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PEOPLE

#interview #star

정해인에게 일어난 기적

EDITOR 김지영 기자

2019. 09. 26

“기적이 일어났어!” 최근 개봉된 영화 ‘유열의 음악앨범’에서 배우 정해인이 던진 첫마디다. 가는 곳마다 아이돌처럼 팬덤을 몰고 다니는 그는 자신의 삶 자체가 기적의 연속이라 말한다. 그 이유가 뭘까.

배우 정해인(31)을 처음 만난 것은 1년여 전, 안판석 PD가 연출한 드라마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로 스타덤에 오른 직후다. 그 사이 그는 안 PD의 또 다른 작품 ‘봄밤’으로 한층 폭넓은 팬층을 확보하며 아이돌 같은 인기를 누리고 있다. 8월 28일 그의 첫 영화 주연작 ‘유열의 음악앨범’이 개봉된 후 그가 무대 인사를 다니는 극장에는 팬들이 구름떼처럼 몰려들어 그 인기를 실감케 했다. 

‘유열의 음악앨범’은 1994년 ‘유열의 음악앨범’이라는 라디오 프로그램을 매개로 우연히 만난 두 사람, 현우(정해인)와 미수(김고은)가 오랜 시간 엇갈리고 마주하기를 반복하며 서로의 주파수를 맞춰나가는 과정을 그린 레트로 감성의 멜로 영화다. 이 작품에서 정해인은 가장 찬란했지만 더불어 아플 수밖에 없었던 10대와 20대를 거쳐 반듯한 사회인으로 성장한 서른 즈음에 이르기까지를 소화하며 지금껏 볼 수 없었던 매력으로 관객을 사로잡는다. 무엇보다 보는 이들의 마음마저 설레게 한 김고은과의 케미스트리가 압권이다. 

두 사람이 러브라인 상대로 만난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2016년 화제의 드라마 ‘도깨비’에서 정해인은 김고은이 짝사랑하는 야구부 선배 역을 맡은 바 있다. 당시의 짧은 만남을 못내 아쉬워했던 두 사람은 이번 영화를 통해 운명적으로 재회한 후 첫 촬영부터 찰떡같은 케미스트리를 발산했다고 제작진은 전했다. 이 작품의 연출을 맡은 정지우 감독은 두 사람의 연기에 대해 “원래 현우와 미수였던 것처럼 시나리오 속 기적 같은 순간과 감정을 완벽하게 표현해냈다”고 극찬했다. 사랑에 숙맥인 듯하면서도 열정적이고 성격이 까칠한 듯하면서도 다정다감한 현우와 닮은 듯 다른 정해인을 가을로 가는 길목에서 만났다.


영화 ‘유열의 음악앨범’에서 주인공 현우 역으로 열연한 정해인.

영화 ‘유열의 음악앨범’에서 주인공 현우 역으로 열연한 정해인.

‘유열의 음악앨범’을 들어본 적이 있나요. 

그 프로그램이 1994년부터 2007년까지 전파를 탔는데 제가 라디오를 제대로 접한 건 대학에 입학하고 이듬해인 2008년부터예요. 군에서 운전병을 하다 보니 차 안에서 라디오 들을 시간이 많았어요. 그때는 라디오 듣는 게 삶의 낙이었죠. 단절돼 있던 사회와 다시 연결되는 느낌이랄까요. 

이번 영화에 출연하게 된 계기가 뭔가요. 

제가 레트로 감성을 좋아해요. 음악 영화에 레트로 감성이 담겨서 무조건 하고 싶었어요. 평소 호감을 갖고 있던 정지우 감독님, 그리고 ‘도깨비’에서 호흡을 맞췄던 김고은 씨와 함께할 수 있는 기회여서 마다할 이유가 없었어요. 



김고은 씨도 출연 결정에 영향을 미쳤군요. 

‘도깨비’를 촬영하면서 고은 씨에게 좋은 느낌을 받았어요. 신인 시절 고은 씨가 출연한 영화도 많이 봤고요. 고은 씨의 작품을 보면서 언젠가는 나도 저 배우와 영화를 함께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정지우 감독님 덕분에 소원을 이뤘어요. 

정지우 감독에 대해선 어떤 생각을 갖고 있었나요. 

감독님 작품을 예전부터 좋아했어요. 그러다 우연한 미팅 자리에서 감독님을 만났는데 첫마디가 “해인 님”이었어요. 처음에는 그렇게 불리는 게 불편했는데 인간 정해인을 존중해주시려는 나름의 배려라는 걸 알게 됐죠. 감독님은 저뿐 아니라 모든 배우들에게 ‘님’ 자를 붙이시거든요. 이분과 함께한다면 촬영장에서 무척 행복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다른 감독들은 어떻게 부르나요. 

‘해인 씨’라고 부르는 분도 있고 ‘해인아’라고 부르는 분도 있어요. 안판석 PD님 같은 경우는 ‘해인 씨’라고 하다가 “우리 친구하자”며 말을 놓으라고 하셔서 무척 난감했어요. 저희 아버지 연배라 말을 못 놓겠더라고요. 더구나 “판석아”라는 호칭은 도무지 안 나와서 세 번이나 거절하다 네 번째 친구 제의를 수락했죠. 그래도 호칭은 여전히 ‘감독님’이에요. 

