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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진격의 거인’으로 대박, 애니플러스 전승택 대표

High Age 애니메이션이란 바로 이것

글·진혜린 | 사진·지호영 기자, 애니플러스 제공

2013. 10. 15

올해 ‘단언컨대’ 못지않게 인구에 회자된 말이 ‘진격의 ○○’이다. ‘단언컨대’가 이병헌의 인기를 반영하듯, ‘진격의’ 또한 일본 만화 ‘진격의 거인’의 인기를 가늠케 한다. 마니아들의 심장을 들끓게 했던 이 만화가 대중의 시선까지 사로잡게 된 배경을 애니플러스 전승택 대표에게서 들었다.

‘진격의 거인’으로 대박, 애니플러스 전승택 대표


‘진격의 준하’ ‘진격의 모델’ ‘진격의 달팽이’ 어디든 ‘진격의’만 붙이면 진취적이고 저돌적이라는 의미를 담은 패러디가 완성된다. 코미디 프로그램에서도, 예능에서도 패러디가 쏟아져 나온다. 도대체 이 말은 어디서부터 시작됐을까?
MBC ‘무한도전’에서 단발머리 가발을 쓰고 괴성을 지르는 정준하의 모습에 ‘진격의 준하’라는 자막을 내보냈을 때, 기자는 IPTV의 리모컨을 눌러 5백원을 지불하고 ‘진격의 거인’ 1편을 플레이했다. 그것이 그날 밤을 하얗게 지새우게 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한 채. “한 편만 더, 한 편만 더”를 외치게 했던 그 강한 중독성. 탄탄한 스토리와 괴이한 거인의 등장은 졸음이 파고들 틈을 주지 않았다.
완결이 되지 않은 터라(‘진격의 거인’ 1기는 9월 29일 일요일에 마지막 25회가 방송된다) 그때까지 방영된 십수 편을 보고 나자 자연스럽게 다음 편성표를 검색하게 됐고, 그때 국내에서는 ‘애니플러스’라는 애니메이션 케이블 채널에서 독점 방영하고 있다는 사실과 재방송은 거의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됐다. 더욱이 일본 MBS에서 일요일 새벽 1시 58분 본방송이 시작되고, 우리나라에서 같은 날 밤 11시 30분에 ‘동시 방영’이 이루어진다는 사실도 알았다. 한국어 자막이 있는 ‘진격의 거인’을 볼 수 있는 가장 빠른 방법은 애니플러스. 그간 존재조차 인식하지 못했던 애니플러스의 존재감이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만화와 애니메이션에 빠진 어른들
애니플러스는 2009년부터 15세 이상 관람가 애니메이션을 방영하는 국내 유일의 하이 에이지(High Age) 애니메이션 채널이다. 다른 채널에서도 하이 에이지 애니메이션을 한두 편 정도 방영하기는 하지만 이 장르만 본격적으로 방영하는 것은 애니플러스가 유일하다. 이 채널에서 방영되는 애니메이션은 자극적인 소재와 복잡한 스토리 라인을 가지고 있어 마니아들의 사랑을 듬뿍 받아왔다. 보통 한 분야에 열중하는 사람을 ‘마니아’ 혹은 ‘오타쿠’나 ‘오덕후’ ‘덕후’라고 표현하는데, 이들은 대중문화로의 진입을 시도하지 않는다. 또 진입을 쉽게 허락하지도 않을 만큼 견고하고 결속력이 강한 문화이기도 하다.
‘진격의 거인’ 또한 그들의 세상에 속한 작품 중 하나였다. 하지만 2013년 4월, 애니플러스 전승택(37) 대표가 ‘진격의 거인’을 첫 방영할 당시 이변이 일어났다.
“일본에서 첫 방송되던 날, 한국에서의 방영을 앞두고 하루 종일 네이버 검색어 1위를 기록했어요. 이미 한국 방영 공고를 2주 전에 냈기 때문에 ‘애니플러스’도 많이 검색되고 있더라고요. 일요일이라 새롭게 올라오는 소식이 없어서이기도 했겠지만, 그만큼 원작이 한국에도 많이 알려져 있었고 애니메이션화되는 것에 대한 관심이 컸다는 이야기기도 하죠.”
‘진격의 거인’은 일본의 신예 작가 이사야마 하지메의 동명 만화를 원작으로 하고 있다. 작가의 처녀작이지만 신선한 소재와 캐릭터의 독특함에 큰 인기를 끌었다. 우리나라에서는 학산문화사에서 정식 수입, 출판되고 있다. 이 원작을 바탕으로 일본 MBS에서 애니메이션을 방영하고 있는 것. ‘진격의 거인’의 배경은 정체 모를 식인 거인들이 인간을 잡아먹는 세상이다. 상처가 자연 치유되는 거인은 쉽게 죽지도 않는다. 결국 멸망 위기에 처한 인류는 50m 높이의 성벽을 쌓고 수백 년을 살아간다. 식인 거인으로부터 인류를 보호하고 인류의 활동 영역을 넓히기 위해 거인과 맞서 싸우는 사람들이 ‘진격의 거인’의 주인공. 이들은 ‘입체기동장치’라는 장비를 이용해 줄에 매달려 날아가고, 괴상한 자세로 뛰거나 기는 거인들을 죽이기 위해 목숨을 건다.
“‘진격의 거인’은 마니아들에게 어필하는 작품이에요. 괴물의 등장이나 인류 멸망이라는 소재는 구미가 당기지만 설정과 구조가 복잡하고 너무 자극적이기 때문이죠. 최근 재난 영화가 인기를 끌고 있는 것처럼 예나 지금이나 인류가 위기에 빠지고 영웅이 등장하는 것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소재죠.”
사실, ‘진격의 거인’이 누구에게나 호평을 받는 것은 아니다. 19세 미만 관람 불가인 이 작품에 대해 거인이 사람을 잡아먹는 장면이 너무 잔인하다거나, 거인의 신체 일부가 잘려나가는 장면 등이 지나치게 리얼하다는 평도 적지 않다. 그래서 전 대표 또한 한국에서 대중적인 인기는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데 막상 뚜껑을 열고 보니 일본에서조차 한국에서의 인기에 놀랄 정도였다.

