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의 제품을 만들기 위해서는 여러 재료가 필요하다. 최근 환경과 인체에 무해하고 안전성이 높아 수요가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는 무기자외선차단제의 경우 산화아연과 이산화티타늄이 꼭 들어가야 한다. 두 원료는 지금껏 독일과 일본에서만 생산돼 거의 모든 화장품 회사들이 독일과 일본 등 생산업체로부터 원료를 수입해 만들 수밖에 없었다. 특히 이산화티타늄의 경우 일본의 타이카(TAYCA)에서 독점하고 있어 국내 화장품 회사들은 값이 비싸도, 물량이 없으면 울며 겨자 먹기로 수입해야 했다.
그러던 중 지난해 말 희소식이 들려왔다. 태경그룹 산하 에스비씨에서 이산화티타늄 개발에 성공한 것. 지난해 12월 20일 태경그룹은 이산화티타늄 생산 브랜드인 ‘텔리카’를 론칭하며 군산 제2공장 준공식을 열었다. 여기에 다수의 화장품기업들이 참석해 안정적 원료공급에 대한 기대감을 높였다. 특히 한 회사는 지난해 초 일본 타이카에서 이산화티타늄 한국 공급을 제한해 제품을 생산하기 어려워지자 전 세계를 돌며 수입사를 찾았던 터라 텔리카 론칭을 반겼다는 후문이다.
화장품 분야에서 기초 소재 원천 기술 확보가 가능했던 데는 태경그룹 김해련(58) 회장의 강한 의지가 있었다. 태경그룹은 1975년 설립된 태경산업(전 한국전열화학공업)에 뿌리를 둔 소재 및 화학 중심의 중견 그룹으로 백광소재, 태경화학, 남영전구, 태경에코, 에스비씨 등 10개 자회사 아래 임직원 1천여 명을 두고 있다. 에스비씨는 산업용 소재 및 친환경 화장품 원료 생산회사로 15년의 연구 끝에 2016년 나노산화아연 개발에 성공해 ‘지니카’를 론칭했다. 지난해 나노이산화티타늄 개발 역시 성공해 텔리카를 론칭, 올해 국내외 판매에 박차를 가할 예정이다.
이쯤에서 기초 소재 및 무기화학 분야에서 45년 한 길로 주력하고 있는 태경그룹의 수장이 여성이라는 점에 의문이 갈 법하다. 남성 근로자 비율이 높은 그룹에서 어떻게 수장을 맡게 됐을까. 김해련 회장은 2014년 3월 설립자이자 부친인 김영환 회장의 타계로 경영권을 이어받았고, 6년째 그룹을 챙기고 있다. 무남독녀인 김 회장은 어린 시절부터 ‘가업을 이어받아야 한다’는 생각을 늘 갖고 있었다.
그렇다고 김 회장의 능력을 과소평가할 수 없다. 그는 가업을 승계받기 전에도 자력으로 승승장구했다. 1989년 디자이너 브랜드 ‘아드리안느’, 1999년 대한민국 최초의 인터넷 의류 쇼핑몰 ‘패션플러스’를 설립해 수장으로 각각 10년씩 회사를 이끌었다. 그사이 1세대 온라인 마케팅 전문가로 ‘히트 트렌드 전략’ ‘하이트렌드’ 등 책을 내고 이화여대 경영학과 교수, 삼성물산 자문위원, 지식경제부 산업발전심의위원 등 대외 활동을 하기도 했다. 언제나 도전하기를 즐겼던 김해련 회장을 만나 근황과 그룹 경영 철학을 들었다.
친환경 이산화티타늄 국산화에 성공해 화제인데요. 어떻게 가능했는지 궁금합니다.
