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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러져가는 한 세상, 아름다운 기록자 작가 송은일

“베스트셀러라는 말에 가슴 뛰던 여중생, 이제 비로소 글쓰기의 재미를 알 것 같다”

글·김명희 기자 | 사진·조영철 기자

입력 2013.10.15 11:12:00

송은일 작가의 장편소설 ‘매구할매’는 유서 깊은 마을에 하나쯤 있을 법한 종갓집이 배경이다.
이번 추석에도 차례를 지내고 식구들을 먹이며 손님을 맞느라 분주했을.
작가가 4백 년 고택을 거쳐간 이들의 삶을 때로는 현미경으로, 때로는 망원경으로 살피며 뽑아낸 이야기는 그래서 남의 것처럼 생경하지 않다.
스러져가는 한 세상, 아름다운 기록자 작가 송은일


송은일(49) 작가가 머물고 있는 전남 담양 창평의 ‘세설원’은 ‘글을 낳는 집’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장편 ‘매구할매’(문이당)가 세상에 나온 지 채 두 달이 되지 않았는데 작가는 새 작품에 대한 구상을 끌어안고 광주 집을 떠나 세설원에 둥지를 틀었다. 직장에 다니는 여성도 아이를 낳고선 기본으로 석 달은 쉬는데 작가는 참 부지런도 하다. 흔히 글쓰기는 산고에 비유된다. 그는 “글 쓰는 게 만만치는 않아도 아이 낳고 키우는 것만 하겠느냐”며 손사래를 친다.
“젊을 땐 작품을 써서 (신춘문예 같은 곳에 응모하려고) 우체국 소인을 찍어 보내고 나면 그렇게 서러울 수가 없었어요. 너무 막연한 상태로 세상에 나를 세워놓은 느낌이랄까.지금은 무던해졌는지 그렇게 서럽거나 특별한 감정이 일지는 않더라고요. 그저 ‘오늘은 누구 불러서 술 한잔할까?’ 그 정도예요.”

고향에 한껏 멋을 부린 집을 짓다

스러져가는 한 세상, 아름다운 기록자 작가 송은일

작가는 장편소설을 펴낸 지 두 달만에 다시 글을 쓰러 집필실에 둥지를 틀었다.



‘매구할매’는 이처럼 글 손이 야무지고 부지런한 송은일 작가의 ‘아스피린 두 알’ ‘사랑을 묻다’ ‘한 꽃살문에 관한 전설’ ‘반야’ ‘천 개의 바람이 되어’ 등에 이은 열 번째 장편소설이다. 몇 년 전 고향인 전남 고흥의 노인정에 갔다가 나이 많은 할머니들을 만난 게 이 소설의 시작이었다. 복날 어머니가 다니는 경로당에 삼계탕을 대접하러 갔다가 80~90세 할머니들이 오글오글한 방에 들어가 인사를 하게 됐다.
“으메 정산댁 딸내미구만. 저것이 작가 아니라고? 내 이약(이야기) 잔 써주라.”
“내 이약이 더 재미날 것인 게, 그짝 말고 이짝 이야기를 써라.”
베르나르 베르베르는 어떤 작품에서 노인 한 명이 사라지는 것은 하나의 도서관이 불타는 것과 같다고 했다. 그가 누구든 종착점에 다다른 사람의 인생은 소설 몇 권으로는 부족할 것이다. 송 작가는 사방에서 자신들의 이야기를 써달라고 하면서 와글와글 웃는 노인들의 모습에 가슴이 저릿했다고 한다.
“한 세상을 건너와 말년에 이른 삶이 빛나는 걸 그 순간에야 비로소 깨달았죠. 내가 그동안 이들의 삶을 쓰지 않고 어디를 헤매고 다녔나 싶어 부끄럽기도 했고요.”
하지만 할머니들 각자의 삶을 다 글로 옮긴다고 소설이 되는 건 아니다. 그래서 작가는 책 속에 “한껏 멋을 부려” 계성재라는 집을 한 채 지었다. 소설은 4백 년 전통의 종갓집 계성재를 중심으로, 현재를 살고 있는 작가 류은현의 이야기와 은현이 그리는 계성재의 과거 이야기가 씨줄과 날줄처럼 교차하면서 펼쳐진다.
책을 펼치기 전부터 궁금했던 건 ‘매구할매’라는 제목의 의미다. 매구의 원래 뜻은 ‘천년 묵은 여우가 변해서 된다는 전설 속의 짐승’. 소설 속 매구할매는 남편과 자식 넷을 한꺼번에 잃은 후 다른 사람의 병이나 임신·출산을 감지하는 신비한 능력을 갖고 계성재의 그늘로 들어온 인물이다. 작가는 “구미호처럼 간사하거나 영악한 존재로서의 매구가 아니라 사람을 보살피면서 나이가 든 지난 시대 우리네 ‘큰어머니’ 같은 할머니들을 통칭하는 의미로 이 단어를 썼다”고 말했다.
송 작가가 소설 속에서 계성재를 지은 곳은 전남 고흥, 자신의 고향 마을이다. 작가의 어머니 정산댁은 작은 뜸에서 큰 뜸으로 고개 하나를 넘어 시집을 왔고, 송 작가의 친정과 시집도 승용차로 5분, 넘어지면 코 닿을 거리에 있다. 보석같이 애지중지하며 언젠가는 꼭 한번 써먹어야지 하면서도, ‘어떻게 그려야 하나’라는 고민을 숙제처럼 안고 있었던 자신의 고향 이야기를 비로소 작품에 꺼내놓은 것이다.
“글을 쓴 지 20년 가까이 돼가는데 그동안 직접적으로 고향을 그릴 수 없었던 건 너무 평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에요. 심지어 우리 동네에는 명절이라고 한복 입고 놀고 그런 것도 없어요. 자가용 끌고 내려와 경운기 타고 마늘 심으러 가죠(웃음). 시골 마을을 무대로 하려면 자극적이거나 어떤 특별한 소재가 있어야 하는데 그걸 찾아내는 게 쉽지 않았죠. 그래서 외면해왔지만 마음속에 부채감 같은 것이 남아 있었는데, 경로당 사건을 계기로 더 이상 미룰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막상 글을 시작하고 나니 시골살이가 체화된 덕분인지 어렵지 않게 풀어갈 수 있었어요.”



