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한 캐나다 대사관저는 서울 성북구 북악스카이웨이 꼭대기에 자리 잡고 있다. 소박한 2층 양옥에 딸린 너른 정원은 이곳이 건물보다 자연에 더 많은 배려를 한 공간임을 알게 한다. 관저로 들어가기 전 데이비드 채터슨 대사는 꼭 보여줄 게 있다며 전망대로 안내했다. 돈 주고도 살 수 없는 아름다운 풍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목련, 개나리, 진달래가 꽃망울을 터뜨리기 시작한 서울의 봄은 평화롭고 생동감이 넘쳤다. 채터슨 대사는 “정말 아름답지 않느냐”고 여러 번 반복해서 물었다. 저녁이 되면 굽이치듯 이어진 서울 성곽에 조명이 들어와 더 아름답다는 설명도 덧붙였다. 누가 한국인이고 누가 외국인인지 모를 지경이었지만 이토록 한국을 사랑한다니, 고맙다는 생각이 든다. 대사관저가 이곳에 자리 잡은 것은 27년 전이다. 몇 년 후 중국 대사관저도 이곳으로 옮겨 캐나다 대사와 중국 대사는 이웃사촌이 됐다.
캐나다 남자와 일본 여자의 드라마 같은 러브 스토리
관저 거실은 통창으로 만들어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 실내에서도 바깥 경치를 감상할 수 있도록 했다. 관저에 들어서자 검정색 민소매 원피스에 흰색 프린트 재킷을 걸쳐 입은 아름다운 동양인 여성이 반갑게 맞아줬다. 그의 아내인 채터슨 여사다. 파란 눈의 남편과 아름다운 일본인 아내, 두 사람의 러브 스토리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채터슨 대사는 “너무 오래된 이야기라 공개하면 나이가 밝혀져 곤란하다”면서도 기꺼이 이야기보따리를 풀었다.
“첫 부임지인 일본에서였어요. 친구 모임에 갔다가 아내를 보고 첫눈에 반했죠. 정말 특별해 보였어요. 그런데 명함을 달라고 했더니 거절하더군요(웃음). 어떡할까 고민하다가 ‘비즈니스 여행을 갈 계획인데, 당신의 도움이 필요할 것 같다’고 둘러대고 명함을 받았죠. 당시 아내가 캐세이퍼시픽 항공사에 근무하고 있었거든요.”
“그때만 해도 남편 인상이 지금과 달리 좀 험상궂었어요. 수염을 덥수룩하게 기르고 있어서. 저는 수염 있는 남자는 별로였거든요(웃음).”
첫 만남을 떠올리며 채터슨 대사 부부는 신혼으로 돌아간 듯 달뜬 표정이다. 채터슨 대사는 그 수염을 말끔하게 정리했고, 두 사람은 곧 사랑에 빠져 결혼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후 사우디아라비아, 프랑스 등을 거쳐 2011년 9월 한국 대사로 부임했다. 그런데 채터슨 대사와 한국의 인연은 그전으로 훨씬 더 거슬러 올라간다. 일본에서 근무하던 1980년대부터 1990년대 중반까지 한국을 스무 번 이상 방문했다는 것.
1 베란다와 연결된 거실. 창을 열면 서울 시내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온다. 캐나다 대사관저의 가장 큰 특징은 바깥 경치를 최대한 즐길 수 있도록 설계됐다는 점이다.
2 대사관저의 중앙홀. 그랜드 피아노와 채터슨 대사가 수집한 미술 작품이 반긴다. 3 클래식한 가구들로 정갈하게 꾸민 다이닝룸. 4 채터슨 여사의 취미는 한지 공예. 석달에 걸쳐 작업한 한지 조명.
5 중앙홀 벽은 아프리카, 사우디아라비아 등을 돌며 채터슨 대사가 직접 촬영한 사진으로 장식했다. 6 채터슨 대사 부부는 일본 전통견 시바 두 마리를 키우고 있다. 사진은 열 살 된 암컷.
“1983년 한국에 처음 왔었는데, 당시 한국은 지금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어요. 경제적으로는 개발도상국이었고, 정치적으로는 민주주의가 태동하는 시기였죠. 일본에서 비행기를 타고 오후 2시에 김포공항에 도착해 택시를 타면 3시쯤엔 연세대 앞을 지나게 되는데 그때마다 항상 시위가 벌어지고 있었어요. 최루탄 때문에 눈물을 흘리면서도 민주주의가 발전하는 성장통이라는 생각에 기분이 나쁘지 않았었죠. 당시 한국 사람들은 ‘하면 된다’ ‘할 수 있다’라는 자신감과 열정으로 가득 차 있었고요. 아, 그리고 또 하나 가장 많이 달라진 것 중 하나가 커피가 아닐까 싶어요. 당시에는 커피 문화가 그다지 발달하지도 않았거니와 마셨다 하면 인스턴트 커피였는데 지금은 어딜 가나 원두커피 전문점이 많더군요.”
