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초 중국에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발발했을 때 가장 먼저 기부에 나선 사람은 빌 게이츠다. 그는 2월 5일 자신과 아내 이름을 따서 설립한 빌 앤드 멜린다 게이츠 재단을 통해 백신 치료제 개발에 써달라며 1억 달러(약 1천1백85억원)를 내놓았으며 중국에도 5백만 달러(약 5백90억원)의 성금을 전달했다. 그의 기부 이후 미국 내 정·재계, 스포츠·문화계 인사의 기부 행렬이 이어지고 있다.
미국과 유럽에는 1백여 년 이상 명맥을 이어온 가문을 비롯해 글로벌 기업들이 존재하는데 이들은 대체로 자신의 가문 이름을 딴 재단을 가족 경영 형태로 유지하고 있다. 록펠러 재단, 카네기 재단 등을 필두로 수백여 재단이 존재한다. 2017년 미국 자선기금 규모가 사상 처음 4천억 달러를 돌파했을 정도로 이들이 한 해 내놓는 기부금 액수는 어마어마하다. 기부 분야는 의료, 환경, 교육, 공공사업, 예술 등 다양하다.
단순히 자금을 출원하는 형태의 기부 이외 미국 사회에 뿌리 깊게 형성돼 있는 특별한 기부 문화가 있다. 상류층 인사들이 매년 주최하는 여러 자선 파티와 자선 경매 등이 바로 그것이다. 대표적으로 매년 5월 미국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의상 연구소에서 주최하고 ‘보그’ 편집장 안나 윈투어가 주관하는 기금 모금 행사 ‘멧 갈라(Met Gala)’가 꼽힌다. 할리우드 스타들이 특별 제작한 화려한 의상을 입고 레드 카펫을 밟기 때문에 SNS상에서는 아카데미 시상식보다 더 화제가 된다.
이러한 자선기금 파티를 주관하는 이들은 대체로 미국 상류층 여성들이다. 문화계, 미술계, 사교계를 주름잡는 여성들은 거대 자산가의 아내 혹은 자녀들로 이들의 일거수일투족은 항상 관심의 대상이다. 이들을 주인공으로 한 소설이나 영화는 숱하게 창작돼왔는데, 2007년부터 5년간 방송된 미국 드라마 ‘가십걸’은 전 세계적으로도 화제를 일으켰다.
최근 미국 상류층 사교계를 직접 경험한 한국인 작가가 낸 책이 눈길을 끌고 있다. 임하연 작가의 ‘점심 먹는 아가씨들’에는 5~6년 전 작가가 미국 뉴욕에 살며 그곳에서 열리는 자선 파티와 만찬회에 참석한 이야기를 비롯해 사교계 저명인사를 만난 일화, 그의 소개로 일하게 된 자선 파티 주최 회사에서 지켜본 자금 모금 과정, 단순히 미에 치중하기보다 의식적으로 사회를 위해 봉사하는 여성들의 이야기가 상세히 담겨 있다.
임하연 작가는 “뉴욕 어퍼 이스트 사이드에 살며 한가로이 브런치를 즐기는 여성들의 삶은 보기완 다르다. 그녀들은 목적의식 없이 망가져 노는 것을 선호하지 않고 질병 연구, 환경 보호, 문맹 퇴치 등 비영리단체를 후원하기 위한 자선 활동을 벌인다”며 오히려 그녀들은 박애주의자에 가깝다고 평했다. 임 작가를 만나 궁금한 미국 상류층의 문화에 대해 들었다.
‘점심 먹는 아가씨들’이란 책을 내게 된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미국 유학 시절 상류층 문화에 관심을 갖고 이를 연구했어요. 그 과정에서 여러 사람을 만났고, 다양한 경험을 했죠. 상류층 여성들이 삶을 대하는 태도를 비롯해 그녀들이 사명으로 삼고 행하는 일이 무엇인지 등 제가 그곳에서 배우고 느낀 긍정적 메시지를 한국 독자들에게 전하고 싶었어요. 궁극적으로 이 책을 통해 많은 이로 하여금 생각의 변화를 이끌어내고 싶었습니다.
