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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눔의 실천, 조수호 회장 아내 양현재단 최은영 이사장

“나눔 정신은 따뜻했던 남편이 남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선물입니다”

글·김명희 기자|사진·박해윤 기자, 양현재단 제공

입력 2014.11.14 10:49:00

조수호 한진해운 회장이 세상을 떠난 지 8년. 병상에서 다시 일어나기 힘들다는 사실을 예감한 고인은 생의 끝자락에서 사회 공헌을 결심하며 재단을 설립했다. 남편의 유지를 이어, 도움이 필요한 곳곳에 따스한 손길을 내밀고 있는 양현재단 최은영 이사장을 만났다.
나눔의 실천, 조수호 회장 아내 양현재단 최은영 이사장
양현재단 최은영(52) 이사장을 처음 만난 것은 지난 9월 초 ‘키키 프로그램’ 론칭 행사에서였다. IVI(국제백신연구소)가 주관하는 키키는 어린이들에게 공중보건 교육을 하는 동시에 용돈을 모아 전염병으로 고통 받는 저개발국 아이들을 도울 수 있도록 고안된 기부 및 교육 프로그램이다. 최은영 이사장은 고 조수호 한진해운 회장의 아내다. 조중훈 한진그룹 창업주의 셋째 아들인 조수호 회장은 3년간 식도암으로 투병하던 끝에 지난 2006년, 5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양현재단은 2006년 고 조수호 회장이 사망하기 직전 설립한 공익 재단이다. 병상에서 마지막을 예감한 고인은 사재를 출연해 재단을 설립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양현(洋賢)’이라는 이름은, 이른 나이에 세상을 뜬 사위가 안쓰러웠던 장인이 고인의 사후에 지어온 호다.

최은영 이사장은 남편의 유지를 이어받아 8년째 양현재단을 이끌어오고 있다. 키키 프로그램도 양현재단이 후원하는 사업 중 하나다. 유수홀딩스(과거 한진해운홀딩스)의 대표이기도 한 최은영 이사장은 좀처럼 인터뷰를 하지 않는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재단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싶다고 하자 흔쾌히 응했다. ‘선행은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말도 있지만, 요즘은 꼭 그렇지만도 않다. 널리 알려질수록 취지에 공감하고 동참하는 사람도 많아진다. 루게릭 환자들을 돕기 위한 페이스북 캠페인 아이스 버킷 챌린지가 대표적이다. 그렇게 한 달여 후에 서울 북촌 한옥마을에 자리 잡은 양현재단에 초대받았다.

은퇴 후 함께 봉사활동 하자던 남편 조수호 회장

가회동 주민센터 맞은편, 족히 몇 백 년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좁은 골목과 담장을 따라 올라가다 보니 양현재단이라는 간판을 달고 있는 한옥이 나왔다. 대문을 열고 들어서자 깨끗하게 비질이 되어 있는 마당이 눈에 들어온다. 사랑방과 건넌방, 그 둘을 잇는 마루로 구성된 건물은 소박하면서 정겨웠다. 골목을 얼마 올라오지 않은 것 같은데 창밖으로 나지막이 이웃집 지붕들이 내다보인다. 끝도 없이 이어진 그 모습이 마치 잔잔한 물결 같다. ‘큰 바다같이 넓고 어진 마음으로 이웃과 더불어 산다’는 양현재단의 설립 취지와 잘 어울리는 공간이다.

사업가들은 기업을 운영하다 보면 어쩔 수 없이 구설에 휘말리기도 하고 어디선가는 싫은 소리도 듣기 마련이지만 조수호 회장은 달랐다. 그는 부하 직원들에게도 늘 존댓말을 사용했다. 최은영 이사장은 남편 사후 추모 글에서 ‘조 회장은 길을 가다가도 적절치 않은 장소에 한진 컨테이너가 놓여 있는 걸 보면 종이를 꺼내 메모했고, 태풍이 지나가는 곳에 배가 뜨는 스케줄이 없는지 매일 챙기는 분이었다’ ‘한번은 남편이 저녁에 식사도 안 하고 우울하게 있기에 이유를 물었더니, 아침 출근 때 인사하는 직원이 있어 뒤를 돌아봤더니 내일이면 회사를 나가야 하는 사람이었다. 내가 사람을 평가하고 이래라저래라 할 능력이나 있는지 모르겠다며 눈물을 글썽였다’고 적었다.



