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그란 검은 뿔테 안경, 검은색 니트셔츠와 흰색 면바지, 흰 운동화. 인터뷰 자리에 나타난 박재정(51) 퍼플독 대표는 요즘 말로 ‘꾸안꾸’(꾸민 듯 안 꾸민 듯 자연스럽게 꾸민) 스타일이었다. 언뜻언뜻 보이는 50대 CEO 같지 않은 패션 센스에서 박재정 대표가 푹 빠진 와인을 닮았단 생각이 들었다. 와인 역시 꾸안꾸의 대상이다. 격식을 다 갖추고 마시거나 달달 외울 필요까진 없지만, 적당히 알고 온도와 잔 등 몇 가지만 지켜주면 더 맛있게 마실 수 있다.
박재정 대표가 설립한 스타트업 퍼플독은 2018년 7월 국내에서 처음으로 와인 구독 서비스를 시작했다. 매월 일정 구독료를 내면 AI 분석을 기반으로 한 내 취향의 와인을 집에서 받아볼 수 있다. 함께 보내주는 와인 설명서와 ‘1분 레슨’ 콘텐츠 덕분에 1년 정도 구독하다 보면 나만의 ‘소울 와인’을 발견하는 것은 물론 어디 가서 ‘와인 좀 안다’고 할 정도의 지식도 쌓인다.
박재정 대표는 국제인증자격증도 취득한 와인 전문가다. 하지만 원래 와인 사업을 하려고 공부를 시작한 것은 아니었다. 매일유업 법무팀장으로 근무할 당시 업무 관계상 필요해 팀원들과 함께 당시 회사에서 운영하던 프랑스 와인 아카데미 듀뱅의 서울지사에서 3년간 공부를 했다. 그 팀원들과 2014년 회사를 나와 처음에는 법무 관련 아웃소싱 업체를 차렸다가 2018년 1월 와인 관련 업종으로 전환했다. 사명도 ‘퍼플독’으로 바꿨다. ‘Purple’은 고귀한 사람, 즉 회원을 의미하고 ‘Dog’는 고귀한 회원을 위한 삶의 동반자이자 집사를 뜻한다.
“와인 시장은 꾸준히 우상향 추세예요. 와인을 전달하는 방식도 트렌디해야겠구나 고민한 끝에 구독 서비스를 시작하기로 했죠. 저는 구독 서비스가 궁극적으로는 구독 상품을 통해 회원의 삶의 질이 향상되거나 행복도가 올라가는 등의 형이상학적 가치를 가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단순히 받아보는 게 편해서라면 그건 정기 배송에 불과하죠.”
“어느 지방에서 어느 품종으로 만들어졌고, 그 포도가 자란 땅이 어떤 스타일이라 이런 향과 맛이 난다는 정보를 미리 알고 있으면 마실 때 머릿속으로 상상이 되잖아요. 와인이 더 맛있게 느껴지죠. 와인은 종이컵에 따라 마시면 정말 맛이 없어요. 조금은 배워야 하고 분위기를 갖추면 더 좋고 이런 점들이 허들이 될 수 있겠지만 한편으론 그렇기 때문에 와인이 자기 라이프스타일을 업그레이드시켜주는 요소가 되는 거 아닐까요(웃음)?”
와인이 핫한 아이템인 것도, 구독 서비스란 트렌디한 방식이 잘 통할 것도 예상했지만 넘어야 할 산이 있었다. 현행법상 주류는 전통주를 제외하곤 온라인 판매가 법적으로 금지되어 있다는 점이다. 청소년의 주류 구입을 막기 위해서다. 단, 매장을 직접 방문해 결제하면 택배 배송은 가능하다. 박재정 대표는 이 명백한 한계 때문에 사업을 확장하는 데 큰 어려움이 있으리란 사실을 뻔히 알면서도 비즈니스를 시작했다. 시간이 오래 걸려도 잘될 거란 믿음이 있었다. 다행히 국세청은 지난해 4월 모바일 앱을 통해 주류를 주문하고 주문한 업체 매장에 방문해 수령하는 스마트 오더 방식도 허용했다.
