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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과 전문의 김혜남, 파킨슨병이 내게 준 메시지

“고통이 반복되는 나날이지만 제게 주어진 시간을 헛되이 보내지 않으려 합니다”

기획 · 김명희 기자 | 글 · 두경아 자유기고가

입력 2015.06.16 10:07:00

“제 별명은 ‘쓰리아워(3시간) 우먼’이에요.” 정신과 전문의 김혜남 박사는 웃으며 자신을 소개한다. 약을 먹으면 3시간 동안은 괜찮다는 말이다. 14년 전부터 파킨슨병을 앓아오면서도 지금껏 버틸 수 있는 힘은 바로 이런 유쾌함에서 나온다. 몸은 이전보다 불편하지만, 아직 재미있는 것들이 많은 김혜남 박사의 무한 긍정 메시지.
정신과 전문의 김혜남, 파킨슨병이 내게 준 메시지
서울 강남 한복판에 자리 잡은, 정원이 딸린 그림 같은 이층집. 이곳 지하에는 인생의 전환기인 30대에 들어선 젊은이들의 불안을 어루만져준 책 ‘서른 살이 심리학에게 묻다’(2008)로 잘 알려진 정신과 전문의 김혜남(56) 박사만의 공간이 있다. 한쪽에는 각종 운동 기구와 편하게 기대 앉아 책을 읽을 수 있는 소파가 있고 다른 한쪽에는 카페처럼 꾸며놓은 홈 바가 있다. 그는 원산지가 다른 다양한 원두를 갖추고 이곳을 찾는 손님들에게 그날의 기분에 따라 커피를 추천하는데, 김혜남 박사를 만나던 날 추천 커피는 ‘자메이카 블루마운틴’. 선택 즉시 원두는 수동 그라인더에 갈린다. 전동 머신보다 힘은 들지만 정성을 들인 만큼 맛은 좋다. 물이 끓으면, 주전자에 옮겨 담고 온도가 80~90℃가 될 때까지 식힌다. 그러곤 익숙하게 핸드 드립을 한다. 그의 공간이 커피 향으로 가득 차는 순간이다.

“어때요, 와인 같죠?”

그는 마치 가장 잘하는 음식을 내놓고 손님의 반응을 기다리는 셰프 같다. 그런데 커피잔을 든 모습이 좀 불안해 보인다. 사실 원두를 그라인더에 갈고 핸드 드립을 하는 동안에도 그의 몸은 계속 떨리고 있었다.

“약 부작용 때문이에요.”

그는 14년째 파킨슨병을 앓고 있다. 파킨슨병은 도파민이라는 신경 전달 물질을 생산하는 뇌 조직이 손상돼 손발이 떨리고, 근육이 뻣뻣해지며, 몸이 굳고 행동이 느려지는 퇴행성 신경 질환이다. 아직까지 치료제는 없으며, 보통 발병하고 15~17년 정도 지나면 심각한 장애가 나타나거나 사망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는 14년째 이 병과 유쾌하게 살아가고 있으며, 최근에는 ‘오늘 내가 사는 게 재미있는 이유’(갤리온)라는 책도 펴냈다.



인생의 황금기에 찾아온 시련

김혜남 박사는 지금으로부터 14년 전 파킨슨병 진단을 받았다. 그의 나이 마흔둘. 고려대 의대를 졸업하고 국립서울병원에서 12년 동안 정신분석 전문의로 근무하다가 개인 병원을 개업한 지 1년이 채 안 된 시점이었고, 두 아이를 데리고 미국으로 가서 공부를 더 하겠다는 계획도 세우고 있던 차였다. 인생의 황금기에 찾아온 뜻밖의 시련에 그는 마냥 허탈해 할 수밖에 없었다.

“파킨슨병 진단을 받고 거의 한 달 동안 침대에만 누워 있었어요. 병에 대해서 너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미래가 빤히 그려지더군요. 그게 저를 더 우울하게 만들었죠. ‘내가 왜 이런 병에 걸려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고, 현실을 받아들이기가 너무 무섭고 끔찍했어요. 세상이 원망스러웠죠. 그러는 사이 우울증은 더 깊어졌고 이대로 죽는 편이 낫겠다 싶었어요.”

