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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왔다! 장보리’ 도씨 황영희의 반전 인생

“로또 맞은 기분, 20년간 다양한 직업 전전하며 사람 공부한 것이 연기 밑천”

글·두경아 자유기고가|사진·조영철 기자

2014. 12. 16

걸쭉한 사투리와 뽀글뽀글 파마가 트레이드마크였던 ‘보리 어매 도씨’ 황영희는 어디로 간 것일까? 20년 무명생활 끝에 ‘왔다! 장보리’로 인생의 반전을 맞은 ‘떴다! 황영희’ 이야기.

‘왔다! 장보리’ 도씨 황영희의 반전 인생
“예뻐서 깜짝 놀랐어요!”

배우 황영희(45)가 자신을 두고 한 말이다. 그는 MBC 드라마 ‘미스터백’의 첫 방송을 모니터링하다가 자신의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다고 한다. 드라마 속에서 재벌가 며느리 ‘이인자’역을 맡아 ‘왔다! 장보리’에서의 뽀글뽀글 파마에 펑퍼짐한 ‘몸뻬’ 분장을 걷어냈더니, 자신도 미처 몰랐던 전혀 다른 모습으로 다시 태어났다는 것이다.

“방송에서 그 정도 규모의 돈 많은 사모님으로 나오기는 처음이에요. 촬영이 끝나면 화장을 지우기 전 거울을 한참 들여다보죠(웃음). 변화를 준다는 건 설레는 일이에요. 사실 ‘도씨’가 원래 얼굴이고, ‘이인자’는 만들어진 모습이거든요. 평소에는 비비크림 하나 바르고 다니는 정도고요. 그래서 ‘도씨’가 편해요. 지금은 대기할 때 헤어스타일이 망가질까 봐 맘대로 눕지도 못하거든요.”

몇 달 사이 스타일만 달라진 게 아니다. 황영희는 ‘왔다! 장보리’ 한 편으로 지난 20년간의 무명 생활을 청산했다. 드라마가 최고 시청률 37%를 기록한 덕분에 사람들은 배우 황영희의 이름은 몰라도, ‘보리 어매(엄마) 도씨’라고 하면 알 정도가 됐다.

“떴다고요? 사실 잘 몰랐어요. 얼마 전 드라마 ‘제왕의 딸 수백향’ 팀 사람들과 저녁을 먹는데 ‘떴다’고 해서 제가 ‘뭐가 떠요?’ 했더니, ‘택시(tvN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하면 뜬 거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혹시나 사람들이 알아보면 불편할까 봐 일부러 화장도 안하고 모자 쓰고 다녔는데도 그래도 다들 저인 줄 아시더라고요. 반대로 지금처럼 예쁘게 하고 나오면 아무도 못 알아봐요(웃음).”



‘도씨’, 내 어머니와 비슷해

황영희는 ‘왔다! 장보리’에서 주인공 못지않게 화제를 모은 ‘신 스틸러’였다. 길을 다닐 때마다 ‘보리 좀 그만 못살게 굴어~’하는 도씨에 대한 원망이 그녀에겐 칭찬으로 들렸다고.

“제가 들었던 말 중 ‘도씨가 울 때 같이 울었다’는 말이 가장 좋았어요. ‘왜 우는지 모르고 따라 울었다’는 분도 계셨는데, 제 연기가 마음으로 전해졌다는 느낌? 그게 제 연기의 목표였거든요. 사실 도씨는 우리 엄마와 비슷해서 표현하는 게 어렵지 않았어요. 인간 본연의 모습, 걸러지지 않고 모성에 충실한 보통 어머니의 모습이죠. 도씨가 보리를 많이 때렸다고 하지만 사실 우리 어렸을 때 정말 많이 맞고 자랐잖아요. 그걸 생각하면 이상할 것도 없어요.”

황영희는 연극 무대에서 20년 동안 활동해온 베테랑 연기자다. 드라마는 2008년 ‘베토벤 바이러스’를 시작으로 ‘파스타’ ‘마이 프린세스’ ‘내 마음이 들리니’ 등에 출연했다. 연극에 비해 드라마 출연작은 그리 많지 않으나, 짧은 시간 내에 황영희만의 캐릭터를 구축해냈다.

“저는 도씨 같은 캐릭터가 편해요. 약간 제정신 아닌 사람이라고 해야 하나요?(웃음) 드라마 속 캐릭터는 대부분 선악으로 나뉘는데, 사실 리얼리티가 떨어지죠. 도씨는 현실적이면서도 잘 들여다보면 나쁘지만은 않은 인물이에요. 그래서 더 정이 갔죠.”

‘왔다! 장보리’ 도씨 황영희의 반전 인생
황영희는 1969년 생으로, 신애라 하희라 유호정 엄정화 등과 동갑이다. 이들 배우들이 어린 나이에 연예계에 뛰어들어 일찌감치 빅스타 반열에 올라선 반면 황영희는 우여곡절이 많았다. 특히 배우 활동을 하며 생계를 위해 건강식품 판매, 부동산 중개 등 다양한 직업을 병행했다.

