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여성동아 로고

고귀한 희생

차디찬 바닷속에서 스러져간 천안함 장병 46인

애틋한 사연 · 유가족 애끊는 심경

글 김명희 정혜연 기자, 김정훈, 동아일보 사회부 사진 조영철 기자, 해군 제공

입력 2010.05.17 18:12:00

남편을 잃고, 아비를 잃고, 자식을 잃은 사람들의 가슴은 까맣게 타버린 지 오래다. 지난 3월26일 오후 9시22분 서해를 순항 중이던 천안함은 두 동강이 나 순식간에 가라앉았고, 조국의 바다를 지키고자 했던 해군 장병들 중 더러는 살고 더러는 목숨을 잃었다. 믿을 수 없는 현실을 받아들여야 하는 이들은 내일이 두렵기만 하다.
차디찬 바닷속에서 스러져간 천안함 장병 46인

침몰 사고 3일전 천안함과 장병들의 모습. 이들 중 일부는 끝내 가족의 곁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스러져갔다.



불꽃같은 청춘들이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 스러져갔다. 이제는 눈물마저 말라버린 유가족들은 그 어떤 말에도 위로를 받을 수 없다. 아직도 믿어지지 않는 현실을 받아들이는 일이 이들에게는 죽기보다 어렵다.
지난 3월26일 오후 9시22분, 칠흑 같은 어둠이 깔린 서해는 조용히 출렁이고 있었고 천안함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군사업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1분 뒤 1천2백톤급 전투함인 천안함은 ‘펑’ 소리와 함께 반토막이 났고 내부는 삽시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일부는 머리가 찢어지고 다리가 부러져 피투성이가 됐다. 함수에 있던 58명의 병사들은 동료를 부축해 승조원 갑판으로 이동했고 차례로 구명보트에 올라 목숨을 구했다. 하지만 46명의 병사들은 선체에 갇힌 채 차디찬 바닷속으로 빠져들어갔다.
그로부터 20일 후, 천안함 함미에서 소리 한 번 못 질러보고 목숨을 잃은 36명의 해군 장병들이 생애 마지막 임무를 마치고 귀환했다. 4월 초 발견된 두 명의 상사를 포함, 38명은 가족의 곁으로 돌아왔지만 8명의 병사는 아직도 조국의 바다에 남아 있다.

#나현민 일병 아버지 나재봉씨 가슴에 묻은 아들 이야기
지난 4월11일 아침 경기도 평택 해군2함대 사령부 내 식당에는 미역국이 나왔다. 실종자(당시) 나현민 일병(20)의 아버지 나재봉씨(52)가 아들의 생일(음력 2월27일)을 맞아 생일상을 차린 것이다. 이날 저녁 나씨는 2함대 가족숙소에 머물고 있는 가족들 방을 하나하나 들러 생일 케이크를 돌렸다. 아들이 바닷속에서나마 생일상을 받았으면 하는 아비의 애틋한 마음이 실종자 가족들을 또 한번 울렸다.
‘실종자가족협의회’ 대표단 일원으로 장례위원장을 맡고 있는 나 일병의 아버지 나재봉씨를 4월18일 2함대 내 해군회관에서 만났다. 3주 넘게 이곳을 지키며 아들의 귀환을 기다렸던 나씨는 청천벽력과 같은 일을 겪으며 심신이 많이 지친 모습이었다. 그가 입대 10개월 된 아들의 사고 소식을 알게 된 것은 TV 뉴스를 통해서였다.
“우리 아이가 천안함에 타고 있었으니까 뉴스가 났을 때 의아하기만 했어요. 처음에는 자막에 이름이 안 떠서 살아 있기만을 바랐는데 결국엔 실종자 명단에 아들 이름이 떴죠. 사실이라고 해도 부모 마음은 그게 아니니까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하려고 평택 2함대로 달려 왔어요. 도착한 사람들 이름에 빨간색으로 동그라미를 치더라고요. 나중에 알고 보니 그게 실종자 가족들을 표시한 거였어요. 도저히 믿을 수 없어서 배 타고 같이 나가서 조마조마하게 수색작업을 지켜봤어요.”
그는 실낱같은 희망을 안고 현장에서 작업과정을 지켜봤다고 한다. 파도가 3m 높이로 치솟아오르는 바다에서 보트에 몸을 실은 채 아들을 찾으려는 아비의 심정을 누가 헤아릴 수 있을까. 그러던 중 수색작업을 하던 한주호 준위가 순직했고, 남기훈·김태석 상사의 시신이 발견됐다.
수색작업이 여의치 않다는 걸 깨달은 그는 다른 가족들과 뜻을 모아 작업을 중단하고 함미를 인양할 것을 요청했다고 한다. 한 사람씩 구하는 것보다 함미를 인양해 한꺼번에 찾는 편이 낫겠다는 판단에서였다. 그리고 4월15일, 어렵게 올린 함미에서 실종자들이 하나씩 발견됐다. 시신이 나올 때마다 관련 가족들은 심장이 얼어붙는 듯했다. 나씨도 마찬가지였다.
“우리 아이가 32번째로 나왔어요. 25번째까지는 다른 가족들에게 곧 당신 아들 이름이 불릴 거라고 위로하며 기다렸어요. 그런데 내 아들 이름이 안 불리는 상황에서 26번째 실종자가 나오니까 저도 정말 죽겠더라고요. 다행히 우리는 아들 시신이라도 찾았어요. 그때까지도 못 찾으신 분들에게 술 권해드리며 힘내시라고 했는데 ‘행여나 술 먹고 자다가 시신이 나오면 어떻게 하냐’며 모두들 마시지도 않고 기다리셨어요. 시신마저 찾지 못한 그분들은 누가 위로할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아들, 군인답게 보내주고 싶어
나씨에게 현민군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아들이었다. 다른 사람을 위할 줄 알고, 성격도 활동적이어서 자기 인생을 독립적으로 개척하고자 노력한 아들이었다. 해군에 입대할 때도 “제복이 굉장히 멋있다”며 부모 앞에서 군 생활을 잘하겠다며 다짐하던 아들이었다. 나씨는 현민군이 진해로 신병교육을 받으러 갈 때 따라갔던 기억을 떠올렸다.