‘진격의 거인’으로 대박, 애니플러스 전승택 대표

애니플러스에서 4월 7일 첫방송된 ‘진격의 거인’.



“일본의 애니메이션 판도는 1년에 네 번의 분기로 돌아가요. 분기별로 많은 작품이 쏟아지고 그중에서 인기를 끌 만한 작품을 서너 편 선별해 수입합니다. ‘진격의 거인’은 만화책으로 먼저 접하고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진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당연히 수입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분기 중에서, 혹은 올 한 해 방영작 중에서 최고 인기를 끌 거라고 예상했거든요.”
예상대로였다. 재방송을 제외한 분기 당시 수입 작품은 일본 방영 후 2, 3일 안에 내보내는 ‘동시 방영’ 원칙을 고수해왔는데, ‘진격의 거인’ 팬들은 그조차도 허용하지 않았다. 초반 2편까지는 3일 후 방영하다가 결국 같은 날 방영하는 걸로 바꾸었다고. 하지만 그때까지는 어디까지나 ‘오타쿠’ 세상에서의 1인자였을 뿐이었다.
“진짜 ‘대박이다’ 싶은 반응은 ‘무한도전’에서 패러디 방송이 나간 이후부터였죠. 그때부터는 시청률도 애니메이션 채널 중 동시간대 1위가 됐어요. 보통 애니메이션 시청률은 1%만 돼도 엄청난 건데 매회 그 정도의 시청률이 나오고 있어요.”