한국 여성들이 미드나 영화를 통해 접하는 미 사교계 이야기는 현실적이지 않은데, 직접 겪어보니 어땠나요.
저도 한때 ‘가십걸’이란 드라마를 흥미롭게 봤어요. 작품은 환상의 세계 같은 이미지였는데 실제로 유학 시절 경험해보니 일부는 현실이더라고요. 우디 앨런 감독의 영화 ‘블루 재스민’ 속 케이트 블란쳇이 연기한 재스민이라는 여성도 제 친구의 지인을 모티프로 한 것이어서 신기하기도 했고요. 사교계 여성들은 여러 작품을 통해 모두가 아름답고 우아하며 부유하고 아무 근심 없는 삶을 사는 것으로 그려지는데 실제로도 비슷해요. 하지만 그것만이 다는 아니었어요. 때문에 좀 더 자세히 알기 위해 여러 가지 자료 조사를 했고, 미국 역사 흐름 속에 자리 잡은 사교계 여성의 삶과 자연스럽게 형성된 기부 문화 등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어요.
미국 사립 여대인 마운트 홀리요크 대학에서 공부하던 중 어떻게 미국 사교계를 경험하게 됐나요.
예술품을 향유하는 부모님 덕분에 미술에 관심이 많았어요. 그쪽으로 좀 더 알고 싶어 대학 입학 전 영국 런던의 미술품 경매 회사 소더비에서 공부했죠. 그때 함께 수업을 들은 세계적인 컬렉터들과 친분을 맺었어요. 전 세계 미술계가 생각보다 좁아 뉴욕, 스위스, 런던 등에서 정기적으로 열리는 아트 페어에 가면 그분들을 매번 만나요(웃음). 그러던 중 학내 미술관 큐레이터와도 친분을 쌓았는데, 대학교 2학년 때 미술계 인턴십 자리를 구하기 위해 그에게 추천인 소개를 부탁했어요. 그때 제니퍼 보바흐라는 사교계 유명 인사를 추천받아 연락했고, 그녀의 파크 애비뉴 아파트에서 처음 만났어요. 그 일화가 책에 자세히 나오는데, 이후 미술계보다는 사교계 자선 파티주최 회사에서 일하는 것이 적성에 맞겠다며 그쪽을 소개해줬어요.
미국은 인종차별 이슈가 항상 존재하는데, 더군다나 사교계는 더할 것 같습니다. 어떤 방식으로 사교계 인사와 교류할 수 있었던 건가요.
요즘 그런 편견을 겉으로 드러내면 큰일 나죠. 단순히 감정을 상하는 문제가 아니라 소송까지 당할 수 있거든요. 속으로는 편견이 있을 수 있지만 겉으로 절대 드러내지 않아요. 지식 계층을 비롯해 상류층 사람들은 ‘인종차별을 해서는 안 된다’는 인식이 뿌리 깊게 박혀 있고, 매너가 좋기 때문에 대화만 통하면 소통하는 데 문제는 없어요. 그리고 요즘 뉴욕 사교계에는 아시아인이 많아요. 루퍼트 머독의 전 와이프 웬디 덩은 대표적인 사교계 명사죠. 또 중국계 자본이 전 세계 미술계를 주름잡고 있기 때문에 인종에 대한 편견을 가지기 힘들어요. 무엇보다 중요한 건 대화의 질이에요. 공통의 화제가 있으면 이야기가 끊이지 않고 관계가 깊어지죠. 파티나 만찬에서 만난 이들과 미술 이야기부터 시작해 미국 역사, 문학, 패션 이야기까지 나누다 보니 인맥이 넓어졌어요.
사교계를 처음 접했을 때 어떤 것을 느끼고 배웠는지도 궁금합니다.