차디찬 바닷속에서 스러져간 천안함 장병 46인

나현민 일병의 어머니가 아들에게 쓴 편지. 슬픔이 밀려와 제대로 글을 쓰지 못한 듯하다.





“아들이 벌써 그만큼 커서 당당하게 군입대하는 것이 자랑스러웠어요. 제 직업이 건축업이다 보니 아이들을 강하게 키우고 싶었거든요. 사회에 나와 사는 것 자체가 전쟁이니까 나이는 어려도 사고방식을 바르게 갖고 무슨 일이든 강하게 헤쳐나가는 아이가 됐으면 했어요. 그래서 군에 입대할 때도 ‘때리고 오면 용서해도 맞고 오면 용서 안 한다’고 말했죠.”
현민군은 처음에는 힘들다고 했지만 빠르게 적응했다고 한다. 함장과 장교들이 굉장히 잘해준다며 부모의 걱정을 덜어주려 했다고 한다. 천안함 분위기에 대해서도 “여러 초계함 중에서 천안함이 가장 단결력이 좋고 가족적이다”며 만족스러워했다고.
“사병이다 보니 휴대전화를 못 들고 가잖아요. 그래도 장교나 부사관들이 현민이를 예뻐해서 휴대전화를 빌려줬나봐요. 그러면 가끔 짧게 통화를 하기도 했는데 아이 엄마가 걱정을 많이 하니까 염려 마시라고 말하기도 하고… 그전에는 함장님하고 같이 찍은 사진을 자기 엄마한테 휴대전화로 보내주기도 했어요. 처음 사건 터지고 나서는 속으로 ‘함장 가만두지 않겠다’고 생각했는데 만나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어보니까 저희보다 더 가슴 아프겠더라고요. 아마 평생 마음의 짐을 덜지 못할 겁니다. 기회가 되면 한번 따로 뵙고 술 한 잔 하면서 짐을 덜어드리고 싶어요.”
그의 아내는 큰 충격을 받아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비통해 하고 있다고 한다. 어떤 위로의 말도 받아들이지 못하는 상태라고. 안치소에 아들이 누워 있기 때문에 장례가 끝날 때까지는 집이라 생각하고 머무를 생각이라고 한다. 그는 “장례가 끝나고 집에 가면 자식의 빈 공간이 너무 커서 살아가기 힘들 것 같다”며 말을 잇지 못했다. 숨을 고른 뒤 나씨는 아들의 생일상을 차리게 된 일에 대해 입을 열었다.
“생일은 돌아오는데 아들은 못 찾고… (생일을 어떻게 하나) 고민을 많이 했어요. 그런데 여기 해군에서 배려를 해주시더라고요. 어떻게 하겠냐고 물어보기에 수색 인양작업이 언제 끝날지도 모르겠으니까 그냥 해달라고 했습니다. 미역국 끓여 놓고 현민이가 바닷속에서라도 아비가 차린 생일상을 받아 주길 바랐어요.”
그는 귀환한 생존 장병들을 만난 이야기도 들려줬다. 책상을 사이에 두고 줄 맞춰 앉아 가족들과 대질 신문하듯 마주 보는 게 거북해 “책상을 치우고 의자를 동그랗게 배치해달라”고 말했다고. 그는 이야기를 나눈 뒤 마지막으로 그들에게 편지를 써달라고 부탁했다. 생전 아들의 모습을 기억하고 싶기 때문이었으리라. 39명이 써준 편지에는 함께 동고동락했던 사람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절절하게 배어 있어 유가족의 마음을 울렸다.
나씨는 천안함 사건에 대한 원인 규명이 잘 마무리 된 후 아들을 비롯한 해군 장병들의 장례 또한 큰 논란 없이 잘 치르고 싶다는 뜻을 내비쳤다.
“욕심 부려서는 안 된다는 걸 알고 있지만 해군이었으니까 명예롭게 해군장으로 치러주고 싶어요. 원인이 제대로 밝혀지면 전사자인지 아닌지 가려지겠죠. 해군 창설 이래 초계함 침몰도 처음이고 이렇게 많은 장병이 목숨을 잃은 것도 처음이니 해군에서도 장례를 어떻게 치러야 할지 고심하는 것 같아요. 어떻든 해군의 조언에 따라 우리 아들의 죽음이 억울하지 않게 장례를 잘 치러주고 싶은 심정입니다.”