‘덕력’이 곧 회사의 능력
전승택 대표는 ‘진격의 거인’의 인기 요인으로 소재의 대중성을 꼽았지만, 작품의 성공이 곧바로 애니플러스의 성공으로 이어진 데는 애니플러스가 그간 쌓아왔던 ‘덕력’(덕후가 가진 전문성과 능력)과 깊은 연관성이 있다.
대학원을 졸업한 후 JJ미디어웍스 네트워크를 공동 설립하며 일본 애니메이션 수입과 유통 사업을 해오던 전승택 대표는 2009년 생활경제티브이 SBN을 인수한 후 애니메이션 채널로 사업을 변경해 수입한 작품을 직접 방영하기 시작했다. 그때 절실하게 다가온 것이 바로 ‘덕력’이었다.
“저는 원래 취미로도 만화를 안 보던 사람이었어요. 동업자가 일본 애니메이션을 좋아했고, 저는 그냥 사업가일 뿐이었죠. 그래서 고객에 대한 이해가 너무 부족했어요. 시청자들의 요구와 불만 사항 중 신경 써야 할 것, 고쳐야 할 것을 골라낼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일명 ‘오타쿠’를 채용했죠. 아, 그런데 저희 시청자들은 그 용어를 별로 안 좋아하세요. 그냥 ‘하이 에이지 애니메이션 마니아’ 정도의 표현이 적당하겠네요.”
고객과의 커뮤니케이션 담당으로 2009년 채용된 오타쿠 직원이 박창호(29) 씨다. 그는 입사 이후 난도질당한 게시판을 말끔하게 정리해나갔다. 태초부터 오타쿠를 위한 채널이었기 때문에 그들을 만족시킬 수 있는 콘텐츠를 뽑아내야 했다.
“개국 당시 엔딩 곡이 끝나기 전 광고가 나간 후, 남은 엔딩 곡을 마저 틀어주었더니 난리가 난 거예요. 작품의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에 광고를 틀었다는 거죠. 수익성을 계산했을 때는 작품이 다 끝나기 전에 광고가 나가는 게 좋으니까, 시청자들의 요구가 황당했죠. 그런데 박창호 씨로부터 이유를 듣고 나서는 엔딩 곡이 완전히 끝난 다음 광고를 송출하기로 했어죠(웃음).”
박창호 씨 이후 신미래(25)·주승현(25) 씨 두 명의 오타쿠가 더 채용됐다. 이들은 고객 커뮤니케이션 외에 작품 감수, 작품 선정 등의 주요 업무를 수행하고 있다. 그 밖에 주 시청자를 만족시키기 위해 애니플러스가 선택한 것은 ‘동시 방영’과 ‘자막 방송’이다. 음지에서 불법 복제물이 돌아다닐 여유를 주지 않기 위해 일본 본방 직후 한국에서 방송하는 것. 성인을 타깃으로 하기 때문에 당연히 더빙보다 ‘자막’이 더 인기를 끌 것이지만, 동시 상영 법칙에 맞추려면 더빙 자체가 불가능하다.

‘진격의 거인’으로 대박, 애니플러스 전승택 대표

박창호·신미래·주승현 씨. ‘덕후’로는 밤을 새워 애니메이션을 봐왔지만 막상 덕후를 직업으로 삼으려니 예전같지 않단다. 애니플러스의 전문성을 책임지는 주요 인력들이다.



