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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영화로 말하다

해외 입양아 출신 영화감독 태미 추 나를 버린 나라에서 나를 찾다

글·정혜연 기자 사진·이기욱 기자

2010. 11. 16

1~2년 뒤 재회를 약속하며 한국을 떠났던 어린 소녀는 십수년이 흐른 후 처녀가 돼 고국 땅을 밟았다. 그는 누가 자신을 이렇게 만들었을까 원망하기보다 용서를 구하는 부모를 가슴으로 껴안았다. 해외 입양아 출신 영화감독 태미 추. 이제 그는 자신과 닮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스크린에 담는다. 또 다른 태미 추가 나오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다.

해외 입양아 출신 영화감독 태미 추 나를 버린 나라에서 나를 찾다


나를 낳아준 부모는 어디 있을까. 살아 있기는 한 걸까. 있다면 나를 보고 싶어하기는 할까….
입양아들은 양부모 손에 자라며 뿌리에 대한 끝없는 질문을 늘 가슴속에 품고 살아간다. 해외 입양아 출신인 영화감독 태미 추(35)도 마찬가지로 이런 의문을 안고 살아왔다. 성인이 된 지금 그는 여전히 해외 입양이 존재하는 고국 땅에서 해외 입양 문제를 소재로 한 영화를 만들고 있다. 지난 10월 중순 다큐멘터리 영화 ‘나를 닮은 얼굴’ 개봉 후 연출을 맡았던 태미 추 감독을 만났다. 그는 이 작품을 통해 “입양아들이 생부모를 만난 후 발생하는 여러 문제를 그려보고 싶었다”고 한다.
“입양 문제가 매체를 통해 많이 다뤄지긴 했지만 대부분 만남 자체를 조명했어요. 저는 만남 이후 일어나는 문제에 초점을 맞추고 싶었습니다. 피붙이라고 해도 수십 년 동안 떨어져 살다 만난 사람들인데 마냥 자연스러울 수만은 없잖아요. 부모와 자식 간의 미묘하고 복잡한 감정의 흔들림을 포착하려 했어요.”
영화는 서른 살이 돼서야 생모를 만난 미국인 브렌트 성욱 비즐리와 그의 어머니 노명자씨에 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출생 직후 미국으로 입양된 브렌트씨는 5년 전 입양인 단체를 통해 생모 노명자씨를 만난다. 2년 뒤 한국을 찾은 그는 모든 것을 주려 하는 한국의 친어머니와 정신분열증을 앓는 미국의 양어머니를 두고 혼란에 빠진다. 결국 한국 정착을 결심하지만 언어도 문화도 완전히 다른 생모와의 삶이 순탄치만은 않다. 스토리도 영화 같지만 태미 추 감독이 이 영화를 만든 계기도 영화 같다.
“여러 케이스를 찾다가 노명자씨를 만났어요. 인터뷰를 하면서 입양 보낸 아들의 사진도 보여주셨죠. 얼마 후 제가 준비하는 프로젝트의 이야기를 듣고 미국에서 한 남성이 이메일을 보내왔습니다. 자신도 입양아인데 도울 일이 있으면 돕겠다고요. 그가 바로 브렌트씨였죠. 그의 이름과 얼굴을 기억하고 있던 전 들뜬 마음으로 ‘당신의 어머니를 알고 있다’는 메일을 보냈어요. 그 역시 ‘어떻게 이런 우연이 있을 수 있냐’며 놀라워했죠. 그렇게 두 사람은 한국에서 다시 만났고 제 영화에 출연하는 것을 기꺼이 승낙해줬습니다.”
한국 정착을 시도했던 브렌트씨는 결국 미국으로 갔다. 헤어진 동거녀 사이에서 낳은 두 딸과 정신이 온전치 않은 양어머니를 돌보는 쪽을 선택한 것. 그의 친어머니 노명자씨는 다른 이의 해외 입양이라도 막아야겠다며 미혼모 쉼터에서 자원봉사를 시작했다. 태미 추 감독은 미국으로 간 브렌트씨와 종종 연락하며 한국의 소식을 들려주고, 입양인 커뮤니티를 통해 도움을 주고받는다고 한다.