“와인 구독 사업이 성장세가 더딜 수밖에 없다는 걸 알고 거기 맞춰 시작했어요. 통신 판매가 안 되다 보니 외부에서 바라보는 브랜드나 서비스 매력도에 비해서 정기 구독자 수가 많지 않은 게 사실이에요. 그러나 모든 구독 모델에 있어 중요한 지표인 구독유지율과 순증가율이 높습니다. 구독유지율이 94%예요. 많은 사람을 유치하진 못하지만 한번 들어오면 나가진 않는다는 거죠. 순증가율도 월 10% 이상입니다.”
퍼플독은 온라인과 오프라인의 시너지를 위해 지난 7월 2일 서울 동교동 AK&홍대 1층에 디지털 와인 스토어 ‘퍼플독 홍대’를 열었다. 이곳에서는 퍼플독이 엄선한 와인 1백30종을 선보이며, 방문객은 누구나 오디오 도슨트를 들으며 나만의 와인을 찾아볼 수 있다. 와인 구독 서비스 신청 및 현장 구매도 가능하다. 오픈식에는 배우 하석진도 참석해 시음회, 와인 도슨트 등을 선보였다.
“세상에 없던 새로운 스토어를 오픈하려다 보니 IT 서비스 개발비가 많이 들었어요. 구독 회원은 이곳에서 만화 ‘신의 물방울’에 나오는 아로마 키트로 그동안 글로만 접했던 54가지 향을 직접 맡아볼 수도 있고, 한 달에 한 번 테이스팅도 해볼 수 있어요. 홍대점을 시작으로 주요 지역에 스토어를 두고 와인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 직접 찾아오게끔 만들 계획이에요.”
지난 6월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해 와인 수입액은 3천7백13억원으로 통계 이래 처음 3천억원을 넘어섰다. 이는 코로나19 이전인 2019년 수입액보다 27% 늘어난 수치다. 올해 1~5월 와인 수입액도 벌써 2천1백44억원으로 집계됐다. 이 속도라면 올해는 4천억원이 넘을 전망이다.
그러나 와인 시장이 폭풍 성장했음에도 아직 많은 사람이 와인을 어렵다고 느낀다. 실제로 와인의 역사가 깊고 종류가 방대한 것도 사실이다. 이 때문에 대부분은 와인 숍 소믈리에가 추천하는 대로 사거나 대형마트 와인 코너에서 가격을 보고 적당히 고르는 경우가 많다.
박재정 대표는 와인이 어렵다는 인식을 인정하며 오히려 “만약 와인이 쉬웠다면 마셨을 때 그만큼 감동이 있겠느냐”고 반문한다. 만약 음악, 미술 분야가 공부를 하지 않고 접해도 누구나 다 아는 거라면 창작자 입장에서 열정적으로 작품 활동을 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와인도 마찬가지다. 진정한 가치를 알아줄 사람이 없는데 열심히 만드는 이가 있을 리 만무하다.
“와인은 어려워요. 그래서 오래전 유럽에서도 와인을 마실 때 버틀러(Butler)가 있었어요. 집사라는 뜻으로 알려진 버틀러의 어원이 술 창고지기에서 시작된 거예요. 유럽에서는 손님을 초대할 때 버틀러가 미리 요리사에게 이러한 와인이 나가니 여기에 맞춰서 음식을 준비하라고 일러줬다고 해요. 그러면 주인은 손님에게 당신의 취향을 고려해 이 와인을 준비했다고 자랑도 하고 와인 창고를 보여주기도 했죠.”
‘와인을 마시는 게 공부이자 숙제가 되면 안 된다’는 게 퍼플독이 와인 버틀러를 자처하는 이유다. 심지어 21세기의 와인 버틀러는 더 똑똑해졌다. 퍼플독 회원 가입 시 한 와인 매칭 설문을 기반으로 자체 개발한 AI 알고리즘이 회원이 좋아할 만한 와인을 배정해준다. 이후 받아본 와인에 대해 피드백을 하면 시스템이 다시 이를 참고하고 다른 회원들의 데이터와 비교해 취향을 보다 정교하게 파악해나간다.
