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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계속된다

가방 디자이너로 변신한 임상아 뉴욕 성공 스토리

“까다로운 뉴요커 매료시킨 나만의 비결, 그리움 대신 행복 알게 해준 남편 그리고 딸”

글 이설 기자 사진 홍중식 기자, 살림Life 제공

2010. 01. 18

'90년대 중반 가수, 배우, MC로 활약하던 임상아가 성공한 백 디자이너로 돌아왔다. 연예인 생활에 회의가 들 때 과감히 던진 승부수. 뉴욕에서 지쳐 쓰러져도 다시 일어나 도전해 성공의 꿈에 한 발짝 다가섰다. 더 깊고 단단해진 그를 만났다.

가방 디자이너로 변신한 임상아 뉴욕 성공 스토리


“내 삶을 그냥 내버려둬. 더 이상 간섭하지 마~. 내 뜻대로 살아갈 수 있는 나만의 세상으로 난 다시 태어나려해~.”
96년 임상아가 부른 ‘뮤지컬’. 15년이 지났지만 많은 사람이 아직도 이 노래를 기억한다. 뮤지컬처럼 흥겨운 멜로디와 얼굴도 몸매도 가창력도 시원하던 여가수. 당시 임상아는 참신한 이미지로 단숨에 인기스타로 떠올랐다. 그가 은퇴 이후 처음으로 한국 팬을 찾았다. 미국 뉴욕에서의 생활을 담은 책 ‘SANG A 뉴욕 내러티브’(살림Life)의 출간을 맞아서다.
“마음과 달리 그간 한국에 자주 다녀가지 못했어요. 공식적인 자리에서 팬들과 만난 적은 한 번도 없고요. 거의 잊혔을 거라 생각했는데, 많은 분이 기억해주시고 환영해주셔서 감개무량합니다.”
그가 뉴욕으로 떠난 것은 98년. 앨범 3장을 내고 뮤지컬과 연기활동을 병행하며 활발히 활동하던 때였다. 돌연 종적을 감춘 지 10년. 스물여섯의 스타는 서른여섯의 세계적인 신예 백 디자이너이자 엄마가 됐다. 지난 12월10일 서울 압구정동에서 만난 그는 차분하지만 열정적으로 살아온 이야기를 들려줬다.

#도전 ‘세계 유행의 중심’ 뉴욕에서 한판 승부를 겨루다!
“계획적으로 떠난 것은 아니었어요. 3집 앨범작업을 끝내고 잠시 뉴욕에 머무르게 됐는데 딱 잘라 말할 수 없는 답답함이 저를 짓눌렀어요. 미련 없이 모든 것을 접고 뉴욕에서 새 인생을 시작했죠. 그렇게 하다보니 이곳에서 성공하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어요.”
성공을 바랐지만 무엇을 해야 할지는 몰랐다. 막연한 꿈이었다. 일단 공부를 시작했다. 연기·춤·노래·영화…. 좋아하는 것, 잘할 수 있는 것을 하다 보니 눈 돌릴 곳이 보였다. 뉴욕은 레스토랑·패션·엔터테인먼트·금융을 중심으로 돌아갔다. 그중 자신 있는 것은 레스토랑과 패션. 음식을 곧잘 하던 터라 일단 요리에 도전했지만 성급한 판단이었다. 4개월 만에 요리학교를 나왔다. 패션으로 방향키를 틀었다.
그는 어릴 때부터 옷을 좋아했다. 초등학교 시절 ‘엘덴 아동복’ ‘김민제 아동복’을 구경하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고, 대학생 때는 그가 걸친 모터사이클 가죽점퍼와 골반 청바지의 출처는 후배들에게 호기심 대상이었다. 연예계에 데뷔한 뒤에도 무대의상과 스타일을 직접 챙겼다. 그런 그가 숱한 스타 디자이너를 낳은 파슨스스쿨을 선택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가방 디자이너로 변신한 임상아 뉴욕 성공 스토리


