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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땅콩집 건축가 이현욱 소장의 ‘행복한 집’ 이야기

“가족이 함께 웃으며 추억 만들 수 있다면 그곳이 최고의 집”

글·백경선 자유기고가 | 사진·조영철 기자, 이현욱좋은집연구소 제공

2013. 11. 05

집은 삶을 담는 그릇이다. 2010년 새로운 주거 양식으로 화제를 모았던 땅콩집,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삶은 어떻게 변했을까. 땅콩집 열풍의 주인공 이현욱 소장의 집을 방문했다.

땅콩집 건축가 이현욱 소장의 ‘행복한 집’ 이야기

딸 은세와 함께한 이현욱 소장. 그는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마당에 울려퍼질 때 가장 행복하다고 한다.



건축가 이현욱(43·이현욱좋은집연구소). 그의 이름 앞에는 실용주의 건축가 혹은 합리주의 건축가란 수식어가 붙는다. 이 소장은 2010년 ‘한겨레’ 구본준 기자와 의기투합해 도심의 아파트 전셋값으로 한 달 만에 새로운 개념의 목조 주택 ‘땅콩집’을 지어 주목을 받았다. 땅콩집은 하나의 껍데기 안에 땅콩이 두 개 들어 있는 것처럼 한 필지에 두 채의 단독주택을 나란히 지은 것을 말한다. 그리고 만 3년이 지난 지금, 사람들은 그에게 “아직도 땅콩집에 살고 있느냐”고 묻곤 한다. 그는 최근 ‘나는 마당 있는 작은 집에 산다’(카멜레온북스)라는 책을 펴내며 그 질문에 답을 했다.
가을이 무르익어가는 10월 어느 날, 경기도 용인시 기흥구 중동에 있는 땅콩집 1호 이 소장의 집을 찾았다. “생각보다 좁지 않죠?” 부엌 식탁에 앉아 일을 하고 있던 그가 반갑게 맞으며 한 말이다.
그의 땅콩집은 1층과 2층, 다락이 각각 52.8㎡(16평)로 총 158.4㎡(48평)의 3층짜리 목조 주택이다. 거기에 66㎡ (20평) 정도의 공동 마당을 갖추고 있다. 1층은 거실과 부엌, 2층은 아들 한세(10) 군과 딸 은세(6) 양의 방, 다락은 부부 침실로 꾸며져 있다. 원래 한세 군과 은세 양이 한방을 썼는데, 커가면서 둘이 토닥거려 얼마 전 방을 따로 마련해주었다. 그 바람에 이 소장 부부는 아이들의 놀이방이었던 다락으로 쫓겨났다고 했다.
이 소장의 아내 김지영(40) 씨는 “땅콩집에 살면서 만족스럽다”고 말했다. 여름에 덥지 않고 겨울에 춥지 않아 냉난방비가 적게 들면 최고의 집이라고 생각하는데 땅콩집이 그렇다는 것. 이사 올 땐 두 집이 붙어 있는 데다가 마당을 같이 쓴다는 것이 부담스럽기도 했지만, 살다 보니 가족 같은 이웃이 생겨 좋다는 말도 덧붙였다.
“사실 아내가 처음부터 이 집을 좋아했던 건 아니에요. 아내는 집을 실험 대상으로 보는 저를 늘 못마땅해했고, 그런 아내를 설득할 자신이 없어 일단 일부터 저질렀어요. 땅을 매입해서 건축 허가를 받고 시공사와 공사 계약을 하고 기초공사가 끝나가는 시점이 돼서야 아내와 아이들에게 보여줬죠. 아내는 이상한 생각이 들었는지 제게 ‘혹시 이거 우리 집이냐’고 물었고, 저는 그제야 사실을 털어놨어요. 차마 아내의 얼굴을 보고 말할 수가 없어 아이들을 보면서 ‘우리 집이고, 다음 달에 이사할 거’라고요. 아이들은 3층집으로 이사한다고 좋다고 기뻐했지만, 아내는 그날 밤새도록 울었죠.”
이 소장은 “그렇게 했기 때문에 땅콩집이 탄생할 수 있었다”는 것을 강조했다. 그리고 “사실 땅콩집의 성공은 그간 아내가 흘린 눈물의 결과”라며 “지금까지 나를 믿고 따라준 아내에게 모든 공을 돌린다”는 말로 미안함과 고마움을 표했다.

결혼하고 7번 이사, 7번의 실험

땅콩집 건축가 이현욱 소장의 ‘행복한 집’ 이야기

경기도 용인에 있는 이현욱 소장의 1호 땅콩집. 냉난방비가 적게 들고 가족 같은 이웃을 만들어준 기특한 집이다.