그들은 저녁마다 자선 파티에 가는 것이 일상이에요. 주기적으로 사교 모임에 가야 하고 기금 모금 행사에 참석해야 하는 등 1년 내내 바쁘게 일정을 소화하고 있죠. 원래 그들의 이런 행사는 암암리에 진행됐는데 몇 해 전부터는 ‘뉴욕소셜다이어리’라는 온라인 사이트를 통해 일정이 공개되고 있어요. 거기에 보면 뉴욕에서만 하루에 10번씩 기금 모금 파티가 열려요. 질병 퇴치, 유방암 환우 돕기, 어린이 후원, 센트럴 파크 보존 등 다양한 주제와 명분이 있는 행사들이에요. 미술계는 아트 페어가 전부인 반면 사교계에서는 이런 다양한 목적의 파티와 만찬, 경매 등이 이뤄진다는 게 놀라웠어요. 또 겉으로 보기에는 파티에 참석해 단순하게 기부하는 것 같지만 모두 정해진 절차와 양식이 있다는 사실 역시 신기했고요. 우리나라에서는 일부가 이런 기금 마련 행사를 추진하지만 아직까지 그런 문화가 형성되지는 않은 것 같아요.
책에 재클린 케네디를 비롯해 롤 모델로 삼을 만한 의식 있는 사교계 여성들이 등장하는데 누가 가장 인상적이었나요.
미국 여성의 지성미와 우아함의 상징인 재클린 케네디 오나시스가 누구보다 인상적이에요. 미국인들이 얼마나 그녀를 사랑하는지 곳곳에서 드러나요. 재클린이 백악관을 나와서 죽기 전까지 뉴욕 5번가 아파트에 살았는데, 바로 옆 저수지 이름을 ‘재클린 케네디 오나시스’라고 지을 정도죠. 재클린은 미국 여성들의 의상과 여가를 보내는 법, 대화 방식, 독서 방향까지 변화시킬 정도로 중산층 여성들의 롤 모델이었고 지금까지도 많은 미국 여성들 사이에 회자되고 있어요. 이외에 리젤 프리츠커 시먼스도 배울 점이 많아요. 영화 ‘소공녀’(1995)의 주인공을 연기해 이름을 알린 리젤은 사실 하얏트 호텔 그룹의 상속녀로, 천문학적 액수의 재산을 물려받았죠. 그녀는 상속녀에만 머무르지 않고 어머니와 재단을 세워 지속적으로 기부하는 등 선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어요. 리젤이 예일대에서 학생들과 나눈 대화를 유튜브에서 봤는데 너무 멋졌어요. 건강한 마인드를 가지고 있는 여성이란 생각이 들었고, 우리가 사회적으로 가져야 할 책임과 의무는 무엇일까에 대해 고민하게 됐죠.
앞서 언급했지만 사교계 여성들은 어떤 방식으로 사회사업을 벌이는지 예를 들어 설명해줄 수 있나요.
비슷하지만 차이가 있어요. 갈라(Gala)는 연회장이나 미술관에서 저녁 식사를 하며 기부하는 것을 말해요. 대표적으로 매년 5월 열리는 멧 갈라가 있죠. 베니핏(Benefit)은 공개 경매와 비공개 경매 형식으로 이뤄지고, 채러티(Charity)는 비영리단체 후원을 위한 자선 모임을 일컬어요. 사교계 여성들은 자신의 사회적 자원을 활용해 기금 모금을 해요. 이외에도 자산가들은 부인과 자식을 재단에 소속시켜 의무적으로 기부에 참여하게끔 하고요. 에스티로더 가문은 패밀리 갤러리에 가족의 이름이 걸린 전시실이 있어요. 아이가 태어나면 이름을 따서 전시실을 만들어주는데, 책임감을 느끼게 하죠. 여성들이 다양한 기부 사업을 벌이는 이유 중 하나는 명예 때문이기도 해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이사회 임원이 되려면 사회 활동 커리어가 있어야 하는데, 경쟁이 매우 치열하죠. 또 자선 활동을 하지 않는 높은 지위의 여성은 질타를 받기도 해요. 세계적 석유 재벌 데이비드 코크의 아내 줄리아 코크가 자선 활동을 하지 않아 비난이 쏟아지기도 했죠. 사교계 여성들은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어떤 형태든 사회사업을 하고 있어요.