#동료 대신 승선한 이창기 원사 형 이성기씨 참담한 심경
천안함 사망자 실종자 사연 하나하나가 가슴을 울리지 않는 이가 없다. 이 가운데 이창기 원사(40)의 사연도 가슴을 아프게 한다. 그의 이름은 당초 천안함 승조원 명단에 없었다. 준사관 시험을 보기 위해 육지에 남기로 했던 것. 하지만 이 원사는 승선할 예정이던 동료의 아이가 아프다는 이야기를 듣고 출동을 자처했다. 그것이 마지막이 됐고, 이 원사는 아직도 귀환하지 못했다.
이 원사의 형 이성기씨(45)는 사고 소식을 접한 날부터 날마다 숨죽여 동생의 무사귀환을 바랐지만 생존 한계시간이라던 69시간, 72시간, 마침내 1백20시간이 지나자 희망의 끈을 놓을 수밖에 없었다. 살아 있어달라는 절규는 시신만이라도 찾게 해달라는 기도로 바뀌었다. 이씨는 “비록 살아오지 못해도 함미에는 있을 줄 알았는데…”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함미 인양을 결정했을 때 생존은 어렵지 않겠냐는 생각을 갖고 마음을 다잡았습니다. 그래도 영원히 못 돌아오는 사람 명단에는 끼지 말았으면 하는 마음으로 하루하루 버텼는데 결국 이렇게 됐어요. 하나뿐인 조카에게 아빠의 마지막 모습이라도 보여주고 싶었는데… 이제 조카 얼굴을 어떻게 봅니까.”

이 원사는 지난 90년 해군 부사관으로 임관, 이후 전북함·속초함·제주함 등을 거쳐 지난해 2월부터 천안함에 탑승했다. 99년 발발한 제1연평해전에서는 속초함 전탐사(해군에서 전파 탐지기를 조종·정비하는 하사관)로 참여, 전투유공표창을 받았다. 연평해전 당시 가슴을 쓸어내린 가족들은 이번에는 깊은 절망과 마주했다.
“지방 출장을 갔다오다가 뉴스로 천안함 사고 소식을 들었어요. 동생이 천안함을 탄다는 이야기를 들었기에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휴대전화를 걸어봤지만 연락이 안되더라고요. 승선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죠. 배를 타고 먼 바다로 나가면 전파가 통하지 않는 곳이 있는데 그런 곳에서는 통화가 안되거든요. 가슴이 쿵하고 떨어지는 것 같고,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어요. 집으로 전화하려고 아무리 발버둥쳐도 전화번호가 기억나지 않았죠. 아내에게 번호를 묻어 제수씨한테 전화를 했더니 그 배에 탔다고 하더군요.”
이씨는 전화를 끊은 후 가슴이 먹먹해 넋을 놓고 있었다. 잠시 후 뉴스 속보에 생존자와 실종자 명단이 올라왔다. 생과 사가 갈리는 순간, 이씨는 눈을 감고 귀를 막았다.
“연평해전에서도 살아왔기 때문에… 그때도 위험하다고 그만두는 게 어떻겠냐고 말렸어요. 그런데 동생이 ‘(연평해전에서) 속초함은 고속정을 호위하는 일을 했기 때문에 알려진 것보다 위험하지 않다. 그리고 군인이니까 그 정도 위험 감수는 당연하다’며 가족을 설득시켰습니다.”

