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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슬아슬한 수다

6인의 여배우가 말하는 여배우의 세계

윤여정 이미숙 고현정 최지우 김민희 김옥빈

글 이설 기자, 문다영 사진 지호영, 이기욱 기자, 뭉클픽쳐스 제공

2009. 12. 21

베일에 꽁꽁 싸인 여배우의 세계. ‘여배우들’은 그 세계를 염탐한 영화다. ‘화보 촬영 현장’이라는 큰 틀만 던진 채 6명의 여배우들에게 흐름을 맡겼다. 자신을 연기한 그들은 얼마나 스스로를 열어 보였을까?

6인의 여배우가 말하는 여배우의 세계


외모, 연기, 사생활. 여배우에 대한 잣대는 모든 면에서 남배우보다 가혹하다. 그들끼리 보이지 않는 경쟁의식도 치열하다. 그래서 “보통 성격으로는 톱에 오를 수 없다”라는 이야기가 나온다. ‘정사’ ‘스캔들-조선남녀 상열지사’의 이재용 감독이 그런 여배우 6인을 한자리에 불렀다. 현실과 가상을 오가는 영화 ‘여배우들’에서다.
영화는 크리스마스 이브 서울 강남의 한 스튜디오를 배경으로 한다. 패션잡지 ‘보그’가 창간기념을 맞아 6명의 여배우를 표지에 담기로 한 것. 윤여정(62) 이미숙(49) 고현정(38) 최지우(34) 김민희(27) 김옥빈(23) 등 세대를 대표하는 배우들이다. 둘만 만나도 불꽃이 튄다는 여배우를 떼로 모은 감독의 속내가 뭘까.
“지난해 윤여정·고현정씨와 만날 기회가 많았어요. 그러면서 여배우라는 사람들이 참 매력 있다는 생각을 했죠. 남자배우에 비해 쉽게 지탄받아 불안하지만, 그 속에 깃든 비범함을 봤거든요. 그들의 모습을 혼자 보기 아까워 영화를 만들게 됐습니다.”
윤여정은 윤여정, 이미숙은 이미숙…. 영화에서 6인은 그들 자신을 연기했다. ‘화보 촬영장에서 일어나는 해프닝’이라는 기본 시놉시스가 주어졌지만, 나머지 여백은 그들의 몫이었다. 각본도 감독과 배우들이 공동 작업했다.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사실인지는 배우만 안다는 얘기.
영화에 나온 패션 에디터와 메이크업 아티스트 등 패션계 피플도 모두 ‘진짜’다. 화보의 콘셉트, 헤어와 메이크업, 의상 모두 실제 ‘보그’에서 맡아 8월호에 기사가 실렸다. 연기와 실제, 영화와 잡지, 생활과 패션을 넘나드는 하이브리드인 셈이다. 11월 중순 코엑스 메가박스에서 이재용 감독과 출연진이 만나 허심탄회하게 영화에 대한 뒷애기를 털어놓았다.

Scene 01 견제

6인의 여배우가 말하는 여배우의 세계

“이런 애들은 꼭 이럴 때 늦게 와야 지가 스탄 줄 안다?! 왜 그런 거 있어.”(고현정)
화보 콘셉트는 ‘보석보다 아름다운 여배우들’. 촬영시간이 되자 여배우들이 자신만의 방식으로 속속 스튜디오에 들어선다. 윤여정은 자신이 땜빵 섭외가 아닌지 궁금해하며, 이미숙은 드라마 ‘에덴의 동쪽’을, 고현정은 ‘무릎팍 도사’를 촬영하고 오는 길이다. 막 해외에서 돌아와 시차 적응이 덜 된 김민희는 직접 오토바이를 몰고 왔다. 한데 시작 전부터 긴장감이 돌기 시작한다. 일본 팬에게 사인을 해주느라 지각한 최지우가 고현정의 심기를 건드린 것.
“내가 선배고 니가 후배라서 내가 반말하는데, 그게 뭐?”(고현정)
“이제 그만 하자고.”(최지우)
“그만 하긴 뭘 그만 해, 이제 시작인데. 니가 먼저 시작했잖아.”(고현정)
둘 사이 신경전은 의상을 선택하는 과정에서 갈등으로 번지고, 고현정이 이마를 툭툭 치자 폭발한 최지우. 뛰쳐나가며 김옥빈에게 외친다. “야, 너 고현정이랑 친하지? 쟤 원래 저렇게 또라이야?”(최지우)
두 사람은 영화 속 싸움이 연기만은 아니라고 입을 모았다.
“실제 사이요? 별로예요. 고현정 언니를 그날 처음 만났는데 바로 싸우는 장면이 나와 심장이 떨렸어요. 표정관리도 안되고. 화면 속 장면, 연기가 아니에요.”(최지우)
“시비를 건 게 아닌데 지우가 예민하게 반응하더라고요. 연기로 시작했는데 눈을 보다 보니 실제로 샘이 확 나더라고요. 연기와 진짜 감정을 아슬아슬 넘나든 것 같아요. 다시 생각해도 그 장면은 짜릿짜릿했어요.”(고현정)
“언니가 째려보면서 손가락으로 머리를 툭툭 칠 때는 정말 화가 났어요. 순발력이 없어서 제대로 대응을 못한 것 같아 아쉬워요.”(최지우)
“한 대 안 친 게 다행이죠. 계획하고 손가락을 댄 건 아니에요. 여배우들이 어떤 면에서 단순한데, 한번 싸워볼까 하는 생각이 든 거죠. 부피는 내가 더 크지만 길이는 비슷하니 체급도 맞고(웃음). 친할 것도 안 좋을 것도 없는, 촬영 때의 관계 정도입니다.”(고현정)

