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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배우 진경 다시 보기

고부 갈등 한 방에 날린 ‘훈계 며느리’

글 | 김유림 기자 사진 | 지호영 기자

입력 2012.06.18 10:51:00

시집살이의 고충과 함께 이상적인 고부 관계를 조명하는 KBS ‘넝쿨째 굴러온 당신’이 인기다. 김남주 ‘시월드’ 못지않게 화제인 것이 바로 ‘교사 며느리’의 ‘시월드’. 철부지 시어머니와의 기 싸움에서 한발도 물러서지 않고 원칙주의로 일관하는 며느리의 모습이 시청자들에게 큰 웃음을 안겨준다. 모처럼 뿔테 안경을 벗은 ‘훈계 며느리’ 진경을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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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등장부터 예사롭지 않았다. KBS 주말드라마 ‘넝쿨째 굴러온 당신(이하 넝굴당)’ 주인공 차윤희(김남주)의 올케언니 민지영(진경) 얘기다. 지영은 중학교 국어 교사라는 직업답게(?) 원칙주의를 내세우며 가족 모두를 가르치려 든다.
시어머니 한만희(김영란)가 아들 차세중(김용희)의 사업 실패로 윤희가 맡겼던 돈까지 다 날린 사정을 딸에게 설명하면서 며느리인 지영에게 “네 남편이니 뭐라고 말 좀 해보라”며 신경질을 내자 지영의 훈계가 시작된다. 얌전히 하나로 묶은 머리에 뿔테 안경을 쓴 지영은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제가 왜요, 어머니. 저도 피해자예요” 하고 차분하게 말한다. 그러면서 그는 “우리 셋 중에 누가 제일 황당하고 억울할까요. 그 사람 오냐 오냐 키운 어머니? 그 사람하고 눈만 마주치면 싸우는 아가씨? (눈을 감고 빠른 속도로 머리를 가로저으며) 아니요. 그 사람한테 속아 결혼해 월급 차압 당하고 집 날려서 어머니 댁에 얹혀사는 바로 저예요” 하고 말끔하게 정리한다. 며느리의 당돌함에 놀란 시어머니가 “얘, 너 선생인 거 누가 모르는 사람 있을까봐 가르치니?” 하고 반격해보지만 지영은 차분히 가운뎃 손가락으로 안경을 들어올리며 “제가 얘기하는 태도가 불쾌하셨다면 그건 죄송해요. 하지만 어머니, 대화의 논점이 제 태도였나요? 아니면 제 직업? 아뇨. 그 사람 무능력이 대화의 주제예요 어머니”라며 시어머니의 분노에 부채질을 한다. 이후에도 지영의 깨알 같은 대사는 고부 갈등이라는 다소 무거운 주제에 재미와 활기를 불어넣으며 시청자들에게 큰 웃음을 선사한다.
처음 보는 얼굴이다 싶은 사람도 많겠지만 진경(40)은 연극계에선 화려한 경력을 쌓아온 배우다. 영화 ‘왕의 남자’를 각색해 10년 동안 공연된 연극 ‘이(爾)’에서 장녹수 역을 맡아 카리스마 넘치는 연기를 선보였다. 국민 여동생 문근영과 더블 캐스팅 됐던 연극 ‘클로저’에서도 호평을 받았고, 영화 ‘약속’을 원작으로 한 연극 ‘돌아서서 떠나라’에서는 탤런트 송선미와 번갈아가며 여주인공 역을 맡았다. 그 밖에도 ‘날 보러와요’ ‘6월의 아트’ ‘8인의 여인’ ‘커튼콜의 유령’ ‘쿠킹 위드 엘비스’ 등 다양한 작품에서 활약했다.

