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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leb 금의환향

추신수 3인의 은인을 말하다

2009 메이저리그를 강타한 남자

글 이설 기자 사진 동아일보 사진DB파트, MBC 제공

입력 2009.12.22 10:43:00

노란머리 팬들이 삐뚤빼뚤 그린 태극기를 흔들며 어설프게 ‘대한 건아 추신수’를 외친다. 경기를 보다가 출출해지면 간식으로 김밥을 먹는다. ‘추추트레인’ 추신수 선수의 유명세로 인한 미국 경기장의 변화들이다. 아시아 선수 최초로 ‘20-20’의 기록을 세운 야구스타 추신수의 성공 스토리.
추신수 3인의 은인을 말하다


“한국에 가고 싶다는 생각은 한 적이 없습니다. 오직 이곳 메이저리그에서 성공하겠다는 일념뿐이었습니다.”
2009년은 추신수(27)의 해였다.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소속인 그는 올해 처음 메이저리그에 풀타임으로 출전해 수준급의 성적을 거뒀다. 아시아 선수 최초로 20홈런 21도루로 ‘20-20’클럽에 이름을 올리며 중심타자로 자리매김했다. 클리블랜드 팬들은 팀의 승리를 견인하는 그에게 힘차게 달리는 증기기관차를 의미하는 ‘추추트레인’이라는 별명을 붙여줬다. 11월 오랜만에 고국을 찾은 그는 팬 사인회, 방송출연, CF촬영 등 빠듯한 일정을 소화하며 국내에서도 인기를 실감했다.
‘야구스타’의 타이틀은 하루아침에 얻은 것이 아니다. 오늘의 명성 뒤에는 하늘만큼 긴 인내와 부단한 노력이 있었다. 그가 처음 미국에 건너간 것은 2001년. 고등학교를 마친 뒤 바로 미국행을 택했다. 롯데 자이언츠 박정태 코치의 조카인 그는 부산고 시절 투수로 활약했다. 2000년 캐나다 에드먼튼에서 열린 ‘세계 청소년 야구 선수권 대회’에서는 MVP와 최우수투수상을 받으며 실력을 인정받았다. 이를 계기로 시애틀 메리너스의 제의를 받아 연고 팀인 롯데 자이언츠의 러브콜을 뿌리치고 야구본토로 향한다. 땀과 자존심을 걸고 메이저리그 최고가 되길 꿈꿨으나 현실은 만만치 않았다.
“말할 능력도 말동무할 사람도 없었어요. 미국에 건너갈 당시 알파벳 소문자도 모르는 상태였어요. 대문자와 숫자, 그리고 간단한 인사말 정도가 영어상식의 전부였죠. 친구도 없어 대부분 시간을 혼자 보내야 했어요. 스트레스가 심해 울기도 많이 하고 원형탈모까지 왔죠.”
성공은 목표를 향해 전력 질주하는 이에게만 그것에 다가설 기회를 준다. 외로움과 불안으로 에너지가 분산돼서는 전력질주가 불가능하다. 미국생활 초반 심하게 ‘적응앓이’를 겪은 추신수도 야구에 집중하기 힘들었다. 그런 의미에서 아내 하원미씨(26)는 그의 진정한 ‘구원투수’였다. 추신수는 ‘MBC 스페셜’과의 인터뷰에서 아내와의 첫만남을 공개했다.

추신수 3인의 은인을 말하다


“2003년 한국에 들렀을 때 돌아가신 부산고 시절 조성옥 감독님 아들의 소개로 만났어요. 카페로 들어오는 아내를 보고 한눈에 반했죠. 너무 좋아서 다음 날 바로 사귀자고 했어요. 불같은 사랑을 했어요. 세상에 둘밖에 없는 듯 새벽 6시부터 밤까지 줄기차게 만났죠. 무리한 데이트 일정으로 아내가 1주일 뒤 몸져누울 정도였어요.”
첫눈에 반해 한 달 만에 교제를 허락받고 다섯 달 만에 결혼했다. 아내는 다니던 학교도 그만두고 그와 함께 미국으로 갔다. 먼 친척 하나 없던 미국 땅에 든든한 내 편이 생긴 셈이다. 원미씨는 ‘내조의 여왕’ 중 여왕이다. “남편을 챙길 때가 가장 행복하다”는 그에게 각종 음식과 보양식을 한국에서 공수하는 것은 기본이다. 콩을 사서 직접 두부를 만들고 균형 잡힌 식단으로 남편의 체력을 보강한다. 직접 마사지를 해주려 스포츠마사지도 배웠다. 만삭일 때도 말리는 남편을 눕혀 기어코 사랑의 마사지를 해줬다.
올해 5월 둘째 건우를 낳을 때는 경기 중인 남편을 배려해 혼자 출산하고, 첫째 무빈군(6)을 돌보기 위해 24시간 만에 운전대를 잡고 집으로 왔다. 그는 “운동선수의 아내는 싱글맘이나 다름없다. 혼자서 뭐든 해결해야 하고, 나 역시 지금껏 그래왔다”고 말한다. 추 선수 역시 “아내의 응원 덕에 야구를 한다. 아내를 좀 더 일찍 만났으면 더욱 좋았을 것이다”라며 고마운 마음을 아끼지 않는다.
“예전에는 제 명예를 위해 야구를 했지만 지금은 가족을 위해 야구를 해요. 아내와 두 아이를 생각하면 연습을 게을리 할 수가 없습니다.”