▼ 생전 조수호 회장님에 대해선 인간적이었다는 평가가 많더군요. 어떤 분이셨나요.

유치원 때 별명이 ‘영국 신사’였대요. 시어머니 말씀으론 어릴 때부터 과묵하고 젠틀했다고 하더라고요. 그런 성정 덕분에 생전 다른 사람을 배려하고, 좋은 일을 많이 했어요. 요즘도 예전에 남편을 알았다는 분들을 만나면 ‘참 좋은 분이었다’는 말씀을 많이 듣는데, 그럴 땐 남편에게 고마운 생각이 들어요. 오래전부터 은퇴하면 사회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하자고 저와 이야기를 많이 나눴죠.

나눔의 실천, 조수호 회장 아내 양현재단 최은영 이사장
▼ 양현재단의 활동 내용을 보면 주로 어린이와 환자들에 대한 지원이 많더군요.

남편이 돌아가면서 재단에 세 가지 숙제를 남겼어요. 해운 분야에 애정이 많아 해운 물류 분야 연구 지원을 하면 좋겠다, 본인이 너무 아팠기 때문에 어린이나 난치병 환자들을 도우면 좋겠다, 그리고 미술 분야를 지원하고 싶다고요. 그림 그리는 걸 좋아했거든요. 저와 재단 이사회가 그 숙제를 하나씩 풀어나가고 있죠.

양현재단이 하는 일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난치성 질환 치료 분야의 전문 인력 양성을 위한 인재 육성 프로그램, 소아암 및 발달장애 아동의 치유와 재활을 돕는 미술 치료 교실, 소아암 어린이들의 공포를 덜고 치료 의지를 북돋는 아이패드용 애플리케이션 개발 및 보급, 소아암 환자 부모들을 위한 소프트웨어인 소아암 수첩 개발, 선원 자녀 대상 장학금 지원, 해양과 관련된 연구를 하는 기관이나 단체 지원 등 다양하다. 이외에도 양현재단 후원회는 매년 보육원과 병원 등을 찾아가 소외되거나 아픈 이들이 잠시나마 시름을 내려놓고 즐거운 시간을 가질 수 있도록 하고 있다.

국적이나 장르 구분 없이 자신만의 확고한 예술 세계를 확립한 중견 예술가에게 수여하는 양현미술상은 올해 8회 수상자를 배출했다. 그동안 우리나라 미술가들이 외국에서 상을 받아오는 경우는 많았지만 세계를 향해 문을 활짝 열어놓은 미술상은 양현미술상이 처음이다. 올해는 태국 영화감독이자 설치·영상 작가인 아피찻퐁 위라세타쿤 씨가 영예의 주인공이 됐다. 수상자에게는 1억원의 상금과 함께 작가가 원하는 시기(수상 후 3년 이내)에 세계 유명 미술관에서 전시회를 개최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 양현재단의 기부와 나눔에 어떤 원칙이 있나요.

적당하게 생색내는 것보다 꼭 필요한 곳에 전달하려고 해요. 그리고 봉사와 나눔의 방식도 기왕이면 창의적이어서 동참하는 사람들이 재미와 보람을 느끼면 좋겠고요. 예를 들어 장기 난치성 질환으로 투병하느라 학교를 가지 못하는 아이들에게 사이버 교육을 제공하는 ‘꿈사랑학교’라는 곳을 지원하고 있는데, 그런 곳은 세계에서 유일무이하다고 하더라고요. 저희는 그것도 좋은 사업이라고 생각했는데, 어떤 분이 ‘아픈 아이들에게 공부를 가르치는 건 우리나라밖에 없을 것’이라고 하시더라고요. 그 말도 와 닿았어요. 그럼에도 아이들이 완쾌된 후 학교나 사회에 다시 적응하는 것도 중요하니 프로그램을 운영하시는 분께 아이들이 스트레스를 받지 않도록 최대한 재미있게 수업을 진행해달라고 부탁드렸죠.

