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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4인의 영혼을 치유한 음식 이야기

성석제 김창완 백영옥 이우일

정리 | 권이지 객원기자

입력 2011.11.17 17:14:00

누구나 자신만이 간직하고 있는 기억 속의 맛이 있다. 엄마의 손맛일 수도 있고, 어려웠던 시절 힘이 됐던 음식일 수도 있으며, 좋은 사람과 나눈 따뜻한 밥 한 끼일 수도 있다. 작가 4인이 자신의 기억 속에 깊이 자리 잡고 있는 음식에 얽힌 특별한 사연을 들려준다.
고향의 은혜, 어머니의 은덕
작가 성석제의 ‘장醬’

작가 4인의 영혼을 치유한 음식 이야기

성/석/제
1960년 경북 상주에서 태어나고 연세대 법학과를 졸업했다. 1986년 ‘문학사상’ 시 부문 신인상을 받으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고 1994년 소설집 ‘그곳에는 어처구니들이 산다’를 펴내면서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대표작은 ‘내 인생의 마지막 4.5초’ ‘아름다운 날들’ 등.



1987년 겨울, 나는 어설픈 나그네 행색으로 고향을 찾아들었다. 6개월 전쯤 시인으로 등단한 터라 직업은 있었으나 돈이 없었다. 물론 시인이라는 직업이 있다는 걸 아는 사람은 고향에는 없을 터였다. 직함이라면 몰라도.
고향에 돌아온 이상 나그네라는 직함은 ‘돌아온 탕자’ 같은 걸로 바뀌어야 하는데 십수 년 전 가족이 서울로 전원 이주한 데다 고향에 돌아왔다고 친척들에게 인사드리러 다닐 처지가 아니었으므로 다른 도시에서나 마찬가지로 나는 나그네로 일관하고 있었다. 그 전에 있던 곳이 바닷가에 있던 절이어서 나는 거기서 조금 배운 전라도 사투리를 섞은 말투로 고향의 비구니 사찰에 몸을 의탁하는 절차를 마쳤다. (중략)
고기와 생선이 빠진 절 음식에서 상대적으로 부족해지기 쉬운 단백질을 채워주는 건 콩이다. 콩자반, 콩나물, 두부도 콩이지만 간장과 된장, 고추장도 콩에서 나온다. 기름지고 자극적인 것이 없는 절 음식에서 맛을 결정하는 것은 바로 콩이다. 절에서 장이 발달한 것은 이 때문이다.
장독대는 스님들이 기거하는 안채가 아닌, 학생들이 주로 기거하는 곳 뒤쪽에 있었다. 모두 수십 년 이상 된 고참 장독으로 안에 든 장 역시 묵은 장들이었다. 스님에게 ‘간장은 묵을수록 맛있고 된장은 햇된장’이라는 말이 있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그건 없어서 못 먹던 시절 이야기로 부잣집이나 양반네들은 늘 충분히 익은 묵은 장을 먹었노라고, 그 해 그 해 장 담가 먹기 바쁜 서민들을 위로하기 위해 만들어진 말 같다고 했다.
장은 그 자체로 맛이 있긴 해도 다른 음식을 떠받쳐주는 역할을 할 때가 더 많다. 시주물로 들어온 김을 불에 슬쩍 그슬려 간장에만 찍어 먹어도 맛이 있었다. 풋고추를 따서 말렸다가 찹쌀가루를 입힌 것을 볶아 고추부각을 만들고 간장에 찍어 먹는 것도 별미였다. 입맛이 없던 적도 없었지만 없던 입맛도 돌아오게 하는 힘이 있었다. (중략)
내 아버지의 아버지, 아버지의 고향이며 내 어머니의 아득한 조상의 고향. 그분들이 담가 먹던 장과 김치는 내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내 음식으로 정해져 있었다. 어머니의 태 속에서 어머니가 만들고 담그고 짓고 먹는 장과 김치, 밥에 이미 중독이 되어 있었다. 음식에 관한 한, 사춘기에 고향을 떠나기는 했어도 어머니와 함께 있는 한 나는 언제나 고향에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였다. 대학 들어가면서 시작된 잦은 출분(도망쳐서 행방을 감춤)과 방랑, 군대생활로 인해 고향과 집에서 멀어질수록 고향과 어머니의 맛에 대한 집착은 무의식중에 강해졌을 것이다.

작가 4인의 영혼을 치유한 음식 이야기


삶은 늘 한 끼의 식사
가수 김창완의 ‘수제비’



작가 4인의 영혼을 치유한 음식 이야기

김/창/완
서울대학교 잠사학과 졸업. 그룹 ‘산울림’의 리드 보컬로 1977년 1집 음반 ‘아니 벌써’로 데뷔한 뒤 지금까지 가수와 배우, 방송 진행자로 종횡무진 활약 중이다. 현재 SBS 파워FM ‘아름다운 이 아침 김창완입니다’의 진행을 맡고 있다.