“전 건축가는 손으로 그림만 그리는 것이 아니라 모든 주택에 다 살아봐야 한다는 ‘잘못된’ 철학을 가지고 있어요. 그것도 혼자 사는 것은 소용이 없고, 결혼해서 가족과 함께 살아야 진정한 실험이 된다고 생각했죠. 그래서 결혼이 어려웠어요. 맞선을 보면 항상 ‘꽝’이었죠. 그러다 친구(그의 친구이자 아내의 형부라고) 소개로 아내를 만났어요. 아내도 제 잘못된 철학과 실험정신을 마음에 안 들어했지만, 그래도 저를 사랑해서 결혼해주었어요. 그런데 울리기만 하니, 미안하죠.”
그는 결혼 이후 8가지 형태의 집에서 살았다. 이사만 7번을 한 것이다. 아내는 어느 날 갑자기 남편이 “여보, 우리 이사 가자. 짐 싸”라고 말하는 것을 가장 무서워한다. 짐을 쌀 때마다 울었다는 김씨는 “남편의 일이니까 이해는 하는데 또 한편으로는 속상하니까 눈물이 나오더라”고 털어놨다. 반대할 수도 없고, 반대한다고 들어줄 리도 없고, 할 수 있는 거라곤 눈물의 시위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결혼하고 1년은 그의 어머니 집, 서울 마포구에 있는 8년 된 141.9㎡(43평) 아파트에서 살았다. 어머니, 여동생, 그, 아내, 갓 태어난 아들까지 함께 살면서 대가족이 사는 공간을 연구했다. “시집과 며느리 사이의 문제는 건축이 아무리 훌륭해도 해결할 수 없다”는 걸 깨닫고, 영등포구 문래동의 79.2㎡(24평) 오피스텔을 얻어 독립했다. 딱 1년을 사니 오피스텔 분석이 끝났다. “오피스텔은 사람이 골병드는 주거 양식”이란다.
다음은 서초구 반포동의 27년 넘은 69.3㎡(21평) 아파트. 집 안에서 아들이 조금만 움직여도 아래층에서 올라왔다. 오래된 아파트 연구고 뭐고, 사람이 도저히 살 수가 없어 4개월 만에 이사를 결정했다. 종로구 옥인동 49.5㎡(15평)짜리 다세대주택은 흡족했다. 일단 동네가 마음에 들었고, 경치도 좋고 공기도 맑았다. 딸 은세가 그 집에서 태어났다. 그때 그는 “주거의 최종 목적지는 역시 단독주택”이라고 결정했다.



땅콩집 건축가 이현욱 소장의 ‘행복한 집’ 이야기


그가 땅을 사서 단독주택을 짓자고 했을 때, 김씨도 흔쾌히 찬성했다. 기대도 많았다. 그들의 첫 단독주택은 2007년 경기도 용인 죽전에 지은 모바일 하우스다. 땅은 330㎡(1백 평)인데 돈이 없어 건물 56㎡(17평)만 지어서 살았다. “컨테이너 박스를 마치 레고처럼 조립한 모양이 독특해 지나가던 사람들이 벨을 누르고 방문한 적도 많았다”고 김씨는 회상했다.
모바일 하우스는 이름 그대로 이동식 집이요, 맞춤식 집이다. 이를테면 이렇다. 신혼부부가 방 하나에 거실과 주방이 갖춰진 A타입 집을 구입해 살다가 이사를 할 땐 집을 운반해 가고 아이들이 생기면 방 2개짜리로 이뤄진 B타입 집을 덧붙이는 것이다. 또 자녀가 성인이 돼 독립을 하면 일부를 중고로 팔 수도 있다. 그러면 필요한 사람이 다시 사다가 쓰는 것이다.
그런데 그의 이상은 난관에 부딪쳤다. 바로 난방 문제였다. 처음에는 집 안에 필요한 모든 에너지를 전기로 해결했더니 누진에 누진이 붙어 한 달 전기 요금이 1백19만원이 나온 것. 대안책으로 LPG를 이용해 난방과 온수만 사용하기도 했는데 그것도 만만치 않았다.
당시 모바일 하우스는 여러 언론 매체를 통해 소개되면서 이슈가 됐고, 그는 실험주의 건축가로 알려졌다. 그러한 상황에서 그는 과감하고 멋지게 실패를 인정했다. 그리고 건축과 단열과 에너지에 대한 공부를 다시 했다.
다음에는 단열에 목숨을 걸어 용인 동백에 198㎡(60평)짜리 단독주택을 완성했다. 단열은 해결됐는데, 집이 넓으니 청소가 문제였다. 게다가 빚도 많아 6개월 만에 다시 근처 죽전의 108.9㎡(33평) 아파트로 이사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관리비를 분석하면서 단독주택의 기준을 연구했다. 단열과 유지비와 청소 문제 등등을 고려한 결과 해답은 작은 목조 주택이었다. 마당이 있는 작은 목조 주택, 이 소장 가족의 8번째 집, 바로 땅콩집이다.
“땅콩집에서 산 지 벌써 햇수로 4년이 됐어요. 이렇게 오래 살아본 집은 처음이에요. 아내는 또 무슨 꿍꿍이가 있는지 불안해하죠(웃음). 그런데 당분간 이사 갈 생각은 없어요. 우리 가족이 이사하면 그 즉시 땅콩집에 관심 갖고 있는 사람들이 ‘거봐라, 불편하니까 이사하는 것 아니냐’고 할 거예요. 그런 오해를 만들지 않기 위해서라도 일단 계속 살아야죠.”

