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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파워우먼

유쾌한 여자 혜은이 홍지민 이유 있는 수다 한 판

“여자만 아는 괴로움, 여자들끼리 풀어버려요”

글 오진영 사진 조영철 기자

2010. 03. 16

가수 인생 35년 만에 처음 뮤지컬에 도전한 혜은이를 배우 홍지민과 함께 만났다. 뮤지컬 ‘메노포즈’에서 갱년기 증상으로 고민하는 중년 여인으로 분해 함께 공연하는 두 사람이 여자, 그리고 딸로서의 삶을 진솔하게 이야기했다.

유쾌한 여자 혜은이 홍지민 이유 있는 수다 한 판


“영영 오지 말았으면 싶은, 나와는 상관없는 이야기면 좋을 것 같은, 그러나 언젠가 올 수밖에 없는 여자의 그 시기에 대한 뮤지컬.”
한 블로거가 올려놓은 ‘메노포즈’ 관람기의 한 구절처럼 메노포즈(폐경)는 모든 여성이 40대 중반에서 50대가 되면 겪지만, 굳이 말하고 싶어 하지 않는 주제다. 그런데 이 폐경을 소재로 한 뮤지컬 ‘메노포즈’가 모처럼 공연장을 찾은 여성 관객들로부터 뜨거운 공감을 얻고 시원한 박장대소를 이끌어내 화제다. 젊은 관객 위주인 뮤지컬 시장에 중년 관객 돌풍을 일으키고 있다.
2005년 한국 초연 이후 세 번째로 찾아온 2010년 ‘메노포즈’(4월4일까지 공연)는 가수 혜은이(54)의 첫 뮤지컬 출연으로 더욱 관심을 모은다. 70∼80년대 최고 인기 스타로 군림하던 그는 ‘메노포즈’에서 ‘한물 간 연속극 배우’ 역을 맡았다. 2월 초 막을 올려 공연 일주일을 넘긴 혜은이를 서울 두산아트센터 연강홀에서 만났다. 드라마 ‘온에어’ ‘스타일’ 등에 출연하며 본격적으로 이름을 알렸으나 사실 뮤지컬 배우가 본업인 홍지민(37)도 자리를 함께했다. 2007년에 이어 두 번째로 ‘메노포즈’에 출연하는 홍지민은 건망증과 외로움에 시달리는 ‘전문직 여성’을 연기한다.

“첫 뮤지컬 무대, 공연 한 달 앞두고 포기할 뻔”
혜은이가 누구인가? 어떤 이는 혜은이를 ‘70년대의 이효리’라고 표현했지만, 그것으로 부족하다. 그토록 오랫동안 세대 구분 없이 온 국민의 사랑을 한 몸에 받은 이는 혜은이가 유일하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야말로 ‘천하의 혜은이’인데, 그런 그도 이번 뮤지컬 공연을 앞두고는 처음으로 생방송 무대에 오르는 신인가수처럼 잔뜩 겁이 났다고 털어놓는다.
“연습을 하면서 너무 힘들었어요. 무대에 오를 자신이 없고, 내가 과연 해낼 수 있을지 너무 걱정스러운 나머지 연습을 한 달 더 해서 3월에 합류할까 하는 고민도 했어요. 조금 서투르고 실수하더라도 다른 배우들과 같이 시작하는 게 낫겠다 싶어 2월 무대에 섰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용기를 내기 잘한 것 같아요.”
공연이 시작되기 전 혜은이가 어찌나 힘들어하던지 대선배의 뮤지컬 걸음마를 지켜보는 홍지민도 덩달아 마음을 졸였다고 한다.
“하도 걱정을 하셔서 다른 배우들까지 조마조마했다니까요. 뮤지컬 신인이라면서 연습 때도 어찌나 일찍 오시는지, 솔직히 저는 두 번째 공연이라 좀 살살 하려고 했는데 선생님 때문에 농땡이를 부리지도 못했어요(웃음).”
2월6일 첫 공연이 얼마 남지 않았던 1월 중순경, 제작진에게 도저히 못하겠다는 말을 전하고 연습에 불참했다고 하니 뮤지컬 무대 데뷔를 앞둔 혜은이의 스트레스가 얼마나 심각했는지 짐작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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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생각에 계약금도 받지 않고 연습을 시작했거든요. 공연에 임박해서 제작진에게 못하겠다고 말하고 종일 집에 틀어박혀 고민을 했어요. 어린 나이도 아닌데 한번 결정한 일에는 책임을 져야 한다는 생각으로 마음을 고쳐먹고 간신히 다시 연습실에 나왔는데, 지민이가 그러는 겁니다. ‘선생님, 될 때까지 연습 맞춰드릴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라고요. 후배들이 격려해주고 밀어주지 않았으면 무대에 못 올랐을 겁니다.”
열아홉 살에 데뷔해 30년 넘게 선 무대였지만 뮤지컬은 이때까지 해온 솔로 가수 공연과 전혀 달라 힘든 점이 많았다. 단독 콘서트 때는 모든 게 그의 노래에 맞춰지지만, 뮤지컬 무대에서는 여러 배우가 화음을 맞춰 노래해야 한다. 크고 작은 스트레스로 힘들어하는 그에게 홍지민은 지속적으로 격려 문자를 보내 용기를 북돋워줬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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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배들의 격려에 힘입어 어렵게 무대에 오른 혜은이는 관객들의 열광적인 반응 에 용기를 내 조금씩 자신감을 되찾아가는 중이다. 홍지민은 혜은이가 괜한 엄살을 부렸던 거라고 말한다.
“처음 함께 공연한 날 보니까 펄펄 날아다니시던 걸요. 35년 관록이 정말 다르구나 절감하면서 우리 12~13년 경력의 나부랭이들은 깨갱하고 두 손 들었어요(웃음).”
혜은이가 손닿을 만큼 가까운 무대에서 노래하고 춤춘다는 사실만으로 객석이 술렁이고 그의 동작 하나하나에 관객이 몰입하는 게 홍지민에게까지 느껴졌던 것.
극중 혜은이가 맡은 역할은 과거의 인기를 후광처럼 두른 채 우아하게 늙어가려고 안간힘을 쓰는 중년의 여배우다. 객석에 불이 꺼지고 무대에 불이 켜진 뒤 가장 먼저 등장해 던지는 대사는 “왕년에 화장품 모델 했던 나인데, 동네 찜질방 전단지에 나가라니!” 하는 푸념이다. 혜은이 아닌 그 누가 이 대사를 그토록 실감나게 전달할 것인가.