몸에 딱 맞는 옷 입은 듯 신나게 연기하는 중
진경은 처음 ‘넝굴당’ 대본을 읽고 ‘딱 내 역’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그동안 여러 캐릭터를 섭렵하면서 자신이 잘 표현할 수 있는 인물이 무엇인지 스스로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진지하면서 코믹한 캐릭터에 자신 있던 그는 연출가와의 첫 미팅에서 실감나는 연기를 펼쳐 보여 한 번에 캐스팅됐다.
“많은 분들이 재미있게 봐주셔서 감사해요. 저 역시 몸에 딱 맞는 옷을 입은 것처럼 연기하는 게 편하고 신나요. 처음 역을 맡으면 캐릭터 분석에 많은 공을 들여야 하는데, 솔직히 지영이란 캐릭터는 워낙 제 안에 있는 몇 가지 요소들을 꺼내면 되는, 그렇게 큰 힘 들이지 않고도 자유자재로 표현할 수 있는 인물인 것 같아요. 2005년에 심혜진, 조혜련, 김성령 씨와 함께 ‘아트’라는 연극을 한 적이 있는데 그때 맡았던 여의사 캐릭터가 지금 하고 있는 역과 비슷해요. 그때 처음 제 안에 코믹하면서도 능청스러운 면이 있다는 걸 알았어요. 이후에 비슷한 역이 오기를 기다렸는데 이번에 또 한 번 기회가 주어진 거죠. 특히나 시청자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아서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어요(웃음).”
촬영장 분위기는 그야말로 ‘웃음꽃’. 주로 함께 연기하는 시어머니 김영란, 남편 김용희와는 서로 쳐다만 봐도 웃음이 터져 난감할 때가 있다고 한다. 김남주 역시 극 중 친정식구들 팀을 보고 “환상의 하모니”라며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고. 진경은 “김영란 선생님이 처음에는 이런 역을 많이 안 해봐서 어색하다고 하더니 NG 한 번 안 내고 실감나게 잘하시고, 김용희 씨도 리액션을 정말 잘 받쳐줘 맛깔스러운 연기를 선보일 수 있다”고 말했다.
진경은 극 중 김남주의 시조카인 방장군(곽동연)의 담임선생님으로도 나와 다양한 면모를 보여준다. 특히 장군의 아버지 방정배(김상호)와 장군의 학업 성적에 대해 심각하게 대화를 나누는 장면에서는 시청자들을 포복절도하게 만든다.
드라마에서와 달리 진경은 털털한 말투로 인터뷰에 응했다. 극 중 똑 부러지는 말투는 어떻게 탄생한 것인지 궁금해 하자 그는 “오랫동안 연기 지도를 해온 덕분인 것 같다”며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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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 연극 ‘이’와 ‘돌아서서 떠나라’ 출연 모습. 3 ‘국민 드라마’로 떠오른 ‘넝쿨째 굴러온 당신’의 한 장면.



“연극만으로는 생계 유지가 힘들어서 그동안 액팅 코치를 겸했어요. 이번 드라마 보시고 ‘실제로 선생님 한 적이 있느냐’고 묻는 분들도 계시더라고요(웃음). 그동안 한채아, 임정은, 서영희, 유건 씨 등과 인연이 있었고, 요즘에도 가끔 SOS를 치는 친구들이 있으면 집으로 오라고 해서 봐줘요. 결과적으로 보면 아르바이트 삼아 해오던 일이 오히려 제 연기에도 도움이 된 거죠(웃음).”
냉철한 이성주의자인 지영도 자식 앞에서만큼은 어쩔 수 없이 ‘말보다 주먹이 먼저 나가는’ 망가지는 모습을 보이고 만다. 어린 아들 재민이 자신의 진주 목걸이를 여자 친구에게 갖다 준 걸 알고 분노하며 아이방으로 들어가 윽박지르고 야단치는 모습에서는 어쩔 수 없는 인간의 이중성을 드러낸다.
“작가 분께서 지영이란 캐릭터를 정말 실감나게 잘 그려주세요. 지영이 시종일관 딱딱하고 논리 정연한 모습만 보였다면 시청자들도 금방 싫증 냈을 텐데, 아주 적절한 시기에 다분히 인간적인 면모를 드러내주시더라고요. 목걸이 때문에 아들을 혼내는 대본을 읽고 저도 한참 배꼽을 잡고 웃었거든요(웃음). 또 장군이 아버지와 전화 통화를 하면서 두 사람이 사돈이자 선생과 학부모 관계라는 게 밝혀졌을 때도 작가의 아이디어가 참 기발하다는 생각을 했어요. 더욱 감사한 건 촬영 들어가기 전에 얘기됐던 분량보다 많이 출연할 수 있게끔 작가가 지영에게 신경을 써주신다는 거예요(웃음).”
주변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진경은 매회 대본을 받으면 대사를 연구하고 수백 번 되뇌며 연습한다고 한다. 비록 몇 마디 되진 않지만 한 문장을 외우더라도 다양한 톤으로 변화를 주면서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되는 말투를 골라낸다.



