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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마당’보다 따스한 김재원 아나운서의 시간&기억들

“보이지 않는 곳에서의 삶이 더 아름다운 남자 말에 마음을 싣기까지…”

글·김명희 기자 | 사진·지호영 기자

입력 2013.06.18 09:57:00

지난 5년간 편안하고 따뜻하게 아침을 열었던 김재원 아나운서. 그가 ‘아침마당’에서 하차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익숙했던 일상의 한 부분이 떨어져나가는 것처럼 서운했다. 친구 같고, 연인 같고, 듬직한 장남 같은 김재원 아나운서와 이제라도 마주 앉은 건 참 잘한 일이지 싶다.
‘아침마당’보다 따스한 김재원 아나운서의 시간&기억들


긴 다리로 성큼성큼 걸어오는 그에게서 소년의 향기가 난다. 한 손에 책을 들고, 입가에는 따뜻한 미소를 머금었다. 바람에 흩날리는 머리카락을 한 번 뒤로 쓸어 넘겼더라면 아마 영화의 한 장면이라고 착각했을 것이다. 사람은 살아온 내력이 몸과 얼굴에 쌓인다던데, 그렇다면 김재원(46) 아나운서는 ‘비현실적’일 정도로 곱게 살아온 걸까.
남들에게 보이는 것을 업으로 하는 아나운서라는 직에 종사하지만 그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더 아름답게 살았다. 하루도 빠짐없이 춘천과 서울을 오가며 뇌경색으로 쓰러져 투병하는 아버지를 간호하고, 퇴직금 중간정산을 받아 캐나다로 연수 갔을 때는 생활비를 마련하기 위해 샌드위치 가게와 일식집에서 아르바이트까지 했단다. 이런 인생 궤적은 곱고 평탄한 것과는 거리가 있지만 어떻게 친구 같고, 연인 같고, 듬직한 장남 같은 이미지로 사람들의 공감을 얻게 됐는지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단서다.