하지만 처음에는 대부분 자신의 와인 취향에 대해 잘 모른다. 첫 설문 결과에서 50% 정도만 맞는 편이다. 그래서 구독 신청 시 내 스타일에 맞는 와인만 구독하겠다는 방식과 다양한 스타일을 경험해보겠다는 방식 중 후자를 택하는 사람이 더 많다. 구독 상품도 3만9천원부터 1백만원까지 다양한데 아무래도 기본 상품부터 가볍게 시작해보는 편이다. 박재정 대표는 “리매칭 2~3회 정도를 거쳐야 거의 정확해진다”며 “만약 그래도 보내준 와인이 너무 별로였다고 하는 분이 있으면 다른 와인으로 새로 보내는데 컴플레인을 거는 고객이 별로 없다”고 자신했다.
다만 소울 와인을 찾았더라도 와인을 더 맛있게 마시기 위한 또 한 가지 중요한 관문이 남았다. 바로 마시는 방법이다. 와인마다 그 와인을 가장 맛있게 즐길 수 있는 적정 음용 온도가 있다. 그 온도를 벗어나면 맛과 향이 달라진다. 일반적으로 전문가들이 추천하는 온도는 화이트와인은 10~12℃, 레드와인은 16~18℃, 스파클링 와인은 6~8℃ 정도다.
“우리나라에서 와인 온도를 맞춰서 드시는 분이 10%도 안 될 거라고 생각해요. 한 회원으로부터 우리가 보낸 와인이 별로였다고, 알코올 향만 느껴진다는 피드백이 온 적이 있어요. 확인해보니 평이 굉장히 좋은 화이트와인이었어요. 이상해서 알아보니 그냥 상온에 뒀다가 드셨다더라고요. 그 와인은 냉장고에 뒀다가 꺼내서 30분 후 온도가 10℃쯤 됐을 때 먹어야 맛있거든요. 화이트와인을 상온 25℃에 뒀다 먹으면 실제보다 알코올 향이 더 많이 느껴지죠. 반대로 20℃에서 먹어야 하는 와인을 5℃에서 먹으면 산미만 엄청 강해지고요.”
박재정 대표는 소주의 예를 들었다. 소주를 차갑게 먹으면 알코올 향이 덜 느껴지고 목 넘김도 좋다. 반면 야유회나 MT를 가서 야외에서 미지근하게 먹으면 바로 취하기 십상이다. 따라서 요즘처럼 무더운 한여름에는 시원하게 마시는 청량감 있는 스파클링와인이나 화이트와인이 제격이다. 박 대표는 “식전에 가볍게 한잔해 입맛을 돋워도 좋고 출출할 때 스낵과 곁들여 마셔도 부담이 없다. 한식에도 잘 어울린다”며 “휴가철 술을 못 마시거나 임신 중, 술자리 후 운전을 해야 하는 상황에서 기분을 내고 싶다면 ‘제로와인’을 마셔보라”고 추천했다. 퍼플독에서 2019년 국내 최초로 론칭한 무알코올 와인 브랜드 제로와인은 세계적인 와이너리 ‘피에르 챠빈 에스테이트’에서 전통적인 제조 방식으로 만든 후 추가적인 공정을 통하여 알코올 성분만 제거한 ‘진짜’ 와인이다.
“시중에서 판매 중인 국내 무알코올 와인은 사실 포도주스나 다름없어요. 일반 포도주스와 같은데 와인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양조용 포도로 만들었기 때문이죠. 양조용 포도는 일반 포도보다 최소 2.5배 이상 더 답니다. 당도가 있어야 술이 되거든요. 결국 양조용 포도로 만든 완전 더 단 포도주스인 셈이죠. 그런데 포도주스와 와인은 성분이 다릅니다. 양조 과정에서 항산화 물질인 폴리페놀과 안토시안이 더 강화되기 때문에 와인이 몸에 좋은 거예요. 알코올을 제거해 와인 성분은 그대로 남아 있는 게 제로와인의 핵심이죠.”
신기한 건 알코올을 제거했는데도 취한다는 점이다. 엄밀히 말하면 취한다기보단 졸립다. 와인 성분 중에 원래 잠이 오게 만드는 요소가 있다. 박재정 대표는 “평소 소주를 잘 마시는데 와인은 한두 잔만 먹어도 취한다는 경우, 취하는 게 아니고 잠이 오는 것”이라 설명하며 웃었다.
“스무 살 때부터 술을 엄청 마셨어요. 요즘은 취하도록 마시진 않아요. 와인은 분위기로 마시는 술이거든요. 제가 좋아하는 와인은 부르고뉴산인데, 와인 아카데미 다닐 때 선생님이 농담하시길 저는 좋아하는 와인 계속 마시려면 돈 많이 벌어야겠다더라고요(웃음). 부르고뉴 와인은 단일품종으로 만드는데도 섬세하고 정말 맛있어요.”
