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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마라토너 이봉주 ‘42.195’ 가슴에 새기고 인생 2막 시작

글 정혜연 기자 사진 조영철 기자 동아일보 사진DB파트

입력 2010.04.16 11:49:00

두 다리로 20년 동안 지구를 네 바퀴 돌았다. 44번의 도전, 41번의 완주. 지난해 은퇴를 선언한 마라토너 이봉주의 영광스러운 기록이다. 누구도 깨기 힘든 대기록을 세운 뒤 마라톤 인생을 아름답게 마무리한 이봉주. 무대에서 내려온 그는 가족과 모처럼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행복한 마라토너 이봉주 ‘42.195’ 가슴에 새기고 인생 2막 시작


살면서 단 한 번이라도 무엇인가에 미쳐본 적 있는가. 41년이라는 세월을 살며 그중 절반을 마라톤과 함께한 이봉주야말로 이 질문에 “예”라고 떳떳하게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이다. 매일 새벽 다섯 시면 일어나 뛰었고 잠자리에 들 때까지 오직 마라톤만 생각하며 살았다. 신혼여행을 가서도 유럽의 새벽 거리를 홀로 달렸다. 날씨가 좋든 나쁘든, 대회가 크든 작든, 예기치 못하게 부상을 입던 순간에도 그는 자신과의 싸움을 멈추지 않았다. 그렇게 뛴 거리가 지구 네 바퀴는 족히 넘는다.
한국 마라톤계를 이끌어온 이봉주는 2009년 10월, 제90회 전국체육대회 마라톤 남자 일반부 1위를 기록한 뒤 영광스럽게 마라톤 인생을 마무리 지었다. 이후 그는 생애 처음으로 휴식시간을 갖고 있다. 아내 김미순씨(40)와 함께 두 아들 우석(7)·승진(6)의 재롱부리는 모습을 보며 소소한 행복을 만끽하고 있는 이봉주. 지난 3월 중순, 자신의 자서전 ‘봉달이의 4141’ 출간을 기념해 서울 여의도에서 방송 출연을 마치고 나오는 그를 만났다.
생각보다 작은 체구에 깔끔한 정장을 차려입은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상상하던 마라토너의 이미지와 달랐지만 인터뷰 장소를 향해 함께 걸으며 그가 마라토너였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평생 마라톤을 해온 사람 특유의 가볍고 빠른 발걸음이었다. 은퇴를 했지만 몸에 밴 발걸음은 그가 국내 최고의 마라토너였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었다.