출연 결정을 할 때 캐릭터는 고려하지 않았는지요. 

이 작품을 하게 된 데는 글이 주는 힘도 있었지만 캐릭터가 굉장히 중요하게 작용했어요. 동시대 사람은 아니지만 현우의 삶을 대본으로 들여다보면서 대한민국에서 살아가는 청춘들의 고단한 생활을 잘 표현하고 싶은 욕심이 났거든요. 청춘 하면 아름다움, 젊음, 패기 같은 긍정의 키워드만이 아닌 불안함과 우울 같은 단어도 떠오르잖아요. 그 모든 게 현우 캐릭터에 녹아 있어서 이 역할을 너무나도 하고 싶었어요. 

청춘의 불안함이나 우울함을 이해할 만한 경험을 해봤나요. 

제 주위에는 지금도 한 번의 기회를 얻기 위해 전전긍긍하는 친구들이 많아요. 상대적으로 빨리 주연이 되긴 했지만 저도 다른 배우들에 비해 데뷔 시기가 좀 늦은 편이었고요. 학창 시절부터 배우가 되려고 준비한 게 아니라 비연예인 친구들이 대학을 졸업하고 군복무를 마치고 나서 직장을 알아보는 나이인 26세에 연기를 시작했거든요. 그 전에는 많이 불안했어요. 대학교에서 연극을 전공할 때는 배우가 되고 싶어 하는 사람도 많고 오디션 경쟁도 너무 치열해서 ‘내가 과연 살아남을 수 있을까. 이 일이 내게 맞는 걸까. 지금이라도 그만두고 안정된 일을 찾을까’라는 생각으로 머릿속이 복잡했어요. 군대에 있을 때는 더 불안했어요. 특히 시간적으로 여유가 생기는 상병 때는 걱정과 고민이 끊이지 않아 ‘대학을 자퇴하고 다른 일을 할까?’라는 생각까지 했어요. 그러다 병장 때 ‘이왕 시작했으니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끝장을 보자’고 마음을 다잡고 학업 마친 후 26세에 오디션 봐서 지금의 소속사에 들어갔어요. 소속사가 생기면서 불안감을 떨치려고 마인드컨트롤을 계속했고요. 

마인드컨트롤을 하는 나름의 노하우가 있다면. 

이번 영화에도 녹아 있는데 그 노하우는 자존감에 있는 것 같아요. 자존감이 무너지면 마인드컨트롤이 안 통해요. 신인 시절에는 자존감이 떨어질 때 부모님이나 동생, 친구를 찾았어요. 그들에게 응원을 받으면 자존감이 회복되거든요. 지금 제 자존감 지킴이는 팬들이에요. 팬들이 항상 저를 따뜻한 시선과 말로 응원하고 지지해주시니까 부정적인 생각을 상쇄하고도 남을 만큼 긍정의 에너지가 샘솟더라고요. 

최근 소속사인 FNC엔터테인먼트의 주가가 막 오를 때 ‘정해인 효과’라는 이야기가 나와 부담이 됐을 법도 한데요. 

전혀 신경 쓰지 않았어요. 주가에는 관심이 없어요. 제 자존감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것도, 제가 관심을 두는 것도 연기뿐이에요. 


영화 속 첫 대사가 ‘기적이 일어났어’예요. 실제로도 기적 같은 경험을 한 적이 있나요. 

제 인생 자체가 기적의 연속이에요. 수능시험을 치른 날 영화 보고 나오다 연예기획사 관계자로부터 명함을 받았는데 그게 시작이었던 것 같아요. 

한 달 동안 연습해 말도 안 되는 연기로 실기시험을 봐서 방송연예과에 합격한 것도 기적이고, 군대에서 큰 교통사고가 날 뻔했는데 안 죽고 산 것도 기적이고, 엔터테인먼트사의 오디션에 붙은 것도 기적이에요. 이번 영화에서 첫 주연을 맡아 스크린에 제 얼굴이 크게 나가는 것도 기적이고요. 이렇게 인터뷰를 하는 것도 기적이라 생각해요. 모든 게 신기해 늘 감사하게 돼요. 

군복무 중 교통사고로 죽을 뻔했다고요. 

비가 억수로 쏟아지는 날이었어요. 병장 때 상사를 태우고 대전에서 경부고속도로를 타고 달리는데 차가 갑자기 시동이 꺼져 핸들이 안 돌아가는 거예요. 다시 시동을 막 걸고 핸들을 틀어 갓길에 대는데 덤프트럭이 달려왔어요. 그 순간 온몸의 털이 다 서면서 오만 가지 생각이 들었어요. 이제 나는 죽었구나 싶었는데 천운으로 아슬아슬하게 비껴갔어요. 정말 아찔한 경험이었어요. 1초만 늦게 갓길로 뺐어도 큰일 났을 거예요. 바로 부대에 전화해 후속 조치를 했더니 운전병의 모범 대처 사례라며 포상휴가를 주더라고요. 그날 밤 막사에 돌아와 누웠는데 돌아가신 친할아버지가 생각나더라고요. 할아버지가 저를 지켜주신 것 같아요. 나중에 엄마가 그 얘기를 듣고 펑펑 우셨죠. 