그러다 문득 ‘왜 오지도 않은 미래를 걱정하느라 침대에 누워 오늘을 망쳐야 하는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을 고쳐먹은 그는 다시 병원에 나가 환자들을 만나고, 강의를 하고, 집안일을 하는 일상을 다시 이어갔다. 다행히 걱정했던 것만큼 몸 상태가 나쁘지 않았다. 피곤하면 오른쪽 다리를 조금 끌었고 글씨 쓰는 게 힘에 부치긴 했지만, 무리만 하지 않으면 생활에 큰 지장은 없었다.

“도파민제는 보통 치료 효과가 3년 간다고 하는데, 저는 그 약으로 12년을 버텼어요. 그 시간 동안 다섯 권의 책을 썼고 진료와 강의도 계속했죠. 다행히 치매 현상은 아직까지 나타나지 않고 있고, 우울증도 심하지 않아요.”

특유의 긍정 마인드로 병과 싸우고 있지만 위기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지난해부터는 증상이 갑자기 나빠져 병원 문을 닫아야 했고, 약도 더 효과가 강한 것으로 바꾸어야 했다. 증상이 심각해졌을 때는, 눈앞에 있는 화장실을 가기 위해 한 발짝 떼는 것도 쉽지 않았다.

정신과 전문의 김혜남, 파킨슨병이 내게 준 메시지
“파킨슨병을 앓는 누군가가 그랬어요. 모든 뼈와 살이 잠자리 날개처럼 떨리는데 너무 아프다고. 그냥 이대로 죽어버렸으면 좋겠다고. 그 말을 듣는 순간 눈물이 왈칵 쏟아졌어요. 저 또한 너무 아파서 창문 밖으로 뛰어내려 죽어버릴까 생각한 적이 있었으니까요. 특히 가족들이 모두 잠든 새벽에 아파서 자지도 못하고 그 고통을 참아내야 할 때면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낫지 않을까 싶기도 했죠.”

약 기운이 3~4시간밖에 되지 않고, 정량을 넘어서면 부작용이 생기기 때문에 고통이 오면 그대로 받아들여야 했다. 지난해 요양을 위해 제주도에 내려갔지만 오히려 건강이 악화돼 6개월 만에 다시 서울로 올라와야 했다.

“그때는 걷지도 못하고 기어 다니다시피 했어요. 얇은 이불조차도 무겁게 느껴져 돌아눕지 못할 정도였고, 몸을 움직이지 못하니 욕창이 생길 것 같았어요. 밤에는 땀으로 흠뻑 젖어 옷을 서너 번이나 갈아입어야 했죠. 그때는 이제 끝인가 싶더군요.”

그런데 최악의 순간, 기적이 나타났다. 바닥을 치던 건강이 조금씩 좋아지기 시작한 것이다.

“공기 좋은 제주도에서 요양한 효과가 뒤늦게 나타나나 봐요. 채식 위주의 식사로 체질이 바뀐 것도 영향이 있는 것 같고요. 요즘에는 아침에 일어나면 남편과 ‘감사하며 살자’고 기도해요.”

지금도 고통의 나날을 보내고 있지만, 김혜남 박사는 토마스 모어의 ‘모든 병은 스승이요, 은혜다’라는 말을 인용하며 “고통을 통해서 많은 것을 배웠다”고 말한다.

“제주도에서 요양할 때 한번은 산책을 나갔다가 돌아오는 시간을 놓친 적이 있어요. 약 기운이 떨어져 다리를 질질 끌면서 돌아오다가 한 무리의 관광객과 마주쳤어요. 젊음과 활기가 느껴지는 그들을 부럽게 바라보는데 뒤로 휠체어를 탄 뇌성마비 환자가 환하게 웃으며 지나가더군요. 그 사람을 보는 순간, ‘저 사람은 나를 보고 부러워할 텐데, 지금 나에게 주어진 것들을 감사하지 못하고 한탄하고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러면서 ‘내가 갖고 있는 것에 감사해야겠다’고 결심했죠. 저는 날마다 걸을 수 있도록 해달라는 기도를 하고, 매일 그 기적을 이루고 살아가고 있어요.”