‘아침마당’은 배울 게 많은 인생 교과서
김재원 아나운서는 지난 4월 KBS 봄 개편 때 ‘아침마당’을 떠나 ‘6시 내고향’으로 자리를 옮겼다. 냉정하게 말하면 아침에서 저녁으로 근무 시간을 옮긴 것뿐인데 “몸을 감싸고 있던 천 한 귀퉁이가 떨어져나간 느낌이다. 오래 살던 동네를 떠나 매일 만나던 옆집 아저씨, 동네 꼬마들을 더 이상 만나지 못하는 것 같은 허전한 마음이 든다”는 걸 보니 그에게는 제법 큰 ‘사건’인가 보다. 아나운서답게 현란한 비유들이 계속 이어진다.
“사람의 인생은 한 권의 책이잖아요. ‘아침마당’을 진행할 땐 책을 읽으러 가는 기분이었다면 ‘6시 내고향’은 하루 일과를 마치고 고향에 쉬러 가는 느낌이에요. 맛있는 음식도 먹고, 구수한 이웃의 이야기도 듣고….”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표시가 난다고, 그가 하차한 지 한 달이 훨씬 지났지만 아직도 ‘아침마당’ 시청자 게시판엔 김재원 아나운서가 그립다는 글들이 종종 올라온다. 아이들이 좋은 사람, 나쁜 사람을 본능적으로 구별하는 것처럼 시청자들도 방송에서 진심을 다하는 사람을 한눈에 알아본다. 출연자의 사연을 경청하고 마음을 다해 전달하려 했던 것이 5년간 켜켜이 쌓여 가족 같이 정이 들었던 것이다.
“그간 해왔던 일에 대한 중간평가를 받는 기분이에요. 제가 한 말 한마디, 생각 한 조각을 그냥 흘려보내지 않으셨구나 싶어서 시청자들이 대단하다, 무섭다는 생각도 들어요.”
‘아침마당’을 함께 진행한 이금희 아나운서도 그에게는 한 권의 책처럼 배울 점이 많은 인물이다. 두 사람은 방송을 함께하는 동안 소박하고 진솔한 모습이 마치 오누이처럼 닮았다는 평을 들었다. 이참에 그에게 방송 외에는 자신을 좀처럼 드러내지 않기로 유명한 신비주의자, 이금희 아나운서에 대해 물었다.
“사람은 보통 카리스마 있다, 성실하다, 재밌다 등 몇 가지 단어로 표현이 되잖아요. 그런데 이금희 아나운서의 특징을 그런 식으로 나열하려면 끝도 없을 거예요. 한 가지로 규정되지 않는 종합적인 분이죠. 상대방에 따라 자신을 바꾸는 카멜레온 같은 재주도 있어요. 일반인 출연자는 자신을 10년 된 친구처럼 느끼게 하는가 하면, 권력을 갖고 있는 사람들에겐 오히려 더 당당하게 다가가는 면도 있죠. 그리고 제가 그분의 하루 생활을 모두 관찰하지 못했지만 함께 있는 2~3시간만 보면 24시간이 부족할 정도로 부지런하세요. 또한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동시에 보는 분이기도 하죠. 과거에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을 가져와서 현재를 살면서도 미래를 내다보는 식이죠.”
‘아침마당’을 거쳐 간 이들 중 특별히 기억에 남는 사람을 꼽아달라고 하자 그는 질문한 것이 미안할 정도로 오래 고민한 끝에 답을 내놓았다.
“닉 부이치치는 ‘신이 그에게 팔다리를 제외한 모든 것을 주셨구나’ 싶을 정도로 강한 분이었어요. ‘한국의 폴 포츠’ 최성봉 씨가 출연했을 때는 어린 시절 그가 어른들로부터 혹사 당한 이야기를 들으며 성인의 한 사람으로서 부끄럽고 미안했고, 용서를 빌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혹시 성봉 군의 미래를 위해 어른들을 용서할 수 있겠어요?’라고 물었더니, 시간을 두고 고민하다가 ‘예. 해보려고요’라고 답하더군요. 리처드 기어는 한 시간 동안 참 따뜻하게 방송을 했던 기억이 나요. 진행을 하면서 저도 참 즐거웠는데, 프로그램이 끝나고 나서 그 분이 제 귀에 대고 ‘전 세계를 돌면서 수없이 많은 생방송을 했지만 당신들처럼 출연자를 편안하게 해주는 MC는 처음’이라고 하더라고요(웃음). 감동이었죠. ‘누군가의 칭찬이 이렇게 큰 힘이 되는구나’라는 것도 새삼 느꼈고요.”

무뚝뚝한 아버지와 마음으로 대화하다
아나운서에도 여러 유형이 있다. 김주하처럼 뉴스를 잘하는 사람도 있고, 손석희처럼 토론에 능한 이도 있으며, 흔치는 않지만 전현무처럼 예능인보다 더 웃긴 경우도 있다. 김재원 아나운서는 듣기를 잘한다. 아나운서가 말만 잘하면 됐지, 듣기를 잘하는 게 무슨 소용이냐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상대의 이야기를 경청하면서 마음을 읽고, 감정 선을 따라가며 더 많은 이야기를 하도록 이끌어내는 것이야말로 교양 MC의 첫 번째 덕목이다.
김재원 아나운서의 경청 능력을 키운 건 8할이 아버지다. 최근 그가 펴낸 ‘마음 말하기 연습’(푸르메)에도 아버지와 관련된 일화들이 나온다. 그는 중학교 1학년 때 어머니를 간암으로 잃고 아버지와 둘이 살았다. 아버지는 말씀이 많은 편이 아니었고, 아들은 아버지의 표정과 몸짓을 보고 마음을 읽었다. 그래서 무뚝뚝한 아버지에게서 그는 태산보다 더 큰 사랑을 느끼며 자랐다.

