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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life

암과 싸우며 얻은 것 김한길

EDITOR 조수빈 채널A 앵커

2019. 12. 29

채널A 주말 ‘뉴스A’를 통해 김한길 전 의원을 인터뷰한 조수빈 앵커가 방송에 다 담지 못한 깊은 내용을 글로 전해왔다. 폐암 4기 진단을 받은 후 2년여간 암과 사투를 벌이며 김한길에게 찾아온 변화들.

인생을 다시 살 수 있다면. 누구나 한 번쯤 해보는 생각이다. 내가 어린 시절 인기 토크쇼 진행자였던 한 남자는 대학에 진학해서 알고 보니 소설 ‘여자의 남자’와 에세이 ‘눈 뜨면 없어라’ 등을 집필한 유명 작가였고, 당대 미모의 여배우와 결혼을 했으며, 내가 뉴스를 진행하던 때는 정치인이었다. 마치 한 편의 소설 같은 삶을 산 그가 2017년 말 폐암 4기 선고를 받았다는 소식이 들렸다. 누구보다 강인한 그는 병마에 쓰러질 뻔했지만 또다시 일어나 새 인생을 살고 있다. ‘뉴스A’ 속 대담 코너 ‘조수빈의 마이크’를 통해 만난 김한길(67) 전 의원. 그는 알려진 것보다 더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고 알고 보면 훨씬 더 친근한 사람이었다. 채널A 예능 프로그램 ‘길길이 다시 산다’를 통해 부인 최명길 씨와 새로운 인생을 사는 모습을 공개한 그를 서울 이촌동 작업실에서 만났다.

‘길길이 다시 산다’ 반응이 굉장히 좋습니다. 사실은 편찮으시다고 해서 걱정을 많이 했거든요. 지금은 좀 어떠신가요. 

아프기 전의 본전을 찾아가는 것 같아요. 우리 집사람 말로는 아프기 전보다 더 좋아진 것 같대요. 담배를 안 피워서. 예전에는 정말 많이 피웠거든요. 

병원에서는 뭐라고 하나요. 

지금은 다 이상 없대요. 제가 거의 정상인 노릇을 하고 있다고 그랬더니 우리 주치의가 거의 그만 와도 된다고, 그렇게 말씀을 하던데요? 주기적으로 체크를 하지요. 혹시 또 나빠질 조짐이 있는지. 

편찮으시다는 기사가 났을 때, “내 얘기 같다”고 하시는 분들이 많았습니다. 얼마나 놀라셨어요. 

그렇긴 한데요. 지금 말씀하신 것처럼 이렇게 나이 먹다 보면 건강에 위기가 오는 게 별난 일이 아니에요. 그런데 어떤 분들은 그 위기를 잘 넘기고 어떤 분들은 넘기지 못하고 그런 거죠. 무슨 극적이거나 대단한 일처럼 얘기되는 것 자체가 저는 참 쑥스러워요. 

생각보다 담담하신데요(웃음). 

저는 사실 담담했어요. 의사가 어느 날 폐에 있던 (암)세포가 폐 밖으로 전이됐다고 하면서 “이런 상태를 4기라 그럽니다”라고 하더군요. 그런데 그 의사 말이 재밌는 게 “저는 말기란 말을 안 하고 4기라고만 합니다” 그랬어요. 그런데 저는 사실 덤덤하게 받았습니다. 왜냐하면 주변에 이런 일들이 많잖아요. 그런데 그 말을 들을 때 제 아내도 있었고 주변에 사람들이 좀 있었거든요. 



병원에 같이 가셨군요. 

네. 항상 같이 갔어요. 그런데 거기서 제가 아무 얘기도 더 안 하고 나중에 집에 와서 그 의사분한테 전화했어요. “아까 4기라고 하는 말이 4기일 가능성이 많다는 이야기입니까?” 그랬더니 조금 목소리를 높이면서 “가능성이 아니라 4기라는 얘깁니다”라고 아주 단정적으로 얘기하시더라고요. 그래서 내가 “그럼 대개 얼마나 더 사는 거요?” 물으니까 몇 달이라고 하시더라고요. 

그 ‘몇 달’이 정확하게 얼마를 말씀하신 건가요. 

