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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임동창 나뭇가지 끝에서 헤매는 인생, 뿌리 찾으면 진정한 행복 누린다

글·진혜린 | 사진·지호영 기자, 동아일보 사진DB파트

입력 2013.07.16 14:01:00

유수의 음악 대학 졸업, 세계적인 콩쿠르 입상, 아무나 설 수 없다는 공연장에서의 연주회 경력으로도 버티기 힘들다는 음악계.
그런데 임동창은 그 흔한 입상 경력 없이도 ‘천재’ 소리를 듣는다.
그 이유는 오롯이 그가 빚어낸 음악과 살아온 인생 안에 들어 있다.
그냥, 임동창 나뭇가지 끝에서  헤매는 인생, 뿌리 찾으면 진정한 행복 누린다


음악에 관심 있는 사람들은 임동창(57)을 더 잘 알 테고, 요리나 살림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은 ‘살림의 고수’이자 한복 디자이너인 이효재를 더 잘 알 것이다. 전자는 임동창의 아내 이효재라 부르고, 후자는 이효재의 남편 임동창이라고 부른다. 기자는 후자였다.
더욱이 이효재의 남편이란 사람은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로 산 따라 물 따라 방랑하는 예술가라, 몇 달에 한 번씩만 얼굴을 볼 수 있는 ‘별난 남편’이라 알고 있었다. 기인이고 괴짜라는 소문도 들었다. “베토벤 뒤진 지가 언젠데 그러고 있어. 니 맘대로 쳐!”라고 할 만큼 배짱도 화법도 통쾌한 사람이란 것도. 피아니스트인지 국악인인지 작곡가인지 장르도 불분명하지만 세 가지 모두 다 부합하는 사람이란 것은 알고 있었다. 그러다 새삼 깨달은 것이, 정작 그의 음악은 들어본 적 없다는 사실이었다.
최근 발간된 그의 자전적 에세이 ‘노는 사람, 임동창’을 읽으면서 모바일 음원 사이트를 통해 그의 음악을 처음 접하고 적잖이 놀랐다. 1993년 발매한 첫 창작 음반 ‘신아위’로 시작해, 이효재를 위해 작가 이외수가 지은 시를 모티프로 직접 작곡하고 연주한 ‘효재의 꿈’과 ‘달하’를 이어 듣고, ‘이 뭐꼬?’ 시리즈를 비롯한 그가 작곡·연주한 음악을 듣고 나니 임동창이 다시 보이기 시작했다. 그가 시도한 서양 클래식과 국악의 만남은 단순한 장르의 변형, 즉 편곡이나 악기의 교차 활용으로 크로스오버하는 한계를 벗어나 있었다. 지금껏 그의 음악을 모르고 살았다는 게 더 신기할 만큼, 음악적 감성이 메마른 기자에게도 깊은 울림을 전해주었다.

16시간씩 피아노만 치던 소년
음악인으로서 임동창의 태생은 피아니스트다. 중학교 2학년 어느 날 불현듯 학교 음악실에서 피아노를 치기 시작했다. 음악 시간에 음악 교사가 치는 피아노 선율이 마치 벼락처럼 혹은 신이 내리듯 몸속으로 들어와버렸다고 그는 표현한다.
하지만 점심 도시락도 싸가지고 다니지 못할 만큼 가난한 그에게 피아노는 사치였다. 장남인 그가 초등학교 6학년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어머니가 홀로 공장에 다니며 5남매를 키웠다.
“말할 수 없이 가난했지만 그늘지거나 하지는 않았어요. 찌들거나 어둡지 않았던 거죠. 돈이 없어서 마음고생 하고 상처받을 수 있었을 텐데, 삶이라는 게 이렇구나, 세상이라는 게 이렇구나 하는 고민을 어렸을 때부터 했던 것 같아요. 그 또래보다 가난을 맞이하는 감각에 깊이가 있었던 거죠. 가난해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데도 돈 있는 아이들만 할 수 있는 것도 막 해보고 그랬어요. 피아노를 가질 수 없었고 레슨비도 낼 처지가 아니었지만 피아노를 가진 그 어떤 사람보다 열심히 피아노를 칠 수 있거든요. 그래서 가난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고, 그 반대로 부유함에도 아무런 의미가 없을 거라고 생각했죠.”
그의 말처럼 꼭 돈이 있어야만 피아노를 배울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음악 교사를 조르고 졸라서 음악실 열쇠를 받았고, 몇 날 며칠을 피아노 앞에서 살다시피 했던 것이 피아노와의 첫 만남이었으니까. 레슨은 언감생심 꿈도 꿔보지 못했지만 헌책방에서 ‘바이엘 교본’을 사서 독학으로 피아노를 익혔다.
“하지만 아무리 연습해도 음반에서 들었던 소리를 낼 수 없었어요. 그때 찾아간 곳이 군산에서 최고 부자들이 모여 산다는 월명동이었어요. 그 일대를 돌아다니다 보니 한 집에 피아노 책을 든 아이들이 많이 오가더라고요. 용기를 내 그 집에 들어갔더니, 한 달 레슨비가 3천원이래요. 살아생전 아버지 한 달치 월급과 맞먹는 돈이었어요.”

