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년 전 5월, 서울지하철 2호선 강남역 10번 출구에 마련된 ‘화장실 묻지 마 살인‘ 피해자 추모장소에 시민 행렬이 이어지던 모습. [동아DB]
예견된 범죄… 쌓여온 분노 터졌다
한국여성변호사회 공보이사를 맡고 있는 이수연 변호사는 “갑작스럽거나 일시적인 현상이 아닌 그동안 누적돼 온 분노가 폭발한 것”이라고 운을 뗐다. 그녀는 “‘강남역 살인사건’을 시작으로 여성들의 목소리가 모이기 시작했고, 미투(metoo) 운동을 거치면서 폭발적으로 터져나왔으며, 최근 n번방 사건에 이르면서 더욱 심화됐다”고 설명했다.“과거에는 사회 문제에 대한 여성들의 목소리가 개별적으로 나오는 정도에 불과했어요. 그런데 강남역 사건을 계기로 공론화되기 시작하면서 개인의 문제가 아닌 여성 전체의 문제로 인식되기 시작했죠. 불법 촬영이 심각한 범죄로 대두되면서 여성들은 ‘나도 언제든 범죄 대상이 될 수 있구나’라는 불안감에 시달리고, 안전하지 않다는 생각을 갖게 됐어요. 또 미투 운동을 거치면서 쉬쉬했던 문제들을 겉으로 드러내고 함께 소리내기 시작했습니다. 여기에 더해 최근 n번방 사건이 터졌고, 그 형태가 매우 엽기적이고 잔인하며 피해자 중 상당수가 미성년자라는 점 등이 더 큰 분노를 자아냈습니다.”
이 변호사는 여성들의 연대와 분노에 대해 일부 남성들이 “모든 남성을 잠재적 범죄자로 몰아간다”고 말하는 것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했다.
“모든 남성이 잠재적 가해자로 취급받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러나 성범죄·가정폭력·스토킹 등 대부분의 폭력 범죄에서 가해자는 남성이고 피해자는 여성인 구조인 것도 사실입니다. 이번 사건 역시 가해자는 남성, 피해자는 여성인 구조이기 때문에 여성들이 더욱 연대하며 분노의 목소리가 나올 수밖에 없는 것이고요.”
시민단체 한 목소리로 ‘변하지 않는 사회’ 질타
가수 승리가 1월 13일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열린 성매매 알선과 해외 원정 도박 등의 7가지 혐의로 구속영장실질심사를 위해 출석하는 모습. [동아DB]
“개인의 성범죄를 넘어 조직화된 성착취가 이처럼 만연하다는 것은 한국사회의 부끄러운 민낯입니다. 범죄의 수법이 진화하고 있고 가해자의 연령 또한 점점 낮아지고 있죠.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분노하고 해결하지 않으면 또 다시 되풀이될 것이라는 생각에 그 어느 때보다 많은 국민들, 여성들이 연대하고 분노하고 있는 것이죠.”
‘십대여성인권센터’ 조진경 대표도 비슷한 점을 분노의 요인으로 지적했다. 그는 “기존에도 비슷한 사건이 많았지만 제대로 된 재발 방지 조치가 없었다”며 “덕분에 범죄자들은 ‘나는 절대 안 잡힌다’ ‘나 하나 잡혀도 바뀌는 것 없다’라는 조롱과 확신을 갖게 됐다”고 말했다. 이어 그녀는 “조씨도 그런 확신에 가득 차 있었으나 결국 붙잡혔다”며 “검거된 조씨가 얼굴을 가린 채 등장하는 걸 보고 여성은 물론 온 국민의 분노가 집결했다”고 설명했다.
청소년성폭력상담소 ‘탁틴내일’ 이현숙 소장은 이번 사건이 여타의 성폭행 사건에 비해 “참여(가해)자의 규모와 잔인함의 정도가 그 어느 때보다 심하다”며 우려를 표했다.
“n번방 사건은 대규모의 인원이 가해자로 참여한 점, 비트코인을 활용하는 등 조직적이고 지능적이었던 점, 미성년 심지어 남매까지 피해자로 대거 등장한 점 등 이전의 비슷한 유형의 범죄가 한층 더 심각한 형태로 발전해 더 큰 충격을 주고 있습니다. 특히 젊은 여성들의 분노가 매우 크다고 생각합니다. 인터넷에 익숙한 세대인 이들은 기성세대에 비해 사건의 실체를 더 잘 알고 있고, 피해자들과 비슷한 연령대인 만큼 더 크게 공감하고 분노하며 확실한 해결을 외치고 있죠.”
“입법 보완하고, 제대로 법 적용해 엄중 처벌해야”
대학생 페미니즘 연합동아리 ‘모두의 페미니즘’ 관계자들이 4월 2일 국회 앞에서 '텔레그램 N번방' 사건 관련 사이버성범죄 방지법 즉각 제정 촉구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뉴시스]
한국여성변호사회의 이 변호사는 “일단 범죄를 저지른 자들에 대한 엄중한 처벌이 있어야 한다”며 “주범은 물론 관전자들도 ‘이 정도는 범죄가 아니야’ ‘처벌을 받더라도 별 거 아닐 거야’ 하는 안일한 생각을 더 이상 가질 수 없도록 바뀌어야 한다”고 말했다. 십대여성인권센터의 조 대표는 “온라인상의 성범죄 기술은 나날이 진화하고 있다”며 “이를 따라가기 위한 수사기관의 수사 기법이 구축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온라인 성범죄는 기존 범죄와 다른 새로운 범죄입니다. 정의부터 다시 내려야 합니다. 또 진화하는 온라인 성범죄를 추적하고 차단할 만한 IT기술이 뒷받침돼야 하며, 그런 기술은 파편적으로 산재되기보다 한 데 집적돼야 합니다. 그러려면 각 부처가 모여 전담 체계를 만드는 등 유기적으로 나서야 합니다.”
강력한 처벌이 이루어지려면 성범죄를 바라보는 사회 전반의 인식 변화가 필요하다는 목소리도 각계각층에서 쏟아졌다. 탁틴내일의 이 소장은 “n번방이 있고 박사가 존재하는 이유는 ‘솜방망이 처벌’ 때문이며, 솜방망이 처벌이 가능한 건 이게 왜 심각한 범죄인지에 대한 사회적 공감이 없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가해자의 문제라기보다 피해자의 탓으로 생각해왔고, 불법촬영물을 포르노 정도로만 인식했기 때문이죠. 미국에선 종신형을 내릴 수 있는 사건(‘다크웹 손정우’)에 대해 우리 사법부는 1년 6개월형을 선고했습니다. 사법부가 이 정도라는 것은 우리 사회 전반의 인식도 아직 이 정도라는 것입니다. 인식 자체가 바뀌어야 합니다. 우리 사회가 어떻게 이 지경까지 왔는지에 대해 반성해야 합니다.”
비슷한 맥락에서 전국연대 측도 “여성을 성적 도구로 삼고 성상품화하며 그렇게 만든 결과물을 공유하면서 유희하는, 그것이 놀이이자 일탈이 된 남성문화가 사라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마지막으로 한국여성변호사회의 이 변호사가 다음과 같은 의견을 전했다.
“여성들이 우리 사회가 불합리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고 안전하게 느낄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개인의 노력도 중요하지만 국가와 사회에서 제도적으로 뒷받침해야 할 것입니다. 입법이 부족한 부분은 보완해야 하고, 정부에서는 제도를 취지에 맞게 잘 운용해야 하며, 사법부에서는 법을 제대로 적용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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