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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당신은 신은경이란 배우를 모른다

글·김명희 기자 | 사진·지호영 기자

2014. 09. 15

CF를 많이 찍고, 토크쇼나 예능 프로그램에 나와 사생활을 공개하는 게 톱스타의 기준이라면, 신은경은 분명 ‘톱’은 아니다. 하지만 자타공인 ‘톱’이라는 배우들 가운데 그와 연기로 겨뤄 이길 수 있는 배우가 얼마나 될까. 바람 잘 날 없는 연예계에서 30년 가까운 풍화작용을 거쳐 결정체로 남은, 순도 100%의 배우 신은경을 찾아가는 길.

당신은 신은경이란  배우를 모른다
비바람이 지나간 뒤 세상이 더 촉촉하고 말끔해지듯, 신은경(41)과 주고받은 이야기가 그러했다. 곁에서 지켜본 신은경은 드세거나 차가운 사람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대단히 따뜻하거나 정감 있더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그는 감정을 드러내야 할 곳은 연기밖에 없다, 일상생활에서의 감정 소모는 불필요한 일이라고 믿는 사람이다. 인생에 몇 차례 고비를 겪다 보니 큰 산과 태풍도 작은 언덕과 산들바람으로 여기게 됐다는 이 불혹의 여인. 신의 저울이 있어 신은경이라는 사람을 달아본다면 정확히 ‘배우’라는 지점에 무게 추의 중심이 잡히지 않을까 싶다.

‘리즈시절’보다 지금이 더 좋다

신은경에 대한 첫 기억은 1994년 드라마 ‘종합병원’에서였다. 그해엔 이상하리만큼 명작 드라마가 많았다. 첫사랑의 아이콘 심은하를 탄생시킨 ‘마지막 승부’, 최민식과 한석규라는 걸출한 스타를 배출한 ‘서울의 달’, 차인표·신애라를 부부로 이어준 ‘사랑을 그대 품안에’, 그리고 김민종·손지창이 쌍둥이로 나오고 이정재가 막내동생으로 등장하는 ‘느낌’이라는 드라마도 있었다. 이 드라마들에 출연한 쟁쟁한 여배우들 속에서도 신은경은 반짝반짝 빛나는 보석 같았다. 가운 주머니에 손을 넣고 후배 구본승의 무릎을 걷어차는 장면조차도 멋있어 보였다. 남자들은 만화 속에서 튀어나온 듯한 청순가련한 다슬이, 심은하에게 열광했지만 여성들은 중성적이고 시크한 신은경에게 한 표 던지며 기꺼이 그의 쇼트커트를 따라 하러 미용실로 달려갔다.

“저도 그때 생각이 나서 작년에 다시 쇼트커트를 해봤는데, 그 느낌이 나지 않더라고요. 어릴 때는 머리 감고 그냥 툭툭 털고 나서 아무 옷이나 걸치고 나가도 예뻐 보였는데, 이젠 청바지에 티셔츠만 입을 수 없으니 의상과도 맞춰야 하고, 그러려면 고데기로 말든지 헤어 제품을 바르든지 해야 하니 더 번거롭더라고요. 역시 스타일링도 나이에 맞게 해야 한다니까요. 배우로서도 그래요. 사람들은 ‘종합병원’이 제 리즈시절이었다고들 하는데, 돈 잘 벌고 화려했을지는 몰라도 저는 그 당시에 대한 기억이 별로 없어요. 너무 바쁘고 찌들어서 내가 뭘 하는지도 모르고 일을 했거든요. 그때가 좋았던 건 딱 하나, 지금보다 작품이 많이 들어왔고, 그래서 선택의 폭이 넓었던 것. 그걸 제외하면 내가 뭘 하는지 알고, 느끼고, 성취를 즐기는 지금이 훨씬 더 좋아요.”



신은경이 처음 연기와 인연을 맺은 것은 단발머리 중학생 때였다. 아역 탤런트로 활동하던 남동생 친구를 따라 방송국에 놀러갔다가, ‘욕망의 문’(1987) PD의 눈에 띄어 그 길로 여주인공의 아역으로 데뷔했다. 돌아보면 연기를 시작하고 계속한 건 우연과 오기 덕분이다. 신은경 나름대로는 이를 팔자요, 운명이라고 생각한다.

“제가 특출하게 예쁜 편은 아니었어요. 이웃집 아이처럼 평범한 얼굴이었는데, 오히려 그게 PD님 마음에 들었던 거 같아요. ‘욕망의 문’이 시대극이었거든요. 처음에는 아버지가 엄하셔서 차마 연기한다는 말은 못하고, 촬영이 있는 날은 독서실에 간다고 둘러대고 방송국으로 가곤 했죠. 그러다 결국 들켰는데, 아버지가 의외로 야단을 안 치시고 지나가는 말로 ‘네가 하면 얼마나 하겠니’라고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오기로 더 열심히 했죠.”