그건 제가 일부러 말을 안 하고 있어요. 자꾸 극적인 얘기가 될까 봐요. 특별히 엄청난 일을 해서 그 위기를 극복한 것도 아니고, 투병이라고 하지만 사실 제가 별로 한 게 없어요. 그냥 병이 와서 앓은 거고 좋은 의사, 좋은 약을 만나서 위기를 넘긴 거죠. 제가 그날 그 몇 달 얘기를 듣고 좀 생각해봤어요. 버킷 리스트라고들 하잖아요. 남은 날들 동안 뭘 하지? 어디 꼭 가봐야 하는 데가 있나? 이런 생각을 해봤는데 특별히 가고 싶은 데도 없고, 해야 할 일도 없더라고요. 그냥 우리 아들들하고 아내한테 좀 더 잘해야겠다, 내 주변 가까이 있는 사람들한테 좀 더 잘해야겠다, 그런 정도로 생각하고 결론 냈어요. 

최명길 씨는 어떠셨는지요. 

나중에 친구들이 어땠냐고 물어봐서 덤덤하게 우리 부부가 거기서 더 뭐라 하지도 않고, 울지도 않고 그랬다 했어요. 그리고 집에 가서 그 얘기를 했더니 우리 집사람이 “그때 당신은 안 울었지만 나는 다른 방에 가서 많이 울었다”고 그러더라고요. 이제 저는 우리 아들이나 아내를 보면서, 또 제 아우나 조카들이 저한테 하는 걸 보면서 ‘내가 나를 너무 가볍게 여기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 그럼 내가 (저세상에) 가면 되지’ 이렇게만 생각해선 안 되는 것 같다, 그런 마음을 갖게 됐어요. 

최명길 씨가 간병인의 도움도 받지 않고 헌신적으로 간호를 하셨다고요. 

예상을 훨씬 뛰어넘게 저를 챙기니까, 저도 많이 놀랐어요. ‘아 내가 이런 대접을 받을 만한 자격이 있는 남편인가?’ 혹은 입장이 바뀌어서 ‘집사람이 아팠다면 내가 이 정도의 반쯤이라도 해줄 수 있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우리가 결혼할 때 사람들이 “최명길이 훨씬 밑진다”는 말을 많이 했어요. 그때 SNS가 없었던 게 정말 다행이에요(웃음). 그런데 오래 살아보니까, 또 이번 일을 겪고 나니까 ‘아 정말 최명길이가 손해를 많이 봤구나’ 그런 생각이 들어요(웃음). 정말 고맙죠. 그런 색시를 얻은 건 저한테는 엄청난 보물을 얻은 것, 로또에 당첨된 것 이상으로 고마운 일입니다. 

지금은 건강해 보이지만 한동안은 거동이 어려울 정도로 힘드셨던 걸로 알고 있어요. 

그러니까 사람 몸이라는 게 정말 신기해요. 제가 2019년 초만 해도 걷지 못했어요. 병원 중환자실에 누워 있다가 나오니까 온몸에 근육이 다 빠져서 걷지 못하는 건 물론이고 목도 제대로 못 가누고 손으로 물건을 집지도 못하고 그런 상태였어요. 그래서 바로 서서 걸음마부터 시작했어요. 지금은 그야말로 거듭난 거죠. 제가 생각해도 예전에 정말 그랬나? 싶을 정도로 너무 멀쩡해졌어요. 

그걸 다 최명길 씨가 도와주신 거죠. 

그렇죠. 제가 병원에 실려 갔다가 휠체어 타고 집에 들어서니까 안에 스펀지를 다 깔아놨더군요. 아무리 그래도 이건 좀 지나친 거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누구하고 의논해서 이렇게 했냐?” 물었더니 혼자 생각해서 그렇게 했대요. 

많이 생각하셨네요. 

저하고 결혼한 것이 그 사람한테 얼마나 득이 됐는지 모르겠는데(웃음), 저한텐 엄청 괜찮은 일이었어요. 


암을 겪으면서 가치관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을 것 같습니다. 

아파서 누워 있다가 다시 걸음마를 배우고 일어서서 걷게 됐을 때 세상과 세상 사람들이 새롭게 보이더라고요. 그건 우리 집사람도 마찬가지예요. 제가 아픈 게 집사람한테도 굉장히 위기였던 것 같아요. 애들 아빠가 없어질까 봐, 없어질 수 있다는 게. 그런 데다가 저는 지난 20여 년 동안 정치한답시고 거대 담론에만 익숙해져 있었어요. 거창한 이야기만 했어요. 

만약 아들들이 나중에 “정치하겠다” 하면 어떡하시겠어요. 갑자기 그게 궁금해졌어요. 