아홉 살 때 쌍둥이 동생과 미국 입양
태미 추 감독은 아홉 살 때 쌍둥이 동생과 함께 미국인 부부에게 입양돼 뉴욕주 캐나다 국경 근처 ‘힐튼’이라는 마을로 옮겨갔다. 한국어를 어느 정도 쓸 줄 알던 나이에 갔으니 간단한 의사소통 정도는 할 수 있을 법도 한데 그는 한국어로 한 문장을 말하는 것조차 버거워할 정도로 모국어를 깡그리 잊은 상태였다. 2001년부터 한국에서 생활하고 있는데도 그에게 한국어는 아직까지 불편한 언어로 여겨지는 듯했다.
“왜 한국말을 못하냐는 질문이 가장 싫어요. 안 하려는 게 아니라 하려 해도 못하는 이유가 더 크거든요. 미국으로 입양됐을 때 한국에서의 모든 것은 ‘잊어야 할 존재’가 돼버렸죠. 한국어, 한국식 식성, 한국 문화를 버리고 가급적 빨리 그곳에 익숙해져야 했기 때문에 모든 것을 게워내려고만 했어요. 이후 한국어는 제게 트라우마처럼 남게 돼 이제 새로이 받아들이려 해도 잘 되지가 않아요.”

해외 입양아 출신 영화감독 태미 추 나를 버린 나라에서 나를 찾다


아들을 하나 두고 있던 그의 양부모는 딸을 원했지만 낳을 수 없었다고 한다. 양부모는 입양하는 데 돈과 시간이 많이 드는 백인 아이 대신 동양인 자매의 입양을 선택했다. 가정 형편이 어려웠던 태미 추의 부모는 좋은 환경에서 자라길 바라는 마음에서 딸 둘을 미국으로 보냈다. 태미 추 감독은 헤어질 때 “몇 년만 떨어져 있다가 다시 만나자”고 약속했던 엄마의 말을 철석같이 믿었다. 하지만 점점 시간이 갈수록 한국을, 생모를 생각하는 일은 희망고문과도 같게 느껴졌다. 잊는 쪽이 훨씬 마음을 편하게 해줬고, 한국을 잊는 만큼 미국 생활에 적응하게 됐다.
그러나 그것도 그리 행복한 일만은 아니었다. 그가 노력할수록 마을 사람들과의 벽은 높게만 느껴졌던 것. 그가 살던 마을은 동양인이라고는 눈을 씻고 봐도 찾을 수 없는 곳이었고, 그를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쳐다보는 마을 사람들은 쉽사리 곁을 내주지 않았다. 이 외에도 그를 힘들게 한 일은 많았다. 태미 추 감독은 “TV 속 주인공들조차 온통 백인인 나라에서 나의 정체성을 찾기가 어려웠던 것이 가장 힘들었다”고 말한다.
“학교에서도 미국 역사만을 가르쳐줄 뿐 동양인에 대해서는 가르쳐주지 않았어요. 철저히 고립된 이방인이었던 동생과 전 우리만의 롤 모델을 찾아야 했어요. 전 그래서 다른 나라의 이야기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죠. 뉴스를 통해 흘러나오는 세계 각국의 소식에 귀 기울였고 자연스레 사회 문제에 눈을 뜨게 됐어요.”
힘들어하는 입양 딸들을 넓은 가슴으로 보듬어줬으면 좋으련만 그의 양부모는 그럴 만큼 좋은 부모는 아니었다고 한다. 열일곱 살이 되던 해 독립을 하기로 결정하고 그는 동생과 함께 집을 나왔다. 그는 그날 이후부터 지금까지 양부모와 연락을 하지 않는다고 한다. 양부모의 성을 따르지 않고 친부의 성인 ‘추’를 따르는 것만으로도 관계가 어땠을지 짐작할 수 있다.
독립한 이후의 생활도 만만치 않았다. 무한한 자유가 펼쳐졌지만 어떻게 돈을 벌어야 할지, 일은 왜 해야 하는지,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끝없는 질문이 밤마다 그를 괴롭혔다. 그는 당시를 회상하며 “인생에서 가장 힘들었던 시기”라고 말했다.
“물질적으로는 물론 심정적으로도 하루하루가 막막하고 암울했어요. 그런 갈등과 고민을 어릴 적부터 관심 있던 예술로 풀면서 조금씩 나아지기 시작했어요. 뉴욕주 이타카대학에 진학해 논픽션, 다큐멘터리 같은 영상물을 만들며 사회적 관심사를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배웠고, 결국 이렇게 영화감독이 됐죠.”



