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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아름다운 퇴장

6년 임기 끝낸 김영란 전 대법관 남다른 선택

“29년간 판사로서 남의 인생 결정, 이제는 남의 인생 보듬어 주는 삶 꿈꿉니다”

글 정혜연 기자 사진 조영철 기자, 동아일보 사진DB파트

2010. 10. 19

2004년 임명 당시 ‘최초의 여성 대법관’으로 주목 받았던 김영란 전 대법관. 6년간의 임기를 마치고 지난 8월 말 퇴임한 그가 전관예우를 받으며 고액 수임료를 받을 수 있는 변호사 사무실 개업이 아닌 “봉사하는 삶을 살겠다”고 공언해 또 한 번 화제를 모았다. 29년 만에 공직에서 물러나 모처럼 휴식을 취하고 있는 김영란 전 대법관을 자택에서 만났다.

6년 임기 끝낸 김영란 전 대법관 남다른 선택


건국 이래 최초의 여성 대법관, 사법 역사상 16년 만에 탄생한 40대 대법관, 사법연수원 기수에 따른 연공서열을 10년 이상 뛰어넘은 파격 인사… 이는 모두 지난 2004년 김영란 전 대법관(55)이 취임할 당시 따라붙던 수식어였다. 그만큼 그는 뜨거운 관심을 받으며 대법관 자리에 올랐고 6년간 맡은 바 소임을 다한 뒤 지난 8월 말, 조용히 자리에서 물러났다.
퇴임 2주 뒤 경기도 화성 자택에서 김영란 전 대법관을 만났다. 서울에서 두 시간 남짓 걸려 도착한 기자에게 그는 시원한 결명자차를 건네며 “멀리서 오느라 수고가 많았다”는 다정한 인사를 덧붙였다. 29년 동안 눈코뜰새 없이 바쁘게 지내다 모처럼 여유를 가진 덕분일까. 그의 얼굴에서 평온함이 가득 배어 나오는 듯했다. 불현듯 그가 법복을 벗고 오로지 자신만을 위해서 한 최초의 일이 무엇인지 궁금해졌다.
“혼자 조용히 책 읽고 생각을 정리할 수 있는 서재를 만들었어요. 원래는 큰딸이 쓰던 방인데 아이가 유학을 간 뒤로 책장을 들여 놓고 읽고 싶던 책들을 가득 꽂아 놨죠. 요즘은 그곳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고 있어요. 가끔 지겨워지면 요가수업에 가는데 강습에 등록해서 수업을 받기는 처음이에요. 일을 그만두면 여유 시간이 많이 늘어날 줄 알았는데 지금까지는 매일 인터뷰다 뭐다 일이 계속 생겨서 나름 분주하게 지내고 있어요.”
김영란 전 대법관은 퇴임하면서 고액의 수임료를 받을 수 있는 변호사로 개업하지 않겠다고 공언해 눈길을 끌었다. 공직자의 변호사 개업을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29년 동안 높은 곳에서 남의 인생을 결정해주고 살았으니 이제는 낮은 곳에서 봉사하며 살고자하는 뜻이 더 강하기 때문이라고. 취임 당시 “소수자·여성의 목소리를 내는 것이 주어진 소명”이라고 말한 것을 생각한다면 그리 의외의 행보는 아니다. 한 시민단체에서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그는 83건의 전원합의체 사건에서 15차례 소수의견을 내 임기 동안 자신이 한 말에 책임을 진 것으로 평가받았다.
“판사라는 직업 자체가 선출되지 않은 직책이에요. 국회는 다수가 원하는 사람(국회의원)이 입법 행정을 하기에 전적으로 다수를 위한 일이 진행될 수밖에 없죠. 사회의 이면에는 성적 소수자·외국인 노동자 등 다양한 소수자 집단이 있는데 수적 열세 때문에 입법안을 못내요. 모두가 같이 살아가는 사회에서 누군가는 그들의 권리에 대해 생각해줘야 하는데 그 일을 제가 대법관으로서 하고 싶었습니다. 제 경우에는 여성으로서 일하며 살았던 경험이 소수자적인 감성을 낳게 해 그게 가능했다고 생각해요.”
임기 동안 맡은 사건 중 그에게 남다른 의미로 남은 것이 무엇인지 궁금했다. 그는 특별히 한 사건을 꼽을 수는 없지만 초동 수사가 미흡해 물증 없이 심증만 가는 사건을 예로 들며 “도움을 주려해도 증거가 없어 덮어야했던 사건들은 끝까지 마음에 남는다”고 안타까운 마음을 표했다.
“유치원생 여자 아이가 아파트 경비원에게 성추행을 당한 사건이었어요. 무죄 판결이 났는데 초동 수사 때 아이가 한 말이라고는 ‘아이스크림 사준 경비아저씨’가 전부였죠. 여러 가지 정황상 아이가 살던 동의 경비원은 아니고 아마도 다른 동의 경비원이었던 모양이에요. 이미 시간이 꽤 지난 뒤라 다시 기소할 수 없고, 이렇다 할 물증도 없어 그 채로 종결됐죠. 이런 사건들은 물러난 뒤에도 늘 안타까움으로 자리하고 있습니다.”