아이들에게 고향과 추억 만들어주고파
땅콩집은 실용적이고 합리적이고 현실적이다. 그런데 인터뷰가 진행될수록 감성적이기도 하다는 생각이 커졌다. 그가 초등학교에 들어가면서 그의 가족은 강남의 아파트로 이사를 갔고, 이후 그의 부모는 강남 개발에 발을 맞춰 1~2년에 한 번씩 이 아파트에서 저 아파트로 이사를 다녔다. 그가 다니던 학교 중심으로 이사를 하면서 집이 조금씩 넓어졌고 생활도 윤택해졌다. 하지만 그는 “집이 점점 넓어지면서 과연 더 행복해졌는지는 의문”이라며 “오히려 가정 형편이 어려웠던 서래마을 시절에 행복했던 기억이 가장 많다”고 추억했다.
강남의 아파트에 살다 초등학교 4학년 때 그의 가족은 서초구 방배동 서래마을 단독주택으로 이사를 갔다. 1980년 무렵 서래마을은 지금의 부자 동네가 아니었다.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아파트가 은행으로 넘어가자, 부모는 그와 여동생의 학교를 옮기지 않는 범위에서 전세가 싼 집을 찾은 것이다. 먼저 살던 아파트에서 10분 만에 도착한 서래마을은 집보다는 논과 밭이 많은 완벽한 시골 동네였다. 똑같은 반포인데 풍경은 천지 차이였다.
“서래마을 친구들은 특징이 있었죠. 우선 콧물을 질질 흘리고 손톱에 때가 끼고 운동화가 아닌 고무신을 신고 옷에는 항상 흙이 묻어 있었어요. 처음에는 왜 이 친구들은 더럽게 콧물을 흘리나 했는데, 어느 순간 저도 친구들 옆에서 똑같이 콧물을 흘리고 있는 거예요.”
그렇게 변하는 게 당연했다. 추운 겨울에도 온종일 밖에서 뛰노니 코 밑이 성할 리가 없고, 흐르는 콧물을 연신 닦아내느라 오른쪽 소매는 항상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땅콩집 건축가 이현욱 소장의 ‘행복한 집’ 이야기

원조 땅콩집 주인 이현욱 소장과 구본준 기자 가족. 이 소장은 최근 집에 대한 생각과 땅콩집에 사는 이야기를 담은 책을 펴냈다.



“부모님에게는 경제적으로나 심리적으로 많이 힘들었던 그 시절이 어린 저에게는 대단한 선물이었어요. 좋은 장난감과 고급 과자는 없었지만 개구리와 메뚜기와 친구들이 있었고, 그걸로 저는 충분했어요. 자연에서 뛰어노는 법을 배웠고 덕분에 인생이 풍요로워졌죠. 아버지는 서래마을로 이사 온 것을 미안해하셨지만, 아버지의 미안함이 저에겐 고마움으로 남아 있어요.”
그는 아버지의 사업이 실패하지 않고 그래서 계속 아파트에서 전자 게임만 하고 살았다면 어땠을까 생각해보았다. 아마 추억할 수 있는 어린 시절이 없지 않았을까 싶다며, 돌이켜보면 그 시절의 추억으로 땅콩집을 만들게 된 것 같다고 말했다.

