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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호 다시 ‘촌놈’으로 살아보니

“소중한 것 내려놓자 더 큰 세상 보이더군요”

글·김명희 기자 | 사진·지호영 기자, 웅진지식하우스 제공

입력 2013.07.16 10:47:00

야구선수로 승승장구할 땐 박찬호가 단지 공만 잘 던지는 사람인 줄 알았다.
그런데 은퇴 후 그가 출연한 방송 프로그램 ‘땡큐’ 등을 통해 화려한 겉모습 뒤 얼마나 많은 좌절과 고민을 했는지, 그 덕분에 얼마나 성장했는지 가슴으로 느낄 수 있었다.
박찬호가 멋진 이유는 성공해서가 아니라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이다.
박찬호 다시 ‘촌놈’으로 살아보니


지난해 11월 박찬호(40)의 은퇴식 풍경을 잊을 수 없다. 덩치는 산만한 남자가 눈물 콧물 섞어가며 펑펑 우는 모습을 보며 그가 정말 야구를 사랑했다는 걸 새삼 느꼈다. 그렇게 좋아하는 일을 그만두면 허전해서 어떡하나, 운동선수는 생활인으로서는 젬병이라는데 야구밖에 모르는 박찬호가 이 험난한 세상을 잘 헤쳐갈 수 있을까, 오지랖 휘날리며 그런 걱정까지 했다.
하지만 SBS 예능 프로그램 ‘땡큐’에 출연한 박찬호를 보고 그런 걱정이 그야말로 기우라는 걸 깨달았다. 예상 밖의 앙증맞은 포즈로 귀요미송을 부르는 그는 세상에 둘도 없는 좋은 아빠였고, 번지점프를 할 땐 두려움을 모르는 모험가였으며, 여럿이 함께하는 자리에서는 ‘배려의 아이콘’이라는 유재석보다 겸손했고, 혜민 스님, 이해인 수녀, 차동엽 신부 등 멘토를 찾아다니며 인생의 답을 구할 땐 구도자 같았다.
쓸데없는 걱정을 거두고, 그의 다음 행보를 기대하던 차 박찬호가 자서전 ‘끝이 있어야 시작도 있다’(웅진지식하우스)를 펴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야구선수로서의 과거를 정리하고, 새로운 미래를 설계하겠다는 의지가 읽히는 제목이다. 끝과 시작의 확실한 매듭. 듣던 대로 완벽주의자답다. 눈물 콧물 짜며 은퇴 기자회견을 했던 자리에서 6개월 만에 다시 자서전 출간 기자간담회를 하는 박찬호의 표정에선 밝은 기운이 넘쳤다.

20년 넘게 반복했던 익숙한 일들과의 결별
아침 6시에 눈을 떠 야구공을 찾는다. 오늘은 어느 팀과 경기가 있더라….
“여보, 당신 이제 야구선수 아니잖아요?”
‘그렇지, 나 이제 은퇴했지.’
초등학교 때 시작했으니, 야구를 한 지 꼭 30년이 됐다. 운동선수들에게는 ‘루틴’이라는 것이 있다. 아침에 일어나면 명상을 하고, 식사는 어떻게 하고, 운동은 몇 시간을 해야 한다는. 그걸 지키지 못하면 심리적으로 흔들려 경기 결과에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소위 말하는 징크스다. 은퇴 후 그가 겪은 가장 큰 변화는 루틴과의 결별이었다. 그는 마운드를 떠났다는 현실과, 자신의 손에 야구공이 없다는 사실이 때때로 허전함과 먹먹함으로 다가오기도 했다고 한다.

