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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학 4년 만에 ‘영감’이라는 선물 안고 돌아온 메이크업 아티스트 정샘물

글·김유림 기자 사진·지호영 기자, 정샘물 제공

입력 2011.10.21 17:28:00

한국 톱스타들의 얼굴을 책임지는 메이크업 아티스트 정샘물이 마흔 가까운 나이에 돌연 유학을 선언하고 서울을 떠났다.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순수미술을 공부하고 4년 만에 돌아온 정샘물의 새로운 도전.
유학 4년 만에 ‘영감’이라는 선물 안고 돌아온 메이크업 아티스트 정샘물



패션과 뷰티의 메카 서울 청담동에는 연예인을 주 고객으로 하는 뷰티 살롱이 많이 모여 있다. 흔히 어떤 스타가 다니느냐에 따라 숍의 인지도가 달라지는데, 스타 메이크업 아티스트 1세대인 정샘물(41)은 20년 넘게 그 분야에서 최고의 자리를 지켰다. 하루에도 수십 명의 일본·중국인 관광객들이 스타들의 모습을 보려고 그가 운영하는 숍으로 몰려든다. 실제로 지금껏 당대 내로라하는 연예인 대부분이 그의 손을 거쳐갔고, 현재는 1세대 한류 스타인 배용준·전지현·송혜교부터 톱스타 김태희·이효리·이미연·김혜수·보아·걸 그룹 카라 등이 그에게 메이크업을 맡기고 있다.
하지만 정샘물은 사업적으로 승승장구하던 지난 2007년 모든 것을 뒤로하고 홀연히 미국 샌프란시스코로 떠났다. 순수미술을 공부하기 위해서였다. 연예인 고객들을 모두 뺏길 수 있는 상황에서 그는 배짱 두둑하게 4년씩이나 자리를 비웠다. 그리고 올 1월 유학 생활을 마치고 귀국했다.
청담동 아파트에 마련된 작업실에서 만난 정 원장은 한결 의욕에 찬 모습이었다. 작업실 입구에는 그가 유학 중 처음 그린 미국의 전설적인 비행사 찰스 린드버그의 초상화가 걸려 있었다. 입체적이고 디테일한 표현력에 감탄이 절로 나왔다. 김혜수·이효리·이은미 등을 모델로 한 작품들도 사진인지 그림인지 구분이 잘 가지 않을 정도로 생동감이 넘쳤다.
이화여대 서양화과 출신인 어머니의 영향으로 정 원장은 어려서부터 미술책을 보고 자랐다. 그 역시 미술에 재능이 있어 일찌감치 그림을 그리며 살리라 마음먹었지만, 학창 시절 아버지의 사업이 기울면서 그림에서 손을 놓아야 했다. 한동안 잊고 지낸 그림에 대한 열정이 다시 살아난 건 전지현·이효리와 함께 광고 촬영차 떠난 샌프란시스코에서였다. 촬영을 마친 뒤 3일 정도 더 머물 기회가 생긴 정샘물은 홀로 도시 곳곳을 돌아다니며 그 안에 배어 있는 예술적 감성에 가슴이 벅차올랐다고 한다.
“출장에서 돌아와 남편한테 그 얘기를 했더니 원하면 얼마든지 가도 좋다고 하더라고요. 벌여놓은 일도 많고, 제가 떠날 상황이 아니었는데도 남편은 적극적으로 유학을 권했어요.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한창 힘들 때여서 그런 식으로라도 저를 쉬게 할 요량이었던 것 같아요. 정말 감사한 건 제가 떠나 있는 동안 숍에 아무 문제가 없었다는 거예요. 저희 직원들이 인복이 많기로 소문이 났는데, 일반 단골손님들은 물론이고 연예인들도 꾸준히 저희 숍을 찾아주셨어요.”

