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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천사 박은총 이야기

마음의 준비를 하라는 말을 애써 무시했다. 대신 아이 이름을 ‘은총’으로 지었다 ”

글 | 구희언 기자 사진 | 이기욱 기자

입력 2012.03.16 12:00:00

“희귀 난치병 세 가지를 포함한 여섯 가지 불치병을 가지고 태어난 아이. 박지훈·김여은 부부의 아들 박은총군은 태어나자마자 6개월밖에 살 수 없다는 진단을 받았다. 그러나 아홉 살이 된 은총이는 아빠와 철인 경기에 도전하며 새로운 희망을 전하고 있다. 은총이네 이야기를 인터뷰와 책 내용을 토대로 재구성했다.
붉은 천사 박은총 이야기


#01. 불안한 예감
2003년 10월2일, 박지훈(37)은 퇴근 후 만삭인 아내와 느긋하게 저녁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내일부터 황금 연휴의 시작이라 비디오를 두 편 빌려 밤늦게까지 영화를 볼 요량이었다. 아내 김여은(34)이 지훈을 다급하게 불렀다. 출산 예정일이 한참 남았는데 양수가 터진 것.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운 부부는 아침 일찍 병원으로 향했다.
“자기야, 들어와서 내 옆에 있어줘.”
분만실로 들어가는 아내를 보며 지훈은 눈가를 훔쳤다. 태명 ‘사랑이’. 내 자식이 태어난다는 생각에 눈물이 줄줄 흘렀다. 오전 10시가 지나 분만실 밖에서 서성이던 그의 귓가에 아이 울음소리가 들렸다. 지훈은 떨려서 멎을 것 같은 심장을 부여안고 분만실에 들어갔다. 아이가 조금 다르다고 느낀 것은 그때였다.
“간호사님, 원래 아이가 엄마 배 속에서 나오면 이런가요?”
간호사는 말없이 아이의 몸을 닦았다. 초조한 마음으로 대답을 기다리는 지훈을 의사가 불렀다.
“아이가 조금 이상한 것 같으니 빨리 큰 병원으로 옮기세요.”
갓 태어난 아이를 부둥켜안고 정신없이 익산 원광대학교병원으로 향했다. 의사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바로 입원시키세요. 검사할 것이 많아요.”
태어나자마자 6일간 병원에 입원한 아이. 의사는 정확한 병명을 찾지 못했다. “짧으면 6개월, 길어야 1년”이라고 했다. 마음의 준비를 하라는 말을 애써 무시했다. 대신 아이 이름을‘은총’으로 지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뜻하는 이름이었다. 붉은 천사 박은총(9)은 그렇게 이들에게 왔다.

