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스님 못 본 지도 어언 십오 년/지금도 그 얼굴 그 모습 그대로인지/
한밤에 금강연 못가에서 이야기할 제/눈은 아직 녹지 않고 달은 둥글려 했지
- 조선 선비 이행(李荇, 1478~1534)의 ‘월정사 스님에게 주다’에서
단풍은 붉다고 다 좋은 게 아니다. 푸른 솔밭에 언뜻언뜻 어리는 단풍이 으뜸이다. 오대산 월정사 전나무 숲이 바로 그렇다. 이미 월정사 전나무 숲엔 단풍잎들이 노릇노릇 알맞게 익었다. 바늘잎 사이에서 나부끼는 발그레한 나뭇잎들. 껑충 큰 전나무 틈새로 키 작은 활엽수들이 찧고 까분다. 앙증맞다. 괴불나무 빨간 구슬열매. 파르르 떨고 있는 선홍빛 화살나무 잎사귀들. 달걀처럼 갸름한 불그죽죽 복자기 나뭇잎. 바스락! 바스락! 발에 밟히는 마른 황갈색 낙엽들. 울긋불긋한 잎들이 언뜻언뜻 어른거린다. 몽환적이다. 아침이슬에 젖은 단풍잎은 봄꽃보다 더 말갛다. 눈이 젖는다.
오대산으로 들어가는 산문 전나무 숲길
월정사 전나무 숲은 오대산으로 들어가는 산문(山門)이다. 일주문으로부터 금강교까지 1km 남짓 거리. 1천7백여 그루의 전나무들이 우렁우렁하다. 머리가 하늘을 떠받치고 있다. 나이 1백 년 안팎의 장년 나무들이다. 중생들은 이곳에서 속세의 때를 벗고 부처님 땅에 들어간다. ‘바람 샤워’로 욕망과 집착의 비린내를 씻는다.
나무가 나무끼리 어울려 살 듯/우리도 그렇게/살 일이다./가지와 가지가 손목을 잡고/긴 추위를 견디어내듯//나무가 맑은 하늘을 우러러 살 듯/우리도 그렇게/살 일이다./잎과 잎들이 가슴을 열고/고운 햇살을 받아 안듯 -오세영의 ‘나무처럼’에서
1 월정사 일주문에서 금강교까지 1km 남짓한 전나무 숲길. 2 2006년 쓰러진 6백 살 최고령 전나무.
전나무는 쭉쭉 빵빵 늘씬하다. 아름드리 몸통에 군살이 하나도 없다. 흑갈색 용 비늘 살갗이 탄탄하다. 군자나무다. 전나무가지는 그늘로 뻗는다. 햇살은 ‘참빗 바늘잎’ 틈새로 비껴든다. 무차별하게 쏟아지는 햇빛이 바늘잎을 통해 걸러진다. 햇살이 국숫발처럼 가지런해진다. 따뜻하고 아늑하다.
전나무 숲길에는 죽은 전나무 고목등걸이 누워 있다. 2006년 10월23일 밤 홀연히 쓰러졌다. 6백 살 최고령 전나무 어른이 눈을 감았다. 밑동은 가운데가 텅 비어 나무통이 됐다. 사람들은 너도나도 그 함지박에 들어가 사진을 찍는다. 얼굴들이 천진난만하다. 어른도 아이가 된다. 동강 난 나무 윗부분은 허허롭게 바닥에 누워 있다. 다람쥐와 산짐승들이 그 통 속을 들락거린다.
전나무 숲길은 적막강산이다. 바람이 가끔 “쏴아~” 하고 숲을 흔든다. 전나무 피톤치드 냄새가 향긋하다. 피톤치드는 향기로운 식물성 살균 물질로, 사람 몸에 이로운 녹색 음이온이다. 온종일 그 향을 맡으며 숲 속에 머무는 사람도 있다. 푸른 하늘, 하얀 구름에 상큼한 바람. 사람들은 느릿느릿 걷는다. 뒷짐 진 채 지그시 눈을 감고 어슬렁거린다. 달팽이처럼 오간다. 딸내미 손잡고, 여기 기웃, 저기 기웃 해찰한다. 가다 말다 한자리에서 맴돈다.