시끌벅적한 주말 저녁이 지나간 토요일 아침 동네 거리는 방금 기차가 떠난 간이역 같았다. 나는 길을 걷고 있었다. 경사진 길을 내려가는 발뒤꿈치의 충격이 맥박처럼 온몸에 퍼졌다. 한 발자국 내딛을 때마다 담장, 전봇대, 그리고 어린이 놀이터가 슬로모션처럼 뒤쪽으로 흘러갔다. 배가 고픈 것은 아니었지만 나는 식당으로 가고 있었다. 배가 고프지도 않은데 먹어야겠다는 생각은 왜 들었을까? 식사의 동인은 배고픔이 아니라 시간표라는 생각을 했다. 작은 식당문을 열고 들어갔다. 아직 손님은 없었다.
녹슨 철제장 위에 올려 있는 작은 스피커에서는 비틀스의 ‘위 캔 워크 잇 아웃(We can work it out)’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메뉴를 보니 콩나물비빔밥과 수제비가 전부였다. 식사 메뉴와 노래가 묘한 충돌을 일으키고 있었다. 수제비는 느린 시간의 배를 타고, 노래는 빠른 시간의 배를 타고 흐르는 듯했다.
(중략)
비틀스가 활발한 활동을 할 무렵 우리나라에선 박재란의 ‘산 너머 남쪽에는’, 최희준의 ‘하숙생’, 나훈아의 ‘사랑은 눈물의 씨앗’, 정훈희의 ‘안개’. 신중현의 ‘님아’ 등이 유행이었다. 비슷한 시절에 우리 귓가에 맴돌던 노래들은 더 이상 수제비집에서 들려오지 않는다. 그런 것을 보면 혀는 귀에 비해 상당히 보수적인 것 같다.‘돈 렛 미 다운(Don‘t let me down)’이 이어져 나왔다. 청춘 시절에 듣던 노래를 나이가 들어서 들으려면 어느 정도의 통증을 감수해야 한다. 그러나 청춘 시절에 먹던 음식을 늙어서 먹는다고 해서 가슴이 아프거나 하지는 않다. 노래는 가슴을 울게 하고 음식은 심장을 뛰게 한다.
(중략)
비틀스 판은 계속 돌아갔다.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Across the universe)’. 노래는 늙지 않는다. 식사를 거의 마칠 무렵 ‘렛 잇 비(Let it be)’가 흘러나왔다. 종업원이 다가와 물었다.
“식사 맛있었어요?”
“응, 근데 조금 아팠어요.”
“왜요?”
종업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냐, 맛있어서 그래요.”
비틀스 노래를 들으며 오늘의 점심식사 수제비는 한 끼니의 식사이기도 하고 내 인생을 들여다보는 핀 홀이기도 했다. 생의 마지막 날까지 삶은 늘 한 끼의 식사일 뿐이다.

작가 4인의 영혼을 치유한 음식 이야기


청춘의 시작과 끝을 꽁꽁 뭉쳐 단단히 다지다
작가 백영옥의 ‘주먹밥’

작가 4인의 영혼을 치유한 음식 이야기

백/영/옥
1974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패션지 ‘하퍼스 바자’의 피처 에디터로 일했으며 2006년 단편 ‘고양이 샨티’로 문학동네 신인상을 수상했다. 패션지 기자 경험을 토대로 젊은 여성들의 사랑 방식을 알콩달콩 그려내는 작가. 대표작은 ‘스타일’ ‘다이어트의 여왕’ 등.



그해(2003), 나는 신춘문예에 떨어졌다. 다음해도 떨어졌고, 그 다음해에도 또 떨어졌다. 그러고도 한참 더 많이 떨어질 거였다. ‘케 세라 세라’ 같은 음악 따위 별로 듣고 싶지도 않았다. 될 대로 되라니, 대체 어쩌란 말인가.
그때, 새벽 4시면 잠에서 깨어나 자신이 원하는 과목을 수강하기 위해 줄을 서는 학생들 사이에서 나는 주먹밥을 먹곤 했다. 그때, 그곳의 아주 작은 주먹밥집 앞에 서서 오뎅 국물과 함께 주먹밥을 먹는 청춘들의 지친 얼굴을 참 많이도 봤다. 그때가 꽤 추운 겨울이었기 때문에 밥을 씹거나 국물을 넘길 때마다 입안에선 뿌연 김이 올라왔다.
너무 오래 끓여서 죽처럼 흐물흐물해진 어묵과 어른의 주먹보다 큰 주먹밥, 주먹밥 표면에 김가루를 잔뜩 묻혀 일명 ‘폭탄밥’이라는 이름이 붙은 다양한 종류의 주먹밥들이 커다란 스테인리스 쟁반 위에 가득 담겨 있었다. 한 달 방세, 학원비, 편의점에서 사 먹을 수 있는 부실한 김밥 이외에 그들에게 허락된 이 한 끼의 식사는 대략 1천원. 나는 ‘1000원’이라고 쓰여 있는 가격표를 보다가, 0의 숫자를 세다가 코끝이 찡해져버렸다. 하루가 다르게 물가가 치솟는 이때, 아직 1천원을 가지고 먹을 수 있는 끼니가 있다는 것 때문에, 1천원짜리 한 장이 인생의 가장 힘든 때를 보내고 있는 사람들의 끼니를 해결해주고 있다는 생각에 울컥했다.
(중략)
허기란 그저 물리적인 배고픔을 뜻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것은 사랑에 배고프고, 우정에 배고프고, 시간에 배고프고, 진짜 배가 고픈 것이므로 우리 삶에 대한 가장 거대한 은유다. 내 인생의 소울푸드가 있다면 아마도 두 손으로 꽁꽁 만들어놓은 이 주먹밥일 것이다. 꿈을 이루지 못해 힘들어하던 때, 더 좋은 꿈을 꾸기 위해 달려가던 때, 그저 조용히 서서 창밖을 바라보며 먹던 따뜻한 밥. 지진과 쓰나미로 초토화된 일본 사람들이 대피소에서 나눠준 주먹밥을 아껴 먹는 장면을 보며 그런 생각은 더 강렬해졌다.