프랑스 중앙 동부에 위치한 부르고뉴는 보르도와 함께 프랑스 최고의 와인 산지로 손꼽힌다. 블렌딩 방식을 이용하는 보르도 지방과 비교하면 생산량이 적어 대부분의 와인 품질이 우수하게 관리되는 편이며 가격대도 높다. 세계에서 가장 비싼 와인으로 유명한 ‘로마네 콩티’가 바로 부르고뉴 피노 누아르 품종으로 만든 것이다.
부르고뉴산을 인생 와인으로 꼽는다고 해서 박 대표가 프랑스 와인, 고급만 즐기는 건 아니다. 최근 국내에선 흔하지 않은 레바논과 조지아 와인에 푹 빠졌다. 퍼플독은 올 1월부터 대부분 독점 수입한 와인들로 구독 서비스를 하고 있다. 수입 확정된 와인이 1백50개이고 이 중 론칭한 게 1백2개다. 앞으로 4백~5백 개의 라인업을 완성할 계획이다. 박 대표는 “와인 유통 구조 때문에 시간이 갈수록 우리가 가장 다양한 라인업을 갖게 될 것”이라고 자신감을 내비쳤다.
“와인 시장의 구조가 프랑스, 이탈리아, 미국, 스페인 같은 곳이 아니면 수입해서 좋은 가격에 팔 수가 없어요. 레바논은 전쟁통에서도 와인을 만들어요. 그런데 레바논 와인이 레바논에 없어요. 폭격으로 없어지면 안 되니까 창고를 네덜란드와 미국에 둬요. 그러다 보니 물류비 때문에 더 비싸지고 우리나라에선 더욱 수입을 안 하게 되는 거죠. 물론 우리도 새로운 곳이라고 해서 무조건 가져오는 게 아니라 낯선 곳일수록 더 꼼꼼하게 따져보고 들여옵니다.”
올해 창립 3주년을 맞은 퍼플독은 구독자 5만 명을 확보하는 것이 목표다. 구독자와 별개로 B2B(기업 간 거래)도 늘려갈 계획. 현재 대신증권, BMW, 아이오닉5 등과 협업 중이다. 박 대표는 “우리나라에선 와인을 선물로 주는 경우가 많은데, 사실 와인을 설명 없이 전하는 것만큼 무책임한 게 또 없다”며 “가치를 알고 마실 수 있도록 돕는 게 B2B 사업”이라고 했다.
“고급 와인을 만들려면 좋은 땅, 뛰어난 기후에서 정성 들여 재배하고 제대로 된 것만 수확을 해야 해요. 양조할 때는 새 오크통에 담아 숙성시켜야 하고요. 우리 사업은 이제 포도를 선별해서 수확하는 단계예요. 수확하고 새 오크통에 양조 잘해서 숙성시켜 시장에 내보냈을 때 구독자가 5만 명이 될 겁니다. 바람이 더 있다면 고등학교 1학년인 아들이 자라서 나중에 같이 일했으면 좋겠어요. 회사를 물려주고 싶어서가 아니라 정말 일이 재미있어요.”
좋아하던 골프를 안 친 지 2년이 되어가고, 즐겨 듣던 음악도 요즘은 귀에 잘 들어오지 않는다는 박재정 대표. 머릿속엔 온통 와인뿐이다. 개인의 목표를 물어도 ‘우리’로 넘어가고, 취미인 골프 얘기를 하다가도 와인으로 귀결됐다. 워커홀릭이 분명한데 푹 빠진 대상이 와인이라면 충분히 이해가 된다. 와인의 세계는 무궁무진하다. 와인 애호가의 필독서 ‘신의 물방울’이 44권으로 1부를 마무리 짓고 2부가 ‘마리아주’라는 제목으로 계속 나오는 것도, 노벨문학상을 받은 시인이자 가수인 밥 딜런이 영감의 근원을 와인으로 꼽은 것도 이 때문 아닐까.