회장 취임 후 회사를 확장하고자 했고, 때마침 기초 소재 개발 회사인 에스비씨가 사정이 어려워져 인수할 수 있었어요. 연구 중이던 아이템을 생산하기 위해 박사급 연구원을 스카우트해 5년 넘게 투자했죠. 에스비씨는 원래 산화아연 생산 회사예요. 아연은 타이어, 골프공, 동물 사료, 정력제 등에 사용되는데 자외선차단제 역할도 해요. 그런데 정제되지 않은 아연은 백탁 현상이 너무 심해서 제품화하기 힘들어 곱게 가는 나노화 작업이 필요하죠. 이미 독일과 일본은 나노산화아연 분야에 경쟁력을 갖추고 있었어요. 국내에서는 생산 기술을 갖춘 곳이 없어 에스비씨에서 수년간 연구한 끝에 2016년 나노화에 성공했고, 지니카 브랜드를 만들어 생산 중이에요. 그런데 자외선 차단 완제품을 만들려면 나노이산화티타늄도 있어야 하는데 일본의 타이카가 전 세계 시장을 독점하고 있죠. 지난해 한일 갈등으로 수출이 어렵게 되자 화장품 회사마다 생산에 애를 먹었어요. 저희는 15년 간의 연구 노하우를 담아 이산화티타늄 개발도 성공해 텔리카라는 브랜드를 만들었죠. 전북 군산에 2백억원을 들여 공장을 지었고 올해부터 나노산화아연 1백20톤, 나노이산화티타늄 2백40톤가량을 생산할 계획입니다.
일본 제품과 비교해 지니카, 텔리카만의 장점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효능은 타이카 못지않아요. 공장을 짓기 전에 샘플을 가지고 다니면서 여러 화장품 회사에 보여줬는데 “타이카보다 낫다” “효과도 더 좋다”고 말하는 분도 있었어요. 무엇보다 가성비가 독일이나 일본 제품보다 좋아요. 그동안 나노산화아연은 독일 바스프, 나노이산화티타늄은 일본 타이카가 전 세계 시장을 장악하고 있어 가격이 비쌌어요. 우리가 앞으로 그보다 저렴하게 공급할 수 있으니 경쟁력이 있죠. 지금 국내 시장에 30%를 공급할 수 있도록 공장을 설립했는데 향후 더 증설해 생산량을 2배로 늘릴 계획입니다.
국내 시장뿐 아니라 해외 시장도 고려하고 있나요.
물론이죠. 전 세계적으로 환경오염의 주범이 되는 유기계 화장품 퇴출 운동이 벌어지고 있어요. 하와이에서는 산호초 파괴를 염려해 유기계 자외선차단제 판매 및 사용을 법적으로 금지시키는 관련 법이 통과될 정도죠. 우리나라 소비자들도 화장품 성분을 꼼꼼히 따지는데, 분석 사이트에 가보면 ‘유기자차(유기계 자외선차단제)’인지 ‘무기자차(무기계 자외선차단제)’인지 분류를 할 정도예요. 저희 에스비씨 나노산화아연, 나노이산화티타늄은 친환경 화장품 원료기 때문에 해외 시장 판매도 자신 있어요.
어릴 때부터 아버지를 따라 회사에 매주 나왔기 때문에 언젠가 가업을 물려 받아야 한다는 생각을 늘 갖고 있었죠. 그래서 경영학을 전공했고 학사 학위를 받고자 남편과 함께 미국으로 향했어요. 거기서 MBA를 취득했는데 남편이 박사 학위를 받을 때까지 시간이 좀 남아서 뉴욕 FIT(Fashion Institute of Technology)에 입학했죠. 그런데 패션 공부가 너무 재미있어서 하는 김에 졸업까지 하고 취직해서 일도 좀 했어요. 한국에 돌아와 스물아홉 살에 ‘한국의 샤넬’을 꿈꾸며 디자이너 브랜드 아드리안느를 만들었어요. 그때 서울 컬렉션에서 패션쇼를 했고, 전인화 등 유명 연예인들이 입어 준 덕에 신세계백화점 본점에 입점할 정도로 인기를 얻었죠.
그렇게 10년 경영하시다가 인터넷 의류 쇼핑몰을 창업하신 계기는 무엇인가요.
1997년 IMF가 터지면서 사업이 어려워졌어요. 백화점 매출도 다 죽고 부산 태화, 대구 대백, 광주 가든 등 지방 백화점은 전부 부도가 났죠. 그때 부실 채권이 생기면서 매장을 줄였고, 자금 회전을 위해 홈쇼핑에 나가게 됐어요. ‘삼구 홈쇼핑’이라고, 당시에 TV에서 물건을 파는 개념 자체가 없던 시절이에요. 당시 친분이 있던 전인화 씨에게 “홈쇼핑에 나와서 우리 옷을 같이 좀 팔자”고 부탁했는데 흔쾌히 도와줬죠. 그때 2시간에 1억원어치를 팔고 ‘홈쇼핑의 위력이 대단하구나’라는 걸 느꼈어요. 이후 이 사업을 계속할 것인가 고민을 하던 차에 미국에서 공부를 하고 왔던 친한 친구들이 “미국은 아마존이라는 회사가 주목받고 있다. 앞으로는 인터넷 시대가 온다. 홈쇼핑 안 해도 된다”고 조언해줬어요. 그렇게 해서 1999년 최초의 인터넷 의류 쇼핑몰 ‘에이다임(현 패션플러스)’를 창립했어요.
