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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leb 이 사람의 삶

한국 무용가, 일본 천년 고찰 주지 김묘선의 두 가지 인생

“승과 속, 남과 여, 한국과 일본을 잇는 고행이 내 운명”

글&사진·이정훈 사진제공·대일사

입력 2011.09.16 15:51:00

머리도 깎지 않은 한국 여성이 1천2백 년 전통을 자랑하는 일본 고찰의 주지가 됐다. 도대체 무슨 인연으로 거기까지 갔을까. 김천흥, 이매방 선생에게 춤을 배운 김진선, 아니 예명이자 법명 김묘선씨가 일본 시코쿠 섬의 대일사 주지와 만나 결혼하고 아들 낳고 남편을 이어 주지가 되고 여전히 아름다운 춤사위를 선보이며 살아가는 이야기.
한국 무용가, 일본 천년 고찰 주지 김묘선의 두 가지 인생

도쿠시마 나루토 문화회관에서 승무를 공연하는 김묘선씨. 그는 승과 속을 합치는 화두를 풀어내야 한다.



섬나라인 일본에서도 섬인 ‘시코쿠’를 찾아간 것은 1천2백 년이 넘은 일본 고찰의 주지인 한국 무용가 김묘선씨(54)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독도 영유권 문제로 시끄러운 8월14일 오사카의 간사이 공항은 더위로 이글거렸다. 폭염을 뚫고 마중 나온 김씨는 삼단 같은 머리를 이고 있었다. 일본에서는 머리도 안 깎고 스님을 하나?
묘선은 김씨의 법명이기도 하다. 일본의 절은 개인 소유고 일본 스님은 결혼해 자녀를 낳고 술과 고기를 먹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여성이 속세에서 쓰던 이름을 갖고 주지가 된 경우는 듣지 못했다. 아닌 게 아니라 그는 많은 논란을 일으키며 시코쿠 도쿠시마(德島)의 대일사(大日寺, 일본 발음 다이니치지) 주지가 됐다.
주지였던 남편이 타계하자 뒤를 이은 것. 한국 무용가가 일본 절의 주지와 결혼한 것도 이례적이었기에 결혼 직후 일본 NHK 방송은 그를 주인공으로 한 다큐멘터리를 찍어 방영했다. 기자가 대일사를 방문했을 때도 도쿠시마의 NHK 팀이 또 다른 다큐멘터리를 촬영하고 있었다. 이번 주제는 ‘머리도 깎지 않고 천년 고찰의 주지가 된 한국 여성’이었다.