작가님 개인에 대한 궁금증도 생기는데, 한국에서 고등학교까지 수학한 후 미국 대학에 진학한 건가요.
원래는 보딩스쿨에 진학하려 했지만 어린 나이에 유학하는 것을 부모님이 반대하셨어요. 한국에서 고등학교 2학년 때 ‘괴테와의 대화’를 읽고 중퇴한 뒤 홈스쿨링을 했어요. 오전에는 외국어 교사들과 영어를 비롯해 중국어, 프랑스어 등 언어를 공부하고 오후에 문학, 철학, 역사 등을 배우며 SAT 를 준비했죠.
책에 예술품을 향유하는 부모 밑에서 자랐다고 나와 있는데 어떤 분들인지 궁금합니다.
평범한 분들인데 예술에 대한 관심도가 높아 예술의전당 오페라를 자주 감상했고, 외국에 나갈 때마다 갤러리에 저를 꼭 데리고 다니셨죠. 각 도시에 있는 갤러리 리스트를 뽑아 최고의 갤러리부터 순회했는데 확실히 안목이 생겼어요. 프랑스 파리에서 한 달 반 정도 엄마와 같이 살았는데, 샹젤리제 거리 부근에 집이 있어서 매일 파리의 미술관을 샅샅이 돌아다녔어요. 대학 졸업 때는 부모님과 함께 뉴욕 크리스티 경매 회사 본사에 가서 제가 논문으로 썼던 키스 반 동겐의 작품을 소개해드리고, 매물로 나온 부첼라티 보석도 구경했죠.
대학 입학 전 소더비 경매 회사에서 공부한 것도 흥미로운데 어떻게 가게 됐나요.
고등학교 때 로버트 댈럭의 ‘케네디 평전’을 읽고 케네디 가문에 관심이 생겼어요. 존 F. 케네디의 장녀 캐롤라인 케네디가 당시 저와 같은 나이 19세에 지금은 하버드와 통합한 래드클리프 칼리지 입학을 미루고 런던 소더비 경매 학교에 가서 미술 수업을 들었다는 대목에 눈길이 갔어요. 저도 그런 세계를 경험하고 싶어 같은 수업에 등록했는데 거기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어요. 제가 최연소 학생이었고 대부분 유명 컬렉터의 자제였죠. 40대 러시아 컬렉터도 있었는데 크리스티 경매 회사의 큰손이더라고요. 왜 수업을 듣느냐고 물으니 자신의 아트 어드바이저를 믿을 수 없어서라고 했죠(웃음). 그곳에서의 공부가 큰 도움이 됐어요. 3천억원이 넘는 작품은 왜 그만큼의 값어치를 하는지에 대해 다방면으로 생각하고 토론하는 식으로 수업했는데, 40명 정도 되는 학생들의 철학적 시선을 느낄 수 있었어요.
대학에서 예술경영 및 역사학을 전공하고 졸업 후엔 어떤 일을 했나요.
졸업 후 자료 조사를 하면서 집필에 집중했고 이번에 책이 나왔어요. 그러면서 향후 재단 설립을 위한 준비도 해왔어요. 미국 아이비리그처럼 동부 여대를 묶어 세븐 시스터즈라고 하는데 한국에도 세븐 시스터즈 동문회가 있어요. 1970년대 졸업하신 분들을 비롯해 최근 졸업한 20대 영 멤버까지 다양한 사람이 교류하며 사회사업과 봉사 활동을 하고 있죠. 미국에서 보고 경험한 바를 토대로 개인 재단을 설립해 사회적으로 기여하는 것이 최종 목표이기 때문에 지금은 관련 준비를 하는 과정에 있습니다.
‘점심 먹는 아가씨들’을 읽는 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이 책은 ‘노블레스 오블리주’에 대한 관심에서 출발했어요. 혈통이나 신분이 없어진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인간의 고귀함은 정신에서 온다고 생각해요. 금수저가 아니더라도 누구나 고귀한 정신은 상속하고 상속받을 수 있죠. 고귀한 정신을 추구하는 여성들이라면 스스로 높은 자존감을 가지고 질적으로 풍족한 삶을 누릴 수 있어요. 독자들과 그런 긍정적 감정을 공유하고 싶어요.