“호텔에서 1년 정도 일했지만 적성에 맞지 않아 그만뒀어요. 부동산중개소에서 일하면서 서울 홍대 앞에 있는 상가 매매를 성사시켜 한 번에 1천8백만원을 벌기도 했는데, 그땐 정말 운이 좋았죠. 참치 캔 공장에서도 일해봤어요. 목포에서는 학교를 다니면서 공장에서 박스 접는 아르바이트를 했죠. 캔이 우르르 떨어지는 소리를 견디지 못해 그동안 일한 돈도 안 받겠다고 하고 나왔지만요.”

서울 대학로에서 주점도 해봤다. 지인과 동업을 했는데 장사 수완이 좋았는지 제법 잘됐다고 한다.

“가게 이름이 ‘무명’이었는데, 막걸리부터 맥주, 소주 다 팔았어요. 그러다 동업하던 사람이 잠적을 하면서 혼자 꾸려가야 했어요. 장사는 잘됐는데, 하기 싫더라고요. 5개월 만에 접었죠.”

그는 수많은 직업을 전전했지만 지난 시간이 모두 헛된 건 아니다. 많은 직업을 거쳐오며, 돈으로는 살 수 없는 경험을 얻었다.

“많은 일을 하면서 다양한 사람을 만났어요. 덕분에 배우에겐 자산인 사람 공부를 할 수 있었죠. 요즘은 연기만 하다 보니 바닥이 드러난 느낌이에요. 다양한 사람을 만나며 사람을 들여다보고, 시장도 가고, 터미널도 가고, 술집이나 클럽도 가고 해야 하는데….”

황영희는 ‘택시’ 녹화 도중 눈물을 펑펑 쏟기도 했다. 동료 배우 안내상이 동영상으로 전해온 메시지, “앞으로 20, 30년은 영희의 시대다”라는 말을 들은 후였다.

“방송 보면 연예인들이 예능 프로그램에 나와서 울잖아요. 그걸 볼 때마다 ‘(저게) 뭐니?’ 그랬는데, 제가 그러고 있더라고요. 열심히 말하는데 뭔가 털리는 기분이고…. 그런데 그 시간을 통해 제 지난날을 되짚어봤던 것 같아요. 그러다 녹화 마지막에 선후배들의 메시지를 보는데 울컥한 거예요.”

어떤 시간이 그를 그렇게 울컥하게 한 것일까? 질문을 던지자, 순간 정적이 흐르고 다시 눈시울이 붉어졌다.

“잠깐…, 쉬었다 하죠. 미쳤어, 정말. 창피해 죽겠어. 시도 때도 없이 눈물이 나오네.”

재빨리 눈을 깜빡여봐도 소용없는 노릇이었다. 공들여 화장한 눈에는 어느새 눈물이 번졌다. 그는 크게 숨을 내리쉬며 진정한 뒤에야 인터뷰를 이어갈 수 있었다.

“지나온 길을 돌아보면 제 자신에게 인색했던 것 같아요. 가끔은 스스로에게 위로도 해줘야 하잖아요. 계속 채찍질만 해왔죠. 그런데 그날 처음으로 제 자신에게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수고했다’고요.”

오랜 무명 시간을 지내온 사람들은 대개 고생했던 지난날을 떠올리며 눈물을 흘리기 마련이다. 그러나 황영희는 지난 시간을 되짚으며 “힘들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오히려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고 살아온 행복한 시간이었다”고 회상한다. 역설적이게도 ‘행복한 시간을 살고 있다’는 생각 때문에 자신에게 혹독했다.

“사람들은 어찌 됐든 조금씩 가족에게 희생하고 살잖아요. 저는 주변 사람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하고 싶은 것만 하면서 살아왔어요. 6개월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돈을 벌고, 나머지 6개월은 연극을 했죠. 일할 때는 돈 버는 재미가 있었고, 연극할 때는 휴식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좋은 시간이었죠. 나를 위해 일을 하고, 내가 하고 싶은 걸 했기 때문에 힘들지는 않았어요. 그런 생각에 가끔 몸과 마음이 아플 때도 맘껏 아파하지 못할 정도로 제 자신에게 냉혹했죠.”

부모의 반대로 접었던 연기자의 꿈, 끝내 포기 못해

‘왔다! 장보리’ 도씨 황영희의 반전 인생
황영희는 스스로를 “답답한 성격이고 머리가 좋지 않은 것 같다”고 평한다. “너무 겸손한 것 아니냐”고 물으니, “그 덕분에 내 주변에 이해심이 많은 좋은 사람들만 있다”고 자랑한다. 그가 말하는 좋은 사람들은 연극판에서 활동해온 선후배로 지금은 승승장구하고 있는 이성민, 진경, 엄효섭, 윤제문 등이다. 모두 그에게는 멘토 같은 존재다.