“파슨스에서 공부하며 핸드백 브랜드를 만들겠다는 꿈을 키웠어요. 핸드백을 좋아했고, 액세서리 비즈니스로 패션사업을 시작하고 싶었죠. 틈새시장을 고민하다 보니 특수 고급 가죽을 이용한 특피 핸드백이 떠올랐어요. 그것이 지금 사업의 발판이 됐죠.”
졸업 후 경험한 인턴 9개월과 어시스턴트 1개월은 ‘이러다 죽겠다’ 싶을 만큼 고된 시간이었다. 교실 안 지식과 실전 간 거리는 생각보다 멀었다. 전화·이메일·미팅 때마다 맞닥뜨리는 영어의 장벽에 까맣게 속이 탔다. 징글맞게 힘들었지만 그만큼 많이 배웠다. 돌이켜보면 고맙고 소중한 경험이다.
이런 시간을 거쳐 2003년 ‘SANG A, INC’를 설립, 2006년 봄 핸드백 브랜드 ‘SANG A’를 론칭했다. 상위 1%를 타깃으로 악어·뱀·타조 가죽 등 독특한 소재의 제품을 만든다. 처음 2년은 시행착오의 연속이었다. 익숙한 일은 하나도 없었다. 디자인을 하고, 이탈리아 가죽 장인들을 만나고, 업계 관계자들과 이야기했다. 조금씩 ‘감’을 잡아갔지만 사람을 부리는 일만은 진도가 더뎠다. 직원들은 그를 ‘pure evil(악마)’이라 불렀다.
“농담처럼 악마라고 말하면 저는 ‘일만 똑 부러지게 하면 악마일 이유가 없다’고 해요. 일할 때 그저 ‘착한 사람’ ‘좋은 사람’이라는 호칭만큼 화나는 게 있을까요. 그래서 직원들에게 ‘빨리 움직여라. 이메일에 느낌표를 붙이지 마라. 실수하지 마라’등 충고를 자주 건네요. 미국 젊은 세대들은 ‘비판’에 한없이 약한데, 한국 사람들은 참 강하게 자랐구나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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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상아는 일욕심이 많다. 버거울 때도 있지만 낮선 땅에서 새로운 도전을 하는 것은 멋진 일이다.



#욕심 똑 소리 날 수만 있다면
그는 욕심쟁이다. 일단 시작했으면 최선을 다하고, 기왕 할 거면 완벽을 추구한다. 질투도 둘째가라면 서럽다. 애플의 스티브 잡스와 ‘보그’편집장 안나 윈투어를 보며 스스로를 다잡는다. 디자이너와 CEO로 일하는 과정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이것을 한국인의 ‘헝그리 정신’이라 불렀다.
“저는 종종 옛 방송시절 매니저를 떠올려요. 그는 안 되는 것도 되게 해야만 하는 사람이었죠. 산골짜기 촬영장에서 땅을 파고 나무판자를 놓아 유기농 화장실을 만들었다는 에피소드도 있어요. 포기하지 않는 그 정신이 제 일을, 인생을 지켜주는 것 같아요.”
두 시간에 한 번꼴로 이탈리아 공장에 전화하고 매달 출장을 오가며 일했다. 밤 비행기를 타고 아침에 도착, 에스프레소로 정신을 깨운 뒤 미팅을 시작했다. 끼니는 파니니와 피자로 때웠다. 지독하게 일하니 지독한 스트레스가 밀려왔다. 점차 잠자는 시간이 힘들어졌다.
“새로운 나라에서 새로운 언어로 사업을 하고 가정을 꾸리는 것은 도 닦는 일이나 마찬가지예요. 모든 게 착착 진행되면 좋겠는데 도처에 장애물투성이인 거죠. 타국 땅의 문화 차이, 외로움과 향수병을 이겨내야 했으니까요. 하지만 그럭저럭 시간을 흘려보내는 건 죽어도 싫었어요. 무리를 하니 심신이 지치는 게 당연했죠.”
그 욕심, 사업을 시작한 지 4년째인 지금도 여전하다. 하지만 그간 일군 성과로 조금은 여유가 생겼다. 클래식한 소재를 트렌디하게 해석한 디자인은 시장에서 호응을 얻었다. 1백50만~1천5백만원 선의 제품은 현재 세계 16개국 편집숍과 백화점에서 판매되고 있다.
업계에서도 인정받는 분위기다. 2007년 삼성그룹이 주는 ‘삼성패션디자인펀드상’을 수상했고, 2008년 패션잡지 ‘보그’선정, ‘주목할 만한 신예작가’로 뽑혔다. 톱스타 리한나, 미샤 바튼, 부시 전 미국 대통령의 장녀 바버라 등 그의 가방을 사랑하는 셀레브러티도 늘었다. 하지만 그는 담담히 “이제 시작”이라고 말한다.
“저는 한 번도 성공했다고 생각한 적이 없어요. 이제 막 ‘상아’ 브랜드를 알리기 시작했고, 타깃 고객들 사이에서 인지도를 쌓아가는 중이에요. 신진 디자이너로 막 주목을 받고 있고요. 세계 시장 곳곳에서 론칭했지만, 한국은 아직 구체적인 계획은 없어요. 우리나라 시장이라 특히 조심스러워 천천히 추진할 생각입니다.”