아이들의 인생을 부모가 규정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요. 그건 그 아이들의 인생이니까. 자기가 원하는 인생을 사는 데 “이렇게 이렇게 해주는 게 도움이 됩니다”라고 할 때 도와주는 게 부모의 역할이죠. 옛날에 박완서 선생이 “부모란 자식에게 이불 같은 것이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어요. 아이들이 자다가 더우면 걷어차고 자다가 추우면 다시 끌어당겨서 덮는 이불 같은 존재여야 한다는 거죠. 저는 그 말에 참 공감해요. 

요즘 젊은 아빠들이 굉장히 힘들어하는데 인생 선배로서 젊은 아빠들에게 이것만큼은 지켜라, 하고 조언해주실 부분이 있을까요. 

제가 우리 아이들이 언제 첫걸음을 떼었는지, 언제 처음으로 눈 맞추면서 “아빠”라고 불렀는지 기억 못 해요. 그래서 스스로 참 모자란 아비라고 생각하거든요. 제가 몇 년 전 여기(사무실) 밖에서 개를 키웠어요. 그 개가 새끼를 낳았는데 너무 예뻐서 먹는 것부터 씻기는 것까지 제가 다 했죠. 그랬더니 비서가 “아이를 둘이나 키운 아빠가 그 강아지를 보고 그렇게 예쁘세요?” 그러더군요. 뒤통수를 한 대 맞은 것 같았어요. 강아지도 그렇게 예쁜데 내 새끼는 얼마나 예뻤겠어요. 그런데 나는 그걸 기억도 못 해요. 그러니까 로또에 당첨됐는데 당첨된 것도 모르고 현금으로 찾지 않고 날려보낸 사람 같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편찮으시면서 생각도 많이 바뀌고 정리되신 듯합니다. 인생에서 가장 보람된 순간이나 하이라이트를 꼽자면 언제일까요. 

‘내가 지낸 직업 중에 뭐가 가장 좋았나’ 생각하면 작가가 제일 좋았던 것 같아요. 세상에 꼭 드러내고 싶은 진실을, 꼭 필요한 거짓말을 가지고 제시하는 일이잖아요. 그런데 아무 거짓말이나 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지만, 작가가 아무 거짓말이나 해도 되는 건 아니에요. 진짜 보여줘야 할 진실을 드러내기 위해서 꼭 필요한 거짓말만이 작가에게 허용된 것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아주 매력적인 일이고, 좋았어요. 가장 보람된 일은 50년 만에 정권 교체, 김대중·노무현 두 대통령을 만들어낸 선거에서 그래도 한 역할을 해 기여할 수 있었던 것, 그게 어쨌든 우리나라 정치에 발전을 가져왔다고 생각하니까 보람이 있어요. 가장 행복한 건, 지금이 답이에요. 이제 아픈 것도 많이 나았고. 오래 친하게 지내온 친구들도 요즘 제가 가장 편한 표정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실제로 편하거든요. 마음이 평화롭고. 

제가 좋아하는 작가셨고, 방송도 진행하셨고, 또 국회의원 시절에는 뉴스로도 많이 뵈었어요. 그런데 이번에 ‘길길이 다시 산다’를 보는데 표정이 너무 귀여우신 거예요(웃음). 굉장히 편안해 보이시고. ‘아 저분한테 저런 표정이 있었나, 저런 분위기가 있었나?’ 그런 생각을 다시 하게 되더라고요. 

원래 제가 굉장히 장난꾸러기고요. 좀 전에 열거하신, 제가 거쳤던 일들은 좋은 것들만 뽑아서 얘기하신 것이고요. 안 좋은 거, 고생한 시절도 많아요. 이 땅에서 살기 어려웠거든요. 빨갱이 아들(그의 부친 故 김철 통일사회당 당수는 1976년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징역 3년을 선고받았으나 2013년 재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이라 그러죠, 아버지는 도망 다니거나 잡히거나 하시죠, 그때는 어디 시험 봐서 취직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어요. 그래서 종이하고 연필 가지고 쓸 수 있는 게 글이니까 그걸 쓰자마자 또 중앙정보부니 보안사니 잡혀가서 매 맞고 ‘앞으로 글 안 쓰겠습니다’ 각서도 쓰고. 세상이 너무 막막했어요. 사방이 우람한 벽으로 막혀 있는 것 같았죠. 그러다 우여곡절 끝에 미국으로 가서 처음에는 공사판의 막노동을 했어요. 또 주유소에서 밤새우며 기름 넣는 일도 했고. 그런데 그런저런 일을 하면서도 나 자신에 대한 깊은 신뢰가 있었어요. ‘이렇게 힘들게 살아도 내가 망가지지는 말아야지’라고 거울을 보면서 다짐하곤 했죠. 그리고 실제로 망가진 것 같지 않아요. ‘그래도 난 뭘 해낼걸?’ (웃음) 그런 생각도 했던 것 같고. 그랬기 때문에 고생하면서도 유쾌했어요. 미국에서 그렇게 일하다가도 밤에 학교에 다닌 적이 있는데 나중에 그 학교에서 만난 친구들 얘기가, 날 잘 모를 때는 한국에서 온 돈 많은 집 건달 유학생인 줄 알았대요. 저는 하루 종일 고된 일을 하다가 빠질 때도 있고 갈 때도 있고 겨우겨우 다닌 학교인데. 남에게 어렵게 산다는 식으로 보이기는 싫더라고요. 