작가 4인의 영혼을 치유한 음식 이야기


남쪽 나라에서 온 조상이 그리워한 맛
만화가 이우일의 ‘쌀국수’

작가 4인의 영혼을 치유한 음식 이야기

이/우/일
기발하고 유쾌한 상상력으로 적재적소에서 독자의 허를 찌르는 킬러 본능을 가진 만화가. ‘노빈손 시리즈’를 비롯해 ‘호메로스가 간다 1’ ‘도날드 닭’ ‘생각 혁명’ 등 수많은 책에 그림을 그리고 글을 썼다.



‘그래, 고려로 가자. 머나먼 그곳에 정착하면 살아남을 수 있다.’
내가 도착한 곳, 내가 배에서 내린 곳은 흰 옷을 입은 사람들이 사는 한적한 바닷가의 마을이었다. 나중에 알게 된 그곳의 지명은 고려의 황해도 옹진군, 화산이다.
흰 옷을 입은 사람들은 웃음이 많은 사람들이었다. 글을 아는 이는 드물었지만 손짓 발짓을 하면 의사소통이 어렵진 않았다. 나는 바닷가 마을에서 막일을 시작하고 고려인들과의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나는 더 이상 안남국의 왕족이 아니었다. 난 머나먼 남쪽 나라에서 온, 말도 안 통하는 뱃사람일 뿐이다.
얼마 후 전쟁이 일어났다. 북쪽의 몽고군이 쳐들어온다고 했다. 마을 사람들은 촌장의 집 마당에 모여 집회를 했다. 나도 그 자리에 함께했다. 사람들은 몽고군과 싸워 마을을 지키고, 나라를 지키기로 결의했다. 난 이해할 수 없었다. 마을사람들이라 해봤자 얼마 안 된다. 절반 이상이 노인이고 아낙, 아이들이다. 별다른 무기도 없다. 그런데 싸우겠다고?
나는 마을을 방어할 계획을 세웠다. 외지로 통하는 두 길목만 지키면 마을이 약탈당하는 것을 막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릴 때부터 책으로 배운 병법이 실제로 도움이 되긴 처음이었다.
우린 살아남았다! 서른 명가량 되던 몽고군 중 절반이 우리에게 죽임을 당했다. 나머지 가까스로 살아남은 자들은 혼비백산 도망을 갔다. 토성을 만들고 길목에 매복했던 작전이 적중한 것이었다. 마을 사람들은 펄쩍펄쩍 뛰며 날 끌어안고 기뻐했다. 나도 그들을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리며 함께 기뻐했다.
촌장의 집으로 관아 사람들이 찾아왔다. 그들은 조정에 우리 마을 사람들이 몽고군을 무찌른 업적을 전하겠다고 했다. 촌장은 관아 사람들에게 내 이야길 했다. 평소처럼 장황하게. 안남국에서 온 왕자가 우리 마을을 구했다고.
(중략)
나는 가끔 남쪽 나라를 바라보며 불어오는 해풍에 마른침을 넘기곤 한다. 다시는 맛볼 수 없는 안남의 포(쌀국수) 국물을 떠올리며. 갖가지 풀잎으로 풍취를 더한, 이젠 돌아갈 수 없는 고향의 그 맛이 그립다.

2011년 여름.
오늘도 이대 앞 단골 베트남 식당에서 쌀국수를 먹는다.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커다란 그릇에 든 쌀국수가 숙주, 양파, 고수와 함께 한 상 차려진다. 화산이씨인 내가 이토록 베트남 쌀국수를 좋아하는 것은, 어쩌면 남쪽 나라에서 온 나의 조상이 이 맛을 죽는 날까지 그리워했기 때문이 아닐까?
* 이 이야기는 화산이씨의 시조 이용상의 설화를 재구성해 쓴 픽션입니다.

작가 4인의 영혼을 치유한 음식 이야기


참고도서·일러스트 제공 | ‘소울푸드’(청어람미디어)

여성동아 2011년 11월 57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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