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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 된, 가수 이적 엄마 박혜란이 모든 엄마들에게

“살아보니 아이 키우는 시간은 잠깐, 안달복달하지 말고 맘 편하게 즐겨요”

글·김명희 기자 | 사진·지호영 기자, 나무를 심는 사람들 제공

입력 2013.07.16 10:03:00

17년 전 여성학자 박혜란이 ‘믿는 만큼 자라는 아이들’이라는 책을 펴냈을 때 당연한 이야기를 한다 싶었다. 책이 주목받은 건 순전히 가수 이적을 비롯해 세 아들을 서울대에 보낸 엄마의 프리미엄 때문이라고도 생각했다. 그런데 실제 아이를 낳고 키우면서 ‘믿는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날마다 뼈저리게 느끼며, 박혜란의 책을 다시 집어 들었다. 세 아들과 여섯 손주의 할머니로 더욱 내공을 다진 그가 젊은 엄마들에게 전하는 맘 편한 육아 이야기.
할머니 된, 가수 이적 엄마 박혜란이 모든 엄마들에게


지난 4월 가수 이적이 둘째 딸을 낳으면서 여성학자 박혜란(67) 씨는 손자 셋, 손녀 셋의 할머니가 됐다. 꼬맹이들과 노는 게 얼마나 재미난지 ‘호호 아줌마’처럼 눈초리는 아래로, 입꼬리는 위로 올라가 가만히 있어도 웃는 인상으로 변했다.
엄마의 치맛바람과 잔소리 없이도 모두 서울대에 입학해 화제가 됐던 세 아들은 신기하게도 자신들과 똑닮은 배우자를 만나 행복한 가정을 꾸렸다. 이화여대 건축학과 교수인 첫째 이동훈 씨는 아들 둘, 가수 이적(본명 이동준)은 딸 둘, 막내이자 최근 방영을 시작한 MBC 드라마 ‘여왕의 교실’의 이동윤 PD는 아들 하나, 딸 하나를 두고 있다.
다른 집 며느리들은 시집의 ‘시’ 자만 나와도 질색을 한다는데, 박씨의 며느리들은 꿀이라도 발라놓은 듯 주말마다 손주들을 몰고 즐겁게 ‘시월드’로 모여든다. 비슷한 또래인 아이들은 장난감 하나 없어도 그림을 그리다가 이불 뒤집어쓰고 귀신놀이도 하고 숨바꼭질도 하고…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잘도 논다. 그렇게 놀다 지치면 ‘재밌는 얘기해달라’며 할머니 품으로 파고든다.
“사실 할머니는 불사조인데, 지금은 너희들과 놀기 위해 잠깐 지상에 나와 있는 거야”라고 이야기를 시작하면 아이들은 침을 꼴깍꼴깍 삼키며 빠져든다. 간혹 “할머니, 그럼 날개가 있겠네요. 날아보세요?”라며 과학적 검증을 요구하는 녀석도 있다. 그럼 그는 “불사조는 한 번 날아가면 다시 못 와. 영원히 할머니를 못 보는데, 그래도 날아가 볼까?”라고 응수한다. 그러면 아이들은 일제히 “할머니, 안 돼요! 가지 마세요”라며 치마폭을 붙잡고 매달린다.

할머니 집은 주말마다 복작복작
그의 집 주말 풍경은 한 폭의 그림처럼 정겹다. 그는 무슨 재주로 아들, 며느리에 이어 손주들 마음까지 사로잡은 걸까. 답은 그가 1996년 펴낸 육아서 ‘믿는 만큼 자라는 아이들’ 그리고 여기에 반성을 보태고 손주들을 키우면서 업그레이드된 생각을 녹인 ‘다시 아이를 키운다면’(나무를 심는 사람들)에 있다. 그는 집 안이 어질러져 있어야 상상력이 자란다고 믿어 정리하라는 잔소리, 공부하라는 채근과는 담을 쌓고 사는 것도 모자라 아이들과 마루로, 주방으로 뛰어다니며 총싸움을 하는 즐거운 엄마이자, 고3 아들을 두고 중국에 초빙교수로 떠났던 간 큰 엄마다. 친구같이 편안하고 있는 그대로를 사랑해주는 엄마의 그늘로 자식들이 모이는 건 당연한 일 아닌가.
그런데 그가 ‘믿는 만큼 자라는 아이들’을 펴냈을 때만 해도 대한민국 엄마들 열에 일곱은 ‘제발 아이를 끝까지 믿고 지켜봐라’는 그의 교육관에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 후 외환위기, 금융위기 등을 겪으며 우리 사회는 무한 경쟁의 한복판으로 치달았고, 교육 현장도 예외는 아니어서, 행여 자신의 아이가 경쟁에 뒤처질 것을 두려워하는 엄마들은 채 돌이 되기도 전의 아이들을 조기 교육 대열로 밀어넣고 있다. 그가 틀린 걸까, 아니면 우리가 이상한 세상에 사는 걸까.