사진 지호영 기자 디자인 김영화
사진제공 카페소사이어티
미국과 유럽에는 1백여 년 이상 명맥을 이어온 가문을 비롯해 글로벌 기업들이 존재하는데 이들은 대체로 자신의 가문 이름을 딴 재단을 가족 경영 형태로 유지하고 있다. 록펠러 재단, 카네기 재단 등을 필두로 수백여 재단이 존재한다. 2017년 미국 자선기금 규모가 사상 처음 4천억 달러를 돌파했을 정도로 이들이 한 해 내놓는 기부금 액수는 어마어마하다. 기부 분야는 의료, 환경, 교육, 공공사업, 예술 등 다양하다.
단순히 자금을 출원하는 형태의 기부 이외 미국 사회에 뿌리 깊게 형성돼 있는 특별한 기부 문화가 있다. 상류층 인사들이 매년 주최하는 여러 자선 파티와 자선 경매 등이 바로 그것이다. 대표적으로 매년 5월 미국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의상 연구소에서 주최하고 ‘보그’ 편집장 안나 윈투어가 주관하는 기금 모금 행사 ‘멧 갈라(Met Gala)’가 꼽힌다. 할리우드 스타들이 특별 제작한 화려한 의상을 입고 레드 카펫을 밟기 때문에 SNS상에서는 아카데미 시상식보다 더 화제가 된다.
이러한 자선기금 파티를 주관하는 이들은 대체로 미국 상류층 여성들이다. 문화계, 미술계, 사교계를 주름잡는 여성들은 거대 자산가의 아내 혹은 자녀들로 이들의 일거수일투족은 항상 관심의 대상이다. 이들을 주인공으로 한 소설이나 영화는 숱하게 창작돼왔는데, 2007년부터 5년간 방송된 미국 드라마 ‘가십걸’은 전 세계적으로도 화제를 일으켰다.
최근 미국 상류층 사교계를 직접 경험한 한국인 작가가 낸 책이 눈길을 끌고 있다. 임하연 작가의 ‘점심 먹는 아가씨들’에는 5~6년 전 작가가 미국 뉴욕에 살며 그곳에서 열리는 자선 파티와 만찬회에 참석한 이야기를 비롯해 사교계 저명인사를 만난 일화, 그의 소개로 일하게 된 자선 파티 주최 회사에서 지켜본 자금 모금 과정, 단순히 미에 치중하기보다 의식적으로 사회를 위해 봉사하는 여성들의 이야기가 상세히 담겨 있다.
임하연 작가는 “뉴욕 어퍼 이스트 사이드에 살며 한가로이 브런치를 즐기는 여성들의 삶은 보기완 다르다. 그녀들은 목적의식 없이 망가져 노는 것을 선호하지 않고 질병 연구, 환경 보호, 문맹 퇴치 등 비영리단체를 후원하기 위한 자선 활동을 벌인다”며 오히려 그녀들은 박애주의자에 가깝다고 평했다. 임 작가를 만나 궁금한 미국 상류층의 문화에 대해 들었다.
‘점심 먹는 아가씨들’이란 책을 내게 된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미국 유학 시절 상류층 문화에 관심을 갖고 이를 연구했어요. 그 과정에서 여러 사람을 만났고, 다양한 경험을 했죠. 상류층 여성들이 삶을 대하는 태도를 비롯해 그녀들이 사명으로 삼고 행하는 일이 무엇인지 등 제가 그곳에서 배우고 느낀 긍정적 메시지를 한국 독자들에게 전하고 싶었어요. 궁극적으로 이 책을 통해 많은 이로 하여금 생각의 변화를 이끌어내고 싶었습니다.
한국 여성들이 미드나 영화를 통해 접하는 미 사교계 이야기는 현실적이지 않은데, 직접 겪어보니 어땠나요.