“차를 몰고 가다 갑자기 벽을 들이받고 싶었던 적도…”
‘메노포즈’에는 모두 네 명의 여자가 등장한다. 혜은이가 연기하는 ‘연속극 배우’(더블 캐스팅 이윤표)와 홍지민이 맡은 ‘전문직 여성’(더블 캐스팅 최혁주) 외에 주책 맞지만 순진한 ‘전업 주부’(이영자·김숙 더블 캐스팅)와 전원생활을 하는 채식주의자 ‘웰빙 주부’(김현진)가 있다. 백화점 란제리 코너에서 브래지어를 놓고 실랑이를 벌이는 이 여자들은 각기 전혀 다른 인생을 살아왔다. 겉만 봐서는 비슷한 점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을 것 같은데, 모두 폐경을 전후해 다가온 갱년기 때문에 속병을 앓고 있다. 그러고는 이내 서로에게 속내를 털어놓는 게 작품의 줄거리다.
혜은이는 2010년 ‘메노포즈’에 캐스팅된 여배우 7명 중에서 유일하게 갱년기를 경험했다. 그의 대사 중 “그런 눈으로 보지 마. 날 이해 못해. 남자들은 알 수 없어. 그 누구도 이해 못해, 괴로운 불면증. 아침 해가 떠오르네, 괴로운 불면증”이란 대목이 있는데, 혜은이는 실제로 우울증을 겪은 적이 있다. 최고의 자리에서 누리던 인기가 썰물처럼 사라져버린 후 맞은 40대에 설상가상 개인사로 어려움이 많았다. 남편 김동현이 사업에 실패한 바람에 떠안은 엄청난 빚을 청산하고자 돈 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해야 했다. 그 시절 아들의 돼지저금통에서 돈을 꺼내며 펑펑 울기도 했다. 딸과 사위의 고생을 가슴 아프게 지켜보던 친정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얼마 안 돼서는 자궁적출수술까지 받고 심각한 우울증을 앓았다.
“지금은 다 지난 일이지만, 당시에는 정말 많이 힘들었어요. 한밤중에 자다가 일어나 울고, 새벽에 바깥에 뛰쳐나가 울고, 집 안이 환한 게 싫어서 불을 다 꺼놓고 지내기도 했어요. 자동차를 운전하고 가다 문득 벽을 들이받고 싶을 때도 있었어요. 그걸 아무한테도 말 못하고 혼자 아파하면서 보냈는데, 지금 돌이켜보면 누군가 이야기 나눌 상대만 옆에 있었어도 한결 위로가 됐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지금껏 그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고 있는 남편 김동현은 ‘메노포즈’ 공연 첫날, 출연배우 전원에게 꽃바구니를 하나씩 보냈다. 김동현의 자상한 외조 덕분에 그날 공연장 대기실은 감탄의 도가니였다고 한다.
홍지민에게는 폐경이 아직 먼 얘기다. 결혼 5년째인 그가 지금 가장 바라는 건 ‘엄마 되기’다. 96년 뮤지컬 배우로 데뷔한 이후 공연과 드라마, 영화 등에 꾸준히 출연했지만 그의 이름을 널리 알린 것은 2008년의 ‘온에어’다. 사람들이 ‘저렇게 연기 잘하는 배우가 어디 있다 이제 나왔나’ 하며 놀라는 사이 홍지민은 더욱 고삐를 당겨 뮤지컬 무대와 TV 드라마를 종횡무진하며 특유의 에너지를 뿜어냈다. 2009년 ‘한국 뮤지컬 대상’에서 ‘드림걸즈’로 여우주연상을 거머쥐며 뮤지컬 연기 경력의 정점을 찍은 그는, “지금 아이가 와준다면 가장 완벽한 타이밍”이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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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초기에는 배우로 자리를 잡기 전에는 아이를 갖지 말자고 생각했어요. 저는 사실 서울예대 연극과에 진학하기 전에 전문대학에서 유아교육을 전공해 교사 자격증도 있답니다. 그런데 그때는 아이들을 별로 예뻐하지 않았어요. 그래서 전공도 바꾼 건데, 지금은 엄마 될 때가 됐는지 아기가 정말 예뻐요. 더욱이 ‘온에어’에 함께 출연했던 송윤아씨가 결혼하고 바로 임신했잖아요. 얼마나 자랑을 하면서 저에게도 빨리 아기 가지라고 하는지, 부러워 죽겠어요(웃음).”
‘메노포즈’에서 홍지민이 맡은 역할은 사회적으로는 성공했지만 늘 일에 쫓기느라 가정을 돌볼 여유가 없어 남몰래 공허함과 외로움에 시달리는 여성이다. 극중에서처럼 깜빡깜빡 잊어버리는 건망증이나 속옷이 축 젖어버릴 만큼 열이 나는 증상이야 아직 체험해본 적 없는 그이지만, 엄마와 통화하는 장면은 마음에 진하게 와 닿는다고 한다. 주름살과 흰 머리가 많고, 살집이 늘어진 갱년기 여성도 힘들 때면 언제라도 엄마 품에 안기고 싶은 딸인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제가 딸 셋 중 막내인데 친정엄마가 혼자 창원에 사세요. 진작부터 제가 모시려고 했는데, 노인대학 민요강사로 활동하시고 계셔서 엄마가 망설이시는 거죠. 엄마 연세가 올해로 79세예요. 3년 전 제가 이 작품 처음 할 때만 해도 느끼지 못했는데, 이번에는 ‘아픈 데 있으면 괜찮다고 하지 말고 빨리 얘기해’ 하며 엄마랑 통화하는 대목에서 자꾸 눈물이 쏟아져요.”