“어렵사리 다시 만난 어머니 원망하지 않아요”
고국과 친모를 향한 그리움을 늘 마음 한편에 두고 살던 태미 추 감독은 94년 한국 입양기관에 ‘엄마를 찾고 싶다’는 편지를 보냈다. 8개월 뒤 실낱같은 희망을 안고 하루하루를 살던 그의 앞으로 친엄마의 답장이 왔다. 그는 “한마디로 충격이었다”고 말했다.
“생각지 못했던 일이라 매우 놀랐죠. 기분이 좋으면서도 마냥 좋지는 않았고… 말로 정확하게 설명할 수는 없지만 떨림과 기쁨을 동시에 느꼈던 것 같아요. 2년 뒤 쌍둥이 동생과 한국에 가서 엄마를 만났어요. 그때 정말 많이 울었죠. 엄마와 같이 나온 남동생 둘도 펑펑 울고… 엄마는 계속 저희를 안아주셨어요.”
당시 그는 자신의 이야기를 영화화하기 위해 촬영팀과 함께 한국을 찾았다. 덕분에 만남의 순간을 카메라에 고스란히 담을 수 있었다. 그날 친모가 했던 말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던 그는 녹화된 영상을 돌려보며 다시 들었는데 그 말이 아직도 기억난다고. 그의 친모는 “미국으로 갔으니 잘 먹어서 키도 크고 체격도 좋을 줄 알았는데…”라는 말을 반복했다고 한다.
“키가 작고 왜소한 모습에 적잖이 놀라셨나 봐요(웃음). 이후로 미국과 한국을 오가며 살다가 2001년부터 완전히 한국에 정착했어요. 그런데 아쉽게도 어머니의 임종은 지키지 못했어요. 그해 가을 미국에 들어갔을 때 남동생이 전화로 어머니의 죽음을 알려왔죠. 충격이 컸지만 몇 해 전부터 투병생활을 하셨기 때문에 어느 정도 마음의 준비는 하고 있었어요. 돌아가시기 전에 얼굴을 뵙고 이야기 나눌 수 있었던 것만으로도 참 다행이라 생각해요.”

해외 입양아 출신 영화감독 태미 추 나를 버린 나라에서 나를 찾다

태미 추 감독은 친모의 임종을 지켜보지 못했지만 그 전에 만날 수 있었던 것만으로도 감사하다고 말했다.



