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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야구 하는 남편 손혁, 골프 하는 아내 한희원을 말하다

“아내의 LPGA 은퇴 경기 때는 제가 꼭 캐디백을 메주고 싶어요”

글·이헌재 동아일보 기자 사진·조영철 기자, 동아일보 사진DB파트

2013. 10. 15

스포츠 스타의 뒤에는 훌륭한 조력자가 있다. 30대 중반에도 LPGA 무대를 누비며 맹활약 중인 프로 골퍼 한희원의 뒤에는 야구 선수 출신의 남편 손혁이 있다. 그가 결혼 10년 만에 처음으로 결혼 생활과 사랑스러운 아들, 그리고 자랑스러운 아내 한희원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줬다.

야구 하는 남편 손혁, 골프 하는 아내 한희원을 말하다


2003년 12월 20일 서울 강남구 한 호텔 예식장에서는 남녀 스포츠 스타의 결혼식이 열렸다. ‘세기(世紀)의 결혼’이라 하기에는 모자랄 수 있지만 잘나가는 톱스타 부부의 탄생이라 큰 화제를 모았다.
주인공은 프로 야구단 LG 트윈스의 에이스 출신 손혁(40·현 MBC스포츠플러스 해설위원)과 미국여자프로골프(LPGA) 투어의 떠오르는 샛별 한희원(35·KB금융그룹)이었다. 야구 선수들과 골프 선수들이 하객으로 대거 참석했고, 사회는 탤런트 이훈, 축가는 가수 변진섭이 맡았다. 이들 부부가 결혼한 지 벌써 10년이 됐다. 강산이 변할 만한 시간이 흘렀지만 한희원은 여전히 현역으로 LPGA 투어에서 뛰고 있다. 2004년 은퇴 후 미국에서 야구 공부를 하던 손혁은 지난해부터 한국에 들어와 야구 해설가로 왕성하게 활동 중이다.
한희원과 손혁은 몸은 떨어져 있지만 매일 화상 통화를 하면서 서로에게 힘이 돼주고 있다. 얼마 전 서울의 한 호텔 커피숍에서 LPGA 투어 프로의 남편이자 야구인으로 살아가는 손혁을 만났다.

사랑스럽고 자랑스러운 아내 한희원

“아내요? LPGA에서 뛰는 한국 선수들에게 새로운 길을 개척해준 선수죠.”
자리에 앉자마자 손혁은 아내 자랑부터 늘어놓았다. 한국 선수들의 LPGA 투어 진출의 물꼬를 튼 선수는 누가 뭐래도 박세리(36·KDB금융그룹)다. 박세리는 1998년 데뷔와 함께 US오픈에서 우승하는 등 LPGA 투어에서만 25승을 거둔 ‘살아 있는 전설’이다. 최근 LPGA 투어는 박세리의 활약을 보고 자란 ‘세리 키즈’들이 점령하고 있다. 올 시즌 메이저 대회 3연속 우승을 일군 세계 랭킹 1위 박인비(25·KB금융그룹)나 전 세계 랭킹 1위 신지애(25·미래에셋), ‘미녀 골퍼’ 최나연(26·SK텔레콤) 등이 모두 세리 키즈다.
그렇지만 결혼과 투어 생활 병행이라는 새로운 이정표를 제시한 선수는 한희원이라고 할 수 있다. 손혁은 “한국 선수 가운데 결혼 후 LPGA 투어에서 우승하는 등 좋은 성적을 올린 것은 아내가 처음이에요. 미국에 같이 머물 때 아내는 선후배들 사이에서 부러움의 대상이었어요. 투어를 뛰면서 결혼을 했고, 아들을 낳았으며, 남편의 ‘외조’까지 받았기 때문이죠”라고 했다. 이들 부부는 2007년 아들 대일 군을 낳았다.
이들은 지금도 후배 선수들로부터 “혁이 오빠 같은 사람만 있다면 당장 결혼하고 싶다. 희원이 언니처럼 살면 좋겠다”는 말을 종종 듣는다.