유학 중 깨달은 메이크업 아이디어, 사업에 접목
정샘물은 ‘아카데미 오브 아트 유니버시티(AAU)’에서 순수미술(파인아트)을 전공했다. 늦은 나이에 시작한 공부였지만 4년 내내 높은 학점을 유지했다. 순수미술을 전공하려면 사진, 드로잉, 칼라 디자인, 특수 분장 등 다양한 교양 과목을 이수해야 하는데, 그중 해부학 시험에서는 그 혼자 A를 받았다고 한다. 메이크업 아티스트로서 순수미술을 전공한 다른 학생들과 비교해 차별화된 접근법을 사용한 덕분이기도 했다.
“18년 동안 사람 얼굴을 만져서 입체감을 표현하는 데 더 유리했어요. 제가 가지고 있는 장점을 활용하려고 노력했는데, 예를 들면 그림을 그릴 때 물감이 아닌 아이섀도, 피그먼트, 크리스털, 패션 촬영에 사용했던 패브릭이나 작은 소품들을 활용했더니 신선하다는 반응을 보이더군요. 메이크업 아티스트로서 자부심이 느껴지는 순간이었죠.”
유학 중에도 본업에서 완전히 손을 떼지는 않았다. 도저히 거절할 수 없는 일이 들어오면 학교에 사유서를 쓰고 수업을 빠졌다. 대표적으로 김태희 화장품 광고와 보아의 앨범 재킷·뮤직비디오 촬영을 들 수 있다. 정샘물은 “그래서인지 4년 동안 자리 비운 걸 모르시는 분들도 많더라”며 웃었다.

유학 4년 만에 ‘영감’이라는 선물 안고 돌아온 메이크업 아티스트 정샘물


유학 4년 만에 ‘영감’이라는 선물 안고 돌아온 메이크업 아티스트 정샘물




1 2 3 10월 초 홈쇼핑에서 첫 선을 보이는 화장품 브랜드 ‘뮬’ 론칭행사 때 모습.
4 5 정샘물은 4년 동안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순수미술을 전공했다.

유학 4년 만에 ‘영감’이라는 선물 안고 돌아온 메이크업 아티스트 정샘물

오랜 세월 톱스타들의 메이크업을 책임져 오고 있는 정샘물. 그는 내면의 아름다움까지 얼굴에 표현하려 애쓴다.



미술을 공부하는 동안 메이크업 아티스트로서 새로운 영감을 많이 얻었다. 언제부터인가 자신만의 메이크업 공식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한 그는 수시로 노트를 펼쳐 아이디어를 스케치하기 시작했다. 덕분에 그는 오랫동안 고민거리로 품고 있던 메이크업 브랜드 론칭을 실행에 옮기게 됐다. 10월8일 CJ홈쇼핑에서 론칭하는 ‘뮬’이 그 결과물이다.
“그동안 여러 화장품 업체로부터 사업 제안을 받았지만, 그때마다 거절했어요. 제 관점이 생기기 전까지 이름만 내주는 일은 하고 싶지 않았거든요. 그러다 미국에 있으면서 저만의 아이디어가 떠오르기 시작했어요. 대표적인 게 이번 론칭 제품에서 핵심으로 꼽을 수 있는 ‘살결 팔레트’예요. 특수 분장 수업을 들을 때 화장품을 덜어서 사용하는 종이 팔레트를 나눠주더라고요. 보통 우리나라 메이크업 아티스트들은 손등에 파운데이션이나 섀도를 조색해서 얼굴에 바르는데, 미국에서는 비위생적인 행동이라고 못하게 하는 거예요. 순간 머리가 띵했죠. 지금껏 저는 그 부분을 간과하고 살았거든요. 그래서 생각해낸 게 파운실러(파운데이션과 컨실러를 섞은 것으로 정샘물 원장의 피부 화장 노하우기도 하다)에 팔레트를 추가하는 거였어요. 그리고 거기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가 손등에서 조색할 때와 똑같은 느낌을 줄 수 있도록 팔레트에 피부 조직과 같은 무늬를 넣었어요.”
그 밖에도 손가락의 지문을 형상화한 ‘지문 퍼프’와 얼굴 굴곡에 맞게 설계한 엄지손가락 모양의 퍼프가 장착된 ‘핑거 픽싱 파우더’에는 일반인에게 메이크업 아티스트의 손길을 그대로 전하고 싶은 정샘물 원장의 마음이 담겨 있다.