지식보다 생각하는 법 가르치는 캐나다 교육
채터슨 대사는 일본에서 10년 정도 근무하며 가까운 거리에서 한국의 경제적, 정치적 성장 과정을 목격했다. 그리고 지금 한국 대사로 부임하게 된 것이 무척 행운이라고 말했다. 더군다나 올해는 한국과 캐나다가 수교 50주년을 맞는 해다. 이에 맞춰 한국은 올해를 ‘캐나다의 해’로, 캐나다는 ‘한국의 해’로 공식 지정하고 우정을 쌓기 위한 다양한 행사를 마련했다.
“캐나다는 19세기 말 선교사 파견을 시작으로 의사·교사들이 잇따라 한국 땅을 밟으며 교류의 폭을 넓혀왔고 6·25전쟁 때는 미국·영국에 이어 세 번째로 많은 2만7천여 명을 파병했어요. 역사적으로는 두 나라가 굉장히 가까운데, 현실에서는 약간 거리감이 있죠. 한국에서는 북미 대륙 하면 미국을 떠올리고, 캐나다는 동아시아 하면 중국과 일본을 먼저 떠올리니까요(웃음). 그런 면에서 이번 수교 50주년은 양국이 서로를 각인시킬 좋은 기회로 삼을 필요가 있어요. 그래서 푸드 페스티벌, 영화제, 북극 사진 전시회 등 다양한 이벤트를 준비했죠. ‘한국 캐나다 수교 50주년 기념 웹사이트(www.celebration2013.kr)’를 방문하시면 이에 관한 자세한 정보를 얻으실 수 있습니다.”
교육 분야만 놓고 보자면 이미 캐나다와 한국은 가까운 이웃이다. 캐나다에 유학 중인 한국 학생이 2만5천 명에 이른다. 한국에서 캐나다 BC주 커리큘럼을 그대로 가르치는 BIS 캐나다 국제학교, 제주 영어교육도시 내에 자리 잡은 기숙형 사립 여학교 브랭섬홀아시아에 대한 관심도 뜨겁다. 캐나다가 핀란드와 함께 세계에서 교육 경쟁력이 가장 높은 나라로 손꼽히는 비결에 대해 채터슨 대사는 “각각의 주 정부가 독립적인 교육 시스템을 갖고 있어 서로 경쟁하면서 성장한 덕분”이라고 말했다. 영어와 프랑스어를 동시에 배우고, G7 국가 중 1인당 공교육비 투자 비율이 가장 높은 점 등도 교육의 질을 높이는 요인이다. 캐나다 교육 시스템에 관해서는 채터슨 여사가 더 하고 싶은 말이 많은 듯했다.
“저는 고등학교까지는 일본에서 공부한 후 캐나다의 커뮤니티 칼리지로 진학했는데, 일본은 한국과 마찬가지로 커리큘럼이 짜여 있어서 학생은 학교나 선생님이 시키는 대로 하기만 하면 되는 반면 캐나다에서는 어떤 과목을 들을지, 어떤 선생님과 공부할지 모든 것을 스스로 판단하고 선택하는 시스템이었어요. 처음부터 학생 자신이 공부의 주체가 돼야 하는 거죠. 또 학생들에게 기회를 많이 주는 점도 인상적이었고요. 제 경우엔 대학에 들어가자마자 바로 현장 경험을 쌓을 수 있도록 일자리를 마련해주더군요. 캐나다 교육의 가장 큰 장점이라면 다른 사람이 대신 무언가를 해주는 게 아니라 학생 스스로 성장할 수 있는 기회와 환경을 제공해주는 점이라고 생각해요.”
“한 가지 덧붙이자면 캐나다 사람들의 가장 핵심적인 교육 철학은 아이들에게 지식이 아니라 생각하는 방법을 가르치자는 겁니다. 가족을 어떻게 부양할 것인가, 사회에 도움이 되는 판단을 하는 법, 나보다 어려운 이웃을 도와야 하는 이유 같은 것들에 관한 사유와 가치관을 확립하는 것이 인터넷 검색을 하면 바로 나오는 지식을 암기하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거죠. 나이 들수록 점점 더 제가 어린 시절에 그런 교육을 받을 수 있는 환경에서 성장했다는 걸 감사하게 되더군요.”(채터슨 대사)
채터슨 대사 부부는 여행을 즐긴다. 특히 광활한 대자연에서 나고 자란 채터슨 대사는 모험가적 습성이 자연스럽게 몸에 배었다. 프랑스에서 근무하던 시절에는 부부가 함께 오토바이를 타고 유럽 곳곳을 누비기도 했다. 개를 키우기 시작한 이후에는 자동차로 교통수단을 바꿨지만 부부의 여행은 변함없이 계속됐다. 한국에선 특히 설악산을 좋아해서 여러 번 다녀왔다. 그래도 아직 봄꽃 핀 설악산의 모습은 보지 못했다며 조만간 다시 한 번 다녀올 계획이라고 했다.