다시 어깨 힘 빼고 스적스적 들어선 산책로/…헛된 욕심들 하나씩 내려놓고/나는 욕심들 하나씩 내려놓고/나는 하나도 급할 일 없는 나그네/찬 이슬 내리기 전까지 천천히 걷고 또 걸을 것이다 -고인숙의 ‘오대산국립공원에서’ 부분
전나무 숲길은 구두와 양말을 벗고 맨발로 어슬렁거려야 제 맛이 난다. 하이힐과 스타킹을 벗어 봉지에 넣어 들고, 설렁설렁 걸어보라. 바짓가랑이를 무릎까지 걷어 올리고 맨발바닥을 흙에 내디뎌보라. 서늘한 땅기운이 정수리까지 뻗친다. 아하! 내가 살아 있구나! 생명의 기운이 용솟음친다. 마음이 평안해진다. 너그러워진다. 콧노래가 저절로 난다. 가슴이 뻐근하면서 시원하다. 뻥 뚫린다. 보름달이 휘영청 밝은 밤, 별 부스러기가 싸라기눈처럼 떨어지는 밤, 월정사 전나무 숲길을 걸어보면, 그동안 왜 그렇게 아등바등 살았는지 부끄러워진다.
3 월정사 일주문. 4 오대산 단풍 숲길은 도란도란 걷기 좋다. 5 비로봉, 상원사, 적멸보궁 방향을 가리키는 안내판.
오대천 골짜기. 오대산에는 32개 산봉우리와 31개 계곡, 12개 폭포가 있다.
옛길 따라 걷는 단풍 숲길
오대산은 소박하다. 후덕하다. 산봉우리 32개, 계곡 31개, 폭포 12개를 거느린 맏며느리 같은 산이다. 김시습(1435~1493)은 “풀과 나무가 빽빽하게 우거져서 속된 자들이 감히 오지 않아 으뜸”이라고 했다. 조선 숙종 때 선비 김창흡(1653~1722)도 “기(器)가 중후하여 마치 유덕한 군자와 같다. 가볍거나 뾰족한 태도가 조금도 없다. 암자가 수풀 깊숙한 곳에 있어 곳곳마다 참선 들기에 안성맞춤이다”라고 했다.
1 작은 나뭇가지로 엮고 흙을 덮어 만든 섶다리. 2 다람쥐도 쉬어가는 길. 3 오대천 벼랑길에 나무들이 터널을 만들었다.
오대산 골짜기는 단풍 숲길이다. 한용운 시인이 ‘단풍 숲을 향하여 난 작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라고 노래하던, 그런 분위기의 길이다. 월정사를 찾는 불자들은 단풍 숲길 만행(卍行)을 즐긴다. 천지가 모두 ‘글자 없는 경전’이다. 무자천서(無字天書)다. 걷다 보면 수많은 경구들이 천둥소리로 다가온다. 우레를 친다. 천지는 말이 없다. 그저 묵묵히 자기 자신을 끊임없이 바꿀 뿐이다. 때가 되면 어김없이 변화한다. 피나는 자기혁명을 한다.
월정사 전나무 숲길은 월정사 부도밭을 지나 오대산 옛길로 이어진다. 옛길은 계곡을 따라 상원사까지 올라간다. 20리(약 8km) 남짓 거리. 노닥거리며 걸어도 3시간이면 충분하다. 곱게 익은 단풍 숲길. 화전민들이 밭일 하러 오갔던 오솔길이다.
옛길은 오대천 골짜기를 따라 구불구불 나 있다. 월정사에서 상원사까지 자동차 길이 있지만, 이 좋은 길을 놔두고 굳이 차 타고 갈 필요가 있을까. 자동차는 상원사에서 돌아올 때 타면 충분하다. 오대천 물은 정갈하다. 푸른 하늘이 덩그마니 내려와 앉았다.
바람이 불 때마다 우수수! ‘나뭇잎소낙비’가 쏟아진다. 황갈색 참나무 잎은 빙그르르 춤을 추며 내려앉는다. 침엽수 바늘잎은 화살처럼 비껴 꽂힌다. 다람쥐가 멀뚱멀뚱 입을 주억거린다. 바닥은 낙엽으로 푹신하다. 푸른 조릿대와 붉은 낙엽 더미가 한데 버무려져 넉장거리로 누워 있다. 돌돌돌 돌을 감고 흐르는 물소리, 웅얼웅얼 끝없이 중얼거리는 바람 소리, 삐삐! 종종! 유목민 노래 같은 새소리가 어우러진다. 계곡물 웅덩이엔 나뭇잎 배들이 빙빙 떠돈다.
오대산 옛길은 월정사 반야교를 건너 회사거리에서 시작된다. 회사거리는 일제강점기 일본 목재 회사가 있었던 곳. 한때 화전민 3백60여 가구가 살던 너와집 동네였다. 오대천은 아래로 흐르고, 사람들은 그 반대로 오대천을 거슬러 오른다. 물은 숲 향기를 퍼 나르고, 사람들은 그 냄새에 취해 숲 품속을 파고든다.