문학소녀가 운명처럼 판사 되기까지
김영란 전 대법관은 경기여고를 졸업하고 서울대 법대를 나와 1978년 사법시험(20회)에 합격, 81년부터 서울민사지방법원 판사로 일하기 시작했다. 누가 봐도 부러워할 엘리트 코스를 밟은 전형적인 수재였다. 학창시절이 어땠을 지 짐작이 갔지만 의외로 그는 “심심할 정도로 평범한 모범생은 아니었다”고 말했다.
“신문반 활동도 하고 친구들과 어울리길 좋아했거든요. 지적인 호기심이 강해 책을 많이 읽었는데 별로 학교 공부와 연관된 책들은 아니었던 것 같아요. 자라면서 부모님과 크게 갈등을 겪은 적은 없지만 고등학교 3학년 때 대학진로를 정하면서 이견이 생겼죠. 전 인문계열 진학을 원했고, 아버지께서는 성적이 아까우니 사회계열로 가라고 하셨거든요. 결국 거역하지 못하고 일단 사회계열로 갔습니다. 나중에 또 사회과학대와 법대 진학을 놓고도 갈등이 생겼는데 최종적으로는 떠밀려서 법대에 갔죠.”

6년 임기 끝낸 김영란 전 대법관 남다른 선택

김영란 전 대법관은 오래 전부터 꾸준히 사회봉사활동을 해온 남편 강지원 변호사와 함께 앞으로 봉사하는 삶을 살 것이라고 한다.



문학도를 꿈꾸던 소녀가 ‘떠밀려서’ 진학한 법대에 쉽게 정을 붙일 리 만무했다. 한동안 법률에는 눈길을 주지 않았고, 때마침 학교도 학생들의 격렬한 데모로 휴교를 선언해 자의반 타의반 생각할 시간을 가졌다. 당시 사회계열 학생 중 유일한 여자였던 그는 미술대에 진학한 고등학교 친구들이 있는 태릉(75년 당시 서울대 미대는 태릉에 캠퍼스가 있었다)에서 주로 대학교 1학년 시절을 보냈다.
하지만 그는 이왕 법대에 진학한 거 기본적인 지식은 쌓자는 심정으로 2학년 겨울방학 때부터 법률에 파고들었다. 그때는 그저 헌법·형법·민법 삼과를 일독하고 시험 삼아 사법고시 1차를 볼 생각이었다. 기대치 않게 합격 통지를 받은 뒤 3학년 겨울방학 때 2년 유예기간을 넘기는 것이 아까워 2차 공부를 시작했고 그렇게 넉달 만에 사법고시를 패스했다.
“누가 봐도 의외의 결과였죠. 법조인에 뜻이 없었는데 그야말로 ‘덜컥’ 합격하고 나니 걱정이 앞섰어요. 연수원 들어갈 때까지도 앞으로 어떤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없었거든요. 연수 끝날 때쯤 판사를 선택했는데 그때는 연수원생이 1백 명 남짓이라 지금과 달리 대부분 원하는 일을 할 수 있었어요.”
판사가 된 것조차 운이 좋았다고 겸손하게 말했지만 그는 재직기간 동안 누구보다 열심히 판사로서 맡은 바 소임을 다했다. 여성 판사가 몇 안 되던 시절, 아이 둘을 키우고 남편 내조에 시부모 뒷바라지까지 하며 일해야 했으나 그렇다고 일을 뒷전으로 미루는 법이 없었기 때문. 그는 당시 “남자 판사들보다 몇 배 노력을 기울여 일했다”며 지난날을 회상했다.
“여기서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면 앞으로 들어오는 다른 여자 판사들이 설 자리가 없어질 거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죠. 개인의 문제가 아님을 느끼자 무거운 책임감이 어깨를 짓눌렀고 그 덕분에 남자 판사들보다 더 잘하려고 판결마다 공을 많이 들였습니다.”