스러져가는 한 세상, 아름다운 기록자 작가 송은일


해학 가득한 시어머니 말 받아 적으려 앞치마에 수첩 넣고 다녀
“꼬치도 안 달고 나옴시롱 야착키도 하다. 햇님인지 달님인지 으짠다고 이라고 애미 애를 믹이냐 가시내야. 느 할매가 살았으면 욕을 발대로 묵었을 것이다.”
소설 속에서 이웃집 할머니가 난산 끝에 세상에 나온 아기를 받으면서 하는 말이다. ‘매구할매’에는 이처럼 차진 남도 사투리가 정겹게 펼쳐진다.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엄청난 특혜다 싶은데 작가는 거기에도 우여곡절이 많았노라고 털어놓았다.
“가끔 시골 노인들이 우리는 생각지도 못하는 엄청난 비유들을 할 때가 있어요. 저희 시어머니가 특히 말씀을 참 재밌게 하시는데 그래서 시댁에 갈 땐 앞치마 주머니에 항상 수첩을 넣고 있다가 어머니가 재밌는 말씀을 하시면 ‘어머니 잠깐 기다리셔’ 하고는 받아 적어요(웃음). 갈 때마다 한두 마디씩은 꼭 건지는 게 있더라고요. 그래도 여전히 부족한 점은 많죠. 이번에 초고를 읽어준 후배가 전라도 토박이인데, 책을 읽고 나서 ‘언니, 사투리가 참 어설퍼. 전라도 노인네들이 말을 얼마나 푸짐하게 하는데, 언니가 그걸 잘 구사를 못 하네’ 그러더라고요(웃음). 사투리는 잘 구사하지 못하지만 머릿속에는 남아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걸 문자로 쓰려고 하니 어렵더군요. 전라도 안에서도 지역마다 조금씩 다른 단어나 억양들이 있는데, 그런 부분들은 조언을 좀 받았어요.”
매구할매, 류은현과 함께 작품을 이끌어가는 또 다른 주인공은 은현의 증조할머니 여례당이다. 나주 거부의 딸로, 계성재에 시집와 17대 종부가 된 여례당이 강력한 카리스마로 집 안팎을 이끌어가는 모습은 ‘토지’의 안주인 서희를 연상케 한다. ‘예로부터 종손이라는 사내들이 밖에서 딴짓하며 살림 들어먹는 일이 흔하기 때문에’ 대대로 종부에게 재산을 상속하는 계성재의 풍속도 흥미롭다.
“종가의 그 많은 가솔과 살림을 이끌어가려면 남자 이상으로 강하고 깊고 큰 카리스마를 지닌 구심점이 필요했을 거예요. ‘토지’의 서희나 ‘혼불’의 효원이 모두 그런 인물이죠. 그런 사람을 골라서 종부로 들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해봤어요. 하지만 대마다 그런 인물이 나올 수는 없고, 몇 대마다 그런 인물이 한 명씩 나와서 앞뒤 세대를 잇는 버팀목 역할을 했을 거예요.”
하지만 여례당 같은 종부의 모습은 요즘 좀처럼 찾기 힘들다. 은현의 모친이자 현재 계성재의 종부 홍림당은 며느리들과의 불화로 우울증을 앓는다. 홍림당의 며느리들은 교회에 다닌다는 이유로, 아이들을 데리고 유학을 갔다는 이유로 명절이나 제사 때 시집을 찾지 않는다.
“내 이익에 부합되지 않으면 가차 없이 버리는 세태를 반영한 거죠. 내 식구 외에는 아무도 돌보지 않겠다는 사람들도 많잖아요. 시부모는 내 식구에 포함되지 않는 거고. 우울증을 겪다 못해 치매를 앓는 홍림당은 부모와 자식 세대에 끼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우리 부모들의 모습이기도 하죠.”