“시어머니·친정어머니 모두 모시고 살고 싶어요”
얼마 전에는 친정어머니가 자식들에게 알리지 않은 채 백내장 수술을 받은 걸 뒤늦게 알고 홍지민의 마음이 미어졌다고 한다. 남편과는 이미 시어머니와 친정어머니를 함께 모시고 살기로 뜻을 모았고, 차일피일 창원 떠나오기를 미루던 친정어머니도 마침내 올가을까지는 딸네 집으로 오시기로 약속을 했다.
“시아버님이 남편 태어나기 전에 돌아가셔서 시어머님이 혼자 사시며 남매를 키우셨어요. 인물이 훤하셔서 재혼을 하려고 마음먹었으면 얼마든지 하셨을 텐데 말이에요. 우리 신랑이 시어머니 닮아 잘생겼다니까요(웃음). 시어머님 뵈면 같은 여자로서 마음이 짠하고 자식 된 도리로 잘 모셔야 한다고 늘 생각해요. 시어머님도 제가 배우로 활동하는 걸 좋아하시고 많이 도와주세요. 앞으로 두 어머니 모시고 살면서 저도 엄마가 된다면, 2010년은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는 한 해가 될 것 같아요.”
탱글탱글한 피부에 눈이 맑은 소녀는 세월이 흘러 새치가 희끗희끗한 부스스 파마머리 아줌마가 된다. 그리고 또 시간이 흘러 자식들이 걱정할까봐 아프다고 말도 못하는 늙은 엄마가 된다. 다 내 이야기 같고 내 엄마 이야기 같은 건, 뮤지컬 ‘메노포즈’만이 아니다. 그 무대 위에서 열정적으로 연기하는 배우들의 삶과 바람도 우리의 그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그들도 여자이고, 딸이니 말이다. 때로는 강렬하게 때로는 구슬프게 노래하는 혜은이와 홍지민, 두 여자를 덥석 끌어안고 후련하게 웃고 또 울고 싶어지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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