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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leb 예술가의 삶

‘절친’ 기자가 본 앙드레 김 ‘판타스틱’ 인생 비하인드 스토리

“독창적인 패션 세계 펼치기 위해 평생 외로움과 싸우면서도 순수함 잃지 않은 진정한 예술가”

사진 동아일보 사진DB파트

입력 2010.09.15 14:57:00

한국 패션의 거장 앙드레 김이 세상을 떠났다.
스타들과의 각별한 친분, 독특한 말투, 흰색을 유난히 사랑하던 디자이너…, 하지만 그의 참모습을 아는 이는 드물다.
앙드레 김의 자서전을 낸 유일한 인물인 동아일보 이승재 기자가 순수한 열정을 지닌 앙드레 김을 추억했다.
‘절친’ 기자가 본 앙드레 김  ‘판타스틱’ 인생 비하인드 스토리


지난 8월12일 패션디자이너 앙드레 김이 7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사망 소식은 대한민국 전체에 큰 충격이었다. 앙드레 김은 단지 패션디자이너가 아니라 시대의 아이콘이었기 때문이다.
앙드레 김은 시대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늘 관심의 중심에 서온 전무후무한 존재다. 1962년 서울 소공동에 의상실 ‘살롱 앙드레’를 내며 국내 ‘남성 디자이너 1호’로 첫발을 내디딘 그는 50년 가까이 최상의 브랜드 파워를 유지해왔다. 한국 패션디자이너로는 최초로 프랑스 파리에서 패션쇼(1966)를 연 것도 그였고, 전 세계에서 최초로 이집트 스핑크스와 피라미드 앞에서 패션쇼(1996)를 연 것도 그였다. 김희선·이병헌·장동건·배용준·원빈·송승헌·송혜교·김태희 같은 스타들이 예외 없이 그의 무대를 거쳐갔다.
화려한 모습 뒤에는 지치지 않는 예술혼이 있었다. 그는 해외패션쇼 행사가 없는 한 일주일에 7일을 의상실에 나와 일했다. 설 연휴에도 추석 연휴에도 그는 텅빈 의상실에 홀로 앉아 디자인을 했다. 그는 “전 가족이 별로 없어서 외로워요. 전 일이 없으면 외로워요. 하루도 일을 하지 않으면 전 죽은 거와 같아요. 일을 통해 외로움을 이겨내야 하지요”라고 말하곤 했다.
앙드레 김의 건강 이상설은 4~5년 전부터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를 잘 아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일찍 돌아가실 분이 아니다. 그분의 열정과 일에 대한 욕심을 생각해보라. 그는 100세 생일에도 디자인을 하고 있을 분”이라며 그의 건강을 의심하지 않았다. 실제로 그는 지난 3월 중국 베이징에서 열린 ‘프리뷰 인 차이나 2010’의 패션쇼 현장까지 진두지휘하는 정력적인 모습을 보였다.
지난 7월12일 그가 폐렴으로 서울대병원 중환자실에 입원했다는 소식이 들렸을 때도 나는 그의 죽음을 전혀 상상하지 못했다. 평소 잘 알고 지내던 앙드레 김 의상실 관계자는 문병을 가려던 내게 “현재 의식은 있으시다. 아들 중도도 알아보신다. 다만 말을 하시긴 어렵다. 쾌차하시면 가장 먼저 연락드리겠다”면서 “너무 걱정하지 마시라”고 오히려 날 위로했다.
뭔가 심상찮다는 느낌이 들었다. 바쁘단 핑계로 최근 자주 연락드리지 못한 게 후회스러웠다. 하지만 그에게 죽음이 그리 가까이 와 있는 줄은 알지 못했다. 앙드레 김은 가족을 제외한 그 누구의 문병도 고사했다. 배우 최지우도 병상에 있는 그를 만나려고 무진 애를 썼지만, 앙드레 김은 “디자이너로서의 내가 아닌, 병자로서의 내 모습을 그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겠다”면서 정중히 사양했다. 그리고 입원 한 달 만에 세상을 떠났다.