농사짓던 초등학생 투잡족, ‘국가대표 마라톤 선수’를 꿈꾸다

이봉주는 국내 마라톤계에 다시없을 기록을 보유한 선수다. 44번의 마라톤 출전 중 41번 완주에 성공했고, 한국 최고기록(2000년 도쿄국제마라톤대회 2위·2시간 7분 20초)을 보유하고 있으며, 아시안게임 2연패(98년 방콕·2002년 부산) 달성, 4번의 올림픽 출전(96~2008년)과 완주 기록을 갖고 있다. 지난 세월을 돌이켜보며 이봉주는 “어린 시절 국가대표를 꿈꾸긴 했지만 이 정도까지 해내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며 겸손하게 말했다.
“전형적인 시골아이였던 제가 가슴에 태극마크를 달고 마라톤을 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영광이죠. 어린 시절 꿈보다 더 많은 걸 이루고, 얻었다고 생각해요(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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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고향은 사방이 탁 트인 충남 천안의 명우리 내 시골 마을이다. 시골이라면 하나쯤 있을 법한 강이나 냇가 하나 없는 곳에 야트막한 앞산 하나만 있었을 뿐이었다. 앞산은 어린 시절 이봉주의 놀이터이자 일터이기도 했다. 할아버지 때의 가난을 물려받은 터라 2남2녀인 그의 형제 모두 자기 몫의 일을 해야 했다. 막내인 그도 예외는 아니었다. 초등학생 시절부터 농사를 지었는데 그때는 동네 아이들 거의가 학교 다니며 일하는 ‘투잡족’이었다. 그렇게 놀며 일하며 운동의 기본기를 다졌다.
“집에서 초등학교까지 걸어서 30분이 걸렸는데 아침 먹고 동네 아이들끼리 모여 학교까지 달리기 시합을 했죠. 그때 제가 나이 많은 형들을 제치고 이기는 경우가 많았어요. 지금 생각해봐도 지구력 하나는 타고난 것 같아요. 하지만 짝발에 평발인지라 ‘단거리 달리기’에는 약해서 초·중·고 통틀어 3등까지 주는 공책 한 권조차 받아본 적이 없어요.”
어린 시절 그는 운동이라면 다 좋아해 축구·야구·복싱 등 여러 종목을 기웃거렸다. 하지만 모두 돈이 있어야 할 수 있는 운동이었기에 쉽게 뛰어들지 못했다. 그러던 중 운동선수가 될 기회가 찾아왔다. ‘목장 주인’이라는 꿈을 안고 입학한 천안농고에서 친구를 따라 육상부에 들어가게 된 것. 그의 말에 따르면 “말이 육상부였지 코치도 없고 체계적인 훈련 프로그램도 없는 특별활동반 수준”이었다고. 별생각 없이 시작한 육상이었는데 그는 “의외로 할 만했다”며 당시의 기억을 더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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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비도 아낄 겸 집에서 학교까지 대략 12km 되는 거리를 뛰어다니기 시작했어요. 처음에는 한 시간 반이 걸렸는데 1년 지나고 보니 40분대로 줄더라고요. 한 선배의 권유로 인천체육전문대학에서 훈련을 시작했죠. 그때 실력이 확 늘었어요. 예산에 사는 삽교고등학교 선배가 저를 보고 자기 학교 육상부로 오라는 거예요. 장학생으로 갈 수 있다고 해서 1년 꿇고 입학했죠. 집에서는 난리가 났어요. 형이 레슬링을 하다가 형편상 그만두고 학교도 제대로 졸업 못했기 때문에 저마저 그렇게 될까봐 걱정하셨던 거죠. 다행히 형이 제 편이 돼줬어요.”
우여곡절 끝에 전학했지만 곧 또 다른 시련이 닥쳤다. 첫 대회에서 우승을 하지 못하자 팀이 해체된 것.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입학한 그에게는 청천벽력 같은 소리였다. 육상선수도, 학생도 아닌 애매한 신분으로 암흑기를 보내고 있을 때 홍성 광천고에서 연락이 왔고 다행히 달리기를 계속할 수 있었다. 대학 진학이 걸린 전국체육대회에서 목숨을 걸고 뛰었고, 마침내 동메달을 땄다. 당시 금메달은 강원도 대표 황영조였다. 이봉주는 다행히 서울시청에 입단해 서울시립대를 다니며 마라톤 인생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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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봉주를 놓고 이야기할 때 빠지지 않는 사건이 있다. 96년 애틀랜타올림픽에서 3초 차이로 아깝게 은메달을 차지한 것. 늘 괜찮다고 말하지만 아쉬움이 남는 건 사실이다.
“당시에는 군대 면제 기쁨이 컸기 때문에 메달 색깔에 연연해하지 않았어요. 하지만 약간 아쉬운 건 있었어요. ‘전략을 좀 더 치밀하게 짰다면 이길 수 있었을 텐데…’ 싶죠. 그보다 2000년 시드니올림픽이 더 아쉬워요. 바로 몇 달 전에 출전한 도쿄마라톤대회에서 한국신기록을 세울 정도로 컨디션이 좋아 자신감도 있었거든요. 처음으로 어머니, 형님, 매형까지 시드니로 날아와 응원해줬는데 앞에서 선수들이 무더기로 넘어지는 바람에…. 암 투병하며 고향에서 아들을 응원하셨을 아버지를 생각하면 정말 아쉬운 대회였죠.”
시드니올림픽에서 이봉주는 19km 지점에서 앞서 달리던 네댓명의 선수들이 무더기로 넘어지면서 덩달아 넘어졌다. 일부는 들것에 실려 나갈 정도로 큰 부상을 입었고 그도 다리에 부상을 입었지만 완주해야 한다는 일념으로 대열에 합류했다. 그러나 이미 페이스를 잃은 뒤였고, 허벅지 통증이 심해져 선두그룹과의 거리를 좁힐 수 없었다. 결국 24위를 기록했다. 이봉주는 당시를 회상하며 “시드니올림픽이 금메달을 딸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다. 이후부터 약간씩 내리막길에 접어들고 있음을 느꼈다”고 말했다.
올림픽 금메달은 하늘이 정하는 것이라고 한다. 이봉주는 올림픽 금메달과 인연은 없었지만 그보다 더 큰 행운을 얻은 사람이다. 어렵다는 ‘첫사랑과의 결혼’에 성공했기 때문. 아내 김미순씨는 어떤 상황에서도 그가 마라톤을 멈추지 않도록 도운 은인이다.
아내와의 첫 만남은 94년, 황영조의 소개로 이뤄졌다. 당시 이봉주는 코오롱팀에 입단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동료들과 서먹하게 지내던 때였다. 전국체육대회를 통해 알고 지내던 황영조가 그나마 가장 가까운 사람이었다. 그는 이봉주의 긴장을 풀어주고자 코치에게 허락을 구해 그의 고향인 강원도로 휴가를 떠났다.

행복한 마라토너 이봉주 ‘42.195’ 가슴에 새기고 인생 2막 시작

마라톤 인생 20년을 정리한 책 ‘봉달이의 4141’을 출간해 지난 3월 출판기념회를 가진 이봉주. 두 아들과 함께 참석해 눈길을 끌었다.