“‘진격의 거인’은 일본 방송을 앞둔 토요일에 영상을 받기로 계약돼 있는데 이보다 늦게 받을 때가 많아요. 그렇게 되면 자막 작업이 방송 시간에 임박해서 끝나는 경우가 많죠. 지난주에는 아예 일요일 아침까지 받지 못해 등골이 오싹했어요. 영상을 받은 뒤 우리가 해야 할 작업이 많아요. 1차적으로 번역자가 번역을 하면 우리 직원들이 감수해서 애니메이션 상황과 맞는지 분석하죠. 가끔은 ‘지진 속보’ 같은 일본어 자막이 함께 딸려올 때가 있어서 그것도 걷어내야 하고, 일요일이 가장 바빠요. 워낙 시청자들의 눈이 예리해서 작은 실수도 용납하지 않거든요(웃음).”
이렇게 탄탄하게 쌓아놓은 덕력이 있었기에 예고도 없이 찾아든 ‘비오타쿠 손님’ 또한 만족시킬 수 있지 않았을까? 이는 애니플러스의 매출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어림잡아 예상보다 다섯 배의 수익을 올린 것 같아요. 수익도 그렇지만 애니플러스의 존재를 알리는 계기가 된 것은 분명하죠. ‘진격의 거인’ 성공 이후 아침마다 하는 일이 하나 생겼어요. 사무실에 오자마자 두 개의 키워드를 검색해보죠. ‘진격의’와 ‘애니플러스’예요. 오늘은 또 어떤 패러디가 나왔을까도 궁금하지만 그로 인해 저희 방송을 찾아보는 분들도 많아졌으니까요.”

‘진격의 거인’으로 대박, 애니플러스 전승택 대표

‘진격의 거인’을 통해 오타쿠 문화와 대중문화의 교집합을 발견했다고 말하는 전승택 대표.



‘진격의 거인’ 성공은 기회다
시청률보다 매출액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은 IPTV·VOD 수익이다. 광고 수익과 수신료도 있지만 IPTV와 VOD 시장의 규모가 커지면서 애니플러스처럼 차별화된 콘텐츠를 수입, 유통하는 업체들에게 큰 수입원이 되고 있다. 본방송만큼 돈을 기꺼이 지불하고 콘텐츠를 시청하는 사람들도 많다는 이야기다.
매출이 올랐다는 것은 또 다른 경쟁의 예고이기도 하다. 그간 대중의 관심 밖에 머물던 오타쿠의 세상에 시선이 집중되고 있다.
“예전에는 경쟁 방송이 없다 보니까, 초기에 관심을 받지 못했던 작품들도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리면 결국 보시더라고요. 하지만 이제부터는 상황이 달라지겠죠. 국내 다른 애니메이션 채널에서도 하이 에이지 애니메이션 수입을 서두르고 있으니까요. 당장 10월부터 가을 분기 작품을 방송해야 할 텐데, 작품을 판단하는 기준이 비슷하다 보니 결국엔 판권료가 오르고 있어요. 하지만 대중과의 접촉이 늘어날수록 시장이 더욱 확대돼 결과적으로는 서로 상생하는 상황이 올 거라고 생각해요.”
‘진격의 거인’의 성공을 통해 배운 것도 많다. 서로 공통분모를 찾을 수 없을 것 같던 오타쿠 문화와 대중문화의 교집합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는 한정된 마니아층만 타깃이었다면 이제는 조금 더 고객층을 확장시킬 수 있으리라는 자신감이 생겼어요. 애니메이션의 색깔을 유지하면서 대중문화와 교집합을 가진 작품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거죠. 그러한 작품을 골라내 방영하면서 시장을 확장해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가을 시즌에 마련한 카드는 스포츠 애니메이션. 스포츠만큼 대중성을 확보한 소재도 드물지만, 애니플러스만의 장점인 ‘덕력’도 빠지지 않을 작품을 선정 중이다.
“‘진격의 거인’ 성공 하나로 하이 에이지 애니메이션이 대중화될 거라고 기대하지는 않아요. 대부분의 작품이 ‘오타쿠의 세계’로 입문해야 소화가 가능하니까요. 작품을 대중에게 억지로 끼워 맞출 수는 없어요. 다만 대중의 구미를 자극할 수 있는 작품을 선정할 수 있는 자신감이 있는 거죠. 앞으로 일본 애니메이션에 국한되지 않고, 한국 애니메이션에도 관심을 기울일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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