#02. 검붉은 아이
날 때부터 은총이는 팔이 앙상했고 두 다리의 굵기가 달랐다. 얼굴의 혈관은 다 터져서 붉다 못해 검었다. 두피부터 입천장, 발바닥까지 온몸이 검붉은 점으로 뒤덮인 아이. 여은은 “배 속에 있을 당시에는 아무런 이상 증상이 없었다”고 했다. 부부는 평소에 잔병치레도 하지 않을 정도로 건강했기에 더 충격을 받았다.
집과 교회, 친척집, 식당 그리고 병원. 다른 곳에는 갈 수 없었다. 유모차에 은총이를 태우고 집 근처 마트라도 갈라치면 따가운 시선이 쏟아졌다. 가게를 나갈 때까지 계속 쳐다보는 사람들을 보며 부부는 겸연쩍게 웃었다. 은총이는 온정 어린 시선과 경멸의 시선을 본능적으로 구분했다. 지훈은 “사람들의 편견이 싫었다”고 했다.
“세상 밖으로 전혀 안 나가려고 했어요. 사람 많은 데 가면 연예인도 아닌데 시선이 느껴지는 거예요. 좋은 시선이 아니라 나쁜 시선이. 특히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저희를 많이 나무라셨어요. 부부가 아이를 잘못 돌봐서 화상 입은 줄 알고 혀를 쯧쯧 차시는데…. 또 아이들은 정직하잖아요. ‘쟤 사람 맞아요?’ ‘괴물이다!’ 이러는데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어요.”
은총이가 백일 됐을 무렵이었다. 2004년 1월29일 오후 6시 40분경. 평소처럼 지훈은 은행에서 마감 업무를 보고 있었다. 휴대전화 벨 소리가 정적을 깼다. 수화기 너머로 여은의 울먹이는 목소리.
“여보, 은총이가 이상해! 얼른 집으로 와줘!”
황급히 집으로 달려간 지훈의 눈에 손과 발을 쉬지 않고 까딱이며 이상 징후를 보이는 은총이가 들어왔다. 부리나케 병원으로 달렸다. 그것이 길고도 힘든 병원 생활의 시작일 줄은 미처 몰랐다.
보름 만에 은총이가 눈을 떴다. 스터지-웨버 증후군. 이름도 생소한 희귀 난치병. 뇌혈관 기형으로 검붉은 반점이 나타나고 뇌가 위축돼 돌처럼 굳는 병이다. 의사는 “6개월 이상 생존은 힘들 것 같다”고 했다. 이전에도 들은 말이었다. 은총이는 하루가 멀다 하고 경기를 했다. 자면서도 몸을 파르르 떨고, 무호흡증 때문에 며칠씩 무의식 상태에 빠졌다. 이게 다가 아니었다. 다리 한쪽이 비정상적으로 비대해지는 클리펠-트레노우네이-베버 증후군. 이 밖에도 인터넷으로 검색도 안 되는 희귀병이 계속 발견됐다. 모든 것이 꿈이기를 바랐다. 하지만 눈앞에 닥친 건 잔혹한 현실이었다.

#03. 허락되지 않은 보통날

붉은 천사 박은총 이야기




2004년 10월3일, 은총이의 첫돌. 은총이가 경기를 일으키는 바람에 공들여 준비한 돌잔치는 엉망이 됐다. 생일날 중환자실에 누워 고통과 싸우는 아들의 모습에 지훈은 억장이 무너졌다. 소아과 밖 남자 화장실에서 엉엉 소리 내 울었다. 아들이 영영 떠나버릴까 봐 무서웠다. 여자 화장실 쪽에서도 울음소리가 들렸다. 익숙한 울음소리. 아내였다. 가장 기뻐야 할 하루가 슬픔으로 얼룩져버렸다. 그날부터 원광대학교병원 중환자실은 은총이의 집이 됐다.
은행원 박지훈의 생활은 아이가 태어난 뒤로 변했다. 툭하면 응급차에 실려가는 은총이를 돌보느라 직장 조퇴를 밥 먹듯 했고, 은총이를 간호하느라 제대로 출근하지 못했다. 돈을 만지는 직업이었지만 머릿속엔 숫자 대신 은총이 생각뿐이었다. 마감 업무 때 계산이 안 맞으면 담당자가 모자란 돈을 채워야 했고 지훈은 그때마다 돈을 물었다. 가진 돈을 병원비로 다 쓴 지훈은 카드 대출에 손을 댔다. 이후에는 종합병원 총무과로 자리를 옮겼지만 5개월 동안 월급을 못 받았다. 전직 은행원인 그는 앞으로의 일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곧 압류가 들어올 거라는 것. 지훈은 결국 신용불량자가 됐다. 부모의 이혼, 사별, 재혼, 가난 등 평범하지 않은 가정에서 살아온 부부의 꿈은 평범한 삶을 사는 것이었다. 소박한 꿈마저도 그들에겐 허락되지 않았다.