“연기하다가 잘 안 풀리면 동료들에게 물어봐요. 한번은 윤제문 씨에게 ‘현장에 나가면 떨려. 너는 어떻게 극복했니?’라고 물었더니 ‘현장에 일찍 가서 소리도 좀 지르고 똘아이 짓을 했다’고 해요(웃음). 현장에서 움직이면서 적응하는 시간을 갖는 거죠. 진경은 저보다 어리지만 정말 속 깊은 친구예요. 의리도 있고 지혜롭죠. 성민 오빠는 정말 잘됐죠? 저는 오빠가 이렇게 될지 알고 있었어요.”

황영희는 어린 시절부터 연기자의 꿈을 키웠다. 단지 ‘심심해서’였다.

“제가 늦둥이거든요. 위로 오빠만 셋 있는데 나이 차가 많이 나서 지금도 저를 어리게 볼 정도예요. 내성적인 탓에 친구도 없어서 집에서 혼자 보내는 시간이 많았어요. 그때 MBC 라디오 드라마, 김자옥의 ‘사랑의 계절’을 열심히 들었거든요. 내용은 날마다 혹은 주마다 바뀌었지만 여자 주인공은 계속 김자옥 씨였어요. 그 드라마를 들으며 배우의 꿈을 꾸기 시작했어요.”

그가 본격적으로 달라지며 끼를 발산하기 시작한 건 중·고등학교 시절부터였다.

“고등학교 다닐 때는 손에서 마이크를 놓지 않았어요. 소풍 가면 앞에 나가 사회를 봤죠. 원래 성격은 내성적이었지만, 배우가 되기 위해 스스로를 개발했던 거죠. 속으로는 떨면서도 ‘내가 꼭 해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했어요.”

연기는 고등학교 때부터 시작했다. 고향인 목포에 있던 극단에 들어가 연기를 배웠고, 당시 서울예대 연극영화과에 지원해 합격까지 했지만 부모의 반대로 포기해야 했다. 서울에 올라와 호텔리어로 1년 정도 일하다 그만두고 다시 연극영화과 시험을 쳤지만 실패했다. 결국 목포로 돌아가 부모가 원하는 유아교육과에 입학하며 평범한 삶을 살려고 했지만, 꿈은 접을 수 없었던 모양이다. 서울로 올라와 극단에 들어갔고, 그때부터 ‘6개월 알바, 6개월 연극’ 생활이 시작됐다.

“어머니는 제가 배우 하는 걸 심하게 반대하셨어요. 그런데 이 드라마가 잘되니까 반대했던 사실을 다 잊으신 것 같아요. 다니시는 교회에서 사람들이 어머니에게 ‘딸 연기 잘 보고 있다’고 하니까 그렇게 좋아하실 수가 없어요. ‘여기저기서 밥 사라고 난리’라기에 그것 때문에 피곤하면 교회를 옮기라고 했더니 펄쩍 뛰시더라고요.”

돈 모아서 어머니 아파트 사드리고 싶어

인기를 얻고 나니 여기저기서 찾는 곳이 많아졌다. ‘미스터백’ 외에도 MBC드라마넷 드라마 ‘스웨덴 세탁소’에 출연하며, 연극 ‘민들레 바람 되어’(수현재씨어터, 12월 12일~2015년 3월 1일) 무대에도 오른다. 그는 요즘 일상이 “로또 맞은 것 같다”고 한다. 그렇다면 경제적으로도 나아졌을까?

“앞으로 윤택해질지 모르겠지만, 아직은 멀었어요. 월세 살고 있는데, 앞으로는 전세로 옮기고 싶어요. 그 전에 어머니 집을 먼저 사드렸으면 해요. 연세 드신 분들은 아파트가 편하잖아요. 어머니 연세가 있으시니 마음이 급해지네요.”

사십대 중반인 그는 아직 싱글이고, 인연을 기다리는 중이다.

“저는 항상 누구와 사랑에 빠질까 찾곤 하는데 그럴 만한 사람은 만나지 못했어요. 연애하고 싶어요. 그런데 지금도 좋기 때문에 누가 연애가 아닌 결혼을 하자고 하면 생각을 해봐야 해요.”

황영희는 그동안 버라이어티한 삶을 살아오며 여러 캐릭터를 연기할 수 있는 잔근육을 키워왔다. 도전해보고 싶은 연기가 있는지 물으니 “액션”이라고 답한다.

“예전에 연극 ‘목란언니’에서 룸살롱 마담 역을 맡아 어이없는 액션 연기를 했는데 재미있더라고요. 영화 ‘마더’에서 김혜자 선배님 뺨을 때리는 장면을 연기할 때도 카타르시스가 느껴지는 거예요. 제 안에 폭력성이 있는 걸까요?(웃음) 여자 두목 같은 캐릭터를 연기하고 싶은데, 너무 진지하지 않게 코믹으로 가면 좋겠어요. 제가 진지하게 해도 웃기겠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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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일리스트·정경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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