연평해전에서 살아 돌아온 베테랑 군인, 아들에게 자랑스러운 아빠
이 원사는 5남매 중 막내. 형제 중 둘째인 이성기씨에게 이 원사는 동생이자 친구 같은 존재였다. 이 원사가 고등학교 졸업 후 해군에 자원입대하던 날도 이씨가 동행했다고 한다.
“군에 입대하던 날 큰형과 제가 진해까지 데려가 함께 하룻밤 자고 다음 날 들여보냈는데 떼놓고 오기 안쓰러워 발길이 떨어지지 않더군요. 가까스로 돌아서나와 형님과 제가 번갈아 전화를 하며 한참 울었습니다.”
이 원사는 제대 후 직업군인의 길을 택했다. 한때 동료들보다 진급이 늦어 속앓이를 한 적이 있지만 누구에게도 내색하지 않았다. 오히려 동료나 선후배를 챙기는 모범적인 군인이었다. 최원일 함장과도 함께 근무하며 두터운 신뢰를 쌓아 최 함장이 그의 결혼식 주례를 서기도 했다고 한다. 동료들은 그를 “당직이 끝나도 항상 남아서 후배들을 교육시키고 이야기를 들어주는 선배”로 기억했다.
“동생이 평소 천안함 선후배들이 가족 같고 함 내 분위기가 좋다는 말을 자주 했어요. 동생이 근무하는 곳은 함수 쪽이라 함미에 갈 일이 없었을 텐데, 가족처럼 지내던 후배들을 구하러 간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이창기 원사는 아내와의 사이에서 중학생 아들 하나를 두고 있다. 해군의 자녀인 걸 자랑스러워하던 이 원사의 아들은 얼마 전 시험에서 전교 2등을 차지했을 정도로 영특하다고 한다.
“조카가 아버지를 좋아하고 많이 따랐어요. 얼마 후 열릴 발명대회 준비를 함께 한다고 기대에 들떠 있었는데… 사고 소식을 알고 가장 먼저 조카에게 달려갔지만 아무 말도 해줄 수 없어 그냥 꼭 안아주기만 했어요. 아이도 아빠가 실종된 사실을 알고 있지만 속이 깊어 내색을 하지 않고 있어 더 가슴이 아픕니다. 제가 이런데 제수씨는 어떻겠습니까. 함미 인양작업이 시작된 후부터 지금까지 아무것도 못 먹고 있어요.”
아직 차가운 물속에 있는 동생에게 해줄 게 아무것도 없어 미안하고 미안한 형 이성기씨. 그는 동생에게 그동안 차마 하지 못했던 “사랑한다”는 말을 꼭 해주고 싶다고 말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제가 동생에게 잘해준 일이 없는 것 같아 더 힘드네요. 사는 게 바빠 자주 살피지 못했고, 형이라고 해서 살뜰하게 챙겨준 것도 없어요. 이제 와 너무 미안하고 동생이 정말 보고 싶습니다. 아무 걱정 말고 편히 있으라고, 지금 제가 해줄 수 있는 말은 그것밖에 없습니다.”

#스러져간 아까운 청춘, 대한민국이 함께 울다
가장 먼저 시신이 발견된 남기훈 상사(36)는 누구보다 강인한 해군이었다. 초계함 사격통제 분야 1인자로 2006년부터 천안함 사격 통제를 담당하는 ‘사통장’으로 근무했다. 큰형이 7년 전 지병으로 숨진 후에는 맏형 역할을 하며 신장병을 앓는 아버지 병원비를 혼자서 감당했다. 해군아파트 그의 집에는 함정에서 시간이 날 때마다 직접 수를 놓아 결혼 4주년 기념으로 아내에게 선물한 십자수가 걸려 있을 정도로 아내에게 자상한 남편이었다.

천안함에서 음파를 탐지하는 음탐장이던 김경수 중사(34). 그의 아내는 한 인터뷰에서 “남편은 부하들의 부모님 선물까지 챙기던 다정다감한 사람”이라고 회상했다. 김 중사는 지난 설에 후배들이 빈손으로 고향에 가는 것을 염려해 아내와 함께 선물을 마련했다고 한다. 아내는 사고 당일 새벽 6시에 걸려온 남편의 전화를 받지 못한 것이 너무도 후회된다고. 마지막으로 받은 문자가 ‘당직 끝나고 자야 하는데 이상하게 잠이 안온다. 자기 목소리 들으면 잘 수 있을 것 같은데’였다고 한다.