앙드레 김 인생 최대 시련은 옷 로비 청문회 사건

‘절친’ 기자가 본 앙드레 김  ‘판타스틱’ 인생 비하인드 스토리

1959년 패션쇼를 마치고 스승 최경자씨와 모델, 최씨의 딸 신혜순씨와 함께 찍은 사진(신혜순씨 제공)



앙드레 김과 나의 인연은 지금으로부터 11년 전인 199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가 격분한 어조로 내게 전화를 걸어온 건 그해 8월25일이었다.
“너무너무 억울하고 분해요. 저 앙드레 김이 왜 이런 잘못된 취급을 받아야 하는지. 제 본명이 김봉남(金鳳男)이라는 게 도대체 뭐가 문제라는 건가요? 부모님이 주신 소중한 이름인데….”
하루 전, 그는 정재계의 로비 스캔들이었던 이른바 ‘옷 로비’ 사건을 두고 열린 국회 청문회에 참고인으로 출석했다. 청문회장에서 “디자이너 앙드레 김입니다”라고 이름을 말했다가 “본명을 밝히라”는 한 국회의원의 강압적 요구에 “김봉남입니다”라고 답했던 그는 이후 예기치 않게 자신의 본명이 세간의 웃음거리가 되자 당혹스러워하며 슬퍼하고 분해했다. 그는 “사람들이 내 껍데기만 알고 놀림감으로 삼을 뿐 내 진심과 영혼의 세계는 알려고 들지도 않는다”며 전화 저편에서 울먹였다.
‘인간’ 앙드레 김이 궁금하던 나는 그때부터 장장 4개월에 걸쳐 서울 강남구 신사동에 있는 의상실 ‘앙드레 김 아뜰리에’에서 그를 만나 심층 인터뷰를 했다. 인터뷰가 얼마나 길었는지, 앙드레 김은 인터뷰 중간 중간 “잠깐 시간을 달라”면서 화장을 고치고 옷을 갈아입기도 했다. 그는 하루 최소 3회 똑같은 옷을 갈아입으면서 “옷을 갈아입을 때면 내가 손님에 대한 태도를 완전히 하는 느낌이 들어 기분이 좋다”고 말하곤 했다.