춤에 인생 걸고 묘선이라는 예명 지어
그의 파란만장한 삶은 무용에서 시작됐다. 대구에서 2남4녀의 맏이로 태어난 그는 열 살 때 한국 고전무용 리허설을 보고 반해버렸다. 그러나 제대로 배울 기회가 없어 학교 특별활동 수업에서 춤을 익혔다. 1978년 고등학교를 마치고 어머니와 서울로 올라와 김천흥 선생의 문하로 들어가 비로소 본격적인 한국 무용 수업을 받게 됐다. 고 김천흥 선생은 중요무형문화재 종묘제례악과 처용무의 예능 보유자(인간문화재)였다. 이어 김 선생의 소개로 승무와 살풀이춤의 대가 이매방 선생의 제자가 됐다.
춤에 인생을 걸기로 하자 예술고등학교 출신들의 인맥이 눈에 들어왔다. 자신에게 부족한 부분을 채워야겠다고 생각한 그는 1984년 추계예술대학 국악과에 들어갔다. 국악이 막 학문의 세계로 편입되던 시절이어서 대학에는 늦깎이로 입학한 국악인들이 많았다. 쟁쟁한 그들과의 교류가 큰 자극이 됐다. 대학을 졸업하고 그는 연세대 교육대학원에 진학하고 인천에 그의 이름을 딴 무용단을 세웠다.
이때까지 그는 부모가 지어준 ‘진선’이라는 이름으로 살았다. 인천에 세운 것도 김진선무용단이었다. 1987년 그는 국악계에선 아주 큰 등용문인 동아일보 주최 국악콩쿠르에서 금상을 받았다. 대상은 늘 음악 쪽에 수여됐으니 무용 부문에서는 1등을 한 셈이다. 그해 이매방 선생이 승무로 인간문화재가 됐다. 입이 걸쭉했던 이 선생은 그를 볼 때마다 진한 전라도 사투리로 “네년이 잡놈하고 살면서 아이를 낳아봐야 춤이 되는데…” 하며 혀를 찼다.
도대체 잡놈은 어떤 남자인가? 동아콩쿠르에서 금상을 타긴 했지만 쭉쭉 뻗어 나가는 느낌이 없었다. 삶을 바꿔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자, 착하지만 특색 없는 진선이란 이름이 걸렸다. 어느 날 작명가를 찾아간 그는 새벽별이라는 뜻의 ‘묘선(昴先)’을 예명으로 받았다. 그는 당장에 김진선무용단을 김묘선무용단으로 바꿨다.
대학원을 마치고 미국으로 날아가 ‘우봉 이매방 전통무용 남가주 보급회’를 차렸다. 그러나 미국 도전의 결과는 만족스럽지 못했다. 1993년 한국으로 되돌아왔다. 김묘선무용단 운영에 최선을 다하던 1995년, 운명의 날이 다가왔다. 일본 시코쿠 섬의 도쿠시마에 가게 된 것이다.
시코쿠는 옛날 네 개의 나라가 있었다고 해서 ‘사국(四國)’으로 적고 시코쿠로 읽게 됐다. 시코쿠를 대표하는 것으로 한국의 진돗개에 비교되는 ‘시코쿠 개’가 있다. 두 개는 모양과 습성이 비슷하다. 일본인이 시코쿠 개를 명품으로 여기는 것을 보고 우리도 진돗개를 명견으로 인정했다. 그러나 한국인에게는 싸움개인 도사견이 더 많이 알려져 있다.
한국의 ‘도’가 일본에서는 ‘현’이다. 시코쿠에는 네 개 현이 있다. 그중 하나인 고치(高知) 현의 옛 이름이 도사(土佐)국이었다. 도사국 시절 시코쿠 개를 중심으로 여러 품종의 개를 교미시켜 얻은 투견(鬪犬)이 바로 도사견이다. 하지만 지금은 도사견, 시코쿠 개보다 ‘아와오도리(阿波踊)’가 시코쿠를 대표한다. 아와오도리에 매년 1백30여만 명이 몰려들어 일본판 삼바 축제로 불린다.
아와는 도쿠시마 현의 옛 이름인 아와(阿波)국에서 왔다. 오도리(踊)는 한자 그대로 뛰면서 추는 춤이다. 4백여 년의 역사를 가진 아와오도리는 일본 4대 축제 중 하나로 꼽히기에 TV가 일본 전역에 중계한다. 아와오도리는 추석에 열렸다. 그런데 개화를 하면서 양력만 쓰기로 했기에 지금은 가장 무더운 8월15일 열린다. 8월15일이 되면 추석을 맞아 고향을 찾는 사람과 추석 휴가를 이용해 아와오도리를 보러 오는 사람으로 인구 26만 명의 도쿠시마는 미어터진다.