사진 김도균
사진제공 퍼플독
박재정 대표가 설립한 스타트업 퍼플독은 2018년 7월 국내에서 처음으로 와인 구독 서비스를 시작했다. 매월 일정 구독료를 내면 AI 분석을 기반으로 한 내 취향의 와인을 집에서 받아볼 수 있다. 함께 보내주는 와인 설명서와 ‘1분 레슨’ 콘텐츠 덕분에 1년 정도 구독하다 보면 나만의 ‘소울 와인’을 발견하는 것은 물론 어디 가서 ‘와인 좀 안다’고 할 정도의 지식도 쌓인다.
박재정 대표는 국제인증자격증도 취득한 와인 전문가다. 하지만 원래 와인 사업을 하려고 공부를 시작한 것은 아니었다. 매일유업 법무팀장으로 근무할 당시 업무 관계상 필요해 팀원들과 함께 당시 회사에서 운영하던 프랑스 와인 아카데미 듀뱅의 서울지사에서 3년간 공부를 했다. 그 팀원들과 2014년 회사를 나와 처음에는 법무 관련 아웃소싱 업체를 차렸다가 2018년 1월 와인 관련 업종으로 전환했다. 사명도 ‘퍼플독’으로 바꿨다. ‘Purple’은 고귀한 사람, 즉 회원을 의미하고 ‘Dog’는 고귀한 회원을 위한 삶의 동반자이자 집사를 뜻한다.
“와인 시장은 꾸준히 우상향 추세예요. 와인을 전달하는 방식도 트렌디해야겠구나 고민한 끝에 구독 서비스를 시작하기로 했죠. 저는 구독 서비스가 궁극적으로는 구독 상품을 통해 회원의 삶의 질이 향상되거나 행복도가 올라가는 등의 형이상학적 가치를 가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단순히 받아보는 게 편해서라면 그건 정기 배송에 불과하죠.”
성장 한계 알면서도 와인 구독 사업 뛰어든 이유
구독이라 하면 으레 우유, 신문을 떠올리던 때에서 어느덧 영상, 꽃, 옷, 와인 등이 생각나는 시대가 됐다. 특히 다른 술에 비해 비교적 고가인 와인이 취미의 대상이 됐다. 박재정 대표는 “예전에는 돈 많은 30대 이상이 와인을 먹는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요즘은 20대도 많이 찾는다”며 “자기 삶을 업그레이드할 수 있는 것 중 하나가 와인”이라고 강조했다. 박 대표에 따르면 와인은 음악, 미술과도 같기 때문이다. 미술 전시회에 가서 큐레이터의 설명을 듣지 않고 그림을 보면 그 작품이 왜 명작인지 모를 수 있는 것처럼 와인도 알고 마시면 더 맛있다.“어느 지방에서 어느 품종으로 만들어졌고, 그 포도가 자란 땅이 어떤 스타일이라 이런 향과 맛이 난다는 정보를 미리 알고 있으면 마실 때 머릿속으로 상상이 되잖아요. 와인이 더 맛있게 느껴지죠. 와인은 종이컵에 따라 마시면 정말 맛이 없어요. 조금은 배워야 하고 분위기를 갖추면 더 좋고 이런 점들이 허들이 될 수 있겠지만 한편으론 그렇기 때문에 와인이 자기 라이프스타일을 업그레이드시켜주는 요소가 되는 거 아닐까요(웃음)?”
와인이 핫한 아이템인 것도, 구독 서비스란 트렌디한 방식이 잘 통할 것도 예상했지만 넘어야 할 산이 있었다. 현행법상 주류는 전통주를 제외하곤 온라인 판매가 법적으로 금지되어 있다는 점이다. 청소년의 주류 구입을 막기 위해서다. 단, 매장을 직접 방문해 결제하면 택배 배송은 가능하다. 박재정 대표는 이 명백한 한계 때문에 사업을 확장하는 데 큰 어려움이 있으리란 사실을 뻔히 알면서도 비즈니스를 시작했다. 시간이 오래 걸려도 잘될 거란 믿음이 있었다. 다행히 국세청은 지난해 4월 모바일 앱을 통해 주류를 주문하고 주문한 업체 매장에 방문해 수령하는 스마트 오더 방식도 허용했다.