그때 당시 획기적인 시도로 평가받았겠어요.
그렇죠. 인터넷으로 물건, 특히 의류를 파는 회사가 거의 없던 시절이니까요. 인터파크에서 기저귀를 파는 정도랄까요. 그래서 신세계백화점, 롯데백화점에서 인수 제안이 왔는데 상장을 계획하고 있어서 안 팔았어요. 2003년 즈음 투자를 받고 상장 계약을 하려는데 몇 년 뒤 우후죽순 인터넷 의류 쇼핑몰이 생겼어요. 블루오션이 레드오션이 되는 타이밍이었죠. 이후 2008년 미국에서 리먼 사태가 터지면서 상장이 연기됐고, 그해 아버지께서 간암 판정을 받으셔서 매각하게 됐어요. 이듬해 태경그룹(전 송원그룹) 부회장으로 취임했죠.
급변하는 한국 인터넷 시장에서 10년간 살아남은 것도 의미 있는데요.
패션플러스 창업 후 10년 동안이 경영자로서 가장 소중한 경험이에요. 새로운 시장을 개척해야 하는데 솔루션이 없어 그걸 찾기 위해 애썼고, 사이트를 매일 업그레이드해야 하니 직원들과 시스템을 만드는 데 총력을 기울였죠. 지금 많은 회사가 데이터 혁명을 부르짖는데 그 전산화, 스마트 팩토리도 저희가 먼저 시작한 셈이에요. 그때 패션 브랜드 경영, 인터넷 시장 개척 경험을 살려 소비자 트렌드 관련 책도 출판했어요. 전문가로 알려지면서 다른 회사 컨설팅도 10년 정도 했고요. 삼성전자 인터넷 강의도 나가고, LG전자 ‘초콜릿 폰’ 론칭할 때 컨설팅을 했죠.
그룹 돌아가는 사정은 초등학교 입학 전부터 아버지께서 회사 일정에 데리고 다닌 터라 잘 알고 있었어요. 물론 전문적인 내용은 피상적으로 보던 것과 차이가 있어 개인적으로 공부를 많이 했어요. 2009년 부회장이 된 뒤로 매주 화학 박사, 전 직원들과 2년 동안 화학 공부를 했고 그러다 보니 세부적인 내용은 다 파악하게 됐죠. 새로운 경영기법이나 환경변화에 민감했기 때문에 이론과 실무를 함께 섭렵하며 일해나간 것이 항상 도움이 되었어요. 언제나 트렌드를 분석하고 전략적인 부분을 찾아내는 것도 습관이었고요.
태경그룹만의 강점이 있을까요.
저희 회사는 기초 소재에 전문성을 가지고 있는 강소 기업이에요. 합금철, 중질 탄산칼슘, 석회, PCC, 액체 탄산, 드라이아이스, 산업용 가스, 전구 등 자회사에서 생산하는 모든 아이템이 다양한 산업의 기초 소재로 들어가는 게 강점이죠. 세계적으로 우리만 갖고 있는 기초 소재도 많거든요. 기업이 힘을 가지려면 좋은 아이템을 열심히 연구개발하면서 기술력을 갖추는 게 중요해요. 그래야 전방 산업에서 휘둘리지 않거든요.
회장으로 6년 일한 지금, 스스로 기업 경영 실적에 만족하시나요.
꾸준히 성장하다가 지난해에는 철강 산업이 하락하면서 실적이 좋지 않았어요. 한일 갈등 등 내·외부적인 이슈가 많아 6년 가운데 유일하게 후퇴했죠. 그런데 올해는 꽤 성장할 걸로 보여요. 나노산화아연, 나노이산화티타늄 생산이 본격적으로 이뤄지면 매출이 상당할 걸로 예상돼요. 또 내년 연구개발에 성공할 아이템이 서너 개 있어서 직원들도 기대감이 높아요.
