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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장애인 앵커 이창훈 “최초라는 타이틀이 부끄럽지 않게”

글·이혜민 기자 사진·조영철 기자, 동아일보 사진DB파트

입력 2011.09.07 17:57:00

523 대 1의 경쟁률을 뚫고 국내 최초 장애인 앵커로 발탁된 이창훈씨.
그는 빛과 어둠조차도 구별할 수 없는 눈으로 평생을 살아왔다.
하지만 늘 도전하면서 살아온 덕분에 그동안 다른 장애인들이 시도해보지 못한 길을 가게 됐다.
시각장애인 앵커 이창훈 “최초라는 타이틀이 부끄럽지 않게”


KBS에서 우리나라 최초로 장애인 앵커를 발탁했다. 비록 1년간 계약직으로 활동하는 앵커를 선발한 것이지만 ‘최초’란 타이틀을 거머쥔 이가 첫 단추를 어떻게 채우느냐에 따라 많은 장애인들의 앞날이 달라질 수도 있다.
7월25일 위촉장을 받은 이창훈 앵커(26). 새로운 출발선 앞에서 숨을 고르고 있는 그를 만났을 때 생각보다 건장한 체격에 놀랐고, 어여쁜 아가씨가 곁에 있어 또 한 번 놀랐다. 알고 보니 평소에는 케인을 짚거나 활동 보조인과 다니는데, 오늘은 사진 촬영이 많아서 셋째 누나가 회사에 휴가를 내고 도와주러 왔다고 했다. 누나의 팔짱을 끼고 조심스레 걷다 의자를 찾아 앉은 그가 바리톤 음색으로 설레는 마음을 전했다.
“합격 당시에는 얼떨떨해서 별 감정이 안 들었지만 시간이 흐르니까 많이 기뻐요.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이란 영화가 있는데, 현재가 제 인생 최고의 순간이 아닐까 싶어요. 뉴스 앵커의 기회를 준 KBS와 새벽기도를 하면서 저를 뒷바라지 해주신 어머니께 감사드려요.”
앵커가 되고 1주일 남짓 시간이 흐르는 동안 그에게는 많은 일이 있었다. 일반적으로 아나운서로 채용되면 수습 교육에 들어가기 전 자유 시간이 주어지기 마련. 하지만 그는 세간의 화제가 돼 각종 라디오, TV, 인터넷 방송 프로그램에 출연해 숱하게 인터뷰를 했다. 덕분에 그는 “인생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게 됐다”고 말한다.

딸 셋을 낳고 얻은 아들, 7개월 만에 시력 잃어
단시간에 많은 인터뷰를 소화했기 때문인지 그의 대답에는 막힘이 없었다. 먼 과거도 마치 어제의 일인 양 생생하게 말했다. 기억은 어느덧 어린 시절로 거슬러 올라갔다.
“딸 셋을 낳고 얻은 아들이라 부모님이 제게 거는 기대가 컸을 거예요. 그런데 제가 태어난 지 7개월 만에 뇌수막염을 앓으면서 시신경이 훼손돼 시력을 잃었죠. 어머니는 저를 낫게 하려고 온갖 민간요법을 다 쓰셨다고 하더라고요. 굿도 하고, 지리산 도사님도 찾아가고, 교회 집회도 가고요. 이마에 있는 흉터 보이세요? 기도원에 계신 분이 저를 낫게 해주겠다면서 손톱으로 상처를 낸 자리라고 해요. 결국 빛은 보지 못하고 상처만 보게 됐죠.”
시력을 잃어 불편하게 살았을 것 같지만 꼭 그렇지는 않다. 그에게는 보이지 않는 삶이 평범한 일상이었던 것이다. 경남 진주에서 태어나고 자란 그는 집과 그 옆에 있는 어머니의 미용실 언저리를 맴돌며 즐거운 유년을 보냈다. 하지만 뇌수막염 후유증으로 잘 때마다 가위에 눌리는 바람에 괴로워했다. 그때마다 그는 시각을 제외한 온 감각을 동원해 엄마 품을 파고들면서 그 공포를 달랬다고 한다.
“어려서는 어머니의 과보호 속에 살았어요. 혼자서 대소변도 못 가리고, 옷도 못 입었죠. 그러다 여덟 살이 되면서 서울 한빛맹아원에서 기숙사 생활을 하며 많이 배웠어요. 당시 맹학교를 다니려면 서울로 갈 수밖에 없었는데 처음에는 그 생활이 너무 싫었어요. 가족과 떨어져 살아야 하는 데다 그곳에선 말투도 달랐으니까요. 주말이면 친구들은 집에 가는데 저는 집이 멀어 갈 수가 없었어요. 어머니가 한 달에 한 번 정도 오시고, 교회 분들에게 부탁해 그분들 집에 가서 자고 오긴 했지만 늘 집이 그리워 전화기를 붙들고 살았어요. 개학이 다가오면 학교 가기 싫다면서 많이 울었던 것 같아요.”
다행히 시간이 흐르면서 공동체 생활의 기쁨을 알게 됐다. 학교생활이 즐거워 명절 때도 집에 내려가지 않고 친구들과 어울렸을 정도다. 관악합주와 합창단, 배구와 골볼(소리가 발생되는 공을 이용해 상대팀 골대에 볼을 넣는 경기)은 그 재미를 더해줬는데 활발한 성격 덕분인지 고 2, 3학년 때는 전교회장으로 뽑히기도 했다.
그는 일찌감치 자신을 독립시킨 부모에게 “감사하다는 말씀을 꼭 드리고 싶다”고 했다. 그때 떨어져 지내지 않았더라면 어머니 없이는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마마보이’에 ‘응석받이’가 됐을 것이 불 보듯 뻔하기 때문이다.
“떨어져 살아서 어머니에 대해 서운한 마음이 들 수도 있었겠죠. 하지만 어머니는 ‘너를 버린 게 아니라 교육을 위해 서울에 보낸 것이고, 계속해서 너를 사랑한다’는 느낌을 받게 해주셨어요. 아버지도 말씀은 많이 안 하셨지만 행여 아들이 기죽을까 봐 노심초사하셨던 것 같아요. 누나들이 조르면 끄떡도 않다가 제가 사달라면 컴퓨터며 피아노며 트럼펫이며 다 사주셨거든요. 이번에 앵커 시험에 도전할 때도 아버지는 ‘열심히 해라’ 딱 그 말씀만 하셨는데 저를 많이 응원해주고 계신다는 걸 알겠더라고요. 음성만 들어도 그 사람의 성품이나 마음가짐이 느껴지는데, 이상하게 아버지 마음은 더 잘 느껴져요.”