한국 무용가, 일본 천년 고찰 주지 김묘선의 두 가지 인생


일본의 지역과 기업, 대학에는 9백여 개의 아와오도리 동아리가 있다고 한다. 예선을 거쳐 선발된 팀들이 도쿠시마 행사에 참여한다. 동아리는 남녀로 나뉘어 여성 음악단은 ‘사미센’이라는 현악기를, 남성들은 ‘다이코’라는 북과 ‘가네’라는 꽹과리를 치며 입장한다. 무용단은 술병과 부채를 휘두르며 춤을 추는데, 여성 무용수들이 간드러진 목소리로 “얏도상~ 얏도 얏도!”를 외치는 것이 인상적이다. 서너 살밖에 안 돼 보이는 아이에서부터 할머니 할아버지가 함께 어우러져 춤을 춘다.
“춤추는 바보에 보는 바보. 다 같은 바보라면 춤추는 것이 낫지 않을까”가 이 축제의 기본 철학이라니 한마디로 웃고 즐기자는 것이다. 클라이맥스는 따로 행진하던 남녀 무용단이 하나로 섞이는 부분이니 일본판 삼바 축제임이 분명하다. 도쿠시마 시청 앞에서 열리는 공식 행사가 끝나면 시내 곳곳에서 동아리별로 모여 행진 때보다 더 흥겨운 뒤풀이가 벌어진다.



아와오도리 행사에 초청한 대일사 주지
1995년 그의 무용단은 도쿠시마에서 활동하는 코리아문화연구회 초청으로 아와오도리에 참여하게 됐다. 도쿠시마에 도착한 날 그의 무용단 초청에 기여했다는 대일사의 오구리 고에이(大栗弘榮)란 사람과 인사를 나눴다. 건장한 체격을 가진 중년 남자(당시 56세)는 빡빡 민 머리에 양복 차림이었다. 김묘선은 통역이 해주는 말을 알아듣지 못했기에 그 남자의 머리만 보고 ‘야쿠자가 우리 초청을 후원해줬나’라고 생각했다.
우리나라 사찰의 요사채가 일본 절에서는 ‘숙방(宿坊)’이다. 환영식이 끝난 후 그의 무용단은 대일사 숙방으로 안내됐다. 그곳에서 승복 차림의 그를 다시 만나면서 ‘이 절의 주지가 후원했다’는 것을 알았다. 그때만 해도 그는 대일사의 위상을 전혀 알지 못했다. 일본 절은 개인 소유여서 가업으로 상속될 수 있다는 것도 알지 못했다.
일본 불교에는 천태종·진언종 등 여러 종파가 있는데, 대일사는 진언종 계열이다. 진언종은 시코쿠 출신의 홍법대사(774~835)가 창설했는데, 홍법대사는 시코쿠의 88개 절을 진언종 성지로 지정했다. 이 절들은 지금도 ‘88개소(八十八個所)’로 불리면서 일본 전역에 있는 불교 신자들의 순례를 받는 전통이 만들어졌다.
88개 사찰을 순례하는 신자를 ‘오헨로상(お遍路さん)’이라고 한다. 이들은 일시적으로 출가한 것이기에 장삼에 삿갓을 쓰고 두세 달 동안 걸어서 88개 절을 찾아 참배한다. 그 거리가 무려 약 1200km에 달한다. 그런데도 매년 30만에서 50만 명의 오헨로상이 시코쿠로 몰려든다. 시코쿠의 전통문화가 된 이 행사를 일본은 유네스코 문화재로 지정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대일사는 오헨로상들이 열세 번째로 참배하는 절이다. 지역 신자와 함께 전국에서 몰려오는 오헨로상 덕택에 대일사의 재정은 좋은 편이라 아와오도리를 후원할 수 있었다. 아와오도리가 끝난 후 오구리 스님은 따로 김씨를 초청해 “한국 춤을 세계화하려면 일본에서 하는 것이 나을 수 있다. 한국 정부가 장차 당신을 모셔가게 할 정도로 당신의 춤을 지원하겠다”는 말로 청혼을 했다.
이것이 큰 힘이 됐는지 다음 해 그는 한국전통예술경연대회에서 고대하던 대통령상을 받았다. 그리고 그해 말도 통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나이 차가 열여덟 살이나 나는 승속(僧俗) 간의 국제결혼을 했다. 그는 한국의 인간문화재가 되고 싶었기에 한국 국적을 유지했다. 남편은 “당신은 한국의 인간문화재가 되고, 나는 일본 스님계의 인간문화재가 되겠다”고 약속했다.
이태 뒤인 1998년 그는 옥동자를 낳았다. 만 59세에 아들을 본 남편은 아이를 끔찍이 사랑했다. 이매방 선생은 우락부락한 인상의 남편을 “진짜 잡놈”이라고 하며 좋아했다. 이 선생은 ‘진국’을 그렇게 표현한 것이다. 이 선생은 제자에게 “이젠 제대로 된 춤을 추겠구나”라고도 했다. 그는 도쿠시마에 한국춤보급회를 만들어 일본인들을 가르쳤다. ‘욘사마’를 필두로 한 한류가 일본에 본격 상륙하기 전에 도쿠시마판 한류를 만든 것이다.
매년 8월15일 한국 무용단을 초청해 아와오도리에 참여시키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리고 다시 로스앤젤레스로 진출해, UCLA에서 한국 무용을 가르치는 교환교수가 됐다. 인천과 도쿠시마, 로스앤젤레스를 돌아가며 살게 된 것이다. 독도 문제로 한일 관계가 삐걱이던 2004년 말 서울에서 춤 발표회를 가진 그는 가족을 무대로 불러 일본 스님인 남편과 아들이라고 떳떳이 소개했다. 사랑에는 국적이 있을 수 없음을 보인 것이다.