‘절친’ 기자가 본 앙드레 김  ‘판타스틱’ 인생 비하인드 스토리


그러는 동안 나는 그를 둘러싼 항간의 온갖 루머와 추측을 뒤로하고 그의 마음 깊은 곳에 담겨 있는 진정성에 한발 더 다가가게 됐고 그에 관한 진실들을 모아서 나는 ‘동아일보’ 주말섹션 ‘위크엔드’에 ‘앙드레 김-이승재 기자의 테마데이트’란 코너로 연재했다.
2002년 내가 “선생님에 관한 첫 책을 쓰고 싶다”고 앙드레 김에게 말했을 때 그는 “나에 관한 오해와 억측이 세상에 너무 많은데 책을 통해 진정한 나를 알릴 수 있게 되었다”면서 행복해했다.
그는 공동저자 형태로 책을 내는 데 동의하면서 1962년 데뷔 이래 40년이 넘도록 간직해온 자신과 아들의 소중한 사진을 비롯해 국내외 스타들이 등장하는 패션쇼 사진을 아낌없이 제공해주었다.
책의 표지디자인부터 사진 선정, 심지어는 서체와 글씨 크기와 지질(紙質)까지, 앙드레 김은 역시 완벽주의자답게 책의 모든 것을 거듭 점검하고 주문했다. 그리고 드디어 책(앙드레 김-My Fantasy)이 나왔다. 그는 하얀색의 이 책을 품에 안고 아이처럼 기뻐했다. 이후 그는 자신과 깊은 친분을 쌓아온 스타와 주위 사람들에게 이 책을 선물하면서 “인간 앙드레 김이 이 안에 있다”고 말하곤 했다.
그때부터 나는 그를 존경했고, 그는 나를 믿었다. 서울 압구정동에 있는 아파트로 나를 초청해 당시 대학생이던 아들 중도씨와 함께 쓰는 침실을 최초로 보여준 것도 내가 그를 편견 없이 바라보리라는 확신에 따른 것이었다. 하얀 방에 나란히 놓인 두 개의 하얀 침대. 그는 “잠들기 전 아들은 나에게 친구들 얘기며, 프랑스어 공부 얘기며, 10대들의 유행 얘기를 들려줘요. 그런 아들의 이야기를 듣는 시간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이에요”라고 내게 말해주었다.
일에 있어서 그는 과하다 싶을 만큼 엄격했다. 장식 하나를 살짝 비뚤게 다는 의상실 직원들의 실수에도 불호령을 치는 장면을 여러 번 목격했다. 그의 숨 막히는 완벽주의는 패션디자이너로서, 그리고 엔터테이너로서 그에게 화려한 입지를 가져다주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흰색 에쿠스 승용차를 함께 타고 가는 내게 이렇게 말하곤 했다.
“아들이 있어서 외롭진 않아요. 하지만 언제나 고독해요. 전 룸살롱도 노래방도 가본 적이 없어요. 포커나 고스톱도 칠 줄 몰라요. 결혼도 하지 못했어요. 한 여인의 남편이 되어 사랑을 나누지도 못했지요. 저에겐 자유롭고 소박한 삶이 없어요. 내가 동네 중국집에 가서 자장면 한 그릇만 먹어도 사람들 사이에서 이야깃거리가 되니까요. 하지만 저의 독창적인 세계를 지켜가기 위해서는 외로움을 이겨내야 해요.”
그는 자신의 패션쇼 피날레를 오로지 결혼식 장면으로 장식하는 것도 “내가 현실에서 이루지 못한 영원한 사랑에 대한 그리움의 표현”이라고 했다. 그는 참으로 많은 이야기를 내게 들려주었다. 때론 넋두리 같았고, 때론 시 같았다.
6·25전쟁 때 피란을 간 부산에서 연상의 여인을 만나 해변에서 플라토닉한 사랑에 빠졌던 그의 첫사랑 이야기에서부터 미군 통신부대에서 전화 오퍼레이터로 일했던 사연, 중1 때 용 한 마리가 꿈틀꿈틀 삼각산을 기어오르더니 승천하는 꿈을 꾼 뒤 평생 뇌리를 떠나지 않는다는 사연, “디자이너가 되겠다”고 아버지에게 말씀드렸더니 “남자가 만든 옷을 여자가 입겠느냐”며 반대하셨다는 얘기, 과산화수소수로 머리를 노랗게 탈색하고 다니다가 아버지에게 혼이 났던 멋모르던 청년시절의 얘기, 릴케의 시 ‘고독’과 워즈워스의 시 ‘수선화’, 그리고 아들 중도의 눈빛에서 디자인의 영감을 얻는다는 이야기까지….

“묘비명은 ‘유행에 연연하지 않고 동양의 에스프리 담긴 순수한 세계 추구한 디자이너’였으면…”
당시 나는 “선생님은 100세 생신을 맞는 날에도 디자인을 하고 계실 것만 같다”고 운을 떼면서 “사람들이 선생님을 어떻게 기억해주길 바라느냐. 혹시 묘비에 새길 내용을 미리 생각해두셨느냐”고 조심스럽게 물었고, 앙드레 김은 나보다 더 크게 웃다가 이내 진지한 표정이 되어 이렇게 말했다.
“이건 어떨까요. ‘20세기라는 과거에서 태어나 21세기라는 미래까지 활동한 패션 디자이너 앙드레 김은 유행에 연연하지 않고 동양의 에스프리가 담긴 독창적인 세계, 순수한 영원의 세계를 추구했다’고요….”
내게 평생에 남을 따스한 조언을 해준 사람도 앙드레 김이었다. 내가 기자라는 직업을 두고 한때 깊은 회의에 빠졌을 때 “지금의 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미래의 나도 사랑할 수 없다”는 말로 가슴을 어루만져줬다.