▼ 인생에서 가장 소중했던 야구를 내려놓은 소감이 어떤가요.
“너무 두려웠는데 막상 다 내려놓고 나니까 세상이 더 크게 보이더라고요. 운동선수들은 좋은 성적을 내고 인정받아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있어요. 잘하는 선수일수록 그런 게 더 강하죠. 저도 은퇴하고 나면 아무도 나를 인정해주지 않는 게 아닌가, 여기서 내 인생은 끝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런데 야구를 그만두고 그런 집착에서 벗어나니 더 자유롭고 당당해졌어요. 은퇴하면 야구를 다시는 못하는 게 아닐까 걱정했는데, 지금은 이러다 야구가 하고 싶어지면 다시 복귀 선언을 할 수도 있을 거 같아요(웃음). 나이 들어 야구 동호회에서 선수로 뛸 수도 있고요.”

▼ 운동을 할 때는 굉장히 절제된 생활을 했는데 그런 것들에서 벗어난 기분은 어떤가요. 예전에 못했던 일을 새로 시작하거나 몰랐던 재능을 발견하지는 않았는지요.
“은퇴 전에는 하루, 일주일, 한 달 단위로 계획이 있었어요. 아침에 일어나 팔굽혀펴기를 하고, 이미지 트레이닝으로 공 던지는 연습을 하고, 22층 아파트까지 뛰어 올라가고… 그런데 이제는 그런 것들을 안 해도 되더라고요. 몸은 편한데 매일 지키던 규칙이 깨지니까 심리적으로 상당한 충격이 왔어요. 우울하고, ‘나 박찬호가 정말 이렇게 막 살아도 되나’ 하는 생각도 들고(웃음). 그러다 골프를 새로 시작하면서 새로운 루틴이 생겼어요. 골프라는 운동이 공 던지는 것과 비슷하더군요. 마인드컨트롤을 통해 홀에 공을 정확히 넣는 것. 야구도 자신이 생각한 위치에 공을 정확히 넣는 거거든요. 타자가 치느냐 못 치느냐는 그 다음 문제죠. 그 외엔 아침에 일어나 아이들이 학교 갈 준비 하는 걸 도와주고, 강의도 듣고 오늘은 누구를 만나서 어떤 이야기를 할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지냅니다.”



박찬호 다시 ‘촌놈’으로 살아보니

1 2012년 한화 스프링캠프에서 후배 안승민과 함께. 그는 선배이기에 앞서 한 인간으로서 동료들과 어울리기를 좋아했다. 2 경기에 나서기 전 불펜 근처에서 한국인들이 환호를 해주면 같이 흥분해 경기를 망치는 경우가 많았다고. 3 경기 전 심판에게 인사를 하는 박찬호. 그는 ‘마운드의 신사’라는 별명을 얻었다.



박찬호를 키운 건 콤플렉스와 호기심
그의 메이저리그(17년) 성적은 통산 1백24승. 특급 투수가 1년에 15승을 거둔다고 봤을 때 8년 이상 꾸준히 정상을 유지해야 가능한 수치다. 하지만 1백24승을 거두기까지 98번의 패배도 경험해야 했다. 나은 것 같으면 다시 찾아오는 부상과 슬럼프, 연봉에 걸맞은 활약을 못해 ‘먹튀’라는 비난을 받은 적도 있다. 그 모든 것이 지나간 지금, 박찬호는 자신을 괴롭혔던 것들에 감사한다고 했다. 콤플렉스를 극복하려는 노력을 통해 자신이 더욱 단단해졌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스스로‘촌놈’이라 부른다. 부족한 놈, 더 노력해야 할 놈, 아직 배울 게 많은 놈…. 최고의 자리에 있던 시절보다는 힘들고 주저앉았을 때 겪었던 일들을 이야기하는 것을 더 좋아한다. 누군가 단점을 말해주면, 앞으로 고칠 수 있으니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 운동만 하다가 사회에 나와서 낯설기도 할 텐데.
“경험해보지 못한 것들이 많으니까 새롭고 긴장돼요. 하지만 두려움은 없어요. 잘못되면 문제를 알게 되고, 그걸 찾아서 고치면 엄청나게 강해지거든요. 아이들을 키워보니 넘어졌을 때 말짱하다가도 피가 나면 울더라고요. 겁을 먹는 거죠. 하지만 상처를 치료하고, 밴드를 붙이고 나면 금방 새살이 돋잖아요. 생각의 차이인 것 같아요. 예전에는 공부하라는 이야기가 듣기 싫었어요. 공부 안 한 게 창피하고, 부족한 게 탄로날까봐. 이젠 ‘부족하다’‘바보 같다’는 소리를 들어도 괜찮아요. ‘아 그게 뭐지? 부족한 게 있으면 고쳐야겠네’라는 생각이 먼저 들거든요.”