부친이 설립한 송원김영환장학재단에 대한 애정이 남다르신 걸로 알고 있어요.
힘들게 공부하는 학생들을 돕는 건 아버지의 꿈이었어요. 본인이 어렵게 공장에서 일하며 학비와 생활비를 벌어 서울대 상대를 졸업했거든요. 그때 ‘돈 걱정 없이 공부만 하면 좋겠다’고 소망하셨대요. 그래서 어려웠던 사업초기에도 불구하고 1983년 송원김영환장학재단을 만드셨고 저 역시 2000년부터 이사장으로 있으면서 어렵게 공부하는 대학생들을 적극 도왔어요. 장학생은 성적을 보지 않고, 어떤 조건도 없이 면접으로만 뽑아요.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 학생들이 메인인데 전부 소득 1분위로 가정 형편이 어려워요. 면접을 보면 4인 가족 생활비가 2백만원인데, 그것도 1백만원은 국가보조금이고 나머지는 자기 아르바이트 월급이라고 하더라고요. 밥을 굶는 학생들이 아직도 많아요. 그런 친구들 위주로 뽑아서 학사도 운영하며 취직할 때까지 머무를 수 있도록 해줘요.
태경그룹 2020년 비전에 대해 한 말씀 부탁드려요.
기초 소재 분야 세계 1위가 목표입니다. 특히 무기계 소재에서 세계 1위 기업으로 일구고 싶어요.
마지막으로 독자에게 한 말씀 하신다면요.
아직까지도 경영인 모임에 가면 “그 회사는 왜 여자가 회장을 하나요”라는 질문을 받아요. 여성의 사회적 지위가 높아졌다고 하지만 아직도 유리천장이 존재하는 것 같아요. 태경그룹 내 회장이 여자라는 선입견을 가진 사람은 없지만 사회적으로는 아직 그런 시선들이 있다는 게 너무 안타까워요. 그걸 깨려면 사회적 인식 변화도 있어야 하지만 여성들 본인의 인식 전환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사회 각층의 여성들이 자신의 자리에서 끊임없이 노력해주길 바랍니다.
사진 조영철 기자 디자인 김영화
사진제공 태경그룹
그러던 중 지난해 말 희소식이 들려왔다. 태경그룹 산하 에스비씨에서 이산화티타늄 개발에 성공한 것. 지난해 12월 20일 태경그룹은 이산화티타늄 생산 브랜드인 ‘텔리카’를 론칭하며 군산 제2공장 준공식을 열었다. 여기에 다수의 화장품기업들이 참석해 안정적 원료공급에 대한 기대감을 높였다. 특히 한 회사는 지난해 초 일본 타이카에서 이산화티타늄 한국 공급을 제한해 제품을 생산하기 어려워지자 전 세계를 돌며 수입사를 찾았던 터라 텔리카 론칭을 반겼다는 후문이다.
화장품 분야에서 기초 소재 원천 기술 확보가 가능했던 데는 태경그룹 김해련(58) 회장의 강한 의지가 있었다. 태경그룹은 1975년 설립된 태경산업(전 한국전열화학공업)에 뿌리를 둔 소재 및 화학 중심의 중견 그룹으로 백광소재, 태경화학, 남영전구, 태경에코, 에스비씨 등 10개 자회사 아래 임직원 1천여 명을 두고 있다. 에스비씨는 산업용 소재 및 친환경 화장품 원료 생산회사로 15년의 연구 끝에 2016년 나노산화아연 개발에 성공해 ‘지니카’를 론칭했다. 지난해 나노이산화티타늄 개발 역시 성공해 텔리카를 론칭, 올해 국내외 판매에 박차를 가할 예정이다.
이쯤에서 기초 소재 및 무기화학 분야에서 45년 한 길로 주력하고 있는 태경그룹의 수장이 여성이라는 점에 의문이 갈 법하다. 남성 근로자 비율이 높은 그룹에서 어떻게 수장을 맡게 됐을까. 김해련 회장은 2014년 3월 설립자이자 부친인 김영환 회장의 타계로 경영권을 이어받았고, 6년째 그룹을 챙기고 있다. 무남독녀인 김 회장은 어린 시절부터 ‘가업을 이어받아야 한다’는 생각을 늘 갖고 있었다.