아내는 마이너리그에서 힘든 선수생활을 하던 시절의 둘도 없는 동지다. 집세를 아끼기 위해 이웃과 공동으로 화장실과 부엌을 사용하면서 지내던 이야기가 나오면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눈시울을 붉힌다. 원미씨는 룸메이트에게 피해를 줄까봐 밤마다 우는 아이를 업고 복도를 서성이곤 했다. 마이너리그 생활이 길어지던 차 부상까지 겹쳐 한국행을 생각하던 그를 잡아준 것도 아내였다.
“남편이 메이저리그가 손만 뻗으면 닿을 것 같은데 그게 너무 어렵다고 했어요. 혼자면 모르겠는데 가족이 있으니 한국으로 돌아가는 게 낫지 않겠느냐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나와 아이 때문이라면 우리만 한국에 가서 기다리겠다고 했어요. 당신은 당신 꿈을 이루라고요. 그때 서로 부둥켜안고 많이 울었어요.”
이런 정성 탓일까. 결국 그는 오랜 마이너리그 생활을 청산하고 2005년 4월 메이저리그에 데뷔했고, 2006년 7월 클리블랜드 인디언스로 팀을 옮겼다. 2007년 팔꿈치 부상을 겪기도 했지만 철저한 자기관리로 회복에 성공했다.

“아버지, 아내, 고 조성옥 감독,



추신수 3인의 은인을 말하다

일일교사로 아들 무빈군의 유치원에 방문한 추신수 선수. 경기할 때보다 이날이 더 떨렸다고 한다.



오늘의 나를 있게 한 고마운 분들”
추 선수는 현재의 자신을 만든 공을 두 사람에게 돌린다. 바로 아버지 추소민씨(58)와 부산고 시절 은사인 고 조성옥 감독이다. 야구 팬이자 ‘열혈 아빠’인 아버지는 백일 무렵부터 그의 손목 힘과 근력을 기르기 위한 훈련에 돌입했다. 친아버지가 할 수 있는 가장 혹독한 훈련이었다.
“철봉에 매달리거나 무거운 물건을 들게 하셨고, 자란 이후에는 밤에 공동묘지를 뛰라고 하셨어요. 힘들었지만 제가 장타에 강한 것은 아버지의 훈련 덕분이에요. 저도 아들에게 훈련을 시키고 있는데, 아버지보다는 훨씬 천사표입니다.”
조성옥 감독도 혹독하기론 만만치 않았다. 새벽 6시부터 밤 11시까지 이어졌던 훈련은 전설이 됐다. 체력의 한계에 다다라도 뛰어야 했고, 토하면서 뛰는 일도 다반사였다. ‘정신적 지주’였던 조 감독은 지난 7월 간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날 추 선수는 홈런 2개를 날렸지만 웃지 않았다. 그는 그날의 홈런은 “감독님의 마지막 선물”이라고 믿고 있다. 이번에 부산에 가서도 가장 먼저 조성옥 감독의 납골당을 찾아 눈물을 흘렸고, 그의 옷방 정면에는 조 감독의 유니폼이 걸려 있다.
“올해 좋은 일이 많았지만 야구는 끊임없이 배워야 하는 운동인 것 같아요. 새로운 기술이 계속 나오고 새로운 투수들이 던지는 공을 때려야 하니까요. 한국 팬도 찾아뵙고 싶지만 우선 미국에서 후회 없이 뛰고 싶어요. 잠깐 ‘반짝’하는 선수보다 오래오래 성실히 선수생활을 하고 싶습니다.”

여성동아 2009년 12월 55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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