저도 한때 ‘가십걸’이란 드라마를 흥미롭게 봤어요. 작품은 환상의 세계 같은 이미지였는데 실제로 유학 시절 경험해보니 일부는 현실이더라고요. 우디 앨런 감독의 영화 ‘블루 재스민’ 속 케이트 블란쳇이 연기한 재스민이라는 여성도 제 친구의 지인을 모티프로 한 것이어서 신기하기도 했고요. 사교계 여성들은 여러 작품을 통해 모두가 아름답고 우아하며 부유하고 아무 근심 없는 삶을 사는 것으로 그려지는데 실제로도 비슷해요. 하지만 그것만이 다는 아니었어요. 때문에 좀 더 자세히 알기 위해 여러 가지 자료 조사를 했고, 미국 역사 흐름 속에 자리 잡은 사교계 여성의 삶과 자연스럽게 형성된 기부 문화 등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어요.
미국 사립 여대인 마운트 홀리요크 대학에서 공부하던 중 어떻게 미국 사교계를 경험하게 됐나요.
예술품을 향유하는 부모님 덕분에 미술에 관심이 많았어요. 그쪽으로 좀 더 알고 싶어 대학 입학 전 영국 런던의 미술품 경매 회사 소더비에서 공부했죠. 그때 함께 수업을 들은 세계적인 컬렉터들과 친분을 맺었어요. 전 세계 미술계가 생각보다 좁아 뉴욕, 스위스, 런던 등에서 정기적으로 열리는 아트 페어에 가면 그분들을 매번 만나요(웃음). 그러던 중 학내 미술관 큐레이터와도 친분을 쌓았는데, 대학교 2학년 때 미술계 인턴십 자리를 구하기 위해 그에게 추천인 소개를 부탁했어요. 그때 제니퍼 보바흐라는 사교계 유명 인사를 추천받아 연락했고, 그녀의 파크 애비뉴 아파트에서 처음 만났어요. 그 일화가 책에 자세히 나오는데, 이후 미술계보다는 사교계 자선 파티주최 회사에서 일하는 것이 적성에 맞겠다며 그쪽을 소개해줬어요.
미국은 인종차별 이슈가 항상 존재하는데, 더군다나 사교계는 더할 것 같습니다. 어떤 방식으로 사교계 인사와 교류할 수 있었던 건가요.
요즘 그런 편견을 겉으로 드러내면 큰일 나죠. 단순히 감정을 상하는 문제가 아니라 소송까지 당할 수 있거든요. 속으로는 편견이 있을 수 있지만 겉으로 절대 드러내지 않아요. 지식 계층을 비롯해 상류층 사람들은 ‘인종차별을 해서는 안 된다’는 인식이 뿌리 깊게 박혀 있고, 매너가 좋기 때문에 대화만 통하면 소통하는 데 문제는 없어요. 그리고 요즘 뉴욕 사교계에는 아시아인이 많아요. 루퍼트 머독의 전 와이프 웬디 덩은 대표적인 사교계 명사죠. 또 중국계 자본이 전 세계 미술계를 주름잡고 있기 때문에 인종에 대한 편견을 가지기 힘들어요. 무엇보다 중요한 건 대화의 질이에요. 공통의 화제가 있으면 이야기가 끊이지 않고 관계가 깊어지죠. 파티나 만찬에서 만난 이들과 미술 이야기부터 시작해 미국 역사, 문학, 패션 이야기까지 나누다 보니 인맥이 넓어졌어요.
사교계를 처음 접했을 때 어떤 것을 느끼고 배웠는지도 궁금합니다.
그들은 저녁마다 자선 파티에 가는 것이 일상이에요. 주기적으로 사교 모임에 가야 하고 기금 모금 행사에 참석해야 하는 등 1년 내내 바쁘게 일정을 소화하고 있죠. 원래 그들의 이런 행사는 암암리에 진행됐는데 몇 해 전부터는 ‘뉴욕소셜다이어리’라는 온라인 사이트를 통해 일정이 공개되고 있어요. 거기에 보면 뉴욕에서만 하루에 10번씩 기금 모금 파티가 열려요. 질병 퇴치, 유방암 환우 돕기, 어린이 후원, 센트럴 파크 보존 등 다양한 주제와 명분이 있는 행사들이에요. 미술계는 아트 페어가 전부인 반면 사교계에서는 이런 다양한 목적의 파티와 만찬, 경매 등이 이뤄진다는 게 놀라웠어요. 또 겉으로 보기에는 파티에 참석해 단순하게 기부하는 것 같지만 모두 정해진 절차와 양식이 있다는 사실 역시 신기했고요. 우리나라에서는 일부가 이런 기금 마련 행사를 추진하지만 아직까지 그런 문화가 형성되지는 않은 것 같아요.