할머니 된, 가수 이적 엄마 박혜란이 모든 엄마들에게

엄마의 잔소리가 없었던 덕분에 무럭무럭 더 잘 큰 박혜란 씨의 세 아들 어린 시절 모습. 첫째 아들은 이화여대 건축학과 교수 이동훈 씨, 둘째는 가수 이적, 셋째는 드라마 ‘여왕의 교실’의 이동윤 PD다. 삼형제 모두 엄마가 직접 잘라준 바가지 머리를 한 모습이 재밌다.



▼ 17년 전에도 열혈 엄마들 사이에서 자녀들을 놓아 키운 걸로 화제가 됐는데, 그때 엄마들과 비교하면 요즘 엄마들은 어떤가요. 또 교육 환경은 어떻게 바뀌었다고 생각하세요.
“악화 일로죠. 교육에 더 많은 돈을 들이고, 아이들을 더 닦달하면서도 엄마들 불안감은 더 커진 것 같아요. 최고로 교육시켰다고 해서 예전처럼 보장된 미래가 펼쳐지는 것도 아니잖아요. 우리 때는 막연하게나마 아이가 성공하면 보상을 받을 거라 기대는 했지만 요즘 엄마들은 그렇지 않다는 것도 알아요. 다만 (사교육을) 안 하자니 끝없는 나락으로 떨어질 것 같아서 하긴 하는 건데, 그건 희망이 아니라 체념이에요. 미래가 불안하다면 아이에게 투자할 게 아니라 저축을 해야 하는데…. 이렇게 계속 가다간 비극이 불 보듯 뻔하겠죠.”



▼ 이젠 엄마들도 아이들이 무모한 경쟁에 내몰리고 있다는 걸 아는 것 같아요. 그래도 옆집, 앞집이 다 시키니까 울며 겨자 먹기로 나도 시키는 거죠. 오죽하면 ‘사교육을 법으로 금지해서 모두 다 못 하는 상황이 오면 좋겠다’는 얘기까지 하겠어요.
“희망 없는 경쟁이라면 정신 똑바로 차리고 ‘나라도’, ‘나만은’ 이런 생각을 갖고 바꿔야 하는데 엄마들이 다들 자신이 없어서 눈치를 보는 거예요. ‘누구는 이렇다’ ‘다른 집은 어떻다’ 맹목적인 비교는 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다른 집은 수십, 수백만인데 그들과 다 비교하려면 삶이 얼마나 고달파지겠어요.”

▼ 그렇다고 아이들을 무작정 놀리는 것도 정답은 아닌 것 같아요. 사교육에 적당한 선이라는 게 있을까요.
“예체능은 아이가 원하면 시키는 게 좋아요. 아이가 ‘아무리 해도 수학은 어려워’하면 그야말로 보충 차원에서 학원에 보낼 수도 있겠죠. 하지만 그 이상의 선행 학습은 시킬 필요도 없고 효과도 없어요. 아이가 지레 지쳐서 정작 뭔가에 집중해야 할 때 집중하지 못하고 매사에 시큰둥해질 수도 있어요. 첫째 동훈이는 초등학교 입학 때까지도 한글을 못 깨쳐서 ‘돌머리가 아닐까’ 하는 불안감도 있었어요. 그런데 학교에 들어가서 새로운 내용을 배우니까 정말 열심히 선생님 얘기에 귀 기울였고, 학교 가는 걸 굉장히 즐거워하더군요. 아이가 흥미를 가지면 저절로 배우게 돼 있어요. 어릴 때 키워줘야 할 건 충분한 시간을 주고 공부건 놀이건 스스로 즐기는 법을 터득하도록 하는 거죠.”