1년여 전 인터뷰에서 인생의 나침반 같은 좌우명이 ‘오늘에 충실하자’라고 말했어요. 

지금도 마찬가지예요. 언제 죽을지 모르잖아요. ‘오늘 하루를 정말 치열하게 살아야겠다. 내일은 없다’는 생각이 점점 더 강하게 들어요. 

현재를 충실히 살아가는 방법에 사랑도 포함되나요. 

그럼요. 사랑은 아름다운 거니까요. 제 주변에 연애를 하지 않은 지 오래된 친구들이 있는데 빨리 좀 하면 좋겠어요. 연애가 아니더라도 열정을 쏟을 수 있는 뭔가를 찾으면 좋겠어요. 연애 상대가 꼭 사람일 필요는 없다고 봐요. 자신의 열정을 쏟을 수 있는 그 무엇이 있다면 그것도 사랑이라고 생각해요. 

이상형은 어떤 타입인가요. 

제가 매료되는 스타일은 상대방을 배려하고 존중해주는 사람이에요. 남자든 여자든 상대방을 존중할 줄 아는 사람을 좋아해서 동성 친구들이 다 그런 타입이죠. 상대방의 말을 귀 기울여 들어주거든요. 제가 생각하는 착함의 기준은 잘 웃고 선행을 베푸는 것이 아닌 경청이에요. 남의 말을 성심을 다해 들어주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에요. 

팬덤이 웬만한 아이돌보다 막강하더라고요. 그런 반응이 아직도 낯선가요. 

이제 낯설진 않아요. 팬들의 사랑을 고맙게 받아들이고 있어요. 그래서 예전보다 감사한 분들, 감사해야 할 일이 많아졌어요. 저는 배우를 서비스업으로 여겨요. 관객이나 시청자들에게 사랑을 받은 만큼 연기로 즐거움을 드려야 한다고 생각해요. 저를 위해 시간과 돈을 투자해주시는 거잖아요. 좋은 서비스가 뭔지에 대해 생각을 많이 하는데 연기만 잘해도 무리는 없겠다 싶어 본업에 충실하려고 해요. ‘많은 분들이 왜 나를 사랑해주시고 내가 나오는 영화를 보러 오실까?’라는 본질적인 질문을 제 자신에게 던질 때마다, 그 답은 언제나 ‘연기를 잘해야겠다’로 귀결되더라고요. 

지금까지 연기한 인물 중 평소 성격과 가장 흡사한 캐릭터를 꼽는다면요. 

제가 연기한 모든 캐릭터에 저의 모습이 조금씩 녹아들어 있지만 저를 닮은 캐릭터는 없어요. 원래 제가 사적인 경험이나 캐릭터를 작품에 투영하지 않거든요. 평소에는 잘 흥분하지 않는 차분한 성격이에요. 지금처럼요(웃음). 

영화 속 현우는 미수에게 관심을 보이는 출판사 대표에게 “대표님이 싫다”고 직설적으로 표현하는데, 실제 정해인 씨라면 어떻게 할 것 같나요. 

상황이나 상대에 따라 다르겠지만 제 생각을 분명히 밝혀야 할 경우에는 무례하지 않은 선에서 소신껏 제 감정이나 생각을 표현할 것 같아요. 

자신이 몰입했던 캐릭터에서 잘 헤어나는 편인가요. 

작품을 끝내면 항상 공허함과 외로움이 밀려와요. 캐릭터에 깊이 빠지면 그 외로움을 계속 견뎌야 하더라고요. 그런 후유증을 오래 지니지 않기 위해 촬영장 밖에서는 의식적으로라도 인간 정해인과 배우 정해인을 분리하려고 노력해요. 

차기작이 정해졌나요. 

조금산 작가의 웹툰을 원작으로 한 영화 ‘시동’이 차기작이에요. 촬영은 이미 다 마쳤고 내년 1~2월에 개봉될 예정인데 저의 또 다른 모습을 만나실 수 있을 거예요. 질풍노도의 시기를 겪는 19세 인물을 연기했는데 캐릭터가 거칠어요. 욕도 하고, 담배도 피우고, 오토바이를 타고 질주하는 새로운 남성미를 보여드려요. 

올해 꼭 이루고 싶은 소망은 뭔가요. 

최근 제 동생과 연극하는 친한 형이랑 여행을 다녀오긴 했는데 가족이 다 함께하는 여행은 못 간 지 오래됐어요. 올해가 저물기 전에 부모님을 모시고 가족여행을 하고 싶어요.

디자인 김영화
사진제공 cgv아트하우스



  • 추천 0
  • 댓글 0
  • 목차
  • 공유
댓글 0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