“와인 구독 사업이 성장세가 더딜 수밖에 없다는 걸 알고 거기 맞춰 시작했어요. 통신 판매가 안 되다 보니 외부에서 바라보는 브랜드나 서비스 매력도에 비해서 정기 구독자 수가 많지 않은 게 사실이에요. 그러나 모든 구독 모델에 있어 중요한 지표인 구독유지율과 순증가율이 높습니다. 구독유지율이 94%예요. 많은 사람을 유치하진 못하지만 한번 들어오면 나가진 않는다는 거죠. 순증가율도 월 10% 이상입니다.”
퍼플독은 온라인과 오프라인의 시너지를 위해 지난 7월 2일 서울 동교동 AK&홍대 1층에 디지털 와인 스토어 ‘퍼플독 홍대’를 열었다. 이곳에서는 퍼플독이 엄선한 와인 1백30종을 선보이며, 방문객은 누구나 오디오 도슨트를 들으며 나만의 와인을 찾아볼 수 있다. 와인 구독 서비스 신청 및 현장 구매도 가능하다. 오픈식에는 배우 하석진도 참석해 시음회, 와인 도슨트 등을 선보였다.
“세상에 없던 새로운 스토어를 오픈하려다 보니 IT 서비스 개발비가 많이 들었어요. 구독 회원은 이곳에서 만화 ‘신의 물방울’에 나오는 아로마 키트로 그동안 글로만 접했던 54가지 향을 직접 맡아볼 수도 있고, 한 달에 한 번 테이스팅도 해볼 수 있어요. 홍대점을 시작으로 주요 지역에 스토어를 두고 와인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 직접 찾아오게끔 만들 계획이에요.”
‘소울 와인’ 더 맛있게 마시는 법
‘퍼플독 홍대’를 찾은 배우 하석진과 박재정 대표.
그러나 와인 시장이 폭풍 성장했음에도 아직 많은 사람이 와인을 어렵다고 느낀다. 실제로 와인의 역사가 깊고 종류가 방대한 것도 사실이다. 이 때문에 대부분은 와인 숍 소믈리에가 추천하는 대로 사거나 대형마트 와인 코너에서 가격을 보고 적당히 고르는 경우가 많다.
박재정 대표는 와인이 어렵다는 인식을 인정하며 오히려 “만약 와인이 쉬웠다면 마셨을 때 그만큼 감동이 있겠느냐”고 반문한다. 만약 음악, 미술 분야가 공부를 하지 않고 접해도 누구나 다 아는 거라면 창작자 입장에서 열정적으로 작품 활동을 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와인도 마찬가지다. 진정한 가치를 알아줄 사람이 없는데 열심히 만드는 이가 있을 리 만무하다.
“와인은 어려워요. 그래서 오래전 유럽에서도 와인을 마실 때 버틀러(Butler)가 있었어요. 집사라는 뜻으로 알려진 버틀러의 어원이 술 창고지기에서 시작된 거예요. 유럽에서는 손님을 초대할 때 버틀러가 미리 요리사에게 이러한 와인이 나가니 여기에 맞춰서 음식을 준비하라고 일러줬다고 해요. 그러면 주인은 손님에게 당신의 취향을 고려해 이 와인을 준비했다고 자랑도 하고 와인 창고를 보여주기도 했죠.”
‘와인을 마시는 게 공부이자 숙제가 되면 안 된다’는 게 퍼플독이 와인 버틀러를 자처하는 이유다. 심지어 21세기의 와인 버틀러는 더 똑똑해졌다. 퍼플독 회원 가입 시 한 와인 매칭 설문을 기반으로 자체 개발한 AI 알고리즘이 회원이 좋아할 만한 와인을 배정해준다. 이후 받아본 와인에 대해 피드백을 하면 시스템이 다시 이를 참고하고 다른 회원들의 데이터와 비교해 취향을 보다 정교하게 파악해나간다.
하지만 처음에는 대부분 자신의 와인 취향에 대해 잘 모른다. 첫 설문 결과에서 50% 정도만 맞는 편이다. 그래서 구독 신청 시 내 스타일에 맞는 와인만 구독하겠다는 방식과 다양한 스타일을 경험해보겠다는 방식 중 후자를 택하는 사람이 더 많다. 구독 상품도 3만9천원부터 1백만원까지 다양한데 아무래도 기본 상품부터 가볍게 시작해보는 편이다. 박재정 대표는 “리매칭 2~3회 정도를 거쳐야 거의 정확해진다”며 “만약 그래도 보내준 와인이 너무 별로였다고 하는 분이 있으면 다른 와인으로 새로 보내는데 컴플레인을 거는 고객이 별로 없다”고 자신했다.