시각장애인 앵커 이창훈 “최초라는 타이틀이 부끄럽지 않게”

1 이창훈씨는 523 대 1의 경쟁률을 뚫고 앵커로 발탁됐다. 2 ‘장애인 앵커’선발 최종 라운드에 오른 후보자들과 함께.



‘시각장애인 안마사 위헌 논쟁’ 보며 다양한 일자리 필요성 느껴



시각장애인 앵커 이창훈 “최초라는 타이틀이 부끄럽지 않게”


시각장애인들은 학창 시절, 안마를 배운다. 촉각이 예민한 그들이 우위를 확보할 수 있는 분야이기 때문이다. 그 또한 안마를 배웠지만 장래를 위해 대학에 가는 것이 더 낫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막상 대학에 들어가 보니 어려운 점이 너무 많았다.
“시각장애인들이 많은 학교에 갈 수도 있었지만 이왕이면 비장애인들이 많은 학교에 가고 싶어서 서울신학대 사회복지학과에 들어갔어요. 그런데 새로운 환경에 놓이니까 막막하더라고요. 시각장애인은 전교에 저 한 사람뿐이었거든요. 그나마 다행인 건 저희 과의 좋은 친구들과 장애인 도우미가 많이 도와줬다는 거예요.”
장애인들의 삶의 질을 높이고 싶어 선택한 사회복지사. 그는 학업에 열중하는 한편 봉사활동에 매진하며 꿈을 키웠지만 졸업하고 일자리를 구하지 못했다. 그런 현실이 불만스러웠지만 그렇다고 좌절하지는 않았다. 그 대신 실력을 쌓는 것이 더 낫다고 판단해 숭실대 대학원 사회복지학과에 입학했다.
“기본적으로 면학 분위기가 좋았어요. 훌륭한 분들도 많이 계셔 많이 배웠고요. 주변 분들이 권하셔서 대학원에 다니면서는 과 대표를 2학기 동안 하기도 했어요. 대학 3, 4학년 때 한국시각장애인대학생회 학생회장을 해서 그 직함이 부담스럽지는 않았어요.”
대학교 3학년이던 2006년 당시는 시각장애인에게만 안마사 자격증을 준다는 것에 대한 위헌 논란이 한창이던 때. 그는 시각장애인청년연합, 대학생 모임 등을 연계해 시각장애인 체험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시각장애인의 상황을 대변하는 뮤지컬을 만들어 주연 배우로 활약하면서 시각장애인들의 실태를 알렸다. 이들을 위한 제도적 지원이 필요하다고 생각해 그만큼 투철하게 덤볐다고 한다.
“촉각이 발달한 시각장애인에게는 안마만큼 적합한 일이 없을 거예요. 물론 다른 일도 할 수 있으면 좋겠죠. 하지만 시각장애인이 그토록 안마에 매달리는 건 그것밖에 할 만한 일이 없기 때문일 거예요. 다양한 분야로 진출하고 싶어도 그럴 수 없는 현실이 안타까웠죠.”
사회적인 목소리를 내고 싶다는 욕구 때문이었을까. 그는 대학 4학년이던 2007년부터 한국시각장애인인터넷방송(KBIC)의 진행자로 참여했다. 비록 청취자는 많지 않았지만 장애인에 대한 인식 개선을 꿈꾸는 그에게는 딱 맞는 역할이었다. 그는 능력이 아닌 장애에 초점을 맞추는 ‘장애 극복’이란 말도, 영화 ‘말아톤’ 포스터에 주인공의 지능이 다섯 살이라고 명시해 장애인을 ‘정신 연령이 낮은 사람’으로 취급하는 일반인들의 인식도 고치고 싶어했다.
“친한 형이 제안해 방송을 시작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재미를 느껴 지금껏 하고 있어요. 방송국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제가 있는 곳에서 진행할 수 있기 때문에 번거롭지도 않고요. 심야에 음악 프로그램 진행을 하고 싶었는데, 사회복지학을 공부한다는 이유로 사회적인 이슈를 다루는 보도 프로그램을 맡았어요. 패널을 모셔놓고 토크쇼도 하고, 시각장애인을 위한 스포츠 게임도 중계했죠. 개국 특집으로 ‘언제가 가장 힘들었을까’ ‘살면서 언제가 가장 좋았을까’란 주제로 청취자들과 함께 얘기해본 적이 있는데, 사람들과 마음을 공유한다는 것 자체가 참 좋았던 것 같아요.”