▼ 어떤 부분에서 특히 부족함을 느끼는지요.
“정신적인 부분에서 좀 미숙해요(웃음). 예를 들어 사람 만나는 걸 좋아해서 식당에 자주 가는데, 종업원들이 알아봐주지 않는다거나 불친절하게 대할 때면 저도 모르게 살짝 섭섭함을 느껴요(웃음). 바쁜데 사인을 너무 많이 해달라는 분들을 만나면 짜증날 때도 있고요. 한 번은 어머니가 ‘나중엔 하고 싶어도 해달라는 사람이 없을 수 있으니 지금 다 해주라’고 말씀하시더라고요. 목욕탕에서 사인해달라고 하는 분, 아래는 안 나오게 할 테니 같이 사진 찍자고 하는 분들도 계시고…(웃음). 그런데 종종 훌륭한 분들을 뵈면 다른 사람을 대할 때 굉장히 너그럽고 배려를 많이 하시더라고요. 그런 것들을 통해 지혜로워질 필요가 있다는 걸 배우죠.”

▼ 혜민 스님·이해인 수녀·차인표·싸이 등 40명 가까운 분이 이번 책에 추천사를 쓰셨더군요. 항상 주변에 좋은 사람이 많은 것 같은데, 인맥관리 비법이 있나요.
“저도 놀랐어요. 부탁드린 분들이 모두 진심을 다해 글을 써주셔서. 그 마음들을 다 책에 넣고 싶었지만 그러면 제가 쓴 원고보다 많아질 거 같아서 많이 줄였어요(웃음). 인맥관리 비결이라면, 그분들을 많이 피곤하게 한 거죠. 더 알고 싶고 궁금한 게 많아서 자꾸 만나자고 하고 질문하고… 그러면서 서로를 잘 알게 된 거 같아요. 제가 원래 어릴 때부터 호기심이 많아서 어머니가 저를 데리고 다니는 걸 싫어하셨어요. 길만 나서면 ‘이게 뭐냐, 저 사람은 누구냐, 왜 저러냐’ 하도 질문을 많이 해서 어머니가 피곤하셨대요. 어릴 땐 그런 일로 혼도 많이 났지만 지금 돌아보면 그런 호기심이 성장의 자양분이 된 거 같아요. 특히 자신에 대한 호기심. 저는 나는 누구인가, 한계는 어디까지인가 그런 걸 알고 싶어서 노력하고 도전했거든요(웃음). 궁금한 게 많다는 건 생각이 많다는 거고, 이렇게 해볼까 저렇게 해볼까 연구하다가 정말 새롭고 놀라운 것을 만들어낼 수도 있다고 봐요.”

박찬호 다시 ‘촌놈’으로 살아보니


야구가 없어도 박찬호는 사라지지 않는다

박찬호 다시 ‘촌놈’으로 살아보니

2009년 필라델피아 구장에서 아내, 두 딸과 함께.



메이저리그에서 활동하는 동안 한국에서 만든 전자제품에 불량이 생기면 우리나라가 욕을 먹듯이 그 또한 한국에서 만들어낸 사람이니까 항상 좋은 모습을 보여야 한다는 압박감이 있었다. 성적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의 측면에서도 바르게 행동하려고 노력했다. 그의 이름은 박찬호이기도 했고, 코리안이기도 했으니까. 그를 보며 많은 사람이 희망을 가졌다. 특히 1997년 외환위기로 실의에 빠진 사람들은 5일마다 경기에 나서는 그를 보며 다시 일어설 용기를 얻었다. 그리고 박찬호도 그들로부터 무한한 지지를 받았다. 박찬호가 힘들 때 견딜 수 있었던 건 수많은 이름 모를 팬이 전해준 에너지 덕분이었다.