그렇다고 김 회장의 능력을 과소평가할 수 없다. 그는 가업을 승계받기 전에도 자력으로 승승장구했다. 1989년 디자이너 브랜드 ‘아드리안느’, 1999년 대한민국 최초의 인터넷 의류 쇼핑몰 ‘패션플러스’를 설립해 수장으로 각각 10년씩 회사를 이끌었다. 그사이 1세대 온라인 마케팅 전문가로 ‘히트 트렌드 전략’ ‘하이트렌드’ 등 책을 내고 이화여대 경영학과 교수, 삼성물산 자문위원, 지식경제부 산업발전심의위원 등 대외 활동을 하기도 했다. 언제나 도전하기를 즐겼던 김해련 회장을 만나 근황과 그룹 경영 철학을 들었다.
기초 소재 국산화로 독점 시장 깨뜨려
1 그룹의 로드맵을 설명하는 김해련 회장. 2 송원김영환장학재단 장학생과 함께. 3 에스비씨 연구실에서 직원들과.
회장 취임 후 회사를 확장하고자 했고, 때마침 기초 소재 개발 회사인 에스비씨가 사정이 어려워져 인수할 수 있었어요. 연구 중이던 아이템을 생산하기 위해 박사급 연구원을 스카우트해 5년 넘게 투자했죠. 에스비씨는 원래 산화아연 생산 회사예요. 아연은 타이어, 골프공, 동물 사료, 정력제 등에 사용되는데 자외선차단제 역할도 해요. 그런데 정제되지 않은 아연은 백탁 현상이 너무 심해서 제품화하기 힘들어 곱게 가는 나노화 작업이 필요하죠. 이미 독일과 일본은 나노산화아연 분야에 경쟁력을 갖추고 있었어요. 국내에서는 생산 기술을 갖춘 곳이 없어 에스비씨에서 수년간 연구한 끝에 2016년 나노화에 성공했고, 지니카 브랜드를 만들어 생산 중이에요. 그런데 자외선 차단 완제품을 만들려면 나노이산화티타늄도 있어야 하는데 일본의 타이카가 전 세계 시장을 독점하고 있죠. 지난해 한일 갈등으로 수출이 어렵게 되자 화장품 회사마다 생산에 애를 먹었어요. 저희는 15년 간의 연구 노하우를 담아 이산화티타늄 개발도 성공해 텔리카라는 브랜드를 만들었죠. 전북 군산에 2백억원을 들여 공장을 지었고 올해부터 나노산화아연 1백20톤, 나노이산화티타늄 2백40톤가량을 생산할 계획입니다.
일본 제품과 비교해 지니카, 텔리카만의 장점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효능은 타이카 못지않아요. 공장을 짓기 전에 샘플을 가지고 다니면서 여러 화장품 회사에 보여줬는데 “타이카보다 낫다” “효과도 더 좋다”고 말하는 분도 있었어요. 무엇보다 가성비가 독일이나 일본 제품보다 좋아요. 그동안 나노산화아연은 독일 바스프, 나노이산화티타늄은 일본 타이카가 전 세계 시장을 장악하고 있어 가격이 비쌌어요. 우리가 앞으로 그보다 저렴하게 공급할 수 있으니 경쟁력이 있죠. 지금 국내 시장에 30%를 공급할 수 있도록 공장을 설립했는데 향후 더 증설해 생산량을 2배로 늘릴 계획입니다.
국내 시장뿐 아니라 해외 시장도 고려하고 있나요.
물론이죠. 전 세계적으로 환경오염의 주범이 되는 유기계 화장품 퇴출 운동이 벌어지고 있어요. 하와이에서는 산호초 파괴를 염려해 유기계 자외선차단제 판매 및 사용을 법적으로 금지시키는 관련 법이 통과될 정도죠. 우리나라 소비자들도 화장품 성분을 꼼꼼히 따지는데, 분석 사이트에 가보면 ‘유기자차(유기계 자외선차단제)’인지 ‘무기자차(무기계 자외선차단제)’인지 분류를 할 정도예요. 저희 에스비씨 나노산화아연, 나노이산화티타늄은 친환경 화장품 원료기 때문에 해외 시장 판매도 자신 있어요.