‘아침마당’보다 따스한 김재원 아나운서의 시간&기억들




“정말 헌신적으로 저를 키우셨어요. 궂은 집안일도 혼자 도맡아 하셨죠. 특히 아침잠을 깨우던 아버지의 도마 소리가 잊히지 않아요. 보통 어머니들 도마 소리는 ‘타다다다닥’ 경쾌한 리듬이 있잖아요. 아버지가 칼질하는 소리는 ‘탁탁’, 뭔가 서툴고 투박했어요. 그래도 제겐 깊은 사랑의 울림으로 들렸죠.”
아버지는 파와 소시지 등을 넣어 튼실하게 만든 계란말이를 매일 도시락 반찬으로 싸줬다. 그는 계란말이가 싫었지만 내색을 못했다. 아버지에겐 다른 대안이 없다는 걸 알았던 것이다. 그렇게 그는 일찍 철이 들었다.
아버지는 한없이 베풀기만 했다. 그가 대학을 마치자 ‘엄마의 소원’이었다며 미국으로 유학을 보내고 자신은 한국에 홀로 남았다. 미시시피대에서 유학하던 1994년 어느 날, 아버지로부터 갑자기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새벽 2시쯤이었다. 그는 ‘한국에서 누가 시차를 잘못 계산해 한밤중에 전화를 했나 보다’라며 마뜩지 않은 마음으로 수화기를 들었다.
“아버지가 ‘재원아, 네가 들어와서 장례를 치르고 가야겠다’고 하시곤 아무 말씀이 없으셨어요. 그러곤 곧바로 쓰러지신 거죠. 다시 전화를 걸어봤지만 수화기를 잘못 놓아 계속 통화 중 신호만 가고…. 사촌과 친구들에게 급히 전화를 걸어 집에 가봐달라고 부탁하고, 저는 그길로 곧바로 공항으로 갔죠. 비행기를 타고 오는 동안 혹시 아버지가 그대로 돌아가시는 건 아닌지, 얼마나 마음을 졸였는지 하루가 10년보다 더 길게 느껴지더군요.”
아버지는 의식을 되찾았지만 신체의 반쪽이 마비돼 거동이 불편했다. 그는 유학 생활을 접고 돌아와 아버지의 보호자가 됐다.
“아버지가 그때 바로 돌아가셨더라면 한이 남았을 텐데, 살아 계셔서 기저귀도 갈아드리고 말도 가르쳐드리고, 걸음마도 도우며 아버지가 저를 키우실 때 했던 것의 10분의 1이나마 갚을 수 있어서, 그 순간을 경험할 수 있다는 게 감사했어요.”
어떻게 보면 그를 아나운서의 길로 이끈 것도 아버지다. 아버지 병간호를 하다가 우연히 TV에서 신입 아나운서 공채 광고를 보았고 지나가는 말로 ‘나도 아나운서나 한번 해볼까’ 했는데, 아내가 다음 날 원서를 받아다 주었다. 사실 그의 초등학교 때 꿈도 아나운서가 되는 것이었다.
“제 성격이 그리 사교적인 편도 아니고, 학교 다닐 때는 거의 말이 없었어요. 친구들도 제가 지금 이 일을 굉장히 힘들게 하는 줄 알고 있고요(웃음). 그러다 보니 ‘내 주제에 아나운서는 무슨…’이라며 지레 겁을 먹었던 것 같아요. 제 경험에 비추어보자면 청소년이나 청년들이 꿈을 과대평가하고, 자신을 과소평가해서 도전해보기도 전에 포기하는 우를 범하지 말았으면 좋겠어요.”
아버지는 스물여덟에 늦깎이로 방송사에 입사한 아들을 무척이나 자랑스러워했다. 방송이 끝나고 “시청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건강하세요”라는 그의 엔딩 멘트는 시청자를 위한 것이기도 했지만 투병 중에도 아들이 진행하는 프로그램을 놓치지 않고 챙겨 보는 아버지를 향한 것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는 방송이 끝나면 하루도 빠지지 않고 아버지에게로 달려가 살가운 아들이 됐다. 이는 그가 지방 발령을 받은 후에도 계속됐다. 말이 쉽지, 서울과 춘천을 오가며 직장 생활과 병간호를 병행한다는 게 보통 의지로 되는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많이 부족했죠. 지금도 후회되는 게, 제가 ‘긴 병에 효자 없나 보다’라는 생각을 할 즈음 아버지가 돌아가셨어요. 잠시나마 그런 생각을 했다는 게 너무 죄송했어요.”
아버지의 병간호를 하면서 보낸 6년이라는 세월은 그의 인생에서 큰 전환점이 됐다. 환자와 보호자들의 심정을 누구보다 잘 아는 그는 10년 넘도록 일 년에 몇 차례 꼭 헌혈을 하고 골수기증 신청도 했다. 한 번은 서울 신촌에 헌혈을 하러 갔다가 “‘아침마당’ 나오는 분과 어쩌면 이렇게 똑같이 생겼어요?’라는 인사를 들은 적도 있다.