“설악산은 산세도, 수종도 다르지만 어딘지 모르게 캐나다와 비슷한 구석이 있어요. 작은 산이지만 그곳에 가면 기분이 상쾌해지죠. 얼마 전엔 경기도 파주 헤이리에 다녀왔고 지난주엔 여동생이 와서 함께 북한산에 올랐어요. 한국의 자연은 캐나다 못지않게 훌륭해요. 서울 시내에선 구석구석 미술관을 찾아다니는 재미도 쏠쏠하고요.”
봄나물과 설악산의 맛과 멋에 반해
캐나다를 여행하는 한국인들에겐 국립공원이나 광활한 호수에 여유롭게 몸을 맡겨볼 것을 권했다.
“오타와와 킹스턴 사이에 1백80년 정도 된 운하가 있어요. 사우전드 아일랜드(Thousand Islands)라고, 엄청나게 많은 크고 작은 호수가 연결돼 있는데, 여름에는 아주 평화롭고 아름답죠. 하우스보트를 타고 몇 주간을 가도 사람 한 명 만날 수 없을 정도로 넓기도 하고요. 그곳에서 자연에 몸을 맡기고 흐르는 대로 자신을 한 번놓아보는 것도 색다른 경험이 될 수 있을 것 같아요.”
옆에서 조용히 남편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채터슨 여사가 갑자기 웃음을 터뜨린다. 남편과 함께했던 여행의 추억이 떠올라서라고 한다.
“저도 남편과 카누를 타고 호수 위에서 며칠 지낸 적이 있어요. 물론 굉장히 아름답고 훌륭한 여행이었죠. 그런데 카누를 비롯한 그 모든 짐을 직접 들고 다녀야 하는 건지는 몰랐어요(웃음). 적어도 그 얘기는 미리 해줬어야 했는데….”
캐나다 원주민들은 단풍나무로 집을 짓고 가구를 만들었으며, 수액으로는 잼(메이플시럽)을 만들어 요리의 단맛을 내는 데 썼다. 메이플시럽은 17세기 본격적인 이주를 시작한 프랑스인과 영국인들이 아침 식사용 팬케이크에 곁들여 먹으면서 가장 전통적인 캐나다 음식으로 자리 잡게 된다. 이처럼 캐나다는 자연에서 얻은 싱싱한 식재료를 이용한 식문화가 발달했다. 깨끗한 물과 품질 좋은 홉 덕분에 맥주는 물론, 밴쿠버와 앨버타 사이 오카나간 밸리의 와이너리에서 생산되는 와인 등도 세계 최고 수준으로 꼽힌다. 3월 22일 서울 반얀트리호텔에서 열린 캐나다 메이플 갈라에서는 최상급 소고기, 로브스터, 메이플 요리, 와인과 맥주 등이 소개됐는데, 특히 맥주에 대한 평가가 좋았다. 채터슨 대사는 “캐나다는 세계적인 홉 수출국인데, 가장 품질이 좋은 건 국내용으로 남겨둔다. 캐나다 맥주가 맛있는 건 그 덕분일 것”이라며 웃었다.
3월 22일 캐나다 메이플 갈라에서 선보인 요리들. 캐나다 요리의 강점은 신선한 식재료다. 캐나다는 전통적인 육류 수출국인 데다 북극해, 대서양, 태평양 등과 접하고 있어 해산물이 풍부하다.
채터슨 여사는 주말엔 직접 식사 준비를 하는데, 정통 캐나다 요리보다는 양식과 일식, 한식을 두루 조합한 요리를 시도하는 편이라고 한다. 남편은 낙지볶음, 닭갈비 같은 맵고 자극적인 음식을 좋아하는 반면 아내는 담백한 식성이라 김치에 치즈를 얹어 요리하는 식으로 자신만의 퓨전 레시피를 만들게 됐다는 것이다. 두 사람이 모두 열광하는 한국 음식은 냉이, 쑥, 달래 같은 봄나물. 특히 채터슨 대사는 세계 어디에서도 한국의 봄나물처럼 신선하고 향취 있는 음식은 맛보지 못했다며 극찬을 했다.
국적을 막론하고 음식 이야기가 나오면 대화가 길어지게 마련이다. 관자, 대구, 게 등 캐나다산 식재료부터 삼계탕, 떡갈비 등 한국 음식까지 군침을 흘리며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채터슨 대사 부부가 키우는 개 두 마리가 달려와 ‘사진 좀 찍어주세요’라는 자세로 포즈를 취한다. 일본 전통견 시바인데, 한국인들이 진돗개를 사랑하듯 일본 사람들이 사랑하는 영리한 개라고 한다. 시바의 예기치 못한 재롱에 대사 부부의 얼굴에 흐뭇한 웃음이 번진다. 아름다움과 여유로움이 공존하는 캐나다 대사 부부의 공간에 함께할 수 있었던 건 기자에게도 큰 행운이었다.
-
추천 0
-
댓글 0
- 목차
- 공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