그냥, 임동창 나뭇가지 끝에서  헤매는 인생, 뿌리 찾으면 진정한 행복 누린다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집으로 돌아와 어머니를 졸랐다. 놀랍게도 어머니는 아무 말 없이 3천원을 아들에게 건네주었다. 하지만 그 3천원이 임동창에게는 처음이자 마지막 레슨비였다. 그의 가정 형편을 눈치 챈 교사가 더는 레슨비를 받지 않겠다고 한 것. 그렇게 눈 뜨면 피아노를 치고 연습이 끝나면 눈을 감는 생활을 했다.
고등학교 2학년이 되자 아예 학교도 그만두고 피아노 연습하러 다녔던 교회에 들어가 먹고 자며 피아노만 쳤다. 페달에 구멍이 나고 건반이 뒤틀릴 만큼, 현 때리는 해머가 닳아 양털 가루가 바닥에 몇 cm씩 쌓일 정도였다. 한번 피아노 앞에 앉으면 16시간 정도는 화장실도 가지 않고 피아노를 쳤다. 피아노를 치는데 누가 음료수를 주기에 입으로 받아먹으면서 친 적도 있다. 가난도 슬프지 않았다던 그를 무엇이 그토록 치열하게 만들었을까.
“타고난 성격이 그런 것 같아요. 밥 하나를 먹어도 사람들은 이 반찬 저 반찬 골고루 먹던데, 저는 딱 한 가지만 있어도 밥을 먹을 수 있거든요(웃음). 원래 뭐 하나 하면 다른 것에는 관심을 안 가져요.”
그는 별일 아니라는 듯 말했지만, 그가 무엇인가에 몰입했던 시간을 질적으로 평가해보자면 단순히 ‘집중’이라는 말로는 부족했다. 자기 자신, 더 나아가서는 자기 목숨도 잊을 만큼 몰입된 상태. 그것은 깨달음의 경지에서나 맛볼 수 있다는 몰아의 상태다. 임동창은 완벽한 몰아의 상태에 도달했을 때, 연습과 연주 기법, 형식과 경계와 틀이 사라지고 완벽하게 ‘자유로운 연주’를 할 수 있다는 것을 피아노를 만난 지 5년 만에 깨달았다고 했다.
보통 자신에게 어떠한 가능성을 발견하면, 자신이 목표로 삼는 모습을 상상하기 마련이다. 피아니스트라면 적어도 유명한 연주자가 되거나 교수가 되는 꿈을 꿀 것이다. 하지만 임동창은 그런 눈에 보이는 꿈을 좇지 않았다.
“피아노를 치다 보니 다른 사람 곡을 흉내 내는 게 아닌, 내 음악을 내가 연주해야 진짜 음악이라는 것을 깨닫았어요. 그런데 아무리 기술적인 작곡 공부를 해도 뭐가 진짜 내 음악인지 모르겠더란 말입니다. 내 음악을 만들려고 하는 나는 과연 누구냐 하는 거예요.”
이미 첫사랑을 만났던 고등학교 1학년 때, 주체할 수 없이 터져나오는 악상으로 작곡을 시작했지만 진짜 자신의 음악을 완성했다는 느낌을 받을 수 없었다.
그 깨달음을 찾고자 하는 절박함이 그를 피아니스트나 작곡가와는 전혀 상관 없어 보이는 인생의 길로 인도하기 시작했다. 보이지 않는 자신의 실체를 찾으려고 출가를 결심했던 것. 그의 나이 스물한 살 때 인천 용화사로 가서 머리를 깎았다. 9개월간 행자 생활을 한 후 사미계를 받았다. 그가 찾는 것은 ‘나는 누구인가’를 의미하는 ‘이 뭐꼬?’였다. 진짜 자신의 음악을 찾기 위해 피아노니 작곡이니 하는 음악은 딱 끊고 복식호흡과 수식관을 배우며 공양주로 수행을 쌓았으니, 이 얼마나 아이러니한 일인가. 하지만 그는 끝내 비구계를 받지 못하고 정식 승려가 되지는 못했다. 가정 형편상 면제된 줄 알았던 병역의 의무였건만 그의 출가를 반대했던 친인척과 지인들에게 등 떠밀려 입대를 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그의 ‘이 뭐꼬?’를 찾는 여정은 입대 후에도 멈출 줄 몰랐다.
“군대에서도 ‘이 뭐꼬?’를 찾으려고 탈영까지 했으니까요. 휴가받아 나왔다 사망신고하러 시청에도 갔었죠. 멀쩡히 살아 있는 사람이 직접 사망신고를 하러 갔으니 받아줄 리가 없죠. 그게 안 되니까 숨어 살려고 마음먹었다가 귀대 날짜를 넘기고 말았어요. ‘3년 군 생활도 못 하는데 평생 중노릇 하겠느냐?’는 큰스님 말씀에 귀대하고 영창에 있다 헌병대 감옥까지 갔죠.”
하지만 여전히 그의 ‘이 뭐꼬?’는 풀리지 않았다.
“제대를 하고 다시 절에 들어가려는데, 그때 첫사랑을 다시 만났어요. 스물여섯 살 때까지 연애 한 번 못 해본 남자가 사랑을 하게 됐으니 얼마나 열정적이었겠어요. 하지만 2~3년 만에 허무하게 끝났죠. 그러고는 다시 할 일이 없어진 거예요. 여전히 풀지 못했던 ‘나는 누구인가’에 다시 매달렸죠.”