‘넝굴당’ 인기로 생애 첫 CF 촬영
현장 분위기가 워낙 좋다 보니 생각지도 못한 연기가 즉흥적으로 탄생할 때도 있다. 최근 화제가 됐던 남편 세중과의 ‘더티 댄스’ 포즈도 그 중 하나. 극 중 시어머니가 남편에게 폭력을 행사하자 지영은 남편 앞을 막아선 채 “어머니 아들이지만 제 남편이잖아요. 구박을 해도 제가 해야죠” 하며 큰 소리를 치고 이에 감동받은 세중이 “여보! 엄마고 뭐고 당신밖에 없다”고 말하며 뒤에서 지영을 격하게 안은 뒤 지영의 손을 자신의 뺨으로 가져가 시청자들에게 큰 웃음을 선사했다. 당시 대본에는 ‘세중이 뒤에서 지영을 안는다’라고 쓰여 있었지만 리허설 중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환상의 호흡을 선보였고 제작진 역시 만족스러워했다고 한다.
얼마 전에는 두 사람에게 안경 협찬까지 들어왔다. 드라마에서 두 사람 모두 안경을 쓰고 나오기 때문이다. 또 진경은 얼마 전 생애 첫 CF 촬영을 했다. 유명 브랜드 요구르트 광고인데 드라마 캐릭터 그대로 깐깐한 엄마가 고른 요구르트라는 콘셉트다.
시청자 게시판을 보면 시어머니에게 할 말 다 하는 지영의 모습을 보고 속이 다 후련하다는 의견이 자주 올라온다. 그 역시 주위에서 이와 비슷한 얘기들을 접할 때면 자신의 연기가 많은 며느리들에게 대리 만족을 선사하는 것 같아 뿌듯한 마음이 든다고 한다.
“제 언니가 드라마를 보더니 ‘딱 나 같은 여자네’ 하더라고요(웃음). 사실 언니가 굉장히 직설적인 성격이거든요. 시어머니에게도 아니다 싶은 건 다 얘기하는 편이고요. 그런데 대부분의 며느리들이 그렇게 하지 못하잖아요. 지영이시어머니에게 나쁜 감정이 있어서 그러는 건 아니에요. 우유부단한 남편과 살면서 많이 지쳤고 삶의 희로애락을 내려놓은 상태에서 그저 사실을 말하는 거죠. 상대에 대한 증오가 있는 게 아니라 모든 현상을 객관적으로 무미건조하게 바라보기 때문에 직언도 할 수 있는 거라고 생각해요.”