저마다 다른 빛깔 아이들, 모두 다 사랑스러워
그는 요즘 간혹 “손주들은 어떻게 키우세요?”라는 질문을 받는다. 그런데 사실 손주들을 보고 있으면 아무 욕심도 안 난다. 그저 아무 탈 없이 착하고 튼튼하게 자라면 그것으로 족하다. 나중에 커서는 저 좋아하는 일로 밥벌이를 하며 그럭저럭 산다면 제일이지 싶다. 어릴 때 영재 소리를 듣고 뭐든지 뛰어나서 1등을 놓치지 않고, 커서는 돈과 명예를 거머쥔 사람? 그런 사람 되면 뭐하겠나 싶다. 밥 세끼 먹는 건 마찬가지일 텐데.

▼ 세 아들 모두 두 아이의 아빠가 됐어요. 아빠로서 아들들은 어떤가요.
“셋 다 좋은 아빠예요. 며느리들은 아니라고 할지 모르겠지만(웃음). 간혹 며느리들이 볼 일이 있어 아들들이 혼자 손주들 데리고 우리 집에 놀러올 때가 있는데, 기저귀 갈아주고 씻기고 로션 바르고 머리 말려주고 하는 것들을 너무 익숙하게 해서 제가 나설 틈이 없어요. 제 아이가 떨어뜨린 음식은 물론이고 씹다 뱉은 고기도 아무렇지 않게 먹는 걸 보면 감동이죠. 막내는 드라마를 시작하면 쉬지도, 집에 들어오지도 못하고 일을 하는데, 지난번 작품을 끝내고는 본인이 휴가를 간 게 아니라 며느리를 열흘간 영국으로 휴가 보내더군요. 아내 혼자서 아이들 돌보느라 고생했다고. 어떻게 그런 기특한 생각을 했는지, ‘그 녀석, 멋진 놈이네’라는 생각이 들더군요(웃음).”

할머니 된, 가수 이적 엄마 박혜란이 모든 엄마들에게


▼ 손주가 여섯이나 되면 그중 특히 정이 가는 아이도 있겠어요. 누구네 몇째가 가장 예쁜지 살짝 귀띔해주세요.
“하하하. 과묵한 아이, 재잘거리는 아이, 잘 웃는 아이, 쉴 새 없이 움직이는 아이, 책을 사면 앉은 자리에서 다 읽어버리는 아이, 그림을 기가 막히게 그리는 아이, 이야기를 끝도 없이 지어내는 아이…. 성격도 재주도 다 제각각이에요. 어쩌면 그렇게들 다른지, 보고 있으면 너무 재미있어서 셋째 낳는 집엔 상금을 준다고 했어요(웃음). 둘째네 큰딸은 현관문 들어서면서부터 ‘번개~ 파워’ 하면서 우렁차게 들어올 정도로 에너지가 넘쳐서 귀여운가 하면, 막내네 둘째는 체격도 여린 데다 얼굴도 작고 뽀얘서 ‘아유 예쁘기도 하지’라는 감탄사가 절로 나와요. 얘는 이래서 예쁘고 쟤는 저래서 예쁜 거지, 굳이 누가 더 낫다고 비교할 필요 있나요. 비교는 아이들에게 열등감을 심어주고, 아이들끼리도 갈라놓는 백해무익한 짓이에요. 아이들은 저마다 고운 빛깔을 갖고 태어나요. 부모들이 할 일이란 아이들 장점을 찾아서 칭찬하고 격려해주며 그 빛깔을 곱고 선명하게 살려낼 수 있도록 해주는 거죠.”