#04. 마치 거짓말처럼
첫 수술. 은총이는 녹내장 수술과 탈장 수술을 한꺼번에 받았다. 녹내장은 스터지-웨버 증후군의 합병증이었다. 2005년 1월3일, 30년 같은 3시간이 흘렀다. 회복실에서 쌍안경 같은 안대를 끼고 누워 있던 은총이는 마취에서 깨어나고도 늦게까지 경기를 했다. 이후로도 두 번의 녹내장 수술을 더 받았지만 은총이는 오른쪽 시력을 거의 잃고 말았다.
은총이의 상태가 심각해졌다. 손과 다리가 굳고 무호흡 때문에 뇌손상이 심해졌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상계백병원을 찾은 여은에게 강훈철 교수는 “수술하면 좋아질 아이를 왜 이렇게 고생시켰느냐”며 “수술시켜줄 테니 돈 없으면 밤에 몰래 도망가라”고 했다. 여은은 “예전에 한 유명 병원에서 ‘(이런 아이를 낳은 건) 재수가 없었다고 생각하라’는 모진 말도 들었다”고 했다. 3월28일 오전 7시, 신경외과 황용순 교수의 집도 하에 은총이는 17시간이 넘는 대수술을 받았다. 수술은 성공적이었다.
왼쪽 팔다리 마비가 심하고 손발이 굳은 은총이에게 필요한 것은 재활치료였다. 분당 보바스병원에서 8주간 매일 물리치료, 작업치료, 언어치료를 받았다. 재활치료 중 기적처럼 은총이가 걸었다. 4년 6개월 만이었다. 오전에 세 걸음, 오후에 여덟 걸음. 스스로 걷는 줄도 모르고 발을 내딛는 모습. 여은은 떨리는 손으로 그 모습을 휴대전화로 녹화해 남편에게 전송했다.
‘은총이가 얼떨결에 내 손도 놓고 혼자서 세 걸음… 걸었어요. 눈물이 핑….’
다들 잠든 시간, 불이 꺼진 병실에서 커튼을 치고 여은은 동영상을 보고 또 봤다. 지훈에게서 답장이 왔다.
‘너무 기뻐서 입은 웃는데 눈물이 자꾸 나와.’
2008년 4월 1일 만우절. 은총이가 걸었다. 거짓말처럼.

붉은 천사 박은총 이야기

1 2011년 8월 목포와 영암, 해남 일대에서 열린 국제철인3종경기에 참가한 은총이네 가족. 2 2011년 5월 남이섬에서, 꽃보다 은총.