▼ 미술상은 이미 커리어가 완성된 작가에게 수여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신선합니다.

미술 분야의 상은 저마다 개성이 있어요. 신진 작가에게 준다거나, 철과 관련된 작품을 대상으로 한다거나. 양현미술상은 지금은 일반인에게 널리 알려지지 않았지만 이 상을 받음으로써 한 단계 더 성장할 수 있는 분을 발굴해 지원하자는 취지로 시작했어요. 3회 때 수상한 설치미술가 이주요 작가가 지난해 네덜란드에서 전시를 마치고 여기로 찾아와 양현미술상을 받고 나서 자신의 미술 세계가 더 넓어졌다며 감사 인사를 하는데 제가 다 뿌듯하더라고요.

남편에게 더 잘해주지 못한 아쉬움, 두 딸과 함께하는 봉사 활동

예전에 한 언론은 최은영 이사장에 대해 ‘여성적인 외모와 달리, 사교적인 성격에 대장부 같은 면모도 있다’고 평했다. 이 이야기를 꺼내자, 최 이사장은 여성적인 것과 사교적인 것이 왜 상반된 것인지 모르겠다며 웃었다. 기사를 쓴 기자는 그의 서글서글하고 소탈한 성격을 그렇게 표현한 것 같다. 그의 인생관은 단순하다. 건강하고 밝게 사는 것이다. 남편의 투병을 지켜보며 죽고 사는 일은 사람의 힘으로 어쩔 수 없다는 것이 역설적으로 그에게 삶의 긍정을 선물한 것이다.

나눔의 실천, 조수호 회장 아내 양현재단 최은영 이사장
한 연구에 따르면 인간이 받는 스트레스 중 가장 큰 것이 배우자의 사망이라고 한다. 남편이 암 선고를 받고, 투병을 하고, 세상을 떠나기까지 그는 그 말 못할 고통을 함께했다. 병원에서 “운명하셨습니다” 라는 이야기를 들었을 땐 ‘내가 뭘 잘 못했지?’ ‘남편에게 더 잘해줄걸’ 하는 생각이 가장 먼저 떠올랐다고 한다. 두 사람은 1985년 10월 8일 결혼했다. 최은영 이사장은 최현열 CY그룹 명예회장과 신격호 롯데그룹 총괄회장의 여동생 신정숙 씨 사이의 1남 3녀 중 장녀다. 조 회장과 최은영 이사장은 집안의 소개로 만났지만 연애결혼을 한 부부 이상으로 금슬이 좋았다. 슬하에 유경(28)과 유홍(27) 두 딸을 두었는데, 아내와 딸 사랑이 각별했던 조 회장은 그 덕분인지 해운업계의 ‘페미니스트’로 불렸다. 여성은 배에 태우지 않는다는 해운업계의 금기를 깨고, 한진해운은 1995년 국내 최초로 12명의 여성 항해사와 기관사를 선발했다. 1997년에는 여성 주재원을 파견했으며 2000년에는 최초의 여성 일등항해사를 배출했다. 인터뷰가 있던 날은 마침 두 사람의 결혼기념일이었다.

▼ 조수호 회장이 돌아가신 후 지난 8년은 이사장님께도 힘든 시간이었죠.(그는 남편 작고 후 올해 4월까지 한진해운 경영을 맡았다. 현재 한진해운은 시숙인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이 대표이사를 맡고 있다)

남편 간호를 하느라 많이 지쳐 있던 상황에서 경영까지 맡아 힘들었죠. 더군다나 그 기간이 해운업이 가장 어려웠던 시기였어요. 여건이 좋았더라면 직원들에게 좀 더 좋은 모습을 보이고, 잘해줄 수 있었을 텐데. 물론 이익이 많이 남는다고 더 좋은 회사는 아니지만, 그런 아쉬움은 있어요. 해운 사업은 멀리 봐야 해요. 큰 배의 속도처럼 천천히 움직이기 때문에 어떤 이슈가 있다고 하루아침에 좋아지거나 하는 게 아니거든요.