어머니 병원비 마련하려던 효자 아들, 박봉 쪼개 기부하던 반듯한 청년…

차디찬 바닷속에서 스러져간 천안함 장병 46인

해군장병과 유가족은 실종된 8명의 병사들을 위해 현수막을 걸고 실종자 가족을 위로했다.



박경수 중사(29·실종)의 사연도 가슴을 아프게 한다. 2002년 제2연평해전에서 북한군의 총탄을 맞고도 살아 돌아온 용사던 그는 외상 후 스트레스장애에 시달려 한동안 배를 타지 못했다. 이를 극복하고 어렵사리 배에 올랐는데 이번에는 결국 귀환하지 못했다. 그의 어머니 이기옥씨는 “연평해전 때도 고생했던 아들아. 왜 배를 탔니”라며 아직까지 시신이라도 찾길 간절히 바라고 있다. 박 중사는 10년 전 혼인신고만 한 아내와 곧 결혼식을 올릴 계획이었다고 알려져 주위를 더욱 안타깝게 했다.
몸이 불편한 부모를 위해 입대한 박보람 하사(24·실종), 김동진 하사(19)의 사연 역시 심금을 울린다. 박 하사는 다리가 불편한 어머니를 걱정해 해군 부사관으로 임관했고, 입대 직전 어머니에게 14K 금반지를 선물할 정도로 효심이 깊었다. 마지막 휴가를 나와서 “다음 달에 적금 6백만원 타면 어머니 약 지어 드세요”라는 말을 남겼다고. 그의 정기적금 만기는 4월이었다. 그의 어머니는 “너무 작아 새끼손가락에만 겨우 들어가지만 아들이 준 이 반지는 평생 빼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김동진 하사 고향인 부산의 이웃은 그를 “월급을 어머니 치료비와 생활비로 몽땅 드렸던 효자”라고 회상했다. 뇌종양 수술을 받은 어머니의 치료비를 벌기 위해 김 하사는 지난해 9월 부사관으로 입대했다. 자신보다 어려운 사람을 생각하는 마음이 깊어 한 달 용돈 10만원을 쪼개 유니세프와 복지관에 기부했고, 매주 교회에 나가서 봉사를 했다고 한다. 그의 생전 소원은 “어머니와 함께 살 수 있는 집을 짓는 것”이었다.

#천안함 침몰부터 함미 인양까지, 안타까운 기록

차디찬 바닷속에서 스러져간 천안함 장병 46인


해군 1천2백톤급 초계함인 천안함은 3월26일 오후 9시22분, 백령도 서남방 2.5km 해상에서 침몰했다. 승조원 1백4명 가운데 58명이 구조됐고 46명이 실종됐다. 최원일 함장 등 생존자들의 증언과 동영상 등에 따르면 따르면 꽝 하는 폭발음과 함께 선체가 두 동강 났으며 함미 부분이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이 와중에도 생존자들은 다친 동료들을 먼저 탈출시키고, 배를 버릴 때는 실종된 전우들을 위해 구명정과 구명볼을 남겨둔 것으로 알려졌다.
3월28일 오전부터 해군 해난구조대(SSU) 잠수사들은 실종자들을 구조하기 위해 사고 해역에 첫 입수를 했다. 오후 10시31분, 사고 장소에서 북쪽으로 180m 떨어진 지점에서 함미가 발견됐고 생존자가 남아 있을 가능성을 염두, 이튿날 잠수부들이 천안함 함미 틈새로 공기를 주입했다. 하지만 기상 악화로 구조작업은 난항을 겪었고, 3월30일 오후 3시, 해군특수전여단(UDT) 수중폭발팀 소속 한주호 준위가 함수 탐색도중 실신해 곧바로 병원으로 후송됐지만 끝내 목숨을 거둬 주위를 숙연케 했다. 4월2일에는 천안함 수색작업을 돕다가 조업에 복귀하던 저인망 쌍끌이어선 금양98호까지 침몰, 안타까움을 더했다.
군은 4월2일 오전부터 구조작업을 재개했다. 그리고 이튿날 오후, 함미 상사식당 부분에서 남기훈 상사의 시신을 발견했다. 이후 잠수부들은 함미 안쪽으로 진입하려 했지만 수압 등 여러 가지 난관으로 작업이 여의치 않음을 알렸고 실종자 가족들은 이날 오후 밤 기자회견을 열어 구조·수색작업을 중단하고 함미를 인양할 것을 요청했다. 군은 이를 받아들여 4월4일부터 천안함 실종자 구조·수색작업에서 인양 작업으로 전환했다. 4월7일 오후, 인양 작업 중 천안함 함미 기관조정실 부분에서 김태석 상사의 시신이 발견됐다. 이후 현지 기상 상태 악화 등으로 인양작업이 지연되자 유가족은 시신이 유실될 우려가 있음에도 함미 이동에 동의했다. 4월15일 천안함 함미는 바지선 거치대에 올려졌고 이날 오후 4시5분부터 서대호 방일민 이상준 하사 등을 비롯, 36명의 시신이 차례로 수습됐다. 하지만 이창기 원사 최한권 상사 박경수 중사 등 8명의 시신은 끝내 발견되지 않았다.
천안함 사고 원인을 둘러싸고 당초 피로파괴·암초·버블제트·기뢰·어뢰 등 각종 추측이 난무했다. 정부는 원인조사를 위해 한국과 미국 간의 공조체계를 강화했고, 민군합동조사단(합조단)은 사고 원인에 대한 정밀한 분석에 들어갔다. 현재 합조단은 일단 외부폭발에 무게를 두고 그 원인은 ‘선체 아래에서 위로 솟구친 강력한 힘’이라는데 의견 접근을 본 것으로 알려졌다.