앙드레 김이 세상을 떠나고 나는 신문에 그를 추억하는 글을 썼다. 인터넷으로 나의 글을 본 재미교포 한 분이 내게 장문의 이메일을 보내왔다. 그는 자신과 앙드레 김에 얽힌 다음과 같은 일화를 들려주었다.j
옛날에 저는 앙드레 김 선생님의 아파트 건너편 동에 살았습니다. 제가 살던 집에서 뒤쪽에 자리한 아이들 방으로 가면 그분의 집이 거의 바로 마주 보이는 위치에 있었지요. 강변을 내다보기 위해 자주 창문을 열다보니 자연스레 앙드레 김 선생님의 집이 보였습니다. 핑크색 커튼을 두른 모습이 늘 저의 호기심을 유발시켰지요. 그때는 ‘독특한 분인가 보다’ 정도로만 생각했을 뿐이었습니다. 어느 날 제가 아들을 데리고 집 앞 비디오 가게에 갔습니다. 제 아들은 좀 심한 장난꾸러기였습니다. 늘 저를 힘들게 하는, 어디든 관심이 지나친 그런 아이였지요. 그날도 아들이 비디오테이프를 이것저것 끄집어내어 어지럽게 늘어놓는 바람에 제가 야단을 쳤습니다. 그런데 누가 뒤에서 “아유, 그냥 놔두셔요. 어릴 때 개구쟁이들이 커서는 더 의젓하게 제몫을 한답니다” 하면서 웃는 것이었습니다. 쳐다보니 단발머리에 흰 양복을 입은 앙드레 김 선생님이었습니다.
그 후 아파트 단지 안에서 선생님을 자주 마주쳤습니다. 내 아들에게 무심코 주신 관심과 칭찬에 늘 고마운 마음을 가지게 되었고, ‘사람에 대한 애정이 많은 분이구나’라고 생각하면서 그동안 그분에 대해 가졌던 선입견을 버렸습니다. 감사하는 마음에 앙드레 김 옷도 사 입었습니다. 화려해서 얼굴이 큰 제겐 어울리지 않았지만 말이지요.
저는 86년 해외로 이주를 하였습니다. 바로 지난 6월에 서울에 갔다가 친구 집으로 가는 중에 우연히 앙드레 김 선생님 집 앞을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제가 친구에게 “야, 이분이 우리 아들에게 덕담 한마디 해주신 뒤 나는 평생 이분의 팬이다. 이분은 정말 프로라서 난 존경한다”고 말했습니다.
진정한 시대의 선각자를 잃은 느낌이 들어 오늘 아침 내 생애 처음으로 이런 편지를 써봅니다. 앙드레 김 선생님이 좋은 곳으로 가시기를 빌면서 이런 방법으로 문상을 대신합니다.
PS. 선생님의 말씀대로 그 개구쟁이 아들은 역시 지금 꽤 괜찮은 사람이 되었답니다.
이 편지를 읽고 난 나는 곧바로 서울대병원 영안실 1호로 향했다. 그리고 앙드레 김이 자신보다 더 사랑했던 아들 중도씨에게 이 편지를 전했다. 중도씨는 이 편지를 아버지의 영정 앞에 조용히 올려놓으며 눈시울을 또다시 붉혔다.
앙드레 김. 그는 이제 세상에 없지만, 지금쯤 그는 그토록 좋아하던 영화 ‘나의 청춘 마리안느’의 한 장면을 진정으로 만나고 있을 것만 같다. 아기사슴과 다람쥐가 뛰놀고 하얀 새가 지저귀며 날아다니는 아름다운 산속을 거니는 미소년이 되어 곧 안개에 싸인 환상적인 성(城)을 발견할 것이다. 그리고 성 안에서 사뿐히 걸어 나오는 순수한 여인을 발견할 것이다.
안녕히, 앙드레 김. 이젠 그토록 그리던 하얀 나라에서 영원한 안식을….