그의 친모는 딸 둘을 보내고 한국에서 어떻게 생활했는지 소소한 이야기까지 모두 그에게 들려줬다고 한다. 어머니의 삶이 얼마나 고단했는지를 상상하며 그는 자신을 입양할 수밖에 없었던 어머니를 이해하기로 했다고 한다. 힘든 삶을 이겨내고 강한 생활력으로 나머지 자식들을 키우며 가정을 지키기 위해 노력한 어머니를 그는 이제 “존경한다”고 말했다.
“어머니는 매우 열린 마음을 가진 분이셨어요. 유머도 넘쳤고, 누구에게나 따뜻한 마음을 가지고 계셨죠. 그런 분의 딸이라는 사실이 좋고 고마웠어요. 미국인에 가까운 나를 그대로 받아들여주신 어머니 덕분에 마음을 열게 됐고 함께 지내는 짧은 시간 동안 저는 차츰 변해갔어요. 어머니의 따뜻함에 전염됐거든요.”
한국에 정착해 살며 그가 했던 첫 번째 일은 2004년 ASK(Adoptee Solidarity Korea·국외입양인연대)를 만든 것이었다. 그가 교류하던 다섯 명의 입양아들과 만든 이 단체는 국내외에 해외 입양 문제를 알리고 궁극적으로 해외 입양을 줄이는 데 목적이 있다.
“해외 입양에 성공한 케이스도 많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아요. 기본적으로 피부색이 다르기 때문에 아이들은 혼란을 겪고 탈선에 이르게 되죠. 입양시키지 않고 부모가 키우는 것이 최선이지만 입양을 굳이 보내야 한다면 국내 입양을 할 수 있도록 사회적으로도 정책을 개선했으면 좋겠어요.”
그가 입양을 주제로 계속해서 영화를 만드는 것도 이러한 목적의 일환이다. 이번에 찍은 영화 ‘나를 닮은 얼굴’은 작품성을 인정받아 지난 7월 미국 댈러스에서 열린 아시아 필름페스티벌에서 최우수 다큐멘터리 상을 받았고, 10월에는 미국 워싱턴에서 열린 APA(Asian Pacific American) 필름 페스티벌에서 최고 다큐멘터리 상을 받았다. 그는 앞으로도 입양에 관한 영화를 계속해서 만들 계획이다.

결혼 부정하지 않지만 지금은 일이 더 중요해
그의 쌍둥이 여동생은 현재 미국 뉴욕에서 인테리어 디자이너로 일하고 있다. 여동생은 결혼하지 않았지만 한국에 있는 두 남동생 중 한 명은 결혼해서 아이도 낳았다고. 현재 그 역시 여동생과 마찬가지로 싱글이다. 입양됐던 기억이 그에게 결혼 자체를 부정하게 하진 않았을까.
“그렇진 않아요. 결혼한 친구들도 행복하게 잘 살고 있고, 제 남동생도 행복한 가정을 이뤄서 사는 걸 보면 기분 좋아요. 입양됐던 기억이 주는 상처보다는 결혼 자체에 희생이 따른다는 점 때문에 하지 않은 거예요. 한국은 특히나 준비가 돼서 결혼하는 것보다 사회적으로 압박을 받아서 하는 경우가 종종 있더라고요. 그렇게 휩쓸려서 하는 건 반대예요. 별로 행복하지 않을 것 같거든요. 배우자가 되고 엄마가 되는 것은 중요한 문제니까 천천히 생각하려고요.”
그에게는 아직까지 결혼보다 중요한 일이 많다고 했다. 영화를 만드는 일이 그것이라고. 그는 현재 공동제작자와 영화제작사 ‘네임리스 필름’을 운영하고 있다.
“언젠간 상업영화도 만들고 싶지만 현재로서는 입양을 주제로 한 영화를 계속해서 만들 생각이에요. 한국의 따뜻한 사람들과 문화·역사·음식을 사랑하지만 아직까지 곳곳에 사회문제가 존재하고 있어요. 입양도 그중 하나고요. 그런 문제를 해결하는 데 기여하고 싶어요.”
태미 추 감독은 자신을 버린 한국에 앙금이 남아 있지 않는 듯했다. 처음 한국에 왔을 때 한국의 부정적인 면만 봤다면 정착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자신을 다시금 따스하게 맞아준 가족과 어머니가 있는 나라에서 숨겨진 따뜻한 면면을 발견했다고 한다. 앞으로도 계속 한국에서 지낼 생각이냐고 묻자 태미 추 감독은 “한국을 향한 미움과 애정이 뒤섞여 있지만 좋은 면이 더 많기에 남을 생각”이라며 웃음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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