급하려는 분위기가 있습니다. 정작 자신들이 발 딛고 서 있는 현실이 누군가의 꿈이 이뤄놓은 결과임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한국 민주주의 역사를 이끌어온 동력

역사에서 꿈을 꾸는 역할을 담당한 사람은 대부분 청년이었습니다. 기성세대보다 관습의 구속을 덜 받고, 책임질 의무가 상대적으로 적은 덕분일 것입니다. 이때 이들을 수용하는 사회적 태도가 어떠한가에 따라 문명의 성패가 갈리곤 했습니다. 변화를 원하는 청년들의 의지를 적극적으로 수용해 탁월한 성취를 이뤄낸 문명이 있는 반면, 상당수 문명은 기득권을 놓지 않으려는 기성 집단의 반발로 사실상 종식되기도 했습니다.



한국 현대사에서 청년을 대하는 태도가 압축적으로 녹아 있는 글은 민태원의 ‘청춘예찬’입니다.

“청춘의 피는 끓는다. 끓는 피에 뛰노는 심장은 거선의 기관같이 힘 있다. 이것이다. 인류의 역사를 꾸며 내려온 동력은 바로 이것이다.”

교과서에도 실려 많은 이의 뇌리에 박혀 있는 이 문장에서처럼, 청년이라는 이름은 말 그대로 눈부시게 빛나는 푸르른 존재입니다. 우리 사회는 한때 객기처럼 보이는 그들의 어설픈 태도조차 청춘의 특권으로 이해하려 했습니다. 거기에 상응하듯 청년들도 개인적 성취의 중요함보다 사회 구성원 모두의 이익을 앞세우는 태도를 공공연히 지향하며 역사적 분기점마다 공적 역할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4·19 혁명에서 1987년 민주화운동까지 이어지는 한국 현대 민주정치사가 대표적인 예시가 될 것입니다.

한국이 오늘날, 시작점이 동일했던 다른 나라들과 분명히 구별되는 현재를 누리게 된 가장 큰 동력은 내일을 바라본 청년 집단의 진취성, 그리고 원숙한 경험을 바탕으로 그들을 엄호한 기성세대의 어울림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지금은 어떨까요. 청년이라는 단어는 언젠가부터 ‘88만원 세대’라는 달갑지 않은 표현으로 대치되기 시작했습니다. 과거 사회 문제를 헤쳐 나가는 주체였던 청년이 이제는 사회가 풀어줘야 할 문제를 가진 집단으로 변해버렸습니다.

청년들은 더 이상 꿈을 꾸지 않습니다. 지표를 보면 과거 어느 세대보다도 사회적 안정과 경제적 풍요로움을 누리는데 “꿈을 꿀 수 있는 여유가 없다”고 합니다. 386세대로 대표되는 기성세대가 이전 세대에게서 받은 기회를 지금의 청년들에게 제공하기를 주저하는 사이, 세상은 온통 적대적 경쟁을 통한 각자도생의 정글이 돼버렸습니다.

탈진실 시대의 청년 정치

이처럼 사회가 제대로 된 방향성을 놓치고 길을 헤맬 때 비전을 제시하고 구성원 사이의 결합을 이끌어야 하는 것이 정치입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정치인의 언어에서 진실이 사라졌습니다. 사회 구성원이 공유하는 공통분모 역할을 하던 진실의 자리에 개인의 감정과 신념 당파성이 들어앉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진실이 일상적으로 왜곡되기도 하고, 필요에 따라서 사용되는 수사 도구로 이용되는 일이 빈번해졌습니다. 단지 개인의 의견일 뿐인 내용이 진실처럼 퍼지고, 진실은 한 개인의 의견처럼 취급해버리는 사회, 이른바 탈진실(post-truth) 시대가 도래했습니다.

탈진실은 진실이 아닌 것을 진실처럼 포장한 허위(虛僞)일 뿐입니다. 이런 종류의 ‘사이비’가 갖는 특징 중 하나가 겉으로는 무척 멀쩡해 보인다는 것입니다. 그럴듯해 보이는 것을 넘어 때로는 진짜보다 더 진짜 같은 엄숙한 표정으로 자신을 포장합니다. 유대인으로부터 국가를 지키겠다는 명분으로 학살을 자행한 나치, 사회 정화를 하겠다며 국민을 강제 수용한 전두환의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를 보십시오. 사회 갈등을 권력 장악의 수단으로 삼는 집단은 언제나 그 실체를 감추고자 동일한 방식을 사용했습니다.

하나 아렌트가 ‘전체주의의 기원’에서 밝힌 것처럼 전체주의가 가장 선호하는 대상은 “사실과 허구의 차이, 진짜와 가짜의 차이”에 관심 없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당파성을 기준으로 모든 것을 사고하고 행동합니다. 자신이 속해 있다고 믿는 집단만 옳다고 보고, 다른 생각은 무조건 배격하는 것이 정의로운 행동이라고 여깁니다. 이런 상황은 필연적으로 소통의 부재를 낳습니다. 최근 ‘공정’을 화두로 내걸고 있는 일부 청년 정치인 그룹도 그렇습니다. 그들은 기득권 부모를 둔 엘리트 청년에게나 유리한 가짜 공정 쇼를 그럴듯하게 포장하려고 여성을 희생양으로 삼습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에도 훨씬 못 미치는 여성을 둘러싼 환경을 보려 하지 않고, 일부 직종에서 드러나는 문제를 침소봉대 확대 재생산해 “여성에게 특혜가 쏟아지고 있다”는 가짜 뉴스를 퍼뜨리는 일에 열심입니다.

청년 정치가 얼마나 쉽게 변질되고 왜곡될 수 있는지는 386 운동권 출신 정치인들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경제범죄, 성범죄 같은 도덕적 파산마저도 부끄러워하지 않는 그들이 20여 년 전엔 ‘젊은 피’라는 이름으로 정치를 시작한 청년이었습니다. 사회가 그들의 욕망을 통제하지 못하고, 당파성에 치우쳐 그들의 잘못에 눈감은 사이 그들은 자정능력을 상실한 괴물이 돼버렸습니다.

지난해 공직선거법 개정으로 국회의원 선거와 지방선거의 피선거권자 연령이 열여덟 살로 낮아졌습니다. 나이로만 따지면 청년 정치의 가능성이 한껏 높아진 환경으로 보입니다. 이런 때일수록 언론과 사회는 정상적인 청년 정치가 작동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데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특히 청년들이 공공선에 대한 꿈을 마음껏 꿀 수 있도록 기회를 주고 지원을 아끼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청년들이 마음껏 꿈꾸기 시작하고, 그들이 가진 가능성이 세대와 세대의 결합으로 이어지면 지금 우리가 안고 있는 많은 문제가 자연스럽게 풀리며 제자리를 찾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청년정치 #선거법개정 #여성동아


신지예
페미니스트를 자임하는 1990년생 여성 정치인. 일찌감치 청년 정치의 중요성을 깨달았다. 2004년 한국청소년모임 대표를 지냈고, 녹색당 소속으로 20·21대 총선과 2018년 서울시장 선거에 출마했으며, 지난해 4·7 서울시장 보궐선거 때는 무소속으로 선거를 치렀다. 대선을 앞두고 국민의힘 새시대준비위원회 수석부위원장을 맡았다가 사퇴했다.


사진 게티이미지



여성동아 2022년 3월 69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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