야구 하는 남편 손혁, 골프 하는 아내 한희원을 말하다


사실 손혁은 선수 생활의 마무리가 별로 좋지 않았다. 1999년 LG 트윈스에서 10승을 거두며 에이스로 활약하기도 했지만 이후 해태 타이거즈(현 KIA)와 두산 베어스로 트레이드됐고 2004년 시즌 도중 두산에서 은퇴를 선언했다. 그리고 미국으로 건너가 2005년까지 한희원과 함께 투어를 다녔다. 손혁은 “원래 은퇴 후에는 모든 선수들이 상당한 상실감과 허무감에 빠지기 마련이다. 그런데 내 경우엔 아내를 따라다니면서 선수 시절의 팽팽한 긴장감을 함께 느낄 수 있었다. 운동선수의 삶을 연장할 수 있었던 게 더없는 행운이었다”고 말했다.
행운이기는 한희원도 마찬가지다. 겉으로는 화려해 보일지 몰라도 골프를 직업으로 하는 프로 선수들에게 투어 생활은 고단한 일상이다. 한 대회의 공식 경기일은 3일 또는 4일이지만 연습일과 프로암 대회까지 포함하면 꼬박 일주일을 같은 골프장에서 보내야 한다. 대회가 끝나면 곧바로 다음 대회가 열리는 곳으로 이동해야 한다. 짐을 풀고, 골프를 치고, 다시 짐을 싸서 미국은 물론 전 세계를 돌아다닌다. 심하게 말하면 다람쥐 쳇바퀴 도는 것과 같은 생활의 연속이다. 성적이라도 좋으면 다행이지만 부진할 때는 심신이 피폐해지기 십상이다. 그런 상황에서 언제라도 내 편인 사람이 곁에 있다는 사실은 그 자체만으로도 큰 위안이 된다. 투어를 뛰는 다른 한국 선수들이 손혁·한희원 부부를 부러워한 것은 그런 이유에서다.
동료들 사이에서는 부러움의 대상이었지만 일반인의 시선은 그리 곱지 않았다. 당시만 해도 많은 사람들이 여자 프로 골퍼가 투어 생활 중 결혼하는 것에 대해 선입견을 갖고 있었다. 이 같은 선입견을 증명이라도 하듯 한희원은 결혼 이듬해인 2004년 초반 극심한 부진을 겪었다. 한희원은 2003년 LPGA 투어에서 2승을 거뒀지만 2004년에는 9월 중순까지 열린 21차례 대회에서 한 번도 우승하지 못했다. 우승은커녕 톱10 진입도 4차례밖에 되지 않았다.



야구 하는 남편 손혁, 골프 하는 아내 한희원을 말하다

한희원 선수는 투어 중 결혼과 출산, 육아를 병행해 후배 선수들에게 좋은 본보기가 되고 있다.



“결혼 후 훈련을 안 하고 놀기만 했다” “승부 근성이 사라졌다” 등등 근거 없는 소문들이 떠돌아다녔다. 이 때문에 한희원은 상당히 스트레스를 받았다고 한다. 이들 부부의 운명을 바꾼 대회는 그해 9월 20일 미국 오리건 주 포틀랜드에서 열린 세이프웨이클래식이었다. 선두에 3타 뒤진 채 최종 라운드에 들어간 한희원은 마지막 날 5언더파를 몰아치면서 공동 선두에 올라 로리 케인(캐나다)과 연장 승부에 돌입했고, 연장 첫 번째 홀에서 1.5m 버디 퍼트 성공으로 역전 우승에 성공했다. 그 우승 한 번으로 모든 일이 술술 풀려버렸다.
“아내가 부진 끝에 우승하자 우리에게 따라붙던 의혹의 눈초리가 순식간에 사라져버렸어요. 이후 아내는 출산까지 하면서 선수 생활과 가정 생활을 병행하는 본보기가 됐고요.”
실제로 이후 장정, 김미현, 김주연 등이 투어 생활 중에 줄줄이 결혼에 골인했다. 한희원이 극도의 긴장감 속에 경기를 치르는 것은 당연하다. 그렇지만 갤러리로 한희원을 따라다니는 손혁도 마음을 쓰기는 마찬가지였다. 골프를 잘 모르면서 참견을 하다가 경기를 망친 적도 있다.
“어느 대회에선가 아내가 치는 퍼팅이 조금씩 짧은 거예요. 그래서 지나가는 말로 ‘좀 길게 쳐보라’고 했죠. 그때 아내가 4홀을 남겨두고 3위쯤 하고 있었는데 제 말 한마디에 정신력이 무너지면서 결국 30등 밖으로 밀려났어요. 한마디로 선무당이 사람 잡은 거죠. 그날 저녁 아내에게 정식으로 미안하다고 사과했어요. 또 어떤 대회에서는 제가 다 마신 물통을 쓰레기통에 버렸어요. 그런데 버디 행진을 이어가던 아내가 다음 홀에서 곧바로 보기를 범하는 거예요. 곧바로 홀을 거슬러 올라가 쓰레기통을 샅샅이 뒤져 그 물통을 되찾아온 적도 있어요.”