서른을 바라보는 나이에, 그는 여전히 눈에 보이지 않는 ‘이 뭐꼬?’를 찾아 헤매는 가난한 음악인이었다. 요즘 작곡가들은 어떤 방식으로 곡을 만드는지 궁금해진 그는 서울시립대 최동선 교수에게 제대 후 썼던 작품들을 한 보따리 들고 찾아가 ‘제자로 받아달라’고 간청했다. 그의 재능을 높게 산 스승은 대학생도 아닌 임동창을 제자로 받아줬다. 그렇게 1년여를 공부하다 결국 스승의 권유에 못 이겨 서른 살에 학력고사를 치르고 서울시립대 작곡과에 입학했다. 그의 인생은 그렇게 ‘음악’이라는 하나의 큰 화두로 물고 물리며 흘러갔다.

깨달음, 그것은 뿌리를 찾는 것
대학생이 되니 졸업 전부터 그에게 수많은 기회가 열리기 시작했다. 오페라도 하고, 지휘도 하고, 연극 음악도 하고, 종종 방송에도 출연했다. 하지만 그게 전부였다. 그것이 그의 허전한 깨달음의 욕구를 채워주지는 못했다. 그 허전함은 수많은 국악인을 만나면서 조금씩 채워져 갔고, 그의 음악도 양악과 국악의 접목으로 이어졌다. 1993년 ‘신아위’를, 1995년 ‘천국인간’을 발표하고 1995년 서울 종로구 연강홀에서 첫 독주회를 열며, 그의 진가가 일반인에게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가 세간의 큰 주목을 받은 것은 2000년 EBS 기획 시리즈 ‘임동창이 말하는 우리 음악’을 통해서였다. 전편 김용옥 선생의 ‘노자와 21세기’를 주제로 한 강의를 이어받아 16회 동안 방송했는데,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그의 방송이 EBS 시청률을 올리는 데 한몫할 정도로, 말 그대로 스타 강사가 됐다. 괴짜니, 기인이니 하는 말도 그때 생겨났다. 이제는 음악가로서 탄탄대로만 남아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그는 방송이 끝난 직후 이 모든 화려함을 내려놓고 다시 머리를 깎고 칩거에 들어갔다.
“나이는 먹었고, 아직 풀지 못한 숙제는 있잖아요. 사회적인 성공을 추구했을 때 내가 행복해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됐어요. 내 내면에 어둠과 찝찝함이 없어야 행복을 느끼거든요. 그 일의 규모와 상관없이 실마리를 풀 수 있는 이치를 발견하지 못했을 때 불행을 느껴요. 내 내면이 밝아지지 않으면 불행할 거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는 거죠.”
