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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leb 인생 사용설명서 열 번째 | 내 생애 최고의 여행

“인생 후반전 가치 있는 삶 설계하다”

유장근 이윤순 부부 산티아고 길에서 얻은 깨달음

글 | 김명희 기자 사진 | 홍중식 기자

입력 2012.08.16 14:43:00

스페인 산티아고 길은 예수의 열두 제자 중 한 명인 성 야고보의 무덤으로 향하는 800km 여정이다. 8세기부터 1천2백 년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인생의 무거운 화두를 짊어지고 이 길로 찾아들었다. LG그룹 부사장을 끝으로 30년간 직장 생활을 마감한 유장근 씨와 아내 이윤순 씨도 인생 후반전을 풀어갈 힌트를 얻기 위해 산티아고 길의 노란 표지판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인생 후반전 가치 있는 삶 설계하다”

1 순례 중 들렀던 알베르게(여관) 앞 순례자 동상에서. 2 순례 를 마친 후 인증서를 받은 부부.



중년 부부들이 걷는 모습은 열에 아홉, 남편이 굳은 표정으로 앞서가면 아내는 잰걸음으로 뒤쫓아가는 모양새다. 특별히 화나는 일이 있거나 싸운 것도 아닌데 오래전부터 그랬던 습관이 굳어진 것이다. 유장근(58)·이윤순(52) 씨 부부도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어딜 가든 서로 손을 꼭 잡거나 팔짱을 낀다. 산티아고 길을 다녀온 후 생긴 변화다. 두 사람은 2011년 3월 31일부터 5월 2일까지 33일간 각자 10kg씩 배낭을 지고 산티아고 길 800km를 걸었다. 하루 평균 24km의 강행군, 서로를 지팡이 삼아 의지하지 않았다면 완주가 불가능했을 것이다. 부부는 왜 고행을 자초했을까.
유장근 씨는 모든 직장인들이 부러워할 만한 삶을 살아왔다. 고려대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1980년 LG화학에 입사해 그룹사 임원, LG데이콤 CFO 등을 거쳐 2010년 LG데이콤 부사장을 끝으로 30년 직장 생활을 마감했다. 샐러리맨으로서 최고의 자리까지 갔음에도 예상치 않은 퇴직을 하자 허탈하고 쓸쓸하고 앞날이 걱정되는 마음은 여느 사람들과 마찬가지였다.
“무엇보다 아내가 낙심하지 않을지 걱정했는데 아무 말 하지 않고 세례를 받으라고 하더군요. 뜻밖이었지만 그 속에 많은 의미가 담겨 있는 것 같아 그러마 했죠.”(유장근)
“언젠가는 이런 순간이 오리라고 생각했어요. 본인이 가장 힘들 텐데, 무슨 말을 더 하겠어요. 마침 시간이 생겼으니 교리 공부를 해서 세례를 받는 게 어떻겠느냐고 했죠.”(이윤순)
아무리 계획을 세워 의미 있게 보내려 해도 백수 생활은 시간이 남았다. 유씨는 열심히 성경을 읽고 새벽 미사에 빠지지 않고 나가 세례도 받았다. 하지만 종교가 무엇인지, 사람들이 왜 거기에 매달리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왜 신앙을 가져야 하는지 회의까지 생겼다. 돌파구가 필요했다. 그때 아내가 지나가는 말로 했던 산티아고 순례가 떠올랐다.
“아내가 처음 산티아고 얘길 꺼냈을 땐 ‘뭐, 800km를 걸어? 미쳤어? ’라고 했는데, 생각해보니 그곳에서라면 내가 고민했던 문제의 답을 찾을 수 있을 것 같더군요. 또 30년간 살면서 제대로 된 가족여행 한 번 못했던 점이 마음에 걸려 이참에 길을 나서보자 했죠.”
오랜 직장 생활 동안 치열함과 꼼꼼함이 몸에 밴 유씨는 길을 떠나기 위해 철저하게 준비했다. 인터넷을 통해 정보를 수집하고, 관련 책도 10여 권을 읽었다. 자료를 접할수록 그 길이 만만치 않음을 알게 됐다. 우선 체력을 다지는 게 급선무. 부부는 한겨울 남한산성 눈길을 헤집고 다니고, 관악산의 가장 어려운 코스를 골라 등반을 했다. 그러다 산티아고 길과 가장 비슷한 길을 찾아냈다. 바로 북한산 둘레길이었다.
“주말마다 북한산 둘레길 중 가장 난코스를 골라 배낭을 짊어지고 9km를 왕복했어요. 주중에는 러닝머신을 10km 이상씩 뛰고요. 그렇게 훈련한 결과를 종합해보니 우리가 걸은 길이 족히 500km는 되더군요.”