4 상원사 돌계단을 오르는 사람들. 5 월정사 부도밭. 6 상원사 절 마당에서 바라본 오대산 단풍. 옅은 물안개가 붉은 산잔등을 휘감고 있다.
|
||||||
오대산 비로봉(1563m) 발아래 구름바다에 묻힌 첩첩 단풍.
나무들이 계곡 벼랑길을 비스듬히 막은 채 누워 있다. 나무 터널이다. 사람들이 허리를 굽혀 그 나무 아래를 지난다. 거제수나무 하얀 껍질이 부얼부얼하다. 옛 사람들은 그 껍질을 벗겨 편지지로 썼다. 나무껍질 가을편지다. 섶다리 위에 사람들이 오간다. 섶은 솔가지나 작은 나뭇가지를 말한다. 물푸레나무나 버드나무로 다리 기둥과 상판을 엮고, 그 위에 섶과 흙을 덮은 게 섶다리다. 한여름 큰물 나면 한순간에 휩쓸려가는 어설픈 임시 다리다.
거대한 연꽃을 만드는 다섯 봉우리
오대산은 다섯 봉우리가 만드는 거대한 연꽃 봉오리다. 그 한가운데 꽃심이 바로 부처님 사리를 모신 적멸보궁이다. 적멸보궁은 ‘용이 여의주를 희롱하는 풍수지형’이다. 부처님 사리는 바로 용의 정골 부분에 묻혀 있다.
가을 오대산은 단풍으로 물들어 붉은 연꽃이 핀다. 겨울에 흰 눈이 내리면 백련꽃이 벙긋 입을 벌린다. 오대산은 몸집이 두툼한 육산이다. 풍만한 연꽃이다. 오대산 다섯 봉우리 중 으뜸은 비로봉(1563m)이다. 비로봉에 올라야 비로소 오대산 연꽃나라가 발아래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다섯 장의 붉은 연꽃잎 한가운데 노란 꽃술(적멸보궁)이 함초롬히 고개를 들고 있다.
비로봉은 상원사에서 3km 거리. 쉬엄쉬엄 걸어도 3시간이면 너끈하다. 적멸보궁이 딱 중간 지점이다. 가파르지 않다. 비로봉 꼭대기에 서면 산들이 아득히 겹쳐 있다. 아슴아슴하다. 구름은 산허리를 감싸며 꿈틀댄다. 산 첩첩, 구름 첩첩, 안개 첩첩, 바람 첩첩….
계곡길을 따라 굽이굽이/산 위에 올라와 보니//운무(雲霧)는 산자락을/
고즈넉이 휘어감아/여인의 허리를 포근히/안아 들은 듯하고//안개비는 촉촉이/내 가슴을 적시어 오는데 -박상현 시인
비로봉에서 상왕봉을 거쳐 북대상두암으로 가는 길은 능선길이다. 천년 주목나무, 하얀 자작나무가 반겨준다. 죽어 천 년을 살고 있는 주목 고목이 미라처럼 서 있다. 군데군데 서어나무가 참나무들 틈새에서 낯가림을 한다. 능선은 산 어깨를 밟고 가는 길이다. 사방에 눈길을 줘도 걸림이 없다. 발바닥이 간지럽다. 발밑에서 구름이 인다. 오대산이 토해내는 하얀 입김이다.
●교통
승용차로는 영동고속도로를 타고 가다가 진부 톨게이트에서 빠져 월정사로 가면 된다. 서울에서 버스를 타고 가려면 동서울터미널(지하철 2호선 강변역)에서 진부행 버스를 탄다. 2시간 30분 정도 걸린다. 진부에선 월정사까지 가는 버스가 있다.
●먹을거리
산채정식, 산채비빔밥, 황태해장국이 대부분이다. 식당마다 맛과 가격이 비슷하다. ▽경남식당(033-332-6587), 보배식당(033-332-6656), 민속식당(033-333-4497), 산수명산(033-333-3103), 오대산비로봉식당(033-332-6597), 오대산통일식당(033-333-8855), 유정식당(033-332-6818), 동대산식당(033-332-6910), 만우농박(033-332-6818), 산들산채식당(033-333-7198), 오대산가마솥식당(033-333-5355), 오대산산채일번가(033-333-4604), 우리식당(033-334-6655, 토종닭 송어회)
-
추천 0
-
댓글 0
- 목차
- 공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