10년이 지나 그는 숙제를 풀고 드디어 ‘깨달음’을 얻었다고 했다. 그렇게 태어난 것이 ‘허튼가락’. 허튼가락은 우리나라 민속음악에 속하는 기악 독주곡 형태를 뜻하는 산조의 또 다른 말이다. 하지만 임동창의 ‘허튼가락’은 조금 다르다. ‘허튼’은 ‘흐트러진’이란 뜻이며, ‘허튼가락’은 시공의 틀을 벗어나 부드럽게 이완되는 자유로운 음악을 뜻한다. 그는 새로운 개념의 악기도 만들었다. 피아노와 가야금을 접목한 ‘피앗고’다. 이 모든 것은 그동안 그가 짊어졌던 무거운 숙제를 풀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숙제를 풀고 나니, 세상에 다시 태어난 것처럼 홀가분하고 기쁘다는 임동창.
“한편으로는 다행이고, 한편으로는 참 불쌍해요. 나름대로 숙제를 풀고 나니, 별것도 아닌 것을 오랜 세월 동안 초연하게 살지 못하고 그것을 풀어보려고 갖은 애를 썼던 것이 불쌍하고, 다행인 것은 비록 별것은 아닌 것 같지만, 그리고 실제 별것 아니기도 하지만 이마저도 모르고 사는 사람이 너무나 많은데, 내 나름대로 풀고 나니 정말 좋은 거죠. 예전에는 뭘 해도 개운치 않고, 뭘 해도 찝찝하기만 했거든요.”
깨달은 후 무엇이 달라졌을까? 그가 한 가지 예로 들려준 이야기.
“저도 예전에는 첫사랑과 헤어지고 두 달간 술로 살았어요. 그것이 슬픔을 맞이하는 저의 태도였던 거죠. 술이 아니면 견딜 수가 없으니까. 그런데 이제는 슬픔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지는 거예요. 예를 들어 슬픔이 왔다고 봅시다. 그것이 사람에 대한 불편한 마음일 수도 있고, 미워하는 감정일 수도 있어요. 그럴 때 누구는 상대방을 향해 그 감정을 폭발시킬 수도 있고, 누구는 꾹꾹 안으로만 눌러 담아 참을 수도 있어요. 그런데 저는 그걸 그냥 보는 거예요. 슬픔하고 그냥 같이 있는 거죠. 그러다 보면 자연스럽게 흘러가요. 감정을 표현하지도 않고, 참지도 않아요. 그냥 있는 거예요. 그냥 보는 거야. 그게 어려워 보이죠? 자, 여기 컵이 있어요. 이건 둥그렇고, 그림이 그려져 있고, 색깔은 어떻고 하는 게 있어요. 그런 것이 마음에 들 수도 있고, 싫을 수도 있어요. 하지만 그런 걸 생각하지 않고, 하나하나 따지지 않고 그냥 컵을 보는 거예요.”
그가 시키는 대로 따라 해보고 싶었지만 도저히 갈피조차 잡을 수 없었다. 이게 가능하냐고 했더니 “많은 사람을 대상으로 이미 임상실험을 거쳤다”며 호탕하게 웃는다.
“하면 다 돼요. 이걸 알게 되면 내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부정적인 생각을 밝은 쪽으로 끌고 갈 수 있는 좋은 기술 하나를 익히는 거예요. 인생의 기쁨과 슬픔은 사람이 범접할 수 없는 부분이라 생각하기 쉽지만, 저는 훈련을 통해 자신의 삶을 개척해나갈 수 있다고 생각해요.”