퇴직 후 떠난 순례, 돌아와서 호스피스 봉사 활동 시작

“인생 후반전 가치 있는 삶 설계하다”

산티아고 순례를 다녀온 뒤 유장근·이윤순 씨 부부는 늘 손을 꼭 잡고 다닌다.



걷는 데 자신감이 생긴 부부는 2011년 3월 29일 인천공항을 출발해, 파리 공항을 거쳐 테제베를 타고 산티아고 길의 출발점인 프랑스 생장피드포르에 도착했다. 3월 31일 카미노(camino·순례)가 시작됐다.
유씨 부부는 1983년 결혼해 1남1녀를 뒀다. 남편은 베이비붐 세대의 전형적인 가장. 그에게 아내란 당연히 곁에 있는 사람일 뿐, 소중함에 대해서는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하지만 카미노를 하면서 자신의 발에 잡힌 물집을 치료하며 걱정해주고, 빨래며 궂은일을 도맡아 하는 아내를 보며 새삼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자신이 직장 생활에 집중할 수 있었던 것도 아내가 아무 문제 없이 집안일을 알아서 잘 처리했기 때문이었음을 뒤늦게 깨달았다. 그는 슬그머니 아내의 가방까지 둘러메고 길을 걸었다.
“돌이켜보면 참 무심한 남편이었습니다. 대기업 임원이었으니까 나는 그래도 된다고 생각한 것 같아요.”
유씨가 미안한 마음을 털어놓자 아내가 손사래를 친다.
“남편은 언제나 든든한 울타리였어요. 한 번도 남편 때문에 속상하거나 서운한 적이 없었죠.”
산티아고 길에서는 수많은 사람들과 만나고 헤어짐을 반복했다. 국적도 다르고 모습도 다르고 참여 동기도 다르지만 불편하고 낯선 여정 속에서도 모두 남을 배려할 줄 아는 이들이었다.
“산티아고 길에는 대체로 자신이 처한 환경을 인식하고 바꿔서 새로운 방향을 찾고자 하는, 성찰을 위해 오는 사람들이 많아요. 그들과 만나 이야기하고, 또 혼자 걸으면서 인생과 인간관계 등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되죠. 처음 화두로 가져갔던 하느님 사랑에 대해서도, 나는 그동안 ‘내가 어떻게 하느님을 사랑할까’만 고민했는데 그게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됐어요. 하느님 사랑은 내가 하느님을 사랑하는 게 아니라 하느님으로부터 사랑을 받는 것이고, 이미 충분히 사랑받고 있다는 걸 카미노 중에 느꼈습니다.”
여행을 다녀온 뒤 부부의 삶은 많이 달라졌다. 병원에서 봉사 활동을 하던 아내를 따라 유씨는 호스피스 교육을 받고 말기암 환자들과 그 가족을 돕는 일을 시작했다. 부부는 ‘산티아고 길의 소울메이트’(가톨릭출판사)라는 책을 통해 길에서 얻은 깨달음을 기록했다. 남편이 글을 쓰고 아내는 사진을 찍었다.
“앞으로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정리가 되더군요. 그동안의 삶도 훌륭했다고 자평합니다. 다만 지금까지는 소질과 능력을 개발해 사회를 위해 올바르게 쓰는 게 목적이었다면 앞으로는 가치 있는 삶을 살고 싶어요. 그간 많은 것을 받았으니 그 은총에 감사하며 다른 사람에게 베풀어야죠. 어제 봉사를 나갔는데, 환자 보호자가 고마워하며 자신도 봉사에 관심을 갖게 됐다는 이야기를 하더군요. 정말 뿌듯했습니다.”(유장근)
“남편이 집안일도 적극적으로 도와주고, 다정다감해진 게 피부로 느껴질 정도예요. 신앙적인 면에서도 단단해졌고요. 카미노 길에는 중독성이 있다고 해요. 기회가 되면 남편과 한 번 더 가보고 싶어요.”(이윤순)

여성동아 2012년 8월 58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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