샌드위치 가게에서 아르바이트하며 생활비 벌기도
김재원 아나운서와 이야기하면서 느낀 점은 그가 인생의 씨줄과 날줄을 무척 정교하게 엮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는 과거의 기억을 촘촘히 뿌리에 새기고 주변으로 가지와 잎을 드리워가는 나무 같다.
씨줄, 즉 시간에 관한 그의 첫 기억은 1971년 12월 25일. 도시락을 싸며 야유회 준비를 하던 어머니가 TV를 보다 갑자기 쓰러진 것이다. 그의 어머니는 대연각 호텔에서 미용실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크리스마스이브에 미용실에서 밤을 지새운 직원들이 그만 대연각 호텔 화재로 참사를 당했다. 그의 어머니는 모든 것이 자신의 탓이라며 가슴 아파하다가 9년 후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과거가 한 사람의 삶을 좌우할 수 있다는 걸 그는 일찌감치 깨달았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짝꿍이던 여학생과 결혼한 것도 그렇다. 학창 시절엔 2인용 책상을 함께 쓰며 무던히도 티격태격했지만 중·고등학교 시절 같은 교회에 다니고, 대학 연합선교 동아리에서 함께 활동하며 ‘그만한 사람 없다’는 걸 깨닫게 돼 프러포즈를 했다고 한다.
날줄에 관해 말하자면, 그는 삶을 공간에 비유하는 걸 좋아한다. 학력을 이야기할 때 “안암동에서 독문학을, 흑석동에서 마케팅을, 상도동에서 회계학을 공부했다”라고 말하는 식이다. 서울 마포에 사는 그는 회사가 있는 여의도까지 매일 걸어서 출퇴근을 하며 신촌, 종로, 광화문 등 웬만한 거리는 도보로 다닌다.

‘아침마당’보다 따스한 김재원 아나운서의 시간&기억들

착하고 자상한 ‘교회오빠’ 같은 이미지의 김재원 아나운서. 실제로 그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다.