▼ 박찬호 선수가 메이저리그의 길을 열었다면 류현진 선수는 요즘 그 위를 쌩쌩 달리고 있는데, 류 선수를 보면 기분이 어떤가요.
“대견하고 또 류 선수를 보면서 그때는 몰랐던 새로운 것들을 느끼게 돼 고마워요. 류 선수 부모님이 관중석에서 응원하시는 모습을 보면서 ‘아, 우리 부모님도 저렇게 만세를 부르셨겠구나’ 싶더군요. 팬들이 열렬히 응원하고 환호하는 모습도 감동이었죠. 운동할 땐 경기에 집중 하느라 관중석을 볼 여유가 없었거든요. 사실 힘들 땐 대인기피증도 있고 그랬는데, 류 선수의 경기를 보면서 ‘나 혼자 잘한 게 아니라 주변에서 에너지를 모아주셨기에 가능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 야구 선배로서 류현진 선수를 평가한다면요.
“굉장히 잘하고 있어요. 사실 류 선수를 보면서 저 다음으로 메이저리그에 진출한 후배들에게 미안한 생각도 들더군요. 저는 주로 빠른 볼을 많이 던졌고, 후배들도 그런 저를 보면서 스피드에 주력한 것 같아요. 그런데 투수는 스피드보다 정확성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은퇴하기 몇 년 전, 힘이 다 빠졌을 때야 깨달았어요. 현진이는 지금 제대로 잘 던지고 잘 치고 있어요. 하지만 지금이 전부가 아니라는 이야기를 해주고 싶어요. 이제 긴 여행을 떠난 거예요. 제가 미국에 처음 진출했을 때 전설적인 좌완 투수 샌디 쿠팩스가 함께 길을 걸으면서 ‘우리는 지금 긴 여행을 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했어요. 당시에는 그게 무슨 얘긴 줄 몰랐는데 지금은 알겠어요. 한 경기, 한 시즌 성적에 집착하지 말고 멀리 보고 부족한 부분을 채워가다 보면 훨씬 더 성장한 자신을 발견할 수 있을 거예요.”

▼ 박찬호 선수가 꿈꾸는 새로운 인생은 어떤 것인지 궁금합니다.
“사회인으로서는 아직 아마추어지만 많이 알려졌으니까 (사람들에게 좋은 영향을 끼칠) 가능성은 많아요(웃음). 청소년들에게 공부 열심히 하라고 하면 부모님이 아무리 얘기해도 꿈쩍 않던 아이들도 대번에 ‘예 알겠습니다’ 그래요(웃음). ‘땡큐’라는 방송을 하면서 한국에 자살하는 사람이 굉장히 많다는 걸 알게 됐어요. 제가 한창 야구할 때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때도 회사가 부도가 나서 밑바닥부터 다시 시작하는데, 당신의 경기를 보며 힘을 얻는다는 분이 많았어요. 울컥하면서도 도움을 드릴 수 있어서 좋았어요. 이제 더 이상은 새벽에 일어나 야구공을 던져 희망을 드릴 수는 없지만 제 경험을 통해 세상 어딘가에서 좌절하고 있을지 모를 분들에게 힘이 되고 싶어요.”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 박찬호에게 딱 어울리는 말이다. 1승의 소중함을 알기에 이를 위해 무수한 땀을 흘렸으며 자신이 얻은 지혜와 감동을 다른 사람들과 나눌 줄도 안다. 앞으로 그가 보여줄 모습이 더욱 기대되는 이유다.

여성동아 2013년 7월 59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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