검사와 순진한 시보의 만남, 그리고 28년의 결혼생활
김영란 전 대법관의 남편은 각종 사회봉사활동에 앞장서고 있는 강지원 변호사. 경기고와 서울대 정치학과 출신인 강 변호사는 행정고시에 합격, 관세청 공무원으로 부산에 근무하다가 다시 응시한 사법시험에서 수석 합격해 당시 고시계에 신화를 창조했다. 두 사람은 80년 12월 서울지방검찰청에서 검사와 시보(공무원 임용후보자가 정식발령 받기 전 적격성을 판정받기 위해 일정기간 근무하는 때)로 처음 만났다.
“만나기 전 이미 합격 수기를 읽어 어떤 사람인지 대충 알고 있었어요. 고시 공부할 때도 수기를 참고로 해서 공부했거든요. 그때는 저하고 상관있는 사람이 될 줄 전혀 몰랐죠(웃음). 옆방에서 근무할 때 같이 점심 먹자고 하더라고요. 저는 뭐 나이 많은 선배 검사가 밥을 사주려나보다 그러고 있었죠. 후에 말하기를 노총각이던 남편은 저를 점찍었었다고…. 전혀 눈치 채지 못했기 때문에 깜짝 놀랐어요.”
그렇게 연애를 하던 두 사람은 82년 3월 부부의 연을 맺었다. 최초의 판사·검사 부부가 탄생해 법조계 안팎에서 꽤 화제가 됐다. 일반 가정에서 볼 수 없는 규율 같은 것들이 존재했으리라 짐작됐는데 김 전 대법관은 여느 가정과 다를 바 없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한편 “전통적인 가정에서 나고 자란 두 사람이 서로의 존재를 인식하고 받아들이는 과정의 연속이었다”며 결혼생활을 회상했다.
“일곱 살 나이차가 나는 데다 두 사람 모두 주관이 뚜렷한 성격이라 적잖이 부딪혔어요. 그 시절에는 결혼하면 여자가 남자의 세계관 속에 들어가 사는 거란 고정관념이 있었고, 남편도 그렇게 생각했죠. 그리 교육을 받고 자란 사람들은 대체로 바뀌기가 쉽지 않은데 남편은 특정 관념에 문제가 있다고 말했을 때 대체로 수용을 해줬어요. 이후로 두 사람 모두 숱하게 조율하면서 서로에게 맞춰갔습니다.”