한국 무용가, 일본 천년 고찰 주지 김묘선의 두 가지 인생


한국 무용가, 일본 천년 고찰 주지 김묘선의 두 가지 인생


바빴지만 뿌듯하던 그의 삶이 2007년 크게 출렁거렸다. 뇌경색으로 쓰러진 오구리 스님이 투병 한 달여 만에 타계했다. 삶의 큰 기둥 하나가 쑥 빠져나가는 것 같은 허전함과 큰 보호막이 사라졌다는 두려움이 몰려왔다. ‘절은 어떻게 할 것인가. 내 춤은 또 어떻게 할 것인가.’
대일사는 진언종의 성지이지만 개인 사찰이다. 오구리 스님은 타계했는데 그의 가족 중에는 당장 절을 운영할 사람이 없었다. 그러자 가까운 친척 중에서 절 운영을 넘보는 사람들이 나왔다. 절을 친척에게 넘긴다는 것은 남편의 유업이자 남편과의 추억이 담겨 있는 공간을 내주는 것과 같았다.
그는 아들을 ‘강남 엄마’ 식으로 키우고 있었다. 일찌감치 미국으로 보내 한국어·일본어·영어를 모두 익히게 했다. 어머니의 걱정을 눈치 챈 조숙한 아들은 “아버지의 뒤를 잇겠다”라고 했다. 일본 불교에서는 만 18세가 넘어야 스님이 될 수 있다. 감수성이 예민한 나이에 아이가 한 말을 철석같이 믿을 수는 없다.
남편도 30대 때는 가업을 이으라는 부친의 바람을 뿌리치고 오사카로 나가 무역업을 크게 했다고 하지 않았던가. 이 사업이 부도로 막을 내리자 호기를 꺾고 대일사로 돌아와 승려의 길을 걸었다고 했다. 아들은 승려 자격을 받아도 혈기가 왕성한 나이이므로 사회생활을 할 가능성이 높다. 이러한 생각을 한 그는 당장은 아들이 승려 자격을 받을 때까지, 멀리는 아들이 가업을 잇겠다고 할 때까지 자신이 대일사를 지키기로 마음먹었다.