▼ 아들 며느리 자녀교육에 훈수를 두는지, 3형제는 자녀들을 어떻게 키우는지 궁금합니다.
“저는 아이들에게 이게 옳다, 저게 옳다 소리를 안 해요. 마음이 넓어서가 아니라 ‘이렇게 살아라’ 했는데 나중에 안 되면 원망 들을 거 아니에요? 그러니까 저 사는 대로 두고 ‘놀러 가자’ ‘뭐 먹을까?’ 그런 소리나 하죠(웃음). 그리고 나는 내 아이들 키울 때도, 아이들이 나보다 낫다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나는 덜렁덜렁하는 성격인데 아이들은 차분했거든요. 남편이 그러면 답답해 보이는데 아들들이 그러는 건 보기 좋더라고요. 며느리들도 다 잘해요. 아이들 건강하게 잘 키우고, 먹는 것도 잘 챙기고, 집도 깔끔하게 잘 치우고…(웃음). 그런 아이들한테 무슨 잔소리를 하고 ‘나를 따르라’고 앞장서겠어요(웃음).
아이들 가르치는 것도 세 집 다 조금씩 다르긴 하지만, 그건 각자가 결정할 일이니 전혀 참견하지 않아요. 올해 첫째와 막내의 큰아이들이 나란히 초등학교에 들어갔는데 첫째네는 혁신 학교를 찾아 보내고, 막내네는 경쟁률이 높다는 교대 부속초등학교에 보냈더군요.”

다시 아이 키운다면 잘 먹이고, 여행 다닐 것
살면서 후회가 없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자녀 양육에 관한 한 모든 엄마의 부러움을 받는 그도 시간이 지난 후 뒤늦게 깨달은 것들이 있다. 당시엔 뭐든 듬뿍듬뿍 먹이면 잘 먹인 것 같아서 인스턴트 음식을 먹이고도 흐뭇해했는데, 모두 서른 넘자마자 서로 질세라 배가 나오고 그중엔 지방간 경고를 받은 자식까지 생겼다. 아기 때부터 유모차에 태우고 부지런히 놀러 다니는 부모들을 볼 때도 마음 한구석이 찔린다.
유년 시절 자연 속에서 감성을 충만하게 키워주지 못한 점, 몸을 쓰는 법을 가르치지 않아 성인이 돼서도 운동과 담을 쌓고 지내는 점도 미안하다고 했다. 지금도 세 아들은 휴일날 식구들과 집에 놀러 와서도 하나같이 ‘어디 누워 있을 데 없나’ 하고 소파나 안방을 노린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다시 아이 키우던 때로 돌아간다면 옛날이야기를 정말 열심히 해주고 싶노라고 했다. 하루 종일 일하고 돌아와 파김치가 돼 잠자리에 들라치면 아이들은 끈질기게 옛날이야기를 해달라고 졸랐다. 마지못해 ‘콩쥐팥쥐’며 ‘해님달님’ 같은 이야기를 몇 번 해주고 나면 밑천이 다 떨어지고, 눈꺼풀이 내려앉곤 했다. “이야기 너무 좋아하면 가난뱅이 된다”며 아이들을 협박해 반강제로 재운 것이 지금도 후회된다. 그래서 손주들에겐 머리를 쥐어짜가며 이야기를 만들어 들려준다. ‘불사조 이야기’도 그렇게 시작됐다.

▼ 아들들이 ‘엄마 교육법 중 이건 정말 좋았어’ 하는 것도 있을 것 같아요.
“공부하라는 잔소리 안 한 거, 그건 지금도 좋았다고 해요. 그리고 자유로운 자아를 만들어줬다나. 말이 근사해요(웃음). 아이들이 어릴 땐 제가 주로 거실에 상을 펴놓고 일을 했는데, 가끔 녀석들이 슬슬 다가와서 말을 건네요. 그럼 귀찮다 생각지 않고, 시험공부할 시간에 쓸데없는 생각한다고 타박하지도 않고, 어른 대하듯 이야기를 들어줬어요. 갑자기 ‘엄마, 외로워’ 그러면 ‘학교에서 무슨 일이 있었냐’며 덜컥 겁부터 내는 게 아니라 ‘외롭지? 엄마도 외로워’하면서 말벗이 돼줬죠. 그러면 아이들도 자신의 골치 아팠던 일이 별 거 아닌 듯 위로를 받았던 것 같아요.”

▼ 요즘 엄마들에게 꼭 해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요.
“이만큼 살아보니 아이를 키우는 시간은 정말 잠깐이더군요. 인생에 그토록 재미있고 보람찬 시간은 다시 오지 않아요. 그러니 너무 신경 곤두세우지 말고, 마음 편히 재미있게 즐기면 좋겠어요. 그 시간을 걱정이 아닌 즐거움으로 채운다면 인생의 나머지 시간도 그렇게 채워질 거예요.”

여성동아 2013년 7월 59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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