자존감이 강하셨던 것 같아요. 

글쎄요. 하여간 제가 주문처럼 ‘나를 믿자’ ‘망가지지 말자’ 그런 얘기하면서 청춘을 보낸 것 같아요. 

정계에서 은퇴하던 때가 생각나는데 좋은 마음으로 내려오시진 않았을 거예요. 그 이후에 폐암 발병 사실도 아신 거고. 만약 그 시간을 계속 보내셨다면 지금껏 모르고 지나갔을 수도 있고 병이 더 번졌을 수도 있었을 것 같습니다. 그 시간이 스스로를 챙기라는 신의 선물이었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정치를 계속하고 있는 상태에서 그렇게 큰 병이 저한테 왔으면 몰랐을 것 같아요. 어쨌든 여러분한테, 또 나라에 폐를 끼칠 뻔했죠. 그 폐가 상당히 작아진 거니까 다행이에요. 그리고 제가 이렇게 더 살게 된 것도 다행이고요. 축구에 ‘추가 시간’이라는 게 있잖아요. 저한테 추가 시간이 주어진 거다, 그렇게 생각하거든요. 그런데 축구에서의 추가 시간은 그냥 널널하게 보내는 것이 아니라 죽기 살기로 마지막 힘을 다 쏟아붓는 시간이에요. ‘근데 나는 그러고 있나?’란 생각이 들어요. 나를 챙기고 우리 아들들과 아내를 챙기고 내 가까운 주변을 챙기는 일, 내 주변에 널려 있었는데도 몰랐던 작은 행복들…. 그런 것을 찾고 배우는 데에 치열하게 살고 싶어요. 

지금 이 순간도 건강 때문에 힘들어하는 분들이 많이 계십니다. 그분들한테 위로가 될 수 있는 말씀 부탁드려요. 

정말 어려운 얘기예요. 병이란 게 착하게 산 사람을 피해 가는 것도 아니고, 옳은 일을 한 사람을 피해 가는 것도 아니에요. 병에 걸린 사람들이 나쁜 사람들이 아니에요. 저를 보면 아시잖아요. 이건 농담입니다만, 어쨌든 병은 수많은 사람들이 걸리고 감당해야 하는 거예요. 대개 암 걸린 분들이 가장 첫 번째로 생각하는 게 ‘왜 하필이면 나지?’라는 것입니다. 그럴 수도 있는 일 중에 하나가 나한테 일어난 것이니까 덤덤하게 받아들이면 좋겠어요. 그리고 온 병은 앓는 수밖에 없어요. 그리고 앓아가면서 약도 쓰고 의사도 만나고 그걸 나아가는 거라고 생각해요. 요즘은 의사들도 “병을 반드시 이기려고 하지 말고 친구처럼 그냥 품고 산다고 생각하는 게 옳다” 그런 말을 하더라고요. 제 경우엔 암세포가 제 몸 안에 많다는 거죠, 지금도. 보통 사람들 몸에도 다 있대요. 그것이 뭐랄까, 집약돼서 덩어리가 안 되는 것 뿐이잖아요? 그러니까 병이라는 것에 대해서 물론 예방하는 노력도 필요하지만 막상 현실로 닥쳤을 때 지나치게 좌절하지 말아야죠. 그럴 수도 있는 일이거든요. 그리고 의연하게 이겨나가려고 노력하는 것이 자기 자신이나 주변 사람들에게 그나마 최선이 아닐까 싶어요.


조수빈 앵커
서울대 언어학과 출신으로 2005년 KBS에 공채 아나운서로 입사해 2008년부터 2012년까지 평일 메인 뉴스 ‘뉴스 9’ 앵커로 활약했다. 현재 채널A 주말 메인 뉴스 프로그램 ‘뉴스A’를 진행하며 ‘조수빈의 마이크’라는 코너를 통해 화제의 인물을 직접 만난다.




기획 김명희 기자 디자인 김영화 사진제공 채널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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