#05. 작은 시작
지훈은 희귀 난치병 질환을 알리고 정부에 의료비 지원을 요청하기 위한 캠페인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10여 년간 댄디-워커 증후군으로 고생하다 2006년 8월 하늘로 간 어린 민석이가 결심을 굳게 해줬다. 2006년 10월13일, 1500km의 국토 대장정에 나섰다. ‘같은 눈으로 바라봐주세요’라는 캐치프레이즈를 걸고 희귀 난치성 환자 후원 모임인 ‘여울돌’ 박봉진 대표와 걸었다. 출발지는 민석이의 유골을 뿌린 강원도 강릉 경포대. 다음은 송이와 우제가 있는 대구, 그리고 부산, 익산, 은총이가 있는 군산. 천안, 수원 성남, 서울, 부천까지 돌고서야 40여 일의 국토 대장정은 막을 내렸다. 지훈의 손에는 희귀 난치병 부모들의 탄원서와 온·오프라인으로 참여한 2만여 명의 서명서가 들려 있었다. 2007년 9월1일. 은총이가 앓던 희귀병 중 하나인 스터지-웨버 증후군이 보건복지가족부 장관이 고시하는 1백7가지 희귀 난치병 목록에 포함됐다. 작은 시작이었다.
“준비하시고, 땡!”
은총이는 지훈이 달리는 모습을 좋아했다. 지훈이 출발 동작을 취하고 빠르게 달려나갈 때면 은총이는 깔깔대며 웃었다. 한번 시작하면 계속 해달라고 했다. 아빠의 ‘방귀’ 소리도 좋아한다. “준비하시고, 땡!”에 “뿌웅” 하는 방귀 소리까지 더해지면 웃다 지쳐 쓰러졌다. 아빠가 달리면, 아들은 웃었다. 지훈에게 달릴 이유가 생겼다. 지훈은 뒤이어 마라톤을 시작했고, 철인 3종 경기에 도전했다. 은총이와 함께.
2010년 10월16일, 부자가 생애 처음으로 철인 3종 경기에 도전했다. 지훈은 은총이를 보트에 태우기 전 우비를 입히고 장화를 신겼다. 보트와 자신을 연결하는 끈을 허리에 묶고 강물로 뛰어들었다. 혼자 수영할 때는 힘 있게 발차기를 했지만, 은총이가 젖을까 봐 팔 힘만으로 나아갔다. 이어지는 사이클과 마라톤. 지훈은 은총이를 유모차에 태우고 달렸다. 아빠가 왜 달리는지를 아는지 모르는지 아들은 까르르 웃었다. 4시간 20여 분 만에 도착. 지훈은 “은총이에게 넓은 세상과 많은 사람이 있다는 걸 알려주고 싶었다”며 “철인 경기를 통해 은총이에게 세상 살아가는 법을 가르쳐주고 싶었다”고 했다. 추위나 고통이 이들을 막을 수는 없었다.
일용직, 우유배달, 통신업, 노점상…. 은총이가 아프면서 지훈의 직업은 다양해졌다. 자꾸 커가는 은총이를 위해 재정적 부분은 여은이, 집안일은 지훈이 맡아 철인 경기 연습과 병행하기로 했다. 지훈은 새벽에 마라톤 연습을 하고 여은을 깨워서 출근시키고, 은총이를 유치원에 데려다준다. 집안일을 하다가 점심을 먹고 나면 사이클과 수영 연습. 할머니 집에서 노는 은총이를 데려오면 지훈의 하루 일과가 끝난다. 많은 이들이 직업을 물을 때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제 직업은 너무나도 좋고 멋진 은총 아빠입니다.”

#06. 붉은 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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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년밖에 못 산다던 은총이는 아홉 살이 됐다. 부부의 믿음도 그만큼 성장했다. 대한민국에서 아픈 아이 한 명쯤은 잘 키워낼 자신이 생겼다. 은총이는 부부가 인생을 충만하게 살 수 있도록 이끌어준 고귀한 선물이자 어려운 이웃을 돌아보게 한 천사였다. 부부는 그간의 여정을 ‘우리 은총이’라는 책에 담았다. 책을 펼치자 가운데 샛노란 부분이 눈에 들어왔다. 은총이가 세상의 빛이 됐으면 하는 마음에서 빛을 형상화한 것이다. 은총이가 병실에 누워 있을 때면 여은과 지훈은 은총이에게 입맞춤을 해주곤 했다. 그래서일까. 은총이는 틈만 나면 아빠 엄마에게 뽀뽀 세례를 퍼붓는다. 여은은 “병원 생활을 오래 해서 은총이처럼 아픈 아이들을 많이 만났다”고 했다.
‘은총이가 없었다면 우리 부부의 삶이 어땠을까’하는 상상은 아예 안 해요. 은총이는 제 삶의 이유거든요. 은총이랑 대화는 제대로 안 되지만 항상 말하죠. ‘은총아, 네가 받은 사랑을 세상에 전하는 사람이 되면 좋겠어’ 하고….”
지훈의 꿈은 여행을 하면서 은총이에게 넓은 세상을 보여주는 것이다.
“은총이가 사람들에게 희망과 꿈을 전하는 사람으로 태어나서 고맙고 미안한 마음이에요. 저도 아내도 아이인 시절이 있었고, 은총이도 그렇고. 아이들은 몸이 아프든 아프지 않든 분명히 이유가 있어서 이 세상에 나온 거거든요. 다들 사랑받으려고 태어난 거예요. 절대 포기 안 하면 좋겠어요.”

참고도서 | 우리 은총이(홍성사)

여성동아 2012년 3월 57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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