#그 외 가슴 아픈 이야기들…
김태석 상사(37) 단 한 건의 장비사고도 일으키지 않은 모범 군인이었고 세 딸의 자상한 아빠였다. 위로 두 형이 모두 해군 출신이며 실종자 수색을 중단하고 선체 인양에 나서고자 했던 실종자 가족 협의회 공동대표 김태원씨가 큰 형이다.
문규석 상사(36) 다양한 함정의 전자장비를 다뤄온 해군 전자 분야의 엘리트다. 문 상사는 천안함 침몰사건 5분 전 딸에게 전화를 했지만 가족들은 미처 마지막 전화를 받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김경수 중사(34) 진급을 해 아내를 기쁘게 하고 싶어 꾸준히 배를 타왔다. 그의 아내는 “남편이 육상근무를 원했는데 내가 ‘진급 때문에 나중에 하라’고 그랬다”며 눈물을 흘렸다.
민평기 중사(34) 후배들에겐 솔선수범하는 선배로, 선배들에겐 책임감 강한 후배로 인기가 많았다. 검도 유단자일 뿐만 아니라 야구, 테니스, 당구 등 못하는 것이 없는 만능 스포츠맨이었다.
안경환 중사(33) 안 중사는 해군의 유도무기 분야 엘리트로 손꼽혔다. 그의 어머니는 아들의 죽음을 믿고 싶지 않아 아들의 사진조차 보지 않고 있다. 그저 바다에 나가 있는 것이라 생각하면서.
김종헌 중사(34) 내연 분야 최고 전문가인 김 중사는 고등학교 3학년 때 교통사고로 부모를 여읜 후 삼남매 중 맏이로 부모 대신 두 동생을 위해 헌신하겠다고 다짐,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입대했다. 결혼 7년 만에 어렵게 얻은 아들이 갓 돌을 지났다.
최정환 중사(32) 자신의 큰 손 때문에 다칠까봐 딸을 안아주지 못했던 천안함의 의무장. 어린 딸을 마음껏 안고 싶다던 꿈을 이루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2008년 대한적십자사 총재 표창을 받기도 했다.
정종율 중사(32) 사고 전 유도탄고속함(PKG)인 서후원함으로 인사 예보를 받은 상태였다. 결혼 후 4년이 지났지만 매일 아내에게 사랑고백을 하며 세 살배기 아들에 이어 아이를 또 갖자던 자상한 남편이었다.
강준 중사(29) 매주 여자친구와 장애아동복지시설에서 자원봉사를 해왔던 그는 고대하던 결혼식을 불과 한 달 앞두고 사고를 당했다. 더구나 최근 육상 근무가 결정돼 이번 출항이 마지막 해상작전이었다.
박석원 중사(28) 추운 밤 근무 때면 함교 외부에서 근무하는 사병을 위해 따뜻한 차를 손수 타줬던 자상한 부사관이었다. 그의 부모는 착한 아들을 잃고 차마 천안함 인양장면을 보지 못했다.
신선준 중사(29) 네 살 때 어머니를 여의고 아버지 손에 컸다. 아들을 잃은 신국현씨(59)는 아들 생일인 4월2일 평택 제2함대사령부에 “식사 1인분을 더 달라”고 해 홀로 아들의 생일을 지냈다.
임재엽 중사(26)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군에 입대한 임 중사는 천안함에서 ‘해결사’로 통했다. 언제나 얼굴에 기름이 묻어 있을 정도로 성실했고, 어려운 일이 생길 땐 누구보다 먼저 나섰다고 한다.
손수민 하사(25) 책임감이 강했다. 손 하사가 천안함 통신체계 암호담당 직별장을 맡은 뒤로 단 한 건의 보안사고도 없었다. 천안함 축구 동아리 회장으로 운동 실력도 남달랐다.
심영빈 하사(26) 그의 별명은 ‘천안함의 천사’였다. 전역일이 한참 지났음에도 형편이 넉넉지 못한 부모님의 짐을 덜어주려고 장기복무를 신청했던 그는 월급을 몽땅 송금하는 효자였다.
조정규 하사(25) 당직 근무가 아닐 때도 일터를 떠나지 않던 조 하사는 초임하사 때부터 소속 부대장 표창을 받을 정도로 모범군인이었고, 자신의 월급으로 형의 학비를 뒷바라지하던 착한 동생이었다.
방일민 하사(24) 휴가 때마다 어머니에게 자신의 음식 솜씨를 검증받던 조리하사로 천안함의 ‘어머니’였다. 좁은 조리실에서도 조리병들이 신명나게 일할 수 있도록 업무분담을 공평하게 해 신임이 두터웠다.
조진영 하사(23) 포상금을 받아 올 여름에는 부산에 홀로 있는 아버지에게 에어컨을 선물하기 위해 열심히 군생활을 했다. 2008년 부사관 능력평가 이론시험에서 만점을 받았다.
차균석 하사(24) 동생에게 늘 ‘커다란 나무’로 의지가 되던 차 하사는 부사관 월급을 받으면 후배들부터 챙기고, 제주 고향집에서 농사지은 감귤을 동료들과 함께 나누던 자상한 수병이었다.
문영욱 하사(23) 2007년 홀어머니를 잃은 문 하사는 슬퍼할 겨를도 없이 학비를 벌기 위해 해군 부사관으로 입대했다. ‘살길을 찾겠다’며 입대한 지 1년 만에 어머니의 곁으로 갔다.
이상준 하사(20) 동의대 특수체육학과를 다니다 입대, 천안함 장병들의 사격 능력을 높이는 데 일등으로 공헌했다. 위로 누나 두 명이 있는 늦둥이 아들 이 하사는 어머니에게 늘 대견한 자식이었다.