행복한 집의 척도는 아이들 웃음소리
땅콩집을 지어 성공했는데, 큰돈을 벌었느냐고 물었다. 그는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는데, 사실 그렇지 않다”며 웃었다. 옆에서 김씨는 “남편에게 생활비를 받아쓰는데 예전이랑 똑같다”며 “많지 않다”고 토로했다.
그는 땅콩집만 설계하는 것은 아니다. 파주의 제니퍼소프트 사옥을 비롯해 성당, 각종 기념관까지 다양한 건축물을 설계한다. 사실 돈을 벌려면 큰 건물을 설계해야 하는데 그는 많은 부분 돈이 덜 되는 ‘집’을 설계한다.
“보통 1년에 작은 집 50채를 설계해요. 작건 크건 50채를 설계한다는 건 50명의 건축주를 상대해야 하는 것이니 쉬운 일이 아니죠. 그렇다고 많이 하는 만큼, 힘든 만큼 수입이 늘어나는 것도 아니에요.”
누군가 찾아와 5천만원이 전부라며 그 돈에 맞게 집을 지어달라고 하면 거절해야 하는데, 그는 궁리를 해서 어떻게든 건축주 형편에 맞는 집을 지어주려 한다. 그가 장사꾼 방식으로 셈을 하지 않는 이유는 “누군가가 행복하게 살 집을 설계하는 것이 행복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무엇보다 “많은 아이들이 우리 아이들처럼 마당 있는 집에서 살길 바라기 때문”이라고 했다.
흔히 아이들이 어릴 때는 아파트에서 살고, 아이들이 다 커서 독립하면 부부만 시골로 내려가 주택에서 살겠다고 한다. 그는 그 생각을 뒤집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아이들과 함께 마당이 있는 집에서 살아야 한다는 것. 마당이 있어야 아이들이 웃을 수 있기 때문이다.
“회사 이름이 ‘좋은집연구소’이다 보니 좋은 집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많이 받아요. 언제부터인가 집은 사는 ‘곳’이 아니라 사고파는 ‘것’이 돼버렸는데, 집의 가치는 숫자로 가늠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에요. 좋은 집 또는 행복한 집의 척도는 아이들 웃음소리죠. 제가 단독주택에 사는 가장 큰 이유도 아이들 웃음소리 때문이고요.”
그의 집 마당은 이제 두 가족을 넘어 동네 아이들의 놀이터가 됐다.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마당에 울려 퍼질 때 그렇게 좋을 수가 없다”는 그는, 아이들이 더 신나게 놀고 더 크게 웃으라고 마당 한쪽에 2층짜리 자그마한 나무집도 만들어주었다.
땅콩집 덕분에 유명해지면서 여기저기서 그를 찾는 곳이 많아졌다. 인터뷰가 끝난 다음에도 강연 때문에 서울 양재동으로 달려가야 한다고 했다. ‘땅콩집=저렴한 집’이라는 오해를 풀어주고 싶어 그는 들어오는 강연을 마다하지 않는다. 건축주를 만나 이야기를 듣고 설계하고 거기에 강연까지 하느라 일주일 내내 그의 스케줄은 빡빡하다. 요즘 같아선 아이들과 1시간 놀아주는 것도 쉽지 않다. 그래도 그는 노력하고 있다.
“아이들이 요즘 마당에서 배드민턴 치는 재미에 푹 빠져 있어요. 저도 20~30분이라도 시간 내서 아이들과 배드민턴을 치려고 애쓰고 있죠. 나중에 아이들은 ‘짧은’ 시간이 아니라 아빠와 ‘함께한’ 시간을 기억할 거예요.”
30분 놀아주는 것도 힘든 상황에 가족 여행은 꿈도 못 꿀 일이다. 그래서 그가 생각해낸 것은 출장을 갈 때 가족과 함께하는 것이다. 지난 주말에도 부산 출장을 가족과 함께 갔다. 비록 부산에서 같이 놀 수는 없었지만, 가고 오는 동안 함께하면서 추억을 만든 것이 어디냐고 했다. 그의 노력에 대해서는 아내도 인정하고 고마워했다. 그가 이처럼 노력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남들에게는 집을 지어 행복하게 살라고 떠들고 다니면서 정작 저는 가족에게 어떠한가 생각해봤어요. 언젠가 한 기자가 저를 영웅이라고 묘사한 것을 봤어요. 그걸 보고 아내가 ‘나는 영웅은 필요 없다’며 ‘아이들과 같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아빠가 필요하다’고 하더군요. 한동안 아내의 그 말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어요.”
요즘 그는 젊은 부부들이 살 수 있는 ‘젊은 한옥’을 연구 중이다. 한옥이 가지고 있는 몇 가지 문제점들을 해결해 이를 대중화하고 싶다는 것. 그리고 올해 안에 젊은 한옥 1호가 탄생할 것이라고 귀띔했다. 또 하나. 그는 시나리오를 쓰고 있다고 고백했다. 원래 그의 꿈은 영화감독이었다. 그는 봉준호 감독처럼 독특하고 기발한 영화를 만드는 꿈을 아직도 꾸고 있다고 했다. 이 소장의 실험과 도전은 계속될 것이고, 그의 가족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매번 그의 실험과 도전에 동참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만 그 가족은 ‘함께’하기에 행복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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