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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나거나 웃기거나 허정민

글 · 김유림 기자 | 사진 · 홍중식 기자, MBC tvN 제공

입력 2015.04.15 10:17:00

MBC 드라마 ‘빛나거나 미치거나’에서 맛깔스러운 코믹 연기로 인기를 모으고 있는 허정민. 1995년 방영된 SBS ‘모래시계’에서 주인공 박상원의 아역으로 데뷔해 마침내 주목을 받게 된 그에게 전매특허 코믹 연기 노하우, 생계형 연기자의 명과 암에 대해 들었다.
빛나거나 웃기거나 허정민
MBC 월화드라마 ‘빛나거나 미치거나’에는 웃음 제조기 허정민(33)이 있다. 극 중 신율(오연서)의 오빠이자 무역상 청해상단의 수령 양규달 역을 맡은 그는 정형화된 사극 톤에서 벗어나 촐싹대는 화법과 깨알 애드리브로 극에 활력을 불어넣고 있다. 어디서 많이 본 얼굴이다 싶지만 ‘허정민’이란 이름이 선뜻 기억나지 않는다면 지난해 화제를 모았던 tvN ‘연애 말고 결혼’을 떠올려봐도 좋겠다. 극 중 한그루의 남자친구 훈동 역을 맡은 그는 부잣집 천방지축 아들인 데다 여자에게 이별 통보도 제대로 못하는 지질남의 전형으로 등장해 주목받았다.

그 전에는 신하균과 이민정 주연의 ‘내 연애의 모든 것’이 있었고, 그것으로도 힘들다면 그룹 ‘엠씨더맥스’ 전신 ‘문차일드’에서 건반을 맡았던 미소년 허정민도 있다. 당시 그는 아이돌 밴드답게 예쁘장한 얼굴과 해맑은 미소로 꽤 많은 여성 팬을 이끌었다. 실제로 요즘 함께 연기 호흡을 맞추고 있는 오연서도 문차일드 시절 그의 열렬한 팬이었다고 한다.

“촬영장에서 처음 만난 날 제 팬클럽 회원이었다고 해서 깜짝 놀랐어요. 저한테 팬레터도 보냈는데 그 내용이 잡지에 채택돼서 제가 답장까지 썼다더라고요. 그 말을 듣고 ‘취향 한번 독특하시네요’ 했죠. 하하. (오)연서 씨는 물론이고 청해상단 식구들과 꿍짝이 참 잘 맞아요. 처음에는 안길강 선배님과 붙는 신이 많다고 해서 ‘저 분과 어떻게 대사를 맞추나’ 걱정을 많이 했어요. 인상만 보면 카리스마가 넘치시잖아요(웃음). 그런데 실제로 만나뵈니까 푸근하고 좋은 분이세요. ‘청해상단이 돋보이려면 규달이를 밀어줘야 한다’면서 연기 지도도 해주시고요. 백묘 역으로 나오는 (김)선영 누나도 연극에서 잔뼈가 굵었는데, 촬영 들어가기 전에 ‘내가 다 맞춰줄 테니까 너 하고 싶은 거 다 해봐’ 하면서 애드리브를 부추겨요(웃음). 이분들 덕분에 아침마다 촬영장 가는 길이 그렇게 신날 수가 없어요.”

매회 허정민이 등장했다 하면 배꼽 잡을 준비부터 해야 한다. 캐릭터도 캐릭터지만 재치 만점 애드리브 덕분에 두배로 웃는 기분마저 든다. 드라마 초반, 양규달은 지지부진한 장혁과 오연서의 관계를 안타까워하며 ‘썸타라’라는 표현을 사극식으로 바꿔 “야 너네 그거 해. 내 거인 듯 내거 아닌 내거 같은 너!”라고 말해 시청자들에게 큰 웃음을 안겼다. 당연히 편집됐을 걸로 생각했던 장면이 그대로 전파를 타자 그때부터 허정민은 애드리브에 자신감을 갖게 됐다고 한다. 최근 방송에서는 위기에 처한 청해상단 식구들이 함께 밥을 먹으면서 백묘가 “규달의 장신구만 팔아도 보름은 먹고 살 수 있다”고 말하자, 허정민은 고급 목도리를 손으로 꽉 잡으며 “한정품이라 안 돼. 놓치지 않을 거예요”라고 말해 또 한 번 대형 폭소를 몰고 왔다. 손형석 PD 역시 이제는 그가 대사를 다 한 뒤에도 커트를 외치지 않고 카메라를 계속 돌린다고 한다. 허정민은 “조금 부담스럽기도 하지만, 언제 또 이렇게 마음껏 놀아볼 수 있나 싶어서 열심히 아이디어를 짜고 있다”고 말했다.

애드리브는 나의 힘



빛나거나 웃기거나 허정민

MBC ‘빛나거나 미치거나’에서 코믹 애드리브로 인기를 얻고 있는 허정민. 오른쪽 사진은 지난해 출연한 tvN ‘연애 말고 결혼’의 한 장면.