이뿐 아니다. 건강하던 시절에는 보이지 않던 것들을 발견하게 됐다. 그는 이것을 ‘마이크로 월드의 발견’이라고 한다.

“병으로 천천히 걷거나 누워 있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지금껏 보지 못하던 세상을 발견했어요. 세상 구석구석을 바라보며 물방울처럼 아주 작은 것에도 나름의 이치와 아름다움이 있다는 것을 알았죠. 그러면서 물방울 사진을 찍기 시작했어요. 그 사진을 SNS에 올렸더니, 친구들이 ‘우리만 보기 아깝다’고 해서 2년 전에는 전시회도 열었죠.”

병을 얻고 오히려 감사할 것들은 늘었다. 자신이 아직도 팔순의 노모에게 보살핌을 받고 있는 것도 고맙고, 아무 걱정 없이 투병 생활에 전념할 수 있도록 해주는 남편이 고맙고, 별 탈 없이 건강하게 자라준 아이들이 고맙다. 겸손을 배우면서 표정이 부드러워졌고, 단점을 고치려 하기보다는 장점에 집중하는 지혜도 얻었다. 이 모든 것들이 병을 얻기 전에는 모르던 것들이다.

“저는 계속 성장하고 있어요. 10년 후에는 지금보다 성숙해 있겠죠. 병을 얻고 나서 사람이 된 것 같아요. 덜 흔들리고 세상을 여유롭게 포용할 수 있는 힘, 자기 자신도 용서할 수 있는 힘을 얻었죠.”

파킨슨병에 걸리면 신체적인 어려움이나 고통도 문제지만 우울증 같은 정신적인 문제로 더 힘들다고 한다. 그는 정신과 전문의니 다른 환자들보다 쉽게 자신을 조절할 수 있을 것 같지만 김혜남 박사는 그렇지 않다고 한다.

“중이 제 머리 못 깎는다고 하잖아요. 부부싸움을 할 때 남편은 ‘당신이 쓴 책 좀 읽어봐’라고 해요. 그럼 저는 ‘그렇게 살 수 있으면 내가 왜 책을 쓰냐’고 말하죠. 이론적으로 아는 것과 감정적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은 달라요.”

정신과 전문의 김혜남, 파킨슨병이 내게 준 메시지
그가 정신적인 고통을 이겨내게 한 열쇠는 유머다. 김 박사는 “병자라고 늘 우울하게 살기는 싫다”면서 “여전히 농담을 즐기고 사람들과 웃으며 살고 싶다”고 말한다.

“사람들이 제 병에 대해서 알고 어쩔 줄 몰라하면 웃으며 말하죠. ‘제가 예전에는 가진 거라곤 돈하고 외모밖에 없었거든요. 근데 나이 드니까 병하고 빚밖에 안 남았네요.’ 그러면 사람들이 심각한 표정을 풀어요. 음식 값을 계산할 때도 그래요. ‘다리가 불편하니까 제일 좋은 게 뭔줄 아세요? 음식 값을 안 내요. 계산대에 도착하면 이미 다 계산한 뒤더라고요. 그러니 오늘은 제게 살 기회를 주시겠어요?’ 그런 유머를 던지고 나면 제 병이 가볍게 느껴져서 기분이 좋아요.”