6년 임기 끝낸 김영란 전 대법관 남다른 선택


강 변호사는 4남3녀 중 셋째 아들인데 첫째 아들은 외교관, 둘째와 넷째 아들도 외국에서 근무한 터라 셋째 며느리인 김 전 대법관은 시부모를 모시며 제사까지 도맡아야 했다. 시아버지는 작고하기 전 6년 간 치매를 앓았고, 시어머니는 2년 반 가량 골다공증으로 누워 지내야 했다. 며느리로서 감내하기 쉽지 않은 일이 많았을 테지만 힘들어 하면서도 끝까지 포기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는 “직장에 투자한 시간이 더 많았기에 마음 한편 잘 모시지 못했다는 죄송한 마음이 늘 자리하고 있다”고 솔직하게 고백했다.
이 부부에게는 네 살 터울 두 딸이 있다. 김 전 대법관이 취임 전 인사청문회에 섰을 때 딸들이 대안학교에 다니는 것이 알려져 눈길을 끌었다. 당대 최고의 엘리트 코스를 밟은 부모가 자식에게 권한 길 치고는 굉장히 의외였기 때문. 획일적인 사회 교육 분위기 속에서 일종의 일탈을 선택하게 한 데는 열린 사고를 갖고, 인생을 좀 더 깊게 고민하라는 뜻이 깔려 있었다.
“기본적으로 아이를 키울 시간도 없고 하나하나 간섭할 여력도 없었어요. 물론 그런 이유 때문에 대안학교에 보낸 건 아닙니다. 오래 전부터 아이들은 큰 틀 안에서 자율적으로 살아가게 해줘야한다고 생각했어요. 자립심을 키우고 자기 자신의 진로라든가 삶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할 수 있어야 행복해질 거라 믿었고, 두 아이 모두 그렇게 큰 것 같아요.”
현재 두 딸은 부모의 뜻대로 자신들의 삶을 독립적으로 개척해나가고 있다. 첫째 민형씨는 심리학을 전공하고 일본에서 광고 회사를 다니고, 둘째 선형씨는 대학에서 영화를 만든다. 서서히 딸들을 시집보낼 시간이 다가오는 것 같아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사윗감이 있는지 물었다. 그는 망설임 없이 “친구·동료처럼 즐겁게 인생을 함께할 수 있는 사람”을 꼽았다. 이어 삶의 무게를 동등하게 짊어지고 나아갈 수 있는 부부가 된다면 좋겠다는 바람도 내비쳤다.

“억만년 전부터 이리 살았던 것처럼 평온한 요즘입니다”
수천 수만 건의 기록을 보고 매일 같이 판결문을 쓰던 대법관이 아무리 퇴임을 했다지만 자택에서 보통 사람처럼 휴식을 취하는 모습은 상상이 되질 않았다. 그러자 김 전 대법관은 “저도 책을 읽다가 뒹굴거리기도 합니다”라며 웃음 지었다.
“아침 일찍부터 읽고 싶은 책을 보고, 한껏 여유를 부리는 요즘 얼마나 행복한지 몰라요. 며칠 전부터 마종기 시인의 에세이 ‘당신을 부르며 살았다’를 읽고 있는데 마음이 잔잔해지면서 전에 없던 평온함을 느끼고 있죠. 오전에 지인이 문자로 어떻게 지내냐고 묻기에 ‘억만년 전부터 이렇게 살았던 것처럼 좋습니다’라고 문자를 보냈을 정도예요.”
휴대전화를 꺼내 지인에게 보낸 문자 내용을 보이며 소녀처럼 웃음 짓는 김영란 전 대법관의 모습에서 그가 지금 어떤 나날을 보내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책 이외에도 그는 드라마·영화 등 다양한 문화생활을 즐기고 있다고 했다. 국민드라마 반열에 오른 KBS 드라마 ‘제빵왕 김탁구’는 70·80년대를 배경으로 한 것이 신선해 첫 방송부터 봤다고. 영화는 꿈의 세계를 소재로 독특한 이야기가 전개되는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주연의 영화 ‘인셉션’이 최근에 본 영화 중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말했다. 조만간 날이 선선해지면 딸이 있는 일본으로 가 두세달 정도 여행을 하고 싶다고도 했다.
일선에서 물러났지만 그는 아직 50대 중반. 아직도 한동안은 거뜬히 일할 수 있을 정도로 건강하다. 때문에 앞으로 봉사하는 삶을 사는 데 노력을 기울일 생각이라고.
“봉사도 공부가 필요한 일이죠. 어떻게 일을 해나갈 수 있을지 자료도 찾고 생각도 정리해보려고요. 또 다른 소망이 있다면 지금까지 판결했던 것을 정리해서 대학생들에게 강연을 하는 거예요. 인생을 사는 데 있어 올바른 목표를 갖는 게 중요한데 제 경우는 ‘좋은 판사가 되는 것’이 목표였어요. 때문에 사람에 대한 이해와 정의에 대한 신념을 토대로 공정한 재판을 하기 위해 항상 애쓸 수 있었죠. 이런 이야기를 젊은 친구들에게 들려주고 그들이 조금이나마 도움을 얻었으면 하는 게 저의 작은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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