다만 소울 와인을 찾았더라도 와인을 더 맛있게 마시기 위한 또 한 가지 중요한 관문이 남았다. 바로 마시는 방법이다. 와인마다 그 와인을 가장 맛있게 즐길 수 있는 적정 음용 온도가 있다. 그 온도를 벗어나면 맛과 향이 달라진다. 일반적으로 전문가들이 추천하는 온도는 화이트와인은 10~12℃, 레드와인은 16~18℃, 스파클링 와인은 6~8℃ 정도다.
“우리나라에서 와인 온도를 맞춰서 드시는 분이 10%도 안 될 거라고 생각해요. 한 회원으로부터 우리가 보낸 와인이 별로였다고, 알코올 향만 느껴진다는 피드백이 온 적이 있어요. 확인해보니 평이 굉장히 좋은 화이트와인이었어요. 이상해서 알아보니 그냥 상온에 뒀다가 드셨다더라고요. 그 와인은 냉장고에 뒀다가 꺼내서 30분 후 온도가 10℃쯤 됐을 때 먹어야 맛있거든요. 화이트와인을 상온 25℃에 뒀다 먹으면 실제보다 알코올 향이 더 많이 느껴지죠. 반대로 20℃에서 먹어야 하는 와인을 5℃에서 먹으면 산미만 엄청 강해지고요.”
박재정 대표는 소주의 예를 들었다. 소주를 차갑게 먹으면 알코올 향이 덜 느껴지고 목 넘김도 좋다. 반면 야유회나 MT를 가서 야외에서 미지근하게 먹으면 바로 취하기 십상이다. 따라서 요즘처럼 무더운 한여름에는 시원하게 마시는 청량감 있는 스파클링와인이나 화이트와인이 제격이다. 박 대표는 “식전에 가볍게 한잔해 입맛을 돋워도 좋고 출출할 때 스낵과 곁들여 마셔도 부담이 없다. 한식에도 잘 어울린다”며 “휴가철 술을 못 마시거나 임신 중, 술자리 후 운전을 해야 하는 상황에서 기분을 내고 싶다면 ‘제로와인’을 마셔보라”고 추천했다. 퍼플독에서 2019년 국내 최초로 론칭한 무알코올 와인 브랜드 제로와인은 세계적인 와이너리 ‘피에르 챠빈 에스테이트’에서 전통적인 제조 방식으로 만든 후 추가적인 공정을 통하여 알코올 성분만 제거한 ‘진짜’ 와인이다.
“시중에서 판매 중인 국내 무알코올 와인은 사실 포도주스나 다름없어요. 일반 포도주스와 같은데 와인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양조용 포도로 만들었기 때문이죠. 양조용 포도는 일반 포도보다 최소 2.5배 이상 더 답니다. 당도가 있어야 술이 되거든요. 결국 양조용 포도로 만든 완전 더 단 포도주스인 셈이죠. 그런데 포도주스와 와인은 성분이 다릅니다. 양조 과정에서 항산화 물질인 폴리페놀과 안토시안이 더 강화되기 때문에 와인이 몸에 좋은 거예요. 알코올을 제거해 와인 성분은 그대로 남아 있는 게 제로와인의 핵심이죠.”
신기한 건 알코올을 제거했는데도 취한다는 점이다. 엄밀히 말하면 취한다기보단 졸립다. 와인 성분 중에 원래 잠이 오게 만드는 요소가 있다. 박재정 대표는 “평소 소주를 잘 마시는데 와인은 한두 잔만 먹어도 취한다는 경우, 취하는 게 아니고 잠이 오는 것”이라 설명하며 웃었다.
지금은 포도 수확 중, 잘 숙성된 와인을 기다리며
박 대표는 술 자체보단 술자리를 좋아하는 타입이다. 한창 술을 마실 때는 소주 2~3병도 거뜬했는데 요즘은 주량이 좀 줄었다. 새로 들어온 와인 테이스팅 외에는 이따금 직원들과 집 근처에서 간단하게 즐기는 정도다.“스무 살 때부터 술을 엄청 마셨어요. 요즘은 취하도록 마시진 않아요. 와인은 분위기로 마시는 술이거든요. 제가 좋아하는 와인은 부르고뉴산인데, 와인 아카데미 다닐 때 선생님이 농담하시길 저는 좋아하는 와인 계속 마시려면 돈 많이 벌어야겠다더라고요(웃음). 부르고뉴 와인은 단일품종으로 만드는데도 섬세하고 정말 맛있어요.”