“걸으면서 하루의 일부를 여행에 할애하는 거죠. 마포도 아직 개발이 안 된 곳이 많아서 골목길에 양치하러 나온 할머니도 계시고 좌판을 놓고 채소를 파는 사람도 있고, 러닝셔츠 바람으로 길에 나와 부채질을 하는 할아버지도 계세요. 돈 주고도 살 수 없는 정겨운 풍경이죠.”
바쁜 생활에 쫓기듯 살다 보면 주변을 둘러볼 여유를 잃기 마련인데, 그는 잊히는 풍경 하나하나까지 마음에 담고 있었다. 2005년 회사에 무급휴가를 내고 퇴직금을 중간정산 받아 캐나다로 연수를 다녀온 것은 그런 여유를 세계로 확장한 것이다.
“10년간 방송을 하고 나니 ‘이대로 가다가는 매너리즘에 빠지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인생의 하프타임을 설정하고, 스스로를 재충전해서 후반전을 준비하자는 생각에 휴직을 하고 가족들과 캐나다로 떠났죠. 퇴직금에 손을 댄 건, 60대에 쓰는 것보다 40대에 좀 더 효과적으로 쓰는 게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였어요. 부족한 부분은 제가 일식집과 샌드위치 가게에서 설거지와 배달을 해서 충당했죠. 공부는 공부대로, 노동은 노동대로, 일상에서 벗어난 순간순간이 행복했어요. 1달러 팁의 소중함도 느꼈고, 무엇보다 고마웠던 것은 아들 친구들 집에 배달을 간 적도 많았는데, 아이가 한 번도 그걸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던 점이에요.”
김재원 아나운서가 아버지를 보면서 철이 들었던 것처럼 아들도 열심히 사는 아버지를 보면서 느낀 점이 많았나 보다. 연수를 마칠 즈음 아들은 한국에 함께 돌아오는 조건으로 고등학교 3학년 때까지의 용돈을 미리 계산해 일시불로 달라는 요구를 했다.
“그 돈 5백만원을 투자해 7백만원으로 불린 다음 주택청약예금에 넣더라고요. 아빠가 궂은일도 하는 걸 봤고, 언제 또 회사를 쉴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자기 용돈 정도는 스스로 확보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 같아요(웃음).”
사실 캐나다의 학교생활에 익숙해진 아들은 다시 한국에 돌아오는 걸 별로 달가워하지 않았다. 그래도 가족이 떨어져 살 수 없다는 생각에 아이를 데리고 오긴 했지만 한국 학교에 다시 적응하는 과정이 그리 쉽지만은 않았다. 초등학교 6학년이던 아들은 학원에 한 달 다니더니 “아빠, 이건 청소년 학대예요. 저는 학교에서 8시간, 학원에서 6시간 공부하고 집에 돌아와서 다시 3시간 동안 숙제를 해야 하는 청소년 학대 현장에 있을 수 없어요”라고 선언했다. “한국 친구들은 다 그렇게 하지 않느냐”고 달래봤지만 아들은 “그 아이들은 어릴 때부터 그렇게 해서 익숙해진 것 같아요. 저를 그런 환경에 밀어 넣으려면 캐나다에 가지 말았어야 했어요”라고 반박했다. 하나부터 열까지 다 옳은 말. 그는 아들을 윽박지르는 대신 타협점을 찾았다. 학원은 다니지 않되 학생의 본분인 공부는 열심히 할 것.
“그래서 고등학생인 아들 녀석은 지금 자기주도학습으로 혼자 공부해요. 학원에 안 다니니까 시간이 남아서 방송반, 영화제작반 같은 동아리 활동도 열심히 하면서 캐나다 학교 다니듯이 적극적으로 학교 생활을 하고 있어요(웃음).”
그의 부부는 아들을 학원에 보내지 않는 대신 대학에 진학한 후 하고 싶은 일을 하라며 아들 앞으로 돈을 모으고 있었다. 그런데 아들이 어느 날 ‘캄보디아에서는 1천만원이면 학교를 세울 수 있는데, 그 돈이 없어서 교육을 받지 못하는 아이들이 수두룩하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 돈을 캄보디아 학교 설립에 쾌척하자는 의견을 냈다.
“2010년 여름에는 그 학교에 다니는 학생 중 한 명을 저희 집에 데리고 와 함께 지냈어요. 저는 한국어, 아들은 영어, 아동미술을 전공한 아내는 미술을 가르치고 피아노 학원도 보내고 여행도 다니면서 한 가족처럼 지냈어요. 지난해에는 저희가 그 학교를 방문했고요. 보통은 아버지가 세운 학교를 아들이 방문하는데 저희 집은 거꾸로 됐어요(웃음).”
그에게서 왜 소년의 향기가 났는지 알 것 같다. 때 묻지 않은 맑고 선한 삶이 향기로 배어나온 것이다. 사실 인터뷰하기 전 김재원 아나운서는 한 가지 당부를 했다. 자신을 너무 멋진 사람으로 포장하지 말아달라는. 약속을 지키려 노력했지만 그럼에도 멋있게 보인다면, 그게 바로 김재원 아나운서다.

여성동아 2013년 6월 59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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