무용가냐 스님이냐 선택의 기로에서
춤에 대한 열정은 잠시 접어두고 일본 불교에 대한 공부를 시작했다. 남편 장례식이 끝나자 그는 남편이 득도했던 교토의 대각사(大覺寺)를 찾아가 스님이 되는 공부를 하고 그해 말 승려 자격시험을 통과했다. 일본에서도 스님은 남녀를 불문하고 머리를 깎아야 한다. 그는 가발을 쓰고 한국 춤을 출 생각을 하고 시험을 봤는데, 그의 명성을 알고 있던 대각사 스님들이 갑론을박한 끝에 ‘그녀만 예외적으로 머리를 깎지 않고 법명도 김묘선을 쓰게 한다’는 결정을 내려주었다.
이것이 큰 힘이 돼 그는 바로 주지 시험에 도전했다. 여러 경전을 외우고 손으로 하는 수행언어인 작법(作法)을 익힌 끝에 2008년 5월 주지 시험도 통과했다. 2년 이상 걸린다는 주지 시험을 1년 만에 해낸 것이다. 이듬해 대일사 주지로 취임했는데, 이는 일본 불교 역사상 여자가, 그것도 외국 국적자가 머리도 깎지 않고 일본 절의 주지가 된 최초의 사건이었다.
이후 그는 각종 법회를 치르고 신도들의 대소사를 관리했다. 스님 공부를 하는 동안 중단했던 김묘선무용단과 도쿠시마의 한국춤보급회 관리와 UCLA의 강의, 아와오도리에 한국 팀이 참석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일도 재개했다. 오지랖 넓은 삶이 남편의 타계로 인한 텅 빈 마음을 채워주는 듯했다. 그는 한국 불교계와 인연을 맺는 것도 잊지 않았다.
시코쿠의 ‘88개소’를 도는 순례는 상당히 유명해서 이따금 한국 스님들도 순례를 한다. 오헨로상과는 확연히 구분되는 승복을 입은 스님이 나타나면 그는 숙방으로 모시고 정성껏 접대했다. 그때의 그는 번뇌를 떨치고 해탈을 위해 애쓰는 승(僧)이다. 반면 한국 전통무용단이나 악단이 방문하면 대일사 식당은 한순간에 놀이판이 된다. 그때의 그는 철저한 속(俗)이다.
그는 일본에서 한국 춤을 알리기 위해 애쓰지만, 독도 영유권 문제나 역사 왜곡 문제가 일어날 때마다 일본을 배타적으로 대하려는 한국인을 향해 쓴소리도 마다하지 않는다. 그는 한국인이지만 그가 그토록 사랑하는 아들은 일본인이다. 그는 승과 속, 남과 여, 한국과 일본, 어머니와 여성 등 섞이기 힘든 둘을 하나로 만들기 위한 고단한 수행을 하고 있는 것이다.
돌이켜보면 그의 영광과 부담은 그의 의욕이 부른 업(業)이다. 최고의 춤꾼이 되겠다는 생각을 품었기에 진선이라는 이름을 버리고 묘선이 됐다. 여자는 아이를 낳아봐야 춤이 된다는 스승의 말씀을 놓치지 않았기에 일본 스님과 결혼했다. 여자에게 결혼은 자기 길을 갈 것이냐, 한 남자의 여자가 될 것이냐를 결정하는 분수령이다. 그는 둘을 함께 가보기로 했다.
어깨는 무거워졌지만 해내는 맛에 무게를 잊었다. 그러나 남편의 타계로 남편 업까지 이어받으면서 ‘한국 무용가 김묘선’보다는 ‘일본 절 주지 김묘선’으로 더 유명해졌다. 주지로서 실패한다면 무용가로서의 성공도 요원해지는 처지로 몰린 것이다. 어느 하나도 소홀히 할 수 없다.
올해 아와오도리에 그는 그의 무용단과 함께 꽹과리의 달인 이광수 선생이 이끄는 민족음악원 사물놀이패를 초청했다. 신기(神氣)가 있는 이광수 선생은 그의 옛 이름을 부르며 “이젠 머리 깎고 춤은 가발 쓰고 하지”라는 말을 던졌다. 지나가는 말이었지만 수도 없이 생각해본 문제였을 터이니 그는 큰 울림을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선택은 그의 몫이다. 운명을 선택하며 살아온 여인 김묘선, 그는 어떤 미래를 열어갈 것인가. 그의 삶은 스승이 던져준 것보다 더 어려운 화두로 가득 차 있다. 8월18일 도쿠시마의 나루토 문화회관에서 열린 공연에서 그는 화두를 풀어내기 위한 깊은 사위를 먼 허공을 향해 힘차게 뿜어 올렸다.

여성동아 2011년 9월 57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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