1 미국 여성들의 롤모델이었던 재클린 캐네디 오나시스. 2 하얏트 호텔 그룹의 상속녀 리젤 프리츠커 시먼스. 3 케이트 블란쳇 주연의 영화 ‘블루 재스민’의 한 장면.
미국 여성의 지성미와 우아함의 상징인 재클린 케네디 오나시스가 누구보다 인상적이에요. 미국인들이 얼마나 그녀를 사랑하는지 곳곳에서 드러나요. 재클린이 백악관을 나와서 죽기 전까지 뉴욕 5번가 아파트에 살았는데, 바로 옆 저수지 이름을 ‘재클린 케네디 오나시스’라고 지을 정도죠. 재클린은 미국 여성들의 의상과 여가를 보내는 법, 대화 방식, 독서 방향까지 변화시킬 정도로 중산층 여성들의 롤 모델이었고 지금까지도 많은 미국 여성들 사이에 회자되고 있어요. 이외에 리젤 프리츠커 시먼스도 배울 점이 많아요. 영화 ‘소공녀’(1995)의 주인공을 연기해 이름을 알린 리젤은 사실 하얏트 호텔 그룹의 상속녀로, 천문학적 액수의 재산을 물려받았죠. 그녀는 상속녀에만 머무르지 않고 어머니와 재단을 세워 지속적으로 기부하는 등 선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어요. 리젤이 예일대에서 학생들과 나눈 대화를 유튜브에서 봤는데 너무 멋졌어요. 건강한 마인드를 가지고 있는 여성이란 생각이 들었고, 우리가 사회적으로 가져야 할 책임과 의무는 무엇일까에 대해 고민하게 됐죠.
앞서 언급했지만 사교계 여성들은 어떤 방식으로 사회사업을 벌이는지 예를 들어 설명해줄 수 있나요.
비슷하지만 차이가 있어요. 갈라(Gala)는 연회장이나 미술관에서 저녁 식사를 하며 기부하는 것을 말해요. 대표적으로 매년 5월 열리는 멧 갈라가 있죠. 베니핏(Benefit)은 공개 경매와 비공개 경매 형식으로 이뤄지고, 채러티(Charity)는 비영리단체 후원을 위한 자선 모임을 일컬어요. 사교계 여성들은 자신의 사회적 자원을 활용해 기금 모금을 해요. 이외에도 자산가들은 부인과 자식을 재단에 소속시켜 의무적으로 기부에 참여하게끔 하고요. 에스티로더 가문은 패밀리 갤러리에 가족의 이름이 걸린 전시실이 있어요. 아이가 태어나면 이름을 따서 전시실을 만들어주는데, 책임감을 느끼게 하죠. 여성들이 다양한 기부 사업을 벌이는 이유 중 하나는 명예 때문이기도 해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이사회 임원이 되려면 사회 활동 커리어가 있어야 하는데, 경쟁이 매우 치열하죠. 또 자선 활동을 하지 않는 높은 지위의 여성은 질타를 받기도 해요. 세계적 석유 재벌 데이비드 코크의 아내 줄리아 코크가 자선 활동을 하지 않아 비난이 쏟아지기도 했죠. 사교계 여성들은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어떤 형태든 사회사업을 하고 있어요.
작가님 개인에 대한 궁금증도 생기는데, 한국에서 고등학교까지 수학한 후 미국 대학에 진학한 건가요.