한국의 샤넬 꿈꿨던 청년 사업가 시절
대학에서 경영학을 전공하고 뉴욕에서 패션디자인을 전공했는데, 이력이 가업과는 관련이 없어 독특합니다. 그 시절 꿈은 무엇이었나요.어릴 때부터 아버지를 따라 회사에 매주 나왔기 때문에 언젠가 가업을 물려 받아야 한다는 생각을 늘 갖고 있었죠. 그래서 경영학을 전공했고 학사 학위를 받고자 남편과 함께 미국으로 향했어요. 거기서 MBA를 취득했는데 남편이 박사 학위를 받을 때까지 시간이 좀 남아서 뉴욕 FIT(Fashion Institute of Technology)에 입학했죠. 그런데 패션 공부가 너무 재미있어서 하는 김에 졸업까지 하고 취직해서 일도 좀 했어요. 한국에 돌아와 스물아홉 살에 ‘한국의 샤넬’을 꿈꾸며 디자이너 브랜드 아드리안느를 만들었어요. 그때 서울 컬렉션에서 패션쇼를 했고, 전인화 등 유명 연예인들이 입어 준 덕에 신세계백화점 본점에 입점할 정도로 인기를 얻었죠.
그렇게 10년 경영하시다가 인터넷 의류 쇼핑몰을 창업하신 계기는 무엇인가요.
1997년 IMF가 터지면서 사업이 어려워졌어요. 백화점 매출도 다 죽고 부산 태화, 대구 대백, 광주 가든 등 지방 백화점은 전부 부도가 났죠. 그때 부실 채권이 생기면서 매장을 줄였고, 자금 회전을 위해 홈쇼핑에 나가게 됐어요. ‘삼구 홈쇼핑’이라고, 당시에 TV에서 물건을 파는 개념 자체가 없던 시절이에요. 당시 친분이 있던 전인화 씨에게 “홈쇼핑에 나와서 우리 옷을 같이 좀 팔자”고 부탁했는데 흔쾌히 도와줬죠. 그때 2시간에 1억원어치를 팔고 ‘홈쇼핑의 위력이 대단하구나’라는 걸 느꼈어요. 이후 이 사업을 계속할 것인가 고민을 하던 차에 미국에서 공부를 하고 왔던 친한 친구들이 “미국은 아마존이라는 회사가 주목받고 있다. 앞으로는 인터넷 시대가 온다. 홈쇼핑 안 해도 된다”고 조언해줬어요. 그렇게 해서 1999년 최초의 인터넷 의류 쇼핑몰 ‘에이다임(현 패션플러스)’를 창립했어요.
그때 당시 획기적인 시도로 평가받았겠어요.
그렇죠. 인터넷으로 물건, 특히 의류를 파는 회사가 거의 없던 시절이니까요. 인터파크에서 기저귀를 파는 정도랄까요. 그래서 신세계백화점, 롯데백화점에서 인수 제안이 왔는데 상장을 계획하고 있어서 안 팔았어요. 2003년 즈음 투자를 받고 상장 계약을 하려는데 몇 년 뒤 우후죽순 인터넷 의류 쇼핑몰이 생겼어요. 블루오션이 레드오션이 되는 타이밍이었죠. 이후 2008년 미국에서 리먼 사태가 터지면서 상장이 연기됐고, 그해 아버지께서 간암 판정을 받으셔서 매각하게 됐어요. 이듬해 태경그룹(전 송원그룹) 부회장으로 취임했죠.
급변하는 한국 인터넷 시장에서 10년간 살아남은 것도 의미 있는데요.
패션플러스 창업 후 10년 동안이 경영자로서 가장 소중한 경험이에요. 새로운 시장을 개척해야 하는데 솔루션이 없어 그걸 찾기 위해 애썼고, 사이트를 매일 업그레이드해야 하니 직원들과 시스템을 만드는 데 총력을 기울였죠. 지금 많은 회사가 데이터 혁명을 부르짖는데 그 전산화, 스마트 팩토리도 저희가 먼저 시작한 셈이에요. 그때 패션 브랜드 경영, 인터넷 시장 개척 경험을 살려 소비자 트렌드 관련 책도 출판했어요. 전문가로 알려지면서 다른 회사 컨설팅도 10년 정도 했고요. 삼성전자 인터넷 강의도 나가고, LG전자 ‘초콜릿 폰’ 론칭할 때 컨설팅을 했죠.