Scene 02 질투



6인의 여배우가 말하는 여배우의 세계


막내 축인 김민희와 김옥빈은 아무래도 현장에서 조심스러웠다. 대선배들 틈바구니에선 한없이 기가 눌렸다. “자꾸 어른들이 이야기하니까 너네들이 먼저 해”라고 윤여정이 독려해도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촬영에 딱 들어갔는데 선배님들 장난 아니시고. 다들 강하셔서 한없이 위축됐어요. 포지셔닝을 고민하다가 그냥 숨어 있기로 했죠. 영화에서 저는 뒷모습이 많이 나와요.”(김민희)
“감독님이 자기 자신과 흡사한 모습으로 촬영에 임하라고 주문하셨어요. 그렇게 연기를 하는데도 뭔가 아쉽다고 하시더군요. 감을 못 잡고 헤맸던 것 같아요.”(김옥빈)
막내들 사이에도 신경전은 있었다. 분장실에 나란히 앉은 김민희와 김옥빈을 번갈아 보던 남자 스태프의 발언이 화근이었다. “남자들은 옥빈이 같은 스타일을 좋아해. 옥빈이가 인기가 많지.” “그렇죠. 옥빈이 인기 많죠. 근데 저도 남자들이 좋아해요”라고 받아치는 김민희. 나긋나긋 말했지만 얼굴엔 불편한 기색이 역력하다.
“옥빈씨가 인기 많다는 말, 인정은 하는데 기분은 안 좋았어요. 둘이 있는데 그러니까 시샘도 나고. 한데 옥빈씨도 제 옷을 입으려다가 작아서 실패했으니 비긴 셈이죠.”(김민희)
“남자들이 칭찬해주는데 기분 안 좋을 리 없죠. 살을 뺀다고 뺀 건데 민희 언니 옷은 너무 작더라고요(웃음).”(김옥빈)

Scene 03 가면 벗기
오늘의 주인공은 여배우와 보석. 그런데 일본에서 출발하기로 한 보석이 깜깜무소식이다. 브랜드 섭외를 맡은 스태프가 전화로 따지니 “일본에 폭설이 내려 비행기가 연착됐다”는 답이 돌아온다. 기다림은 하염없이 길어지고 거리엔 때마침 눈이 내리고. 창밖을 넘겨보던 이미숙이 문득 제안한다. “우리 샴페인이나 한 잔 할까?”
한잔 두잔 잔이 오가면서 사담이 이어진다. 파티에 어울릴 안줏거리를 가지러간 고현정의 빈자리를 틈타 은근한 공모가 시작된다. 그와 시비가 붙었던 최지우가 천진한 표정으로 입을 연다.
“분장실에서부터 시비조였어요. 안 그래도 얼굴이 부었는데 막 잡아당기고.”(최지우)
“한류가 못된 게 한이 됐나보다. 같은 또래인데 네가 예뻐서 그런 거 아니겠어?”(이미숙)
연예계 뒷담화, 배우생활 중 겪은 에피소드, 스캔들로 시동을 건 수다는 여배우의 자살, 노출 수위 등으로 속도를 높이더니 보다 내밀한 곳을 향해 내달린다. 이혼을 겪은 선배들이 돌아가며 속 깊은 곳에 자리한 상처를 꺼내놓은 것. 연기가 아닌 실제 상황에 당황하던 후배들도 이내 진한 눈물로 아픔을 함께했다. 윤여정의 “친한 지인들이 아프거나 하나 둘 떠난다”는 말에 분위기는 한층 숙연해졌다.
“샴페인을 마시면서 취중 토크 비슷하게 진행했어요. 정신이 몽롱해서 당시 무슨 말을 했는지 모르겠는데, 배우들이 살면서 느끼는 진심들이 오갔지 싶어요.”(이미숙)
“재미있을 것 같아서 선뜻 출연에 응했는데, 처음 3,4일은 잠을 잘 못 잤어요. 나를 연기한다는 게, 나를 보여준다는 게 겁이 나서 괜히 출연했다 싶었죠. 하지만 점점 자신감이 생기면서 재미있어졌고, 지금은 오히려 더 못 보여드린 점이 후회돼요.”(최지우)