프랑스 중앙 동부에 위치한 부르고뉴는 보르도와 함께 프랑스 최고의 와인 산지로 손꼽힌다. 블렌딩 방식을 이용하는 보르도 지방과 비교하면 생산량이 적어 대부분의 와인 품질이 우수하게 관리되는 편이며 가격대도 높다. 세계에서 가장 비싼 와인으로 유명한 ‘로마네 콩티’가 바로 부르고뉴 피노 누아르 품종으로 만든 것이다.
부르고뉴산을 인생 와인으로 꼽는다고 해서 박 대표가 프랑스 와인, 고급만 즐기는 건 아니다. 최근 국내에선 흔하지 않은 레바논과 조지아 와인에 푹 빠졌다. 퍼플독은 올 1월부터 대부분 독점 수입한 와인들로 구독 서비스를 하고 있다. 수입 확정된 와인이 1백50개이고 이 중 론칭한 게 1백2개다. 앞으로 4백~5백 개의 라인업을 완성할 계획이다. 박 대표는 “와인 유통 구조 때문에 시간이 갈수록 우리가 가장 다양한 라인업을 갖게 될 것”이라고 자신감을 내비쳤다.
“와인 시장의 구조가 프랑스, 이탈리아, 미국, 스페인 같은 곳이 아니면 수입해서 좋은 가격에 팔 수가 없어요. 레바논은 전쟁통에서도 와인을 만들어요. 그런데 레바논 와인이 레바논에 없어요. 폭격으로 없어지면 안 되니까 창고를 네덜란드와 미국에 둬요. 그러다 보니 물류비 때문에 더 비싸지고 우리나라에선 더욱 수입을 안 하게 되는 거죠. 물론 우리도 새로운 곳이라고 해서 무조건 가져오는 게 아니라 낯선 곳일수록 더 꼼꼼하게 따져보고 들여옵니다.”
올해 창립 3주년을 맞은 퍼플독은 구독자 5만 명을 확보하는 것이 목표다. 구독자와 별개로 B2B(기업 간 거래)도 늘려갈 계획. 현재 대신증권, BMW, 아이오닉5 등과 협업 중이다. 박 대표는 “우리나라에선 와인을 선물로 주는 경우가 많은데, 사실 와인을 설명 없이 전하는 것만큼 무책임한 게 또 없다”며 “가치를 알고 마실 수 있도록 돕는 게 B2B 사업”이라고 했다.
“고급 와인을 만들려면 좋은 땅, 뛰어난 기후에서 정성 들여 재배하고 제대로 된 것만 수확을 해야 해요. 양조할 때는 새 오크통에 담아 숙성시켜야 하고요. 우리 사업은 이제 포도를 선별해서 수확하는 단계예요. 수확하고 새 오크통에 양조 잘해서 숙성시켜 시장에 내보냈을 때 구독자가 5만 명이 될 겁니다. 바람이 더 있다면 고등학교 1학년인 아들이 자라서 나중에 같이 일했으면 좋겠어요. 회사를 물려주고 싶어서가 아니라 정말 일이 재미있어요.”
좋아하던 골프를 안 친 지 2년이 되어가고, 즐겨 듣던 음악도 요즘은 귀에 잘 들어오지 않는다는 박재정 대표. 머릿속엔 온통 와인뿐이다. 개인의 목표를 물어도 ‘우리’로 넘어가고, 취미인 골프 얘기를 하다가도 와인으로 귀결됐다. 워커홀릭이 분명한데 푹 빠진 대상이 와인이라면 충분히 이해가 된다. 와인의 세계는 무궁무진하다. 와인 애호가의 필독서 ‘신의 물방울’이 44권으로 1부를 마무리 짓고 2부가 ‘마리아주’라는 제목으로 계속 나오는 것도, 노벨문학상을 받은 시인이자 가수인 밥 딜런이 영감의 근원을 와인으로 꼽은 것도 이 때문 아닐까.
사진 김도균
사진제공 퍼플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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