1년 계약직이라도 ‘최초’라는 의미 커

시각장애인 앵커 이창훈 “최초라는 타이틀이 부끄럽지 않게”

이창훈씨의 셋째 누나 기은씨가 동생의 사진 촬영을 돕기 위해 인터뷰에 동행했다.



2월 대학원을 졸업한 그는 이번에도 일자리를 구하지 못했다. 대부분의 사회복지관에서 경력직 사회복지사를 모집하기 때문에 서류 심사조차 통과하지 못한 것이다. 하지만 그는 이번에도 안주하지 않았다. 지금 당장 돈을 벌지 못해도 재미있고 의미 있게 살아가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국가인권위원회 장애인차별금지법 모니터링단 활동을 하고, 도서관에서 시각장애인들을 위한 스마트폰 이용법을 강의하면서 경험을 쌓았다. 뚜렷한 일자리가 아니기 때문에 불안할 수도 있었지만 이런 활동이 자신을 완성하는 밑거름이 될 것이라고 확신했다. 앵커에 도전한 것 역시 이런 마음가짐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사회생활을 해보니까 꿈이 많아지더라고요. 그러다 6월 말에 KBS에서 장애인 앵커를 뽑는다는 공고를 듣게 됐어요. 합격 여부는 불투명했지만 ‘일단 도전해보자’ 싶었죠. 엄청난 열의를 가지고 덤빈 것은 아니었는데 서류 심사를 거쳐 실무 테스트를 받는 30명 안에 뽑히니까 안이하게 준비해서는 안 되겠더라고요. 일단 TV와 인터넷을 통해서 앵커들의 발성을 익혔고 혀가 아프도록 뉴스 대본을 따라 읽었어요. 시청자들에게 호감을 주는 외모가 돼야 한다는 생각에 스타일에도 변화를 줬고요. 미용사인 어머니가 카메라 테스트할 때마다 직접 머리를 손질해주셨고, 외가 식구 중에 메이크업 아티스트가 계셔서 메이크업은 그분이 해주셨어요. 누나들은 제 스타일리스트로 발 벗고 나섰고요. 아무래도 가장 중요한 테스트는 최종 면접 때 속보 대응력이었던 것 같은데요. 점자 정보 단말기를 이용해 원고를 읽었는데 다행히 그 전에 비슷한 내용을 보도한 경험이 있어서 수월하게 넘어갔던 것 같아요.”
결과적으로 그는 어머니의 바람대로 제 몫을 하는 사회인이 됐다. 치열한 경쟁률을 뚫고 당당히 우리나라 최초의 장애인 앵커가 된 것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 자리는 1년만 유지되는 계약직. 그럼에도 그는 이 점에 대해 별다른 불만이 없다고 했다.
“저는 ‘1년 동안 앵커로 일한다’는 것에 초점을 맞추지 않았어요. 그랬다면 도전도 안 했을 거예요. 다만 이 자리가 장애인으로서 ‘최초’라는 데 주목했어요. 계약 조건만 보면 앞날이 불안하다고 느낄 수도 있지만 이 시간 동안 노력하면 더 좋은 일이 생길 거라고 봐요. 이제 막 첫발을 내딛는 것이니까 차근차근 실력을 쌓아가야죠. 제가 잘해야 다른 장애인들에게 더 많은 기회가 생길 테니 더 힘내서 하려고요(웃음).”
“KBS 민경욱 앵커처럼 생동감 있게 뉴스를 전달하고 싶다”는 이창훈 앵커. 그는 ‘기회는 노력하는 자에게 열려 있다’는 명제가 진리라는 것을 새삼 증명해내고 있었다.

여성동아 2011년 9월 57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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