결혼은 인생 최고의 우승컵
손혁 자신도 평생 운동을 했던 터라 일반인이 보기에는 말도 안 되는 징크스를 믿을 수밖에 없었다는 것. 그는 “또 언젠가는 내가 화장실만 다녀오면 아내가 보기를 하더라. 그래서 다음 대회부터는 화장실을 안 가기 위해 아무것도 안 먹고 따라다닌다”는 웃지 못할 사연도 들려줬다.
손혁이 아내와 함께 투어를 다니면서 깜짝 놀란 게 있다. 아내가 도무지 쉬질 않더라는 것이다. 대회 중이건 아니건 한희원은 끊임없이 연습을 했다.
“프로 골퍼는 야구의 선발 투수와 비슷한 점이 있어요. 선발 투수가 한 경기를 마치고 나흘을 쉬듯, 골퍼는 4일 경기를 하면 3일은 경기가 없잖아요. 이때 어떻게 잘 쉬느냐가 중요해요. 계속 연습을 하겠다는 아내에게 최소한 월요일은 쉬자고 설득했어요.”
한희원의 트레이닝도 직접 맡았다. 잠자기 전 스트레칭을 해주고 복근 운동도 시켰다. 야구 선수로 뛰며 산전수전 다 겪은 경험을 살려 아내가 부진했을 때 심리적으로 안정을 찾는 방법도 알려주곤 했다.
손혁은 2006년부터는 미국의 피칭 전문가인 톰 하우스 밑에서 야구 공부를 시작했다. 그 때문에 한희원이 중요한 대회를 치를 때만 투어에 동행했다. 그해 가을 열심히 훈련을 해 2007년 초에는 볼티모어 산하 마이너리그 팀과 계약도 했다. 부상으로 선수 생활을 다시 이어가진 못했지만 야구인으로 제2의 인생을 준비하고 있었다.
“2009년인가, 어느 날 아내가 전화로 ‘꼭 좀 투어에 와줬으면 좋겠다’고 하더라고요. 내가 보고 싶어 그런 줄 알고 살짝 좋아했죠. 그런데 막상 가보니 운전사가 필요한 거였어요. 3주 연속 대회가 있었는데 대회장으로 이동할 때마다 7, 8시간씩 운전을 해야 하니까 날 부른 거더라고요.”
여기서 궁금한 것 하나. LPGA 투어 프로 골퍼 아내를 두고 있는 손혁은 과연 골프를 잘 칠까. 야구 선수 출신 중에는 싱글을 치는 골프 고수들이 꽤 많은 편이다. 야구와 골프는 공을 때린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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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 대일 군은 손혁과 함께 한국에서 지내는데 부모의 유전자를 물려받아 운동에 소질이 있다고.