임동창의 또 다른 이름, ‘풍류학교’
어찌 보면 뜬구름 잡는 도인처럼 보이지만 그의 뜻을 따르는 사람은 의외로 많다. 더욱이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거나 음악을 배우려는 젊은이들이 그의 곁을 지키며 배우고 생활하는 ‘풍류학교’는 최근 KBS1 ‘다큐 공감-절로, 절로 저절로’ 편에 소개되기도 했다. 음악가가 운영하는 학교라면 음악을 가르치는 곳이겠거니 싶었는데, 그것도 아니다. 음악보다 인생을 먼저 알아야, 자기 자신을 먼저 알아야 진정한 행복과 자유를 누릴 수 있다는 것. 그것이 아이들 사이에서 ‘덕궁할배’로 불리는 임동창이 가르치고 싶은 전부라고 했다.

그냥, 임동창 나뭇가지 끝에서  헤매는 인생, 뿌리 찾으면 진정한 행복 누린다


“방송 끝나고 학부모들이 엄청 전화를 하더라고요. 우리 아이도 보내고 싶다고…. 지금까지는 인연이 닿는 대로 자기네들끼리 모여서 자기네들끼리 돈 모아 생활하고 그랬어요. 아무리 집에 가라고 해도 안 가고 붙어 있는 거예요. 제가 데리고 사는 게 아니라 아이들이 저를 데리고 사는 거죠. 시간표 같은 걸 정하거나 수업이 있거나 그런 것도 아니고, 레슨비를 받는 것도 아니거든요. 레슨비를 받으면 내 의지대로 못 가르치니까.”
그의 제자들은 음악을 배우러 왔다가 그림을 그리게 된 사연, 공부와는 담을 쌓고 살다 공부의 의미를 찾게 된 사연, 말썽꾸러기에 반항기 많던 아이가 제 갈 길을 걷게 된 사연 등을 제각각 가지고 있다. 그가 ‘풍류학교’ 학생들과 함께 거주하는 전북 남원의 한옥집 또한 그러한 사연을 가진 제자의 부모가 빌려준 집이다.
“자기 삶인데도 자기 의지대로 살아갈 수 없는 아이들이 많아요. 그런데 저를 만나고 나서 자꾸 자기 자신을 보게 되는 거죠. 피아노를 배우러 왔다 결국에는 자신의 길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도 공부거든요. 우리는 모두 나뭇잎 끝에 매달려 살고 있어요. 그 나뭇잎이 시들면 나뭇잎에 물을 주고 햇볕을 쬐어주려고 하죠. 그런데 사실은 나뭇잎이 달려 있는 가지, 그 가지가 달려 있는 줄기, 그 줄기를 버텨주는 뿌리까지 들어가야 나뭇잎이 잘 자라거든요. 하지만 그 안으로, 가지 안으로 들어가기가 힘든 거죠.”
가지 안으로 들어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물었다. 지금 자신을 둘러싼 불행, 슬픔, 스트레스, 고통의 실체를 하나하나 들여다보는 것. 그것을 제거하거나 극복하거나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하나하나 그 실체를 인정하는 것. 그것을 매일같이 반복하다 보면, 그것을 바라보는 내 자신이 결코 불행을 불행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내공이 쌓인다. 그것은 불행과 공존하면서도 진정으로 행복해질 수 있는 방법이라고 했다.
현재는 공간의 문제로 더 이상 ‘풍류학교’ 학생을 늘릴 수 없는 상황이다. 하지만 올해가 가기 전에 완주로 그 터전을 옮겨 규모를 키울 생각이다. 공식적인 학교로서 틀을 갖추고 본격적으로 ‘풍류학교’를 운영할 계획도 있다.
그와 만나던 날, 그는 KBS1에서 7월 17일부터 방송될 ‘K-Sori 악동’ 촬영차 서울에 머물러 있을 때였다. 기존의 서바이벌 형식에 다큐멘터리 성격이 가미된, 국악인 발굴 프로젝트. 임동창은 아이들 15명을 총감독하는 교장 역할을 맡았다.
“예전 같았으면 큰소리 떵떵 치면서 가르치려고 들었을 거예요. ‘조금 아는 것은 아는 게 아니다. 많이 안다는 것은 더더군다나 아는 것이 아니다. 내가 모른다고 존재하지 않는 게 아니야. 내가 안다고 그게 진짜가 아니다.’ 그러니까 가르칠 게 없는 거지. 가르칠 것은 없고 자신 안에 있는 것을 깨어날 수 있게 하는 게 스승인 거지. 모든 아이가 다 천재인데, 뭘 더 가르치겠어요.”