서승원 하사(21) ‘기관부 생활반장’으로 통했고, 서 하사를 따르며 힘든 군생활에서 희망을 품는 장병이 많았다. 서 하사 아버지가 그에게 통화를 시도한 사실이 실제 통화를 나눈 것으로 와전돼 실종자 가족들이 희망을 품기도 했다.
서대호 하사(21) 천안함의 가수이자 분위기메이커였다. 힘든 기관실에서 일했지만 얼굴 한 번 찡그리지 않았다. 부모에게 봉급을 보내던 착한 아들이었다.
이상희 병장(21) 5월1일 제대를 앞두고 있었다. 조리병으로 다른 부대에서 전출 요청이 들어올 정도로 요리 솜씨가 좋았지만 천안함의 가족적인 분위기가 좋아 계속 근무했다. 제대 후에는 일본으로 어학연수를 갈 예정이었다.
이용상 병장(22) 갑판병으로 항상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아 지난해 7월에는 함장상을 받았다. 다음 달 1일 전역을 앞두고 천안함에 타기 직전 집으로 보낸 책, 사진과 편지 등이 유품이 됐다.
이재민 병장(22) 후배 조리병들이 쉴 수 있도록 업무를 대신할 정도로 자상한 성격이었다. 5월1일 전역예정으로 “집에 가고 싶다”며 시간이 빨리 가길 빌었던 청년이다.
이상민 병장(22) 사고 이틀 전 아버지에게 안부전화를 했던 이 병장은 5월 제대를 앞두고 있었다. 임무가 상대적으로 쉬운 지원정(YTL)으로 전출 명령이 났지만 남고 싶다며 계속 천안함에서 근무했다.
이상민 병장(21) 1남3녀 중 막내로 4월18일은 아버지의 생일이었다. 그동안 받은 월급을 고스란히 부모에게 드렸던 효자였고, 집안의 희망이었다. 6월 제대 예정이었다.
강현구 병장(21) 금지옥엽 외아들로 부모에겐 다시없는 희망이고 축복이었다. 늦은 밤이면 승조원들을 위한 야식을 준비해 동료들과의 우의가 깊었다.
정범구 상병(22) 천안함 식당에서 항상 독서를 했다. 할머니에게 입버릇처럼 “배를 타고 나가면 물이 그렇게 아름다울 수 없어요. 다들 잘해 줘서 군대에 남고 싶어요”라고 말했던 그는 홀어머니를 남겨둔 채 그토록 사랑하던 바다에서 짧은 생을 마쳤다.
김선명 상병(21) 수년 전 여읜 어머니 제사를 위해 휴가를 기일까지 연기하기도 했고, 휴가 때면 건축일을 하는 아버지를 도왔다. 효성이 지극하고 동생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던 든든한 장남이었다.
박정훈 상병(22) 작업 때문에 얼굴에 항상 기름이 묻어 있었던 그는 힘든 작업에도 활력이 넘쳐 승조원들 사이에 웃음 전도사로 통했다. 그의 어머니는 “엄마 표정만 봐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아는 효자였다. 그래서 나는 울 수 없다”고 말했다.