대학 진학 포기하고 메이크업 독학
새로운 일을 앞두고 두려움이 있을 법하지만 그는 사업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남편에게 의지한다고 했다. 정샘물 인스피레이션의 대표이자 미키모토 코스메틱 사장인 남편 유민석씨(43)는 이번 화장품 론칭과 관련해 업무적인 부분을 모두 맡아 처리했고, 정 원장이 유학차 한국을 떠나 있을 때도 ‘정샘물닷컴’이란 인터넷 사이트를 개설해 고객들과의 커뮤니티를 지속적으로 이끌어가는 등 남다른 사업 수완을 발휘했다. 두 사람은 남편이 연예기획사 대표 시절 만나 1997년 결혼했다.
“프리랜서로 활동할 당시 그룹 ‘잼’ 일을 맡으면서 이승연씨를 만났고, 자연스럽게 김희선·김지호·고소영씨 등 유명 연예인들과 일하게 됐어요. 남편도 그 무렵 만났죠. 배용준·박상아씨를 소속 배우로 둔 사장님이었는데 일을 맡기면 유일하게 당일 결제를 해줬어요(웃음). 젠틀한 면이 마음에 들어서 결혼까지 했죠. 제 일을 누구보다도 소중하게 생각하고, 저를 가장 잘 이해해주는 사람이에요.”
결혼 후 남편은 그에게 작은 스튜디오를 마련해줬다. 무거운 메이크업 박스를 들고 다니는 아내가 안쓰러웠기 때문이다. 미용실 형태를 갖추지 못한 작은 공간이었지만 그때부터 연예인들은 물론 정·재계 인사들까지 스튜디오로 찾아오기 시작했다. 2년 만에 그는 청담동 양옥집으로 작업실을 옮기고, ‘정샘물 뷰티살롱’이라는 간판을 처음 내걸었다.
그가 메이크업 아티스트의 길로 접어든 건 우연이었다. 고교시절 등록금을 내지 못할 정도로 가세가 기울자 그는 방과 후 어느 교수님 연구실에서 잔심부름을 하며 아르바이트를 하기도 했다. 대학 진학의 꿈을 포기한 지는 이미 오래. 결국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 명동의 한 패션몰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던 그는 함께 일하는 언니들을 통해 메이크업 아티스트라는 직업을 처음 접했다. 그때부터 독학을 시작한 그는 중고 서점에서 메이크업과 관련된 책을 모조리 사다가 섭렵한 뒤 화장품 회사에서 운영하는 차밍 스쿨에 다니며 실전을 익혔다. 수첩에 연극영화과에 다니는 동창과 선배들 리스트를 작성한 뒤 무작정 학교로 그들을 찾아가기도 했다.
“서울예대에 자주 찾아갔는데, 나중에는 저를 그 학교 학생으로 착각하는 사람들도 생겼어요(웃음). 하지만 아무리 사정을 해도 경험이 없는 제게 선뜻 일을 맡길 리가 없죠. 많은 좌절을 겪으면서 제가 누구인지를 먼저 알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러던 어느 날 A4 용지에 저의 장점과 단점을 나눠서 쭉 써내려가기 시작했어요. 단점은 한 장 넘게 나오는데, 장점은 두 줄도 채우기 힘들더라고요. 그걸 보는 순간 ‘이게 진짜 나의 모습이라면 어느 누구도 나를 좋아하지 않겠다. 내가 변하는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날부터 내성적이고 의기소침한 성격을 바꾸려고 많이 노력했어요.”

유학 4년 만에 ‘영감’이라는 선물 안고 돌아온 메이크업 아티스트 정샘물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긴 그는 결국 톱스타들도 인정하는 편안한 아티스트가 됐다. 언니·동생 사이로 지내는 지인도 많은데, 최근 옥주현이 ‘나는 가수다’에 출연하면서 안티 팬들에게 공격을 받을 때는 마치 친동생의 일처럼 마음이 아팠다고 한다. 며칠 전 옥주현이 출연 중인 뮤지컬 ‘아가씨와 건달들’에 초대받아 보고 왔다는 그는 사랑에 모든 것을 바치는 바보 같은 여자, 아들레이드를 보면서 진짜 옥주현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고. 정샘물은 “하고 싶은 말을 못하고 속으로만 애태우는 모습이 꼭 순진한 바보, 주현이 같았다”고 말했다.