지금이야 자신감 넘치게 애드리브를 날리지만, 처음부터 이런 반응을 예상하진 못했다고 한다. 어떤 캐릭터인지도 모른 채 PD와 첫 미팅을 가진 그는 몇 마디 나누지도 않은 상태에서 바로 가발을 맞추는 등 그 자리에서 출연을 확정지었다. 이날 손 PD는 “‘연애 말고 결혼’ 잘 봤다. 이번에도 비슷한 캐릭터라 미안하지만 그때처럼 해주면 좋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배역을 맡겨주셨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했고, 배역에 대한 기대는 하지도 않았어요. 사극이라 출연자도 많으니 ‘한 회에 한 신이나 나올까’ 싶었죠. 그런데 막상 촬영에 들어가고 깜짝 놀랐어요. 한동안 이런 행운이 찾아왔다는 게 믿기지 않았어요. 또 사극을 하면 몸 고생이 심하다고 들었는데, 다행히 저는 부잣집 아들로 나와 입고 있는 옷도 좋고, 추운 날씨였지만 고생을 많이 안 했어요(웃음).”

손형석 PD의 말대로 허정민은 지난해 ‘연애 말고 결혼’에 출연하면서 연기자로서 한 단계 도약할 수 있는 발판을 만들었다. 그는 인터뷰 중 자신을 캐스팅해준 ‘연애 말고 결혼’의 송현욱 PD에게 고마운 마음을 표했다. 2006년 KBS 아침드라마 ‘그 여자의 선택’에서 처음 허정민과 인연을 맺은 송 PD는 그가 실의에 빠져 있을 때마다 손을 내밀어준 은인이라고 한다. 2011년 허정민이 군 제대 후 미래가 보이지 않는 현실에 고뇌하고 있을 때 KBS 드라마스페셜 ‘82년생 지훈이’의 주연으로 허정민을 발탁한 이도 송 PD다. 현재 송현욱 PD가 연출 중인 드라마 tvN ‘슈퍼대디 열’에 허정민이 카메오로 등장한 것도 그동안 쌓인 의리 때문.

“군대 제대하고 뭘 하며 먹고살아야 하나 고민이 많던 시기였는데, 어느 날 송현욱 감독님이 저를 강화도 바닷가로 데리고 가셨어요. 술을 마시면서 ‘정민아, 요즘 너의 심리 상태는 어떻니?’ 하고 물어보시기에 ‘일도 안 들어오고 너무 힘들다. 연기를 계속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며 마음속에 있는 얘기들을 다 털어놨어요. 그리고 2주 뒤 한 영화 오디션을 보고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감독님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는데, ‘대본 보냈으니까 한번 읽어봐라’ 하시더라고요. 그때만 해도 작은 배역 하나 주셨나 싶었는데 집에 돌아와 메일을 열어보고는 왈칵 눈물이 났어요. ‘82년생 지훈이’ 주인공을 주신 거예요. 88만원 세대를 위로하는 작품이었는데, 지금 제가 처해 있는 현실과도 비슷했고, 저의 그런 처절함이 연기에 잘 묻어날 거라 생각했다고 하시더라고요.”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를 기용한 송현욱 PD에 대한 보답으로 그는 어느 때보다 열정적으로 연기에 임했다고 한다. 일주일간 이어진 촬영에서 제대로 잠을 잔 날이 거의 없을 정도로 밤새 한 장면 한 장면을 떠올리며 캐릭터를 연구했다고. 허정민은 “그때 처음으로 역할을 분석하고 고민하는 능력을 키운 것 같다”고 말한다.

빛나거나 웃기거나 허정민
생계를 위해 뛰어든 연극판

1995년, 13세 나이에 SBS 드라마 ‘모래시계’에서 박상원의 아역을 맡아 연기자로 데뷔한 그는 이후 이렇다 할 만한 작품을 만나지 못하면서 무명의 시간을 보냈다. 그러면서 경제적 어려움도 겪었다. 어려서 부모의 이혼으로 어머니와 단둘이 산 허정민은 나이가 들수록 어머니 부양에 대한 책임감이 커져갔다고 한다. 그런 반면 대학(단국대 연극영화과) 졸업 후에도 자리를 잡지 못한 채 20대 후반에 다다르자 우울증과 알코올 의존증을 앓기도 했다.

“어느 날 갑자기 일이 끊겼는데 갈 데가 없고, 만날 사람이 없다는 것, 아무도 나를 찾지 않는다는 게 굉장히 무섭게 느껴지더라고요. 그때부터 집에서 술을 마시기 시작했어요. 밤새 마셔도 취하지 않더라고요. 그러다 문득 이렇게 살면 안 되겠다 싶어서 공익근무요원으로 군대에 갔는데 초등학교로 배정을 받는 바람에 인생이 확 달라졌어요. 맑고 순진한 아이들과 생활하면서 내가 그동안 ‘쓰레기처럼 살았구나’ 하는 반성을 했죠. 선생님을 따라 과학 실험 수업에도 참가했는데, 다음 날 아이들에게 술 냄새 풍기는 게 싫어서 퇴근 후 술도 마시지 않았어요. 그때가 제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기가 아니었나 싶어요.”