안동엽 상병(22) 뼛속까지 군인이었지만 함정이 기지에 정박해도 배 위에서 생활해야 했기에 “땅을 밟고 싶다”는 말을 자주 했다. 어머니 김영란씨(54)는 “이제 영원히 땅 위에서 데리고 있을 수 있겠다”며 눈물지었다.
김선호 상병(20) 입대 전 가족들에게 “전역하면 꼭 대학에 입학하겠다”고 약속했던 그는 끝내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함정근무 기간 6개월을 모두 채우고, 육지로 갈 수도 있었지만 “가족적인 천안함이 정말 좋다”며 배에 남았다.
조지훈 일병(20) 어려운 가정형편에도 열심히 공부해 인하공업전문대 선박해양시스템학과에 진학했다. 종종 휴대전화로 동료들과 함께 사진을 찍어 안부 문자를 보내곤 했다.
장철희 이병(19) 입대한 지 70여 일, 천안함에 승선한 지 8일 만에 사고를 당했다. 출항 전 할머니가 편찮다는 소식에 조용히 눈물을 훔치던 장 이병은 군 복무 틈틈이 공부를 하던 성실한 청년이었다.
최한권 상사(실종·38) 사건 당시 함수에 있던 생존 장병들이 비상조명등 불빛을 보면서 탈출할 수 있었던 것은 최 상사의 치밀한 정비 덕분이었다. 최 상사는 늘 아버지와 같이 엄격하면서도 따뜻한 선배로 통했다.
장진선 하사(실종·22) 소형선박조종사 등 국가기술자격증 취득을 준비하던 학구파. 바다로 떠난 그의 미니홈피 제목은 ‘기다려라 다시 돌아온다’이다.
박성균 하사(실종·21) 지난해 9월 해군 부사관 222기로 입대해 천안함이 첫 근무지였던 박 하사는 틈틈이 전문서적을 공부할 정도로 자기계발에 열정적이었다. “인양 끝나고 함미를 열면 짠하고 나올 거지? 적당히 하고 빨리 나온나” 친구들은 그의 미니홈피에 이렇게 썼다.
강태민 일병(실종·21) 함정 근무기간 6개월을 모두 채웠지만 함장에게 잔류 요청을 하고 천안함에 남았다. 조선해양공학도였기에 배를 끔찍이 좋아하던 청년은 꿈을 키우던 바다에서 사고를 당했다.
정태준 이병(실종·20) 부모에게 힘이 되는 든든한 아들이었다. 어머니의 투병으로 집안형편이 어려워지자 휴학 후 경제적 부담을 덜어보겠다며 입대했다.

우리 가슴에 귀환한 46인 장병, 당신을 잊지 않겠습니다.

차디찬 바닷속에서 스러져간 천안함 장병 46인


여성동아 2010년 5월 557호
좋아요

Print Edition

How to be a woman

생각하는 여자가 읽는 매거진! 지금 바로 만나보세요.

이번호목차이번 호 구입하기

독자알림

더보기

Follow up on SNS

여성동아 에디터가 핫뉴스, 최신 트렌드와 이벤트를
실시간으로 전해 드립니다.

  • 여성동아 페이스북
  • 여성동아 인스타그램
  • 여성동아 유튜브
  • 여성동아 네이버포스트
  • 여성동아 네이버TV