#고독 떨칠 수 없다면 즐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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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웃지만 홀로 걸어온 오랜 타지 생활, 쉬웠을 리 없다. 많이 외로웠고 수십 번 울컥했다. 시원하게 눈물을 쏟아내거나 “자신에게 지지 말자”고 다독이며 외로움을 이겨냈다. 하지만 뉴욕생활 8년째 맞은 고비는 쉽게 지나가지 않았다.
“2,3년 지나고 나니 힘든 시간이 잦아졌어요. 8년째 되는 해에는 우울증에 걸릴 정도였죠. 특히 밥과 반찬을 차려 혼자 식사할 때가 그랬어요. 밥에 국, 김치를 먹어도 함께할 사람과 분위기가 없으니까요. 한국에서의 사소한 일상이 그리웠어요.”
심한 향수병을 앓았다. 한국 땅이, 한국의 냄새가, 한국에 있는 정다운 사람들이 사무치게 그리웠다. 그때마다 그는 한국TV의 오락 프로그램 ‘야심만만’을 봤다. “강호동을 만나면 절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일 정도다.
“한국말로 이야기하고 마음을 나누는 일이 불가능하잖아요. 전화로 수다를 쏟아내는 것도 한계가 있고요. 그럴 때면 ‘야심만만’을 봤어요. 여럿이 둘러앉아 두런두런 이야기 나누는 것을 보며 친구와 수다 떠는 기분을 맛봤죠. TV 속으로 들어가는 거예요.”
가족도 큰 힘이 됐다. 그는 2001년 한 동네에 살던 재즈기타리스트 출신 미국인 음반 프로듀서와 결혼, 다섯 살배기 딸 올리비아를 뒀다. “알고 보니 소탈한 부자였다”는 남편은 한식과 찜질방을 좋아하는 한식 마니아다. 그는 인생에서 가장 잘한 일 중 하나로 결혼을 꼽는다.
“연애기간 2년 동안 남편이 부자라는 사실을 몰랐어요. 허름한 아파트에 살면서 11년 된 고물차를 몰았거든요. 성격도 굉장히 소탈해서 누구와도 잘 어울렸고요. 우울증을 극복한 것도 남편 도움이 컸어요. 물론 외로움은 평생 따라다니는 거지만, 지금은 한껏 받아들이고 즐기는 방법을 터득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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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 남편과 딸은 ‘믿는 구석’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은 뒤 그에겐 믿는 구석이 생겼다. 홀로 덩그러니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다가도 집으로 향하는 순간 마음이 따뜻해진다. 그는 요즘 새로운 경험에 흥분해 있다. 올리비아가 유치원에 들어간 것이다.
“올리비아의 원서를 유치원에 접수시키며 참 많이 배웠어요. 유치원 원서만 아홉 군데에 넣어서 세 군데 합격했죠. 본인 인터뷰, 학부모 인터뷰, 학교 방문, 시험 성적 리뷰 등 보통 일이 아니더군요. 유별나다는 말은 들었지만 현실은 더 버거웠어요. 하지만 학부모가 되는 기분은 굉장히 신나고 설레요.”
학창시절을 한국에서 보낸 그에게 낯선 풍경이었다. 한 교실 한 수업당 18명을 넘지 않는 학생수, 선생님과 친구처럼 웃고 떠드는 아이들. ‘동방예의지국’의 예의범절은 없지만 훨씬 활기차고 자유로워 보였다.
그의 남편은 유대인이다. 남편을 따라 1년 반 교리를 공부하고 구두시험을 치러 유대교로 개종했다. 가족은 그의 보물 1호이지만 새로운 도전이기도 했다. 남편의 형제들은 모두 서로 잘 아는 유대인 집안의 딸을 아내로 맞았다. 한국인인 그는 기를 쓰고 노력해도 메울 수 없는 공감대가 그들에겐 있었다.
“돌아가신 시할아버지는 참 박식하고 따뜻하셨어요. 저한테도 잘해주셨거든요. 한데 어느 날 시할아버지가 이런 말씀을 해주셨어요. ‘온 가족이 모일 때마다 아웃사이더 같은 기분을 느낄 거다. 한 가족으로 대해주길 바라는 기대로 자신과 싸우려 하지 마라. 보이는 것, 느끼는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려 노력하라.’ 그 말을 듣고 혼란스러웠던 부분이 많이 풀렸어요.”
어릴 때부터 춤을 춰온 그는 미국에서도 꾸준히 춤을 춰왔다. 몸을 움직이고 땀을 흘리며 마구 뒤엉켜 답답한 감정을 털어버리곤 했다. 요즘은 흑인들이 격렬하게 추는 크럼핑을 배운다. 혹시 무대에서 관객과 눈을 맞추며 노래하던 시절이 그립진 않을까.
“요즘도 재미 삼아 작곡도 하고 노래도 불러요. 남편이 음악을 하는 사람이라 마음만 먹으면 음반도 만들 수 있겠죠(웃음). 하지만 지금은 하는 일에 푹 빠져 있어요. 조금씩 제 브랜드를 키우며 만족하게 되면 그때 생각해볼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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