목숨 걸고 연극판에 뛰어든 것도 그때 이후다. 흔히 연극배우는 가난하다고 하지만, 그는 밥벌이 수단으로 연극을 택했고 밤낮없이 대학로를 전전했다. 그야말로 생계형 배우의 길을 택한 그는 회당 개런티를 받다 보니 여러 작품에 동시 출연해 하루에 4번 무대에 오른 적도 있다. 그동안 그가 출연한 작품은 ‘뉴보잉보잉’ ‘S다이어리’ ‘수상한 흥신소’ ‘담배가게 아가씨’ 등 상업극 위주였는데 그 안에서 관객 호응을 살피고 재미 요소를 뽑아내는 법을 자연스럽게 배웠다고 한다. 허정민은 “예술성 있는 작품을 많이 못했다는 아쉬움도 있지만 상업극을 통해 배운 것이 훨씬 많다. 훈동이나 양규달의 유머 코드도 연극에서 많이 뽑아왔다”며 웃었다.

“연극을 하면 관객의 반응이 바로바로 오기 때문에 긴장할 수밖에 없어요. 공연이 끝나면 늘 오늘 공연은 뭐가 좋았고 뭐가 문제였는지, 더 재밌게 하려면 어떻게 하는 게 좋겠다는 회의를 해요. 요즘도 연극하는 친구들과 자주 만나 술을 마시는데, 그들이 저보고 그래요. ‘요즘 드라마에서 우리 노하우 다 갖다 쓴다’고요(웃음). 근데 그 말이 사실이에요. 하하. 연극이 없었다면 지금의 저도 없어요.”

빛나거나 웃기거나 허정민

허정민의 웃음은 연극과 인생으로 다져진 내공에서 나온다.

‘지루하지 않은’ 배우를 꿈꾸다

배우로서 그 어느 때보다 환한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는 요즘 그는 일을 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함을 느낀다. “유명 스타가 되지는 못하더라도 죽을 때까지 연기만 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하다”는 그의 말이 가식처럼 들리지 않는다.

“힘든 시기를 겪어보니까 아무리 작은 배역이라도 그 소중함을 알겠어요. 사실 어릴 때는 ‘그냥 한 신 때우지’ 하는 생각으로 촬영장에 간 적도 있어요. 오로지 돈벌이 수단으로 연기를 대했던 거죠. 물론 유명해져서 돈도 많이 벌면 좋겠지만 그렇지 못하더라도 연기를 계속할 수 있으면 좋겠어요. 저도 안길강 선배님처럼 존재감 확실하고, 누구에게든 ‘연기 하나는 믿고 맡길 수 있다’는 말을 들을 수 있으면 좋겠어요.”

현재 그는 서울 대학로에서 홀로 자취 중이다. 군 제대 후 본격적으로 연극을 하면서 경기도 파주 집에서 나와 독립했다. 처음에는 혼자 사는 게 쓸쓸하기도 했지만, 나이가 들면서 살림에 재미가 붙고, 누군가의 간섭을 받지 않는 생활이 편하게 느껴진다고 한다. 연애에도 도통 관심이 없다고 하니, 혹시 초식남이 아닐까 싶다.

“하하. 그러고 보니 정말 초식남이네요. 사실 결혼에 대한 환상이 거의 없어요. 부모님도 가끔 여자친구는 있냐고 물어보시는데, 없다고 하면 ‘누구나 결혼을 하는 건 아니니 너 좋을 대로 해라’ 그러세요(웃음). 연애를 하도 오랫동안 쉬어서 이제는 어떻게 연애를 하는 건지도 잘 모르겠어요(웃음). 이러다 운명 같은 사람이 나타나면 생각이 또 바뀌겠죠?”

아직은 일에 몰두하고 싶다는 그의 최종 목표는 ‘지루하지 않은 배우’가 되는 것이다. 장난기 가득한 모습 때문에 대학 시절 교수로부터 “너는 절대로 배우가 될 수 없다”는 충격적인 말을 듣기도 했지만 결국은 그런 장난기가 지금의 허정민을 만들었다.

“할리우드 배우 아담 샌들러처럼 많은 사람들에게 웃음을 주는 연기자가 되고 싶어요. 대중이 원하는 제 모습도 그렇기를 바라고요. 아직은 제가 누구인지 모르는 분이 더 많지만,시종일관 같은 모습으로 열심히 하다 보면 언젠가는 눈길 한번 주시지 않을까요(웃음)?”

디자인 · 김수미

여성동아 2015년 4월 61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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