사랑하는 각시, 이효재

깨달음을 위한 10년의 세월. 그리고 이제는 풍류학교 학생들과 일상을 보내고 있는 임동창. 그 한가운데에는 그의 아내 이효재가 있다.
“각시는 끊임없이 일을 해요. 한두 달에 한 번씩밖에 못 보는데, 저를 만나서도 일만 하거든요. 차 마시면서 이야기 좀 하자고 하면 안 와. 억지로 끌어당겨서 앉혀놓으면 앉아서도 일을 해. 뜨개질을 하거나 바느질을 하거나. 차가 식으면 홀랑 마셔버리고 일만 하거든. 그러니까 손 나이가 백 살이라잖아요. 그걸 보면 미안하고 안쓰럽고 그러죠.”
사실, 그게 무슨 부부랄 수 있을까 싶었다. 친구나 애인이라고 하는 게 더 어울릴 것 같은 느낌. 애시당초 결혼할 때 임동창이 ‘결혼하자’며 이효재에게 받아둔 다짐을 떠올려보면 더욱 그렇다. 첫째는 ‘결혼해 살아도 서로 코 꿰지 말고 자유롭게 살자. 나는 내 맘대로 살 테니, 그대도 그대 맘대로 살아라’였고, 둘째는 ‘나는 지금 공부에 몰두해야 하기 때문에 공연하러 다닐 여유가 없다. 그러니 당분간 돈을 못 벌 거다. 난 하루 세 끼 밥만 먹으면 되는데 나 밥 먹고 살게 해달라’는 거였다. 기러기 아빠와 비교해봐도 별난 부부 모습이다. 그렇다면 그에게 결혼이란 어떤 의미일지 궁금했다.

그냥, 임동창 나뭇가지 끝에서  헤매는 인생, 뿌리 찾으면 진정한 행복 누린다

‘살림의 고수’로 불리는 한복 디자이너 이효재. 떨어져 살지만 늘 생각만 해도 설레는 각시다.