앙드레 김 삼우제 풍경 & 아들 중도씨 인터뷰

‘절친’ 기자가 본 앙드레 김  ‘판타스틱’ 인생 비하인드 스토리

앙드레 김의 아들 중도씨가 아버지 묘소에 제주를 올리고 있다.

“아빠, 할아버지 무덤에 어떻게 이렇게 빨리 풀이 자랐어요?”
손자 현서군(5)은 할아버지 묘가 며칠 새 푸른 잔디로 뒤덮인 게 신기했나보다. 8월17일 앙드레 김이 묻힌 충남 천안 공원묘원에서는 삼우제가 열렸다. 빈소를 화려하게 수놓던 스타들의 모습은 찾을 수 없었다. 앙드레 김이 가족같이 대하던 의상실 식구들과 단골식당 주인 등 몇몇 지인들이 조촐하게 묘지를 찾아 고인의 안식을 빌었다. 며느리 유은숙씨는 빈대떡·편육·갈비 등 평소 앙드레 김이 좋아하던 음식을 정성껏 장만해왔고 아들 중도씨(30)는 뜨거운 햇빛이 내리쬐는 가운데도 시종일관 예를 다했다. 평생 미혼이었던 앙드레 김은 82년 당시 5개월 된 중도씨를 입양해 사랑을 쏟아 키웠다. 몇몇 지인은 갑작스러운 이별이 아직도 믿기지 않는 듯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았다. “초인처럼 살아오신 분이라 이번에도 잘 넘기실 줄 알았는데….” 앙드레 김이 위독해 중환자실에 입원해 있을 때 가족이 병세를 밝히지 않은 이유도 그가 꼭 회복돼 다시 일어설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었다고 한다.
고인이 무척 아끼던 쌍둥이 손자 현서·손녀 현유(5)와 막내 지유(2)는 아직 생과 사의 경계를 알지는 못하지만 의젓하게 할아버지 곁을 지켰다.
삼우제를 마친 후 중도씨로부터 앙드레 김의 마지막 순간을 비롯해 몇 가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다음은 중도씨와의 일문일답.

상심이 클 것 같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게 아직 믿기지 않습니다. 지금도 옆에 계신 것 같은데….”
임종 순간은 어땠습니까.
“주무시다가 편안하게 가셨습니다.”
전부터 건강이 안 좋으셨던 걸로 알고 있는데.
“네. 그래서 저와 집사람, 그리고 의상실에 계신 실장님이 일하시는 걸 많이 말렸습니다. 제발 좀 쉬시라고. 그래도 열정이 워낙 강하신 분이라 뜻을 꺾지 않으셨습니다.”
고인은 어떤 아버지였나요.
“여느 아버지처럼 따뜻한 아버지였습니다.”
손자손녀도 무척 예뻐하셨죠.
“네. 아이들 옷도 만들어주시고, 불러서 식사도 함께 하시고. 아이들을 굉장히 예뻐하셨습니다.”
조의금을 받지 않았는데, 누구의 의견이었나요.(이 질문에 대해서는 앙드레 김을 가장 가까이에서 보좌한 의상실의 임세우 실장이 답했다)
“평생 좋은 일을 많이 하신 선생님의 뜻을 받들어 가족들이 자연스럽게 그렇게 결정했습니다. 처음에는 조의금을 받아 유니세프에 기증을 할까도 생각했지만, 그보다는 가까운 사람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으셨던 선생님의 생전 모습을 떠올려 고마운 뜻만받기로 한 것입니다.”
중도씨는 고인에 대해 말을 아꼈다. 아버지와의 지난 이야기는 추억으로 묻어두고 싶은 듯했다. 사람들을 모두 떠나보내고 그는 다시 한 번 아버지의 무덤을 둘러봤다. 할아버지에게 “또 오겠다”며 천진난만하게 작별 인사를 건네는 손자손녀들, 이들이 있어 앙드레 김의 마지막이 훨씬 더 따뜻했을 것 같다.

김명희 기자 사진 이기욱 기자


여성동아 2010년 9월 56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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