▼ 지금도 남편 생각이 많이 나시죠.

처음에는 세월이 약이겠거니 했는데, 그게 아니더군요. 밥을 먹다가도 ‘이 음식 참 좋아하셨지’ 싶고, 함께 갔던 장소에 가도 생각이 나죠. 시간이 아무리 흐른들 어떻게 치유가 되겠어요. 그래서 친구들에게 늘 남편한테 잘해주라고 이야기해요. 제가 잔소리를 너무 많이 하니 친구들이 안 좋아하더라고요(웃음).

▼ 딸들은 누구를 많이 닮았나요.

두 아이 모두 아빠를 닮아서 성격이 유한 편이에요. 큰아이는 책임감 강하고 사교적이고 새로운 걸 기획하는 걸 좋아합니다. 둘째는 와세다대에서 비즈니스를 공부하다가 미술을 전공하기 위해 런던에서 학부 과정을 다시 시작했어요. 둘째는 창의적이고 조용하고 상냥해요. 남편도 미술을 좋아하고 잘해서 시어머니께서는 종종 자신 아들이 다니던 팜프렛 고등학교 식당과 복도가 온통 아들이 그린 그림으로 도배돼 있었다고 자랑 삼아 말씀하시곤 했어요. 남편도 언젠가 경영을 하지 않았더라면 미술가가 됐을 거라고 말하기도 했고요. 그런 걸 알기 때문에 둘째가 뒤늦게 미술을 한다고 했을 때 반대하지 않았죠.

▼ 자녀들을 교육할 때 특별히 강조한 점이 있다면요.

아이들이 어릴 때 이래라저래라 잔소리를 좀 했는데 하루는 남편이 절 부르더니, ‘당신은 자신에게 100% 만족해?’라고 묻더라고요. 무슨 소리인 줄 몰랐는데, 제가 시키는 대로 하면 잘돼야 100% 저와 똑같은 사람이 된다는 거예요. 그 소리를 듣고 잔소리를 덜하게 됐어요. 사교육도 많이 시키지 않았어요. 악기를 다루게 해봤는데 둘 다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아서 그 자리에서 그만두게 하고 미술만 좀 시켜서 전 강남 유명 과외 선생님이나 학원 그런 건 하나도 몰라요. 단, 봉사활동 하는 데는 꾸준히 데리고 다녔어요. 한번은 큰딸과 보육원에 가서 그곳 아이들과 놀았는데, 딸이 ‘엄마, 이건 어떻게 할까’라고 묻는 거예요. 여섯 살 된 여자아이가 슬며시 우리 딸에게 와서 ‘언니는 엄마가 있어서 참 좋겠다’ 그러더래요. 그 후론 우리 딸이 절대로 보육원 아이들 앞에서 ‘엄마’라는 말을 안 해요. 그리고 보육원에 갈 때마다 늘 자신이 아이들을 위해서 무엇을 더 할 수 있을지 생각하더라고요. 그런 걸 보면 백 마디 말이나 글보다 한 번 경험하고 직접 느끼는 게 교육에는 훨씬 나아요.

양현재단은 많은 이들에게 때로는 따뜻한 햇살이 되고, 때로는 시원한 바람이 됐다. 최은영 이사장에게도 마찬가지다. 그 역시 이곳에 들어서면 마음이 평온해진다. 고등학교(성심여고) 때부터 보육원에 봉사활동을 다니고, 이웃 돕기 성금을 내기 위해 어린 딸들 손을 잡고 은행에 드나들었던 그에게 나눔은 자연스러운 일상이요, 힐링이다. 어쩌면 양현재단은 고 조수호 회장이 그런 아내에게 남긴 큰 선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여성동아 2014년 11월 61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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