원래는 보딩스쿨에 진학하려 했지만 어린 나이에 유학하는 것을 부모님이 반대하셨어요. 한국에서 고등학교 2학년 때 ‘괴테와의 대화’를 읽고 중퇴한 뒤 홈스쿨링을 했어요. 오전에는 외국어 교사들과 영어를 비롯해 중국어, 프랑스어 등 언어를 공부하고 오후에 문학, 철학, 역사 등을 배우며 SAT 를 준비했죠.
책에 예술품을 향유하는 부모 밑에서 자랐다고 나와 있는데 어떤 분들인지 궁금합니다.
평범한 분들인데 예술에 대한 관심도가 높아 예술의전당 오페라를 자주 감상했고, 외국에 나갈 때마다 갤러리에 저를 꼭 데리고 다니셨죠. 각 도시에 있는 갤러리 리스트를 뽑아 최고의 갤러리부터 순회했는데 확실히 안목이 생겼어요. 프랑스 파리에서 한 달 반 정도 엄마와 같이 살았는데, 샹젤리제 거리 부근에 집이 있어서 매일 파리의 미술관을 샅샅이 돌아다녔어요. 대학 졸업 때는 부모님과 함께 뉴욕 크리스티 경매 회사 본사에 가서 제가 논문으로 썼던 키스 반 동겐의 작품을 소개해드리고, 매물로 나온 부첼라티 보석도 구경했죠.
대학 입학 전 소더비 경매 회사에서 공부한 것도 흥미로운데 어떻게 가게 됐나요.
고등학교 때 로버트 댈럭의 ‘케네디 평전’을 읽고 케네디 가문에 관심이 생겼어요. 존 F. 케네디의 장녀 캐롤라인 케네디가 당시 저와 같은 나이 19세에 지금은 하버드와 통합한 래드클리프 칼리지 입학을 미루고 런던 소더비 경매 학교에 가서 미술 수업을 들었다는 대목에 눈길이 갔어요. 저도 그런 세계를 경험하고 싶어 같은 수업에 등록했는데 거기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어요. 제가 최연소 학생이었고 대부분 유명 컬렉터의 자제였죠. 40대 러시아 컬렉터도 있었는데 크리스티 경매 회사의 큰손이더라고요. 왜 수업을 듣느냐고 물으니 자신의 아트 어드바이저를 믿을 수 없어서라고 했죠(웃음). 그곳에서의 공부가 큰 도움이 됐어요. 3천억원이 넘는 작품은 왜 그만큼의 값어치를 하는지에 대해 다방면으로 생각하고 토론하는 식으로 수업했는데, 40명 정도 되는 학생들의 철학적 시선을 느낄 수 있었어요.
대학에서 예술경영 및 역사학을 전공하고 졸업 후엔 어떤 일을 했나요.
졸업 후 자료 조사를 하면서 집필에 집중했고 이번에 책이 나왔어요. 그러면서 향후 재단 설립을 위한 준비도 해왔어요. 미국 아이비리그처럼 동부 여대를 묶어 세븐 시스터즈라고 하는데 한국에도 세븐 시스터즈 동문회가 있어요. 1970년대 졸업하신 분들을 비롯해 최근 졸업한 20대 영 멤버까지 다양한 사람이 교류하며 사회사업과 봉사 활동을 하고 있죠. 미국에서 보고 경험한 바를 토대로 개인 재단을 설립해 사회적으로 기여하는 것이 최종 목표이기 때문에 지금은 관련 준비를 하는 과정에 있습니다.
‘점심 먹는 아가씨들’을 읽는 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이 책은 ‘노블레스 오블리주’에 대한 관심에서 출발했어요. 혈통이나 신분이 없어진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인간의 고귀함은 정신에서 온다고 생각해요. 금수저가 아니더라도 누구나 고귀한 정신은 상속하고 상속받을 수 있죠. 고귀한 정신을 추구하는 여성들이라면 스스로 높은 자존감을 가지고 질적으로 풍족한 삶을 누릴 수 있어요. 독자들과 그런 긍정적 감정을 공유하고 싶어요.
사진 지호영 기자 디자인 김영화
사진제공 카페소사이어티
-
추천 0
-
댓글 0
- 목차
- 공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