“영조의 중학교 동창 한 명이 친구를 데리고 왔는데 처음 보는 순간 반해버렸죠(웃음). 이상형이 청순하고 순박한 간호사였는데 딱 들어맞았거든요. 그때 전국체전 두 차례 우승, 호놀룰루국제마라톤 우승 등으로 얼굴이 조금 알려진 상태였는데 아내는 절 모르더라고요. 운동에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이었어요.”
그때부터 아내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한 프로젝트에 들어갔다. 그의 생일에 맞춰 서프라이즈 파티도 해주고, 훈련캠프에서 강원도 삼척 아내 집까지 오가기 위해 처음으로 차도 샀다. 일년간 그렇게 오갔지만 아내는 쉽게 마음을 열어주지 않았다. 하지만 크고 작은 대회를 끝내면 어김없이 자신을 보러 오는 이봉주를 보고 마음을 바꾼 아내는 95년 동아국제마라톤대회 생중계를 통해 그가 우승하는 모습을 보고 축하 메시지를 전했다.
본격적으로 사귀기 시작한 이후로는 아내의 기다림이 시작됐다. 때는 7월의 무더운 여름날, 처음으로 아내가 이봉주의 팀 숙소를 찾아왔다. 하필이면 오후 훈련이 늦게 끝나는 바람에 아내는 숙소 근처 공원에서 무려 일곱 시간 동안 기다려야 했다. 훈련 일정이 계획대로 끝나주면 좋으련만 그렇지 못한 날이 더 많았다. 그렇게 8년을 연애했고 2002년 4월 결혼에 골인했다.
“저도 아내가 첫사랑이지만 아내에게도 제가 첫사랑이에요. 매우 드문 케이스죠. 제일 고마운 순간이요? 지금까지 늘 한결같이 제 옆에 있어준 것. 그리고 두 아이를 낳아 잘 키워준 게 너무 고마워요.”

가족과 못다 한 행복 누리며 제2의 인생 준비
요즘 그는 집에서 아이들과 놀아주며 20년 만의 휴식을 즐기고 있다. 이봉주의 두 아들은 아빠 엄마의 장점만 뽑아 태어난 듯, 눈에 띄는 꽃미남이라 누구에게나 예쁨을 받고 있다. 올해 초등학교에 입학한 첫째 아들은 벌써부터 인기인이 됐다고. 아이들 칭찬을 하자 그는 쑥스러워하며 “아내를 닮아서 다행이다”며 웃음 지었다. 마라토너의 아들들이니 벌써부터 운동에 소질을 보일 것 같았다. 하지만 그는 예상외로 “영 소질이 없어 보인다”고 말했다.
“어린이 축구 교실에 보냈는데 공은 안 차고 벌레나 잡으러 다니더라고요(웃음). 나중에 운동을 하고 싶다면 시킬 생각이지만 지금 꼭 뭐가 되라고 강요하고 싶지는 않아요. 그냥 아이들이 좋아하는 걸 하면서 행복하게 살면 좋겠어요.”
지난해 공식적으로 은퇴를 선언했을 때, 가장 기뻐한 사람은 아내였다. 그동안 이봉주가 얼마나 힘들게 훈련했는지 가장 잘 알고 있기에 이제는 짐을 내려놓고 쉬면서 인생을 즐기길 바랐다는 것. 물론 한편으로는 남편이 뛰는 모습을 보지 못하게 돼 조금 아쉬워하기도 했다고 한다. 앞으로 대회에서 이봉주가 뛰는 모습을 볼 수는 없지만 마라톤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서든 그를 볼 수 있을 것 같다.
“지난 연말 삼성전자 육상부와 계약이 끝나면서 오인환 감독님이 코치직을 제의했어요. 그런데 당분간 쉬고 싶어서 거절했죠. 아이들과 좋은 추억을 만들고 싶었거든요. 또 다른 뜻은 마음속에 품은 꿈이 있기 때문이에요. 스포츠 행정가의 길을 가고 싶은데 마라톤을 하느라 공부를 못했기 때문에 이제부터 해보려고요. 20년 전 육상 시작할 때 ‘매일 다섯 시간씩 훈련하자’고 다짐했는데 그 정신력이면 못 이룰 리 없다고 생각해요.”
언제까지나 후배들에게 본보기가 되는 선배로 남고 싶다는 이봉주. 은퇴 후 지난 넉 달 동안 그는 지난 20년 마라톤 인생을 정리한 책 ‘봉달이의 4141’을 출간했다. 마흔하나의 ‘봉달이’ 이봉주가 마흔한 번의 마라톤을 완주하면서 겪었던 마흔한 가지 이야기가 담겨 있다.

여성동아 2010년 4월 55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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