김혜남 박사는 투병을 위해 병원을 닫은 후 오로지 자신만의 시간을 갖게 됐다. 30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다. 그동안 그는 아이를 유산하고도 출근을 할 정도였으니, 그가 진료를 놓는 일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슬프기도 하고 한편으로 시원하기도 해요. 진료는 제일 좋아하는 일이고 잘하는 일인데, 하기 싫어서 그만둔 게 아니니까요. 하지만 우선 제가 살아야 했기에 그 상황에서 진료는 사치였죠. 이제는 마음을 비우고 ‘앞으로 뭘 하면서 살까?’ 하는 고민을 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은 즐겁다

요즘 김혜남 박사의 일상은 이렇다. 우선 아침에 일어나면 1시간 이상 운동을 한다. 파킨슨병 환자에게 가장 중요한 건 꾸준히 몸을 움직이며 일정한 리듬을 유지하는 것이다. 운동이 끝난 뒤에는 컴퓨터로 게임을 하거나 책을 읽는다. 점심 약을 먹은 뒤 오후 2시 정도가 되면 컨디션이 가장 좋아진다. 보통 이 시간에는 사람을 만난다. 그가 밖에 나가기보다 지인들이 그의 집으로 찾아오는 경우가 많다. 그러면 그는 홈 바에서 손님을 맞고 커피를 권하며 소소한 즐거움을 나눈다.

고통이 반복되는 나날이지만,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을 헛되이 보내지 않으려 한다. 최근에는 버킷 리스트도 작성했다. 첫 번째는 ‘그림 그리기’다. 초등학교 때부터 그림에 두각을 나타냈고 담임 선생님도 미술을 해보라고 권했지만 사느라 바빠 잊고 있었던 꿈을 다시 꺼낸 것이다. 붓과 캔버스가 아닌, 스마트폰과 터치 펜이지만 그것으로도 충분하다. ‘다른 나라 언어 배우기’도 있다. 현재 중국어를 공부 중이고, 러시아어도 배울 예정이다.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서 사람들에게 대접하고 싶다는 항목도 있고 ‘나에게 상처 준 사람에게 실컷 욕하기’도 있다. 그는 “그동안 너무 고상한 척, 아무렇지 않은 척 살았다”면서 “욕쟁이 할머니처럼 내게 상처 준 사람들을 향해 시원하게 욕 한 번 퍼붓고 싶다”고 말한다. 그는 세상에 모든 책을 읽고 싶다고 했고,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고 그들의 마음을 따뜻하게 만들어줄 책을 더 쓰고 싶다고 했다. ‘오늘 내가 사는 게 재미있는 이유’를 쓴 이유도 “사람들에게 지금 서 있는 곳에서 한 발짝 더 나아갈 용기를 주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언젠가, 화장실을 가야 하는데 발걸음이 안 떨어지는 거예요. 그런데 어렵게 한 발짝 떼고 또 한 발짝 떼니 몇 분에 걸쳐서 화장실에 도착할 수 있었어요. 그 순간의 저처럼, 어려움에 처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사람들에게 조금만 더 힘을 내라고 응원해주고 싶었어요.”

그는 또 “온전히 남편을 혼자 가져본 적이 없다”며 남편과 무인도에서 일주일만 단둘이 살아보고 싶다고 했다. 아직 미혼인 아이들을 결혼시키고 사위와 며느리까지 동반해 크리스마스를 보내고 싶다고도 했다.

“제가 가장 후회되는 건 아이들이 어렸을 때 함께 시간을 많이 보내지 못한 거예요. 그래서 이번 책에 아이들에게 보내는 편지를 넣었어요. 아이들이 그걸 읽고 ‘눈물이 났다’, ‘정말 좋았다’고 하더군요.”

김혜남 박사의 마지막 버킷 리스트는 바로, ‘조용히 온 데로 다시 가기’다. 마지막 항목을 말하는 그의 얼굴이 평온해졌다.

“있는 듯 없는 듯 살다가 가고 싶어요. 무덤도 만들지 않으면 좋겠지만, 아이들이 섭섭할 테니까 (뼛가루는) 나무 밑에 뿌려서 종종 찾아오게 하고 싶어요. 조용히 삶을 잘 마무리하고 떠나고 싶습니다.”

사진 · 조영철 기자

디자인 · 최진이 기자

여성동아 2015년 6월 61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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