일기 쓰는 습관, 다른 데 눈 돌리지 못하는 고집이 자산

스러져가는 한 세상, 아름다운 기록자 작가 송은일


스러져가는 한 세상에 관한 이야기를 이토록 웅숭깊게 풀어낸 작가가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 시작한 건 결혼해서 아이를 낳은 후인 서른 즈음. 작가라는 업에 꽂힌 건 중학교 1학년 때 아버지 책상에 놓여 있던 월탄 박종화의 5권짜리 대하소설 ‘자고 가는 저 구름아’를 읽고부터다. 소설 속 주인공인 정약용이 그렇게 멋져 보일 수가 없었단다. 그런 그가 여름방학 때 돌아다니던 잡지 쪼가리에서 ‘베스트셀러’라는 단어를 본 건 어쩌면 운명이었을지도 모른다. 베스트셀러 작가를 꿈꾸던 여중생은 길고 긴 습작과 무명의 시간을 거쳐 2000년 ‘여성동아’ 장편소설 공모에 ‘아스피린 두 알’이 당선되면서 등단했다. 비록 남들보다 시작은 좀 늦었지만 남들이 은퇴를 고민할 나이에 그의 작품 세계는 더욱 넓고 깊숙해졌다. 늦은 출발에 조바심을 내던 시기도 있었던 것 같지만 작가는 지금 자신의 모습에 아주 만족하는 듯했다.
작가가 꼽는 자신의 최고 자산은 끊임없이 끼적거리는 버릇이다. 작가를 꿈꾸던 순간부터 해가 바뀔 때면 두툼한 대학 노트를 사 일기를 쓰고 메모하는 습관을 들였다. 소설가가 돼야겠다고 마음먹었을 땐 이미 그 노트가 스무 권이 넘었다.
“어릴 때 글짓기 대회 나가서 상 한번 타본 적이 없어요. 그런 제 모든 열등감을 상쇄하는 한 가지는 끼적거리는 습관이었죠. 일기를 쓰기 위해서 메모를 하고, 하루를 산다고 느낄 때도 있었으니까요. 또 무엇을 하든, 어딜 가든 그것에 깊이 발 담그지 못하고, ‘나중에 작가가 되면 이렇게 써먹어야지’라는 연구를 많이 했던 것 같아요. 글 외엔 다른 곳에 눈 돌리지 않은 것, 자산이라기보단 고집에 가깝죠.”
하나뿐인 아들과는 어떤 엄마보다 많은 시간을 함께 보냈다. 더러 학교에 데려다주고 데리고 오는 일도 있었지만 공부하라고 닦달한 적도, 치맛바람 일으키며 학교를 들락날락한 적도 없다고 한다.
“나는 선생님을 찾아가서 내 아이 잘 봐달라고 부탁하고 그런 요령이 안 생기더라고요(웃음). 아이와 많은 시간 함께 있었던 건 맞지만 집안에서의 방치라는 것도 있으니까…(웃음).아이 인생은 아이 인생이고 내 인생은 내 인생이지, ‘나를 희생해서 아이를 어떻게 만들어보겠다’는 생각은 안 했어요.”
글에 빠져 있는 아내가 더러 섭섭하고, 마뜩찮던 남편도 이젠 은근히 글쟁이 아내를 자랑스러워하는 눈치다. 책이 나오면 가장 많이 사는 사람도 그의 남편이다. 그가 일주일에 며칠 집을 비우고 세설원에 나와 있는 것이 불편할 법도 한데, 이젠 그런 것도 작가 남편으로서의 당연한 의무인 양 받아들이는 여유가 생겼다고 한다. 시간이 갈수록 깊고 따뜻해지는 이 모든 것들이 작가 송은일에게 지금이 최고 전성기라고 말하는 듯하다.
“몸은 점점 물기가 빠져가는데 글쓰기는 이제 물이 오르는 것 같아요. 책이 얼마나 팔리느냐를 떠나서 내가 그릴 수 있는 세상에 대한 가능성이 커진다고 할까. 문을 열면 또 다른 세상이 펼쳐져서 그 안으로 들어가면 될 것 같은 느낌이에요. 글쓰기는 나이들어서 갑자기 시작할 수 있는 일은 아니지만 어느 시기를 통과해 내 나이 정도에 이른다면 한번 해봄 직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여성동아 2013년 10월 59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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