내면의 아름다움까지 표현하고 싶어
스타들과 가깝게 지내면서 그들의 고충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정샘물은 메이크업을 통해 스타 내면의 아름다움까지 끌어내려 애쓴다. 메이크업을 할 때마다 상대가 가진 내면의 매력이 무엇인지, 그리고 메이크업을 통해 어떻게 표현돼야 하는지를 끊임없이 속삭인다는 그는 “사람들은 잘 알지 못하는 아름다움을 눈빛으로 투영시키려 한다”고 말했다.
“어머니가 늘 하신 말씀이 있어요. ‘진정한 마스터는 절대로 수를 읽혀서는 안 된다’는 거예요. 남들이 봤을 때 ‘어떻게 했을 거야’ 하고 짐작할 수 있으면 마스터가 아니라는 얘기죠. 메이크업도 얼굴이 어딘가 모르게 예뻐 보이기는 한데 화장을 한 건지 안 한 건지 잘 모르도록 자연스럽게 하는 게 중요해요. 마치 본래 피부가 좋은 것처럼, 본래 눈매가 예쁘고 코가 오똑한 것처럼 말이죠(웃음). 또 상대의 예쁜 마음도 얼굴에 드러날 수 있게요.”
요즘 정샘물 원장의 큰 관심사는 직원들을 상대로 하는 미술 강의다. 유학 생활에서 얻은 모든 지식을 후배들에게도 가르쳐주고 싶은 마음에 1주일에 한 번씩 작업실에서 강의를 한다. 물론 업무의 연장은 아니다. 유학 중에도 항상 3명의 스태프를 거느리고 있었는데 이유는 단 하나, 직원들에게도 다양한 경험을 하게 해주고 싶어서였다. 그는 모든 지점의 직원들에게 3개월간 그와 함께 샌프란시스코에 머물며 배우고 느낄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학교에서 배운 걸 저만 알고 있는 게 너무 아깝더라고요. 여태껏 저를 위해 이렇게 큰돈 써본 적이 없거든요. 유학 중에도 함께 있는 직원들에게 제가 배운 걸 전수하곤 했는데, 한번은 샌프란시스코를 다녀간 한 원장한테 문자가 왔어요. 김태희씨 커피 광고 촬영 중에 특수 분장이 필요했는데, 지난번 저한테 배운 걸 응용해 그 자리에서 바로 일을 해냈다는 거예요. 얼마나 뿌듯하고 행복했는지 몰라요. 요즘 하는 강의는 원장부터 막내 스태프까지 배우고 싶은 사람은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데, 자신이 미처 알지 못했던 새로운 열정을 끌어낼 수 있으면 좋겠어요. 솔직히 아직까지 메이크업 아티스트에 대한 인식은 그리 높지 않아요. 저희 직원들부터라도 스스로 격을 높이고 새로운 비전을 지닐 수 있으면 좋겠어요.”
정샘물은 메이크업 아티스트에게 필요한 자질 중 창의성에 버금가는 것이 “섬김 정신”이라고 말했다.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예술 행위인 만큼 상대를 위하는 마음이 반드시 뒷받침돼야 한다는 것. 그러기 위해서는 과장된 말이나 몸짓이 아닌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보여주면 된다고.
“어떤 분야든 밸런스를 맞추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예를 들면 연예인과 일한다고 해서 자신이 연예인보다 더 화려하게 꾸민다거나, 친하다고 해서 사생활까지 관여하는 식은 옳지 않다고 봐요. 상대를 기분 좋게 섬기되 자신의 역할이 무엇인지를 확실히 알고, 그 안에서 최선을 다해 임무를 수행하는 게 중요하죠.”

여성동아 2011년 10월 57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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