“결혼이란 걸 하게 되면 이혼하기 전까지는 의리로 뭉쳐 있는 유일한 친구라는 거죠. 이 세상에서 하나밖에 없는 내 파트너. 내가 어려우면 이 친구가 도와줄 거야, 저 친구가 어려우면 누구보다 내가 먼저 가서 도와줘야지 하는 끈끈함. 우리는 자식이 없어서 더 그런 것 같아요.”
두 사람의 만남도 독특했다. 그들이 처음 만난 것은 14년 전, 그가 막 머리 깎고 깨달음을 얻으려고 몸부림칠 때였다. 충북 보은에 위치한 약 10만㎡(3만 평) 규모의 99칸 집인 ‘선병국 가옥’ 집 아이가 임창동 밑에서 공부했는데, 그 아이 엄마가 소개해준 사람이 바로 이효재였다. 이효재는 가끔 자신의 남편을 처음 만났을 때를, “머리는 빡빡 밀었고, 맨발에다 입은 옷은 남루하고 제자들이랑 오글오글 사는데, 청소도 안 해서 다시는 안 와야지 했다. 소개해준 언니가 두 달만 만나보라고 해서 두 달을 만나보니 모성본능을 자극하더라”고 얘기하곤 했다.
두 사람이 결혼하게 된 계기는 독특했다. 남들은 연인끼리 돈거래 했다 헤어지는 경우가 다반사인데, 오히려 이 두 사람은 그게 깊은 인연을 맺게 해준 계기였다고. 임동창은 제자들과 생활할 때 강의를 나가거나 공연을 해서 번 돈으로 살았는데, 한번은 생활비가 떨어져 당시 이화여대 부근에서 한복집을 하던 이효재에게 4백50만원을 꿨다. 마침 공연해서 번 돈으로 갚을 기회가 왔는데, 엉뚱하게도 그 돈을 뒤풀이에 쓰라고 공연 기획자에게 얹어준 것. 이효재는 ‘물렸다’고 하지만, 한편으로는 돈 앞에서 당당한 남자로 보였다고 했다. 임동창 또한 자신의 거친 모습 뒤에 숨은 순박함을 알아주는 여자가 좋았단다.
“처음에는 보통 사람들처럼 같이 살았어요. 그때 신혼살림을 담은 책이 ‘효재처럼’이거든요. 그런데 살다 보니 각시도 독특하고 나도 그랬던 거예요. 각시도 자유롭지 못하면 숨을 못 쉬는 사람이고. 결혼하면서 내 뒷바라지하고 살림만 하겠다고 했는데, 살아볼수록 이 사람이 천재인 거라. 그래서 ‘아, 이 사람이 나 한 사람을 위해 자기의 삶을 소멸하게 해서는 안 되겠구나’ 하는 것을 알았죠. 많은 사람과 나누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는 결혼은 자칫하면 ‘두 사람이 나란히 걸어 들어가는 합장묘’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특히 자신들처럼 나이 들어 결혼하고 아이가 없다면 더욱 일반적인 부부처럼 서로를 옭아매려 할수록 그렇게 될 수 있다고 했다. 자신들 처지에 맞게 자유롭게 사는 것이 이들 부부의 사랑법이었다.
“제가 이렇게 서울에 와 있어도 얼굴 볼 새가 없어요. 각시도 바쁘고 저도 바쁘니까. 얼굴을 볼 수 있을 때라면 제가 공연을 할 때나, 아니면 제가 사는 남원으로 각시가 내려올 때죠. 전화는 수시로 해요. 중요한 일이 있으면 바로바로 전화하고요. 특히 각시가 중요한 일이 있으면 꼭 저한테 상의하고요. 그게 부부죠. 뭐 별거 있나요. 나는 어디를 가면 간다 연락하고, 집에 들어오면 들어왔다고 보고하죠. 그게 중요해요. 보고하는 거(웃음).”
이제 결혼 14년 차에 접어든 이 부부는, 남들이 보기에 별나고 독특해도 14년을 변함없이 서로에 대한 마음을 확인하고 사랑하는 것만큼은 보통의 부부와 다를 것 없어 보였다.
“각시가 참 변함이 없어요. 처음의 마음이 시간이 갈수록 변질되는 사람이 아니거든요. 우리처럼 이렇게 떨어져 있으면 마음이 멀어지는 것을 금방 알게 되거든요. 서로의 마음은 서로가 가장 잘 알잖아요. 그런데 그런 게 전혀 없어요. 중요한 건 나한테만 그런 마음을 갖는 게 아니라는 거예요. 너는 내 것, 나는 네 것 하면서 서로에게만 잘해주는 것은 좋지 않아요. 다른 사람한테도 그렇게 잘해야죠. 실질적으로 모든 사람에게 다 잘할 수는 없겠지만 다른 사람을 귀하게 여기는 마음 자세는 아주 중요한 거죠. 그런 게 각시의 최고의 매력이라고 생각해요.”
임동창은 사람들이 기인이라고, 괴짜라고 부르지만 자신은 ‘평범한 사람’이라고 했다. 어쩌면 그의 눈에는 외적인 가치에만 매달려 살고 있는 현대인의 모습이 더 기이해 보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몇 년 전 기사를 검색해봐도, 그는 늘 검은색 티셔츠에 통이 넉넉한 바지를 입고 맨발이었다. 멋을 내는 거라곤 잘 어울려서 민둥산을 만든 헤어스타일뿐. 그는 세상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가 아닌, 스스로가 만들고 좇아왔던 인생의 가치 앞에 이제는 자유로워졌다고 말한다. 그래서 그는 피아니스트 임동창도, 작곡가 임동창도, 국악인 임동창도 아닌, 그냥 임동창이다. 실제 그의 호가 ‘그냥’인 것처럼.

참고도서·‘노는 사람, 임동창’(문학동네)

여성동아 2013년 7월 59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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