내성적이고 조용했던 아이, 연기로 성격 개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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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경은 처음부터 연기자로서 끼를 타고나진 않았다. 어려서는 내성적이고 조용한 아이였고, 사춘기 시절에는 세상에 대한 불만과 반항심으로 힘든 시기를 보내기도 했다. 감정을 표출하지 못하고 늘 억누르며 지낸 탓이 크다고.
“늘 가슴속에 뭔가 꽉 차 있는 느낌인데, 현실에서는 그런 것들을 표현할 통로가 하나도 없었어요. 고등학교 때 사물놀이반도 하고 탈춤반에도 들었지만 어머니의 반대로 접어야 했죠. 그러다 언니가 대학에 들어가서 연극반 활동을 하는 걸 보고 ‘연기를 하면 나를 표현할 수 있겠구나’하는 생각이 들어서 재수 끝에 동국대 연극영화과에 들어갔어요. 당시 집에서는 난리가 났죠. ‘네가 무슨 연기를 하냐’고 부모님의 반대가 대단했어요.”
아무런 준비 없이 무작정 연기 세계에 뛰어든 그는 연기자로서 사회에 발을 내딛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대학원에 진학한 이유 역시 학교라는 공간에 숨고 싶은 마음이 컸기 때문이라고 한다. 결국 그는 스물아홉 늦은 나이에 기성 무대에 데뷔했다. 그 첫 작품이 ‘이(爾)’. 당시에도 그는 극단에 소속되지 않고 프리랜서로 활동했다. 예전에는 모든 게 극단 중심이었으나 최근 들어 대형 자본의 유입으로 연극계 역시 프로덕션과 제작자 개념으로 바뀌었고, 진경은 그 과도기를 겪으며 힘든 시기를 보냈다고 한다.
“극단에 소속되기에는 용기가 없었어요. 매번 직접 일을 찾아다녀야 하니 좌절도 많이 맛봤고, 특히나 미래가 불안하다는 것 때문에 심적으로 많이 힘들었죠. 요즘 드라마 현장에서 보면 나이가 어린데도 연기를 두려워하지 않고 똑 부러지게 잘 하는 친구들이 많더라고요. 정말 부럽고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저는 학교라는 공간에 숨어서 소극적으로 연기를 했거든요. 가끔 ‘나도 좀 더 일찍 세상 밖으로 나왔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하죠(웃음).”
경제적 어려움 외에도 그를 힘들게 한 건 연기자로서 인정받고 싶은 욕심이었다. 그는 “처음에는 단지 나를 표현하고 살기 위한 몸부림으로 연기를 시작했는데, 나이가 들수록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들더라”며 솔직하게 말했다.
“연극의 묘미는 매번 시작할 때마다 모험이고 도전이라는 거예요. 예를 들어 현실과는 동떨어진 그리스 비극의 여주인공을 맡았다면 그 인물이 되기 위해 들이는 공이 워낙 많기 때문에 나중에 무대 위에서 관객들에게 연기를 펼쳐 보일 때, 그 희열감은 어떤 말로도 표현하기 힘들어요. 하지만 그렇게 노력하고 애쓴 것에 비해 외부에서 돌아오는 반응이나 보상은 TV 매체와 비교하면 보잘것 없죠. 실제로 그런 괴리감 때문에 힘들어 하는 연극배우들이 꽤 많아요. 또 예전에 연극만 할 때는 드라마 하는 배우들은 참 쉬울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막상 제가 해보니까 TV에 나오는 모든 연기자들을 존경하게 됐어요. 지난해 아침드라마 ‘장미의 전쟁’에 출연할 때는 연극과 메커니즘이 다르다 보니까 카메라 울렁증이 생기더라고요(웃음). 연기력은 기본이고 순발력과 재치가 필요한 작업이라는 걸 그때 처음 알았죠. 다행히 지난해 고생을 많이 해서인지 이번 드라마에서는 비교적 쉽게 적응할 수 있었어요.”
아직 싱글인 그에게 결혼할 생각은 없냐고 묻자 “연기와 결혼했다”며 농담을 했다. 현재 만나는 남자 친구는 있지만 구체적인 결혼 계획은 없다고.
진경은 연기를 통해 우울한 성격에서 활달한 모습으로 바뀌었을 뿐 아니라 인식하지 못했던 마음의 상처까지 치유 받았을 만큼 연기를 필연으로 믿는다. 한 가지 더 바람이 있다면 앞으로 좀 더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감동을 줄 수 있는 연기자가 되는 것. 진경은 “한때 불안한 마음에 성우 시험을 본 적도 있지만, 이제는 연기를 위한 연기자가 되고 싶다”며 환하게 웃었다.

여성동아 2012년 6월 58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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