“아버지의 이름으로 가업 이어갈 것”
가업이지만 전공과 무관한 소재 회사를 경영하게 됐을 때 어려움은 없었나요.그룹 돌아가는 사정은 초등학교 입학 전부터 아버지께서 회사 일정에 데리고 다닌 터라 잘 알고 있었어요. 물론 전문적인 내용은 피상적으로 보던 것과 차이가 있어 개인적으로 공부를 많이 했어요. 2009년 부회장이 된 뒤로 매주 화학 박사, 전 직원들과 2년 동안 화학 공부를 했고 그러다 보니 세부적인 내용은 다 파악하게 됐죠. 새로운 경영기법이나 환경변화에 민감했기 때문에 이론과 실무를 함께 섭렵하며 일해나간 것이 항상 도움이 되었어요. 언제나 트렌드를 분석하고 전략적인 부분을 찾아내는 것도 습관이었고요.
태경그룹만의 강점이 있을까요.
저희 회사는 기초 소재에 전문성을 가지고 있는 강소 기업이에요. 합금철, 중질 탄산칼슘, 석회, PCC, 액체 탄산, 드라이아이스, 산업용 가스, 전구 등 자회사에서 생산하는 모든 아이템이 다양한 산업의 기초 소재로 들어가는 게 강점이죠. 세계적으로 우리만 갖고 있는 기초 소재도 많거든요. 기업이 힘을 가지려면 좋은 아이템을 열심히 연구개발하면서 기술력을 갖추는 게 중요해요. 그래야 전방 산업에서 휘둘리지 않거든요.
회장으로 6년 일한 지금, 스스로 기업 경영 실적에 만족하시나요.
꾸준히 성장하다가 지난해에는 철강 산업이 하락하면서 실적이 좋지 않았어요. 한일 갈등 등 내·외부적인 이슈가 많아 6년 가운데 유일하게 후퇴했죠. 그런데 올해는 꽤 성장할 걸로 보여요. 나노산화아연, 나노이산화티타늄 생산이 본격적으로 이뤄지면 매출이 상당할 걸로 예상돼요. 또 내년 연구개발에 성공할 아이템이 서너 개 있어서 직원들도 기대감이 높아요.
부친이 설립한 송원김영환장학재단에 대한 애정이 남다르신 걸로 알고 있어요.
힘들게 공부하는 학생들을 돕는 건 아버지의 꿈이었어요. 본인이 어렵게 공장에서 일하며 학비와 생활비를 벌어 서울대 상대를 졸업했거든요. 그때 ‘돈 걱정 없이 공부만 하면 좋겠다’고 소망하셨대요. 그래서 어려웠던 사업초기에도 불구하고 1983년 송원김영환장학재단을 만드셨고 저 역시 2000년부터 이사장으로 있으면서 어렵게 공부하는 대학생들을 적극 도왔어요. 장학생은 성적을 보지 않고, 어떤 조건도 없이 면접으로만 뽑아요.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 학생들이 메인인데 전부 소득 1분위로 가정 형편이 어려워요. 면접을 보면 4인 가족 생활비가 2백만원인데, 그것도 1백만원은 국가보조금이고 나머지는 자기 아르바이트 월급이라고 하더라고요. 밥을 굶는 학생들이 아직도 많아요. 그런 친구들 위주로 뽑아서 학사도 운영하며 취직할 때까지 머무를 수 있도록 해줘요.
태경그룹 2020년 비전에 대해 한 말씀 부탁드려요.
기초 소재 분야 세계 1위가 목표입니다. 특히 무기계 소재에서 세계 1위 기업으로 일구고 싶어요.
마지막으로 독자에게 한 말씀 하신다면요.
아직까지도 경영인 모임에 가면 “그 회사는 왜 여자가 회장을 하나요”라는 질문을 받아요. 여성의 사회적 지위가 높아졌다고 하지만 아직도 유리천장이 존재하는 것 같아요. 태경그룹 내 회장이 여자라는 선입견을 가진 사람은 없지만 사회적으로는 아직 그런 시선들이 있다는 게 너무 안타까워요. 그걸 깨려면 사회적 인식 변화도 있어야 하지만 여성들 본인의 인식 전환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사회 각층의 여성들이 자신의 자리에서 끊임없이 노력해주길 바랍니다.
사진 조영철 기자 디자인 김영화
사진제공 태경그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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