안양예고, 단국대 연극영화과 등을 거쳐 일찌감치 연기에 승부수를 던졌다. 그 사이 그에게 들어오는 배역은 하나같이 ‘종합병원’의 정화처럼 중성적이거나, 독하고 차갑게 운명을 개척해나가는 인물이었다. 자연스레 신은경의 원래 성격도 그럴 것이라는 선입견이 따라붙었다.

“다들 저를 무섭다고 알고 계신데, 예전에는 그런 면이 없지 않아 있었어요. 영화나 드라마가 혼자 하는 일이 아니라 한 작품에 50명에서 많게는 1백 명 가까운 인력이 투입되다 보니 사소한 실수라도 하면 그게 눈덩이처럼 커져서 결국 모든 사람이 피해를 보는 상황이 발생해요. 그러다 보니 저 자신에게 엄격해야 했고, 다른 사람에게도 가차 없었어요. 그러다 긴장이 풀리면 저 자신을 너무 놓아버리기도 했죠. 그런데 나이가 들면서 실수도 할 수 있고, 사람마다 장점도 있고 단점도 있다는 걸 알게 되니 인내심이 생기더라고요. 이젠 현장에서 후배들 눈치도 봐요. 다른 게 아니라, 연기는 액션의 합처럼 서로 주고받는 거라서 상대가 자기 몫을 잘해줘야 저도 잘할 수 있거든요. 그러니 상대를 위해서가 아니라 저 자신을 위해서, 좋은 에너지를 받기 위해서 후배들을 챙기는 거죠.”

내겐 태풍도 산들바람

당신은 신은경이란  배우를 모른다
최근 신은경은 영화 ‘설계’ 촬영을 마쳤다. 9월 18일 개봉하는 ‘설계’는 모든 걸 빼앗긴 한 여성이 복수를 위해 사채업계에 뛰어들며 벌어지는 이야기를 담은 서스펜스 스릴러 영화. 신은경은 믿었던 이들의 배신으로 아버지와 막대한 재산을 모두 잃은 후 치밀하게 복수를 설계해나가는 세희 역을 맡았다. 4년 만에 주연을 맡은 이 영화에서 신은경은 스타일리스트의 도움 없이 직접 의상을 준비하는 등, 연기는 물론이고 외적인 부분에서도 공을 많이 들였다.

“촬영할 때는 큰 부담을 느끼지 않았는데, 어제 제작발표회를 하고 영화 제목이 실시간 검색어에 오르고 하니까 확 겁이 나더라고요. 드라마가 장거리 마라톤처럼 서서히 피치를 올리는 것과 달리, 영화는 모든 것을 한꺼번에 쏟아붓고 평가를 받아야 하기 때문에 어려운 부분이 있어요.”

‘설계’의 주인공 세희의 기구한 운명은 자연스레 신은경의 파란만장한 삶과 오버랩된다. 신은경은 2003년 당시만 해도 흔하지 않았던 소속사 대표와의 결혼을 발표하면서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하지만 행복도 잠시, 전남편의 사업은 고전을 면치 못했고 빚이 늘어났다. 여러 가지 이유로 결혼 4년 만에 이혼했고 그 사이 태어난 아들은 뇌수종 진단을 받았다. 이외에도 영화 ‘조폭마누라2’ 촬영 중 각목 파편이 왼쪽 눈에 들어가 실명 위기를 겪기도 했고, 빚 때문에 출연료를 압류당하는 등 곡절이 많았다.

“세희를 연기하면서 시련에 굴하지 않는 당찬 면이 좋았어요. 개인적으론 닮고 싶은 인물이기도 해요. 전 세희와 달리, 냉정하지도 치밀하지도 않은 성격이거든요. 닮은 점이 있다면 겉으로는 강인해 보이지만 속은 여리다는 거예요.”

어떤 배우는 시련을 통해 켜켜이 쌓인 감정이 연기로 표출되기 때문에 역경도 자산이 된다고 했다. 그 반대의 경우도 있다. 배우들은 대부분 감성적이기 때문에 일반인보다 시련을 받아들이는 강도가 강하다. 수많은 이들에게 따뜻한 웃음을 선사했던 키팅 선생님, 로빈 윌리엄스도 기자가 신은경과 마주 앉기 하루 전인 8월 12일 우울증을 앓다 스스로 세상을 등졌다.

“역경이라는 게 다른 사람에겐 별것 아닌 것 같아 보이는 것도 당사자에겐 죽을 만큼 힘들 수도 있고, ‘세상에 저렇게는 못 살지’ 싶은 일도 정작 당사자는 담담하게 받아들이기도 하더라고요. 결론은 큰 산이든 태풍이든, 받아들일 당시 내 그릇이 어느 정도냐에 따라 다르게 느껴질 뿐이지, 시간이 지나고 나면 아무것도 아니더라는 거죠. 다행히 저는 큰 산과 태풍을 만났지만 그것들을 모두 작은 능선과 산들바람으로 받아들였고, 그 힘의 바탕에는 가족이 있었어요. 아무리 힘든 일이 있어도 주변에서 ‘이건 아무것도 아니야’라고 말해 주면 정말 그런가 싶어지면서 힘이 나거든요. 제가 힘든 상황에 처했을 때 가족이 내색하지 않고 무던하게 잘 견뎌줘서 고맙고 그런 부분 때문에 더 책임감이 생겼어요.”