현재 손혁은 80대 중반에서 90개 정도를 친다. 생각보다는 기대 이하의 실력이다. 이에 대해 손혁은 “선수 시절 강속구 투수가 아니었다. 그게 한(恨)이 돼서인지 골프를 칠 때는 거리에 집착을 많이 하는 편이다. 아내가 가끔 코치를 해줄 때 ‘살살 좀 치라’고 하는데 그런 말에 개의치 않고 힘닿는 대로 친다”며 웃었다. 평균 드라이버 비거리는 2백80야드 정도이고, 가끔씩 3백 야드를 넘게 칠 때도 있다. 그렇지만 정확성이 떨어지다 보니 스코어가 썩 좋은 편은 아니다.
“처음 미국에 건너가 아내 및 아내의 지인들과 라운딩을 할 때는 아예 경기 진행이 안 될 정도로 못 쳤어요. 그런데 어느 순간 골프를 즐기게 됐는데, 지금은 자연스럽게 어울릴 정도는 되죠. 제가 선수도 아닌데 아주 잘 칠 필요는 없잖아요.”

야구, 골프 모두 잘하는 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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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혁은 한희원과 함께 투어를 다니면서 많은 추억을 쌓았다. 끝없이 펼쳐진 옥수수 밭 사이로 차를 몰기도 했고, 경치 좋은 곳에 차를 세우고 함께 걷거나 커피를 마시기도 했다. 보스턴 인근에서 대회가 있을 때는 메이저리그 보스턴 레드삭스의 홈 구장인 펜웨이 파크에서 함께 야구 경기도 봤고, 콜로라도에서는 당시 메이저리거였던 김병현(현 넥센)을, 뉴욕에서는 서재응(현 KIA)을 만났다.
손혁이 지난해부터 야구 해설가로 활동하기 위해 귀국하면서 부부는 현재 따로 살고 있다. 아들 대일 군은 손혁이 한국으로 데리고 들어왔다. 영어도 중요하지만 어릴 때 한국어를 배우는 게 더 중요하다는 생각에서다.
“아이는 지금 유치원에 다녀요. 제가 일을 나갈 때면 친가나 외가에서 봐주세요. 아내와 화상 통화를 할 때면 아이를 보고 싶다며 힘들어할 때가 많아요. 그럴 때마다 ‘후회 없이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해 뛰고 오라’고 말해주곤 해요. 내가 일찍 운동을 그만둬 선수 생활이 얼마나 소중한지 잘 알고 있으니까요.”
야구 시즌이 끝나면 손혁은 아들을 데리고 미국 샌디에이고에 있는 집으로 가 가족이 함께 생활한다. 그러다 투어 시즌이 시작되면 다시 한국으로 돌아온다. 박세리, 김미현(은퇴), 박지은(은퇴)과 함께 LPGA 투어 진출 1세대에 속하는 한희원도 이제는 선수 생활이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언제일지는 몰라도 아내의 은퇴 즈음이 되면 몇 개 대회를 따라다니면서 사진과 동영상을 찍어둘 생각이에요. 대일이가 컸을 때 ‘엄마가 이렇게 훌륭한 선수였다’는 걸 보여주고 싶어서요. 아직까지 아내의 캐디백을 직접 메본 적이 없어요. 캐디는 사실 일반인이 할 수 없는 전문가의 영역이거든요. 그렇지만 아내의 마지막 대회에서는 꼭 메주고 싶어요. 함께 필드를 걸으면서 얼마나 애써가며 그 길을 걸어왔는지 함께 느끼고 싶어요. 시작은 함께 못했지만 끝은 같이해줄 생각이에요. 마지막 홀을 나오면서 ‘정말 고생했다’고 말해주고 싶어요.”
부모의 유전자를 고스란히 물려받은 덕분인지 대일 군은 어린 나이지만 뛰어난 운동감각을 보여준다. 샌디에이고 집 마당에서는 손혁과 캐치볼을 하고, 인근 드라이빙 레인지에서는 취미 삼아 골프 연습을 한다. 손혁은 “나를 따라 야구를 하든, 아내의 뒤를 이어 골프를 하든 둘 중 하나를 했으면 좋겠다. 물론 최종 선택은 대일이가 하는 거지만”이라며 기대감을 내비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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