그가 물끄러미 주스 잔을 바라보더니 “한때는 이 주스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했다”며 말을 이었다.

“배우들은 감정의 기복이 심하다 보니 상처받는 일이 생기면 이런 주스를 봐도 뭔가 다른 게 있지 않을까 의심하고 두려워하게 돼요. 그걸 더 부추기는 게 술이고요. 집에서 혼자 술 마시는 안 좋은 습관이 있었는데, 그게 좋을 땐 괜찮은데 힘들 땐 사람을 더 극단적으로 만들더라고요. 그래서 지금은 완전히 끊었어요. 5년 전부터는 한 방울도 입에 안 대고 있어요. 아직도 갖고 있는 나쁜 버릇이라고 하면 한 가지 일에 꽂히면 다른 생각을 못하고 거기에만 빠져드는 거예요. 재작년에 PT(퍼스널 트레이닝)를 받다 몇 달 만에 그만뒀는데 그 이유가 한번 운동을 할 때마다 젓가락질도 못할 정도로 심하게 해서 결국은 병이 나서였죠. 트레이너가 ‘시키는 대로 다 하기에 괜찮은 줄 알았다’며 미안해하더라고요. 영화 ‘조폭마누라1’을 찍을 때도 액션 연습을 너무 열심히 하다 갑상선 호르몬에 이상이 생겼어요. 주변에선 미련 떨지 말고 영리하게 굴라고 하는데, 어릴 때 일을 시작해서인지 계산을 잘 못하고 매사 순수하게 받아들이는 게 몸에 배서 그래요. 또 저 스스로도 대충 열심히 하고 대충 결과가 잘 나오길 기대하기보다 안 할 거면 아예 하지 말고, 일단 시작한 일은 미친 듯이 매달려서 끝을 보는 게 옳다고 생각해요.”

당신은 신은경이란  배우를 모른다


45세부터 대운, 아직 배우로서 목마르다

그런 마음 자세라면 연기가 아닌 다른 어떤 일을 해도 성공했을 거라고 하자 신은경이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며 활짝 웃었다. 그래도 그가 살아 있음을 느끼는 건 역시나 현장에 있을 때다. 정말 긴 대사를 NG 없이 한 번에 마쳤을 때, 못할 것 같은 장면을 해냈을 때, 머릿속으로 그렸던 인물을 실사로 그대로 뽑아냈을 때, 상대 배우와 호흡이 척척 맞을 때, 아니 그 어떤 단서를 달지 않더라도 그냥 북적북적하고 들썩들썩한 촬영장의 공기가 좋다.

“아는 분이 점을 봤는데, 제가 마흔다섯 살부터 대운이 온대요. 그 말을 듣고, 다른 이유에서가 아니라 ‘나이 들어도 나를 계속 찾아주는 사람이 있겠구나’ 싶어서 기분이 좋더라고요. 아직 배우로서 너무 목마르고 갈 길이 멀어요. 진짜 꿈이라고 하면 60, 70, 80세가 돼서까지 그 나이에 맞는 배역을 꾸준히 하는 거예요. 한 작품으로 벼락 인기를 얻고 그걸로 광고 찍어 편안하게 사는 것보다 신은경은 어떤 역할을 맡겨도 참 잘해낸다, 신은경이 나오면 다르다, 그런 얘기를 듣고 싶어요.”

정상의 자리나, 타이틀 롤에 대한 욕심과는 다르다. 신은경은 자리라고 말할 만한 위치까지 못 올라가서 그런지 자신은 자리에 대한 욕심은 없다고 선을 그었다.

“한 컷이 나오더라도 내가 꼭 필요하고, 작은 배역이라도 작품에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좋은 가치를 창출하고 싶은 거지 제 입맛에 맞는 일만 계속하겠다는 뜻은 아니에요. 그런 고집을 갖고 있다면 나이 들어서 이 일을 할 수 없어요. 현장을 즐기다 보면, 나 중심에서 서서히 벗어나 숲을 보는 법도 배우게 되더라고요. 철없을 땐 세상이 나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줄 알았는데 살아보니 그렇지 않더라고요. 그걸 알고 나니 작은 특혜나 배려가 더 감사하게 느껴져요. 식당에서 반찬을 더 챙겨준다거나, 바쁘니까 미용실에서 시간을 당겨준다든가 하는 것들. 그건 배우 신은경을 배려해주시는 거라는 걸 알면서도, 인간 신은경한테 주시는 특혜 같아 정말 감사하고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책임감도 갖게 돼요.”

멋모르고 배우라는 꿈을 안고 달리기 시작한 소녀는 20대에 모두가 부러워하는 자리에 올랐으며, 한때 거센 인생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기도 했다. 급류에 휩쓸려 표류하던 순간 그를 지탱해준 것은 일이요, 연기였다. 신은경은 이렇게 열정의 힘은 강하다는 것을 삶으로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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