Scene 04 연대
누구나 나를 드러내길 꺼린다. 나약하거나 추한 이면이라면 더 그렇다. 대중의 기대와 관심을 한 몸에 받는 여배우들은 위험부담이 더 클 터. 그럼에도 이들이 ‘여배우들’을 선택한 이유는 동지들이 궁금해서다. 윤여정 이미숙 고현정은 알고 지내던 사이고, 이미숙은 김민희와 함께 작품을 했지만, 나머지는 첫 대면이다. 함께하는 자리가 흔치 않은 여배우는 서로가 베일에 싸인 존재들이다.
“배우 생활을 하면서 남녀 배우가 어울릴 자리는 있는데, 의외로 여배우들은 만날 기회가 흔치 않아요. 그래서 가까이서 보고 싶었어요. 함께 작업하며 서로를 재발견하고 많이 배운 것 같습니다.”(고현정)
“다들 너무 만나고 싶었어요. 대선배들을 한꺼번에 만나는 기회를 놓칠 수 없었죠. 이런 기회는 다시 안 올 것 같아요.”(김옥빈)
“나이는 누구나 드는 건데, 여배우들은 나이를 평가받으면서 먹어요. 그런 여배우만의 괴로움이 있어요. 작품을 하면서 비슷한 고민을 나눌 수 있었죠.”(이미숙)
여배우라는 호칭에 대한 욕심도 동기가 됐다. 분명 여배우지만 그 타이틀에 스스로를 걸맞다 여기는 여배우는 드물다. 그래서 한 단계 도약하고 싶었다. 최지우는 “스스로를 깨는 작업을 통해 조금은 배우로서 한 발짝 내디딘 것 같다”고 했고, 김민희는 “선배들 틈에 끼어서 여배우로 출연할 수 있어서 의미 있었다”라고 평했다.
촬영하면서 서로 의외의 면들을 발견하기도 했다. “지우는 깍쟁일 줄 알았는데 착하고 곱더라. 옥빈이는 예상대로 5,6차원이었다”(윤여정), “지우는 일본어를 시켰더니 못하더라. 보이는 것과 다른 모습이 많은 아이였는데, 그간 힘들었겠다 싶었다. 영화가 나가면 지우는 흥하거나 망하거나, 둘 중 하나일 것 같다”(이미숙), “윤여정 선생님은 의외로 무섭지 않고 친구처럼 편했다”(김민희), “민희 언니는 조용할 것 같았는데 농담 잘하고 많이 웃더라”(김옥빈) 등이다.

6인의 여배우가 말하는 여배우의 세계


Scene 05 ‘늙은 년, 마른 년, 웃긴 년’
“감독님이 정~말 수고가 많으셨어요.” 고현정이 고해성사를 하듯 말했다. 아름답고 기 센 여섯 여배우와 무사히 작업을 마친 이재용 감독의 소감이 남다를 터.
“처음 도전하는 작업이라 신났지만 동시에 두렵고 불안했어요. 대중의 눈을 생각해야 하는 배우들인데, 내가 단순한 호기심과 욕심으로 그들을 모았다는 생각에 마음이 무거웠죠. 저를 믿고 따라와준 배우들에게 고마울 따름입니다.”
여배우들이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처럼 스스로 수식어를 붙였다. ‘늙은 년’ 윤여정, ‘참견쟁이 년’ 이미숙, ‘중간 년(나이 순)’ 고현정, ‘골치 아픈 년’ 최지우, ‘마른 년’ 김민희, ‘어린 년’ 김옥빈. 이재용 감독은 이미숙을 일컬어 “참견보다 웃기는 면이 더 크다”고 한 술 더 뜬다. ‘년’이라는 표현에 조심스러우면서도 재밌어 죽겠다는 표정들이다. 가까이서 이들을 지켜본 이재용 감독의 평가는 어떨까.
“윤여정씨는 친구처럼 말이 잘 통해요. 감각이 굉장히 젊으시죠. 이미숙씨는 제가 아는 가장 웃긴 여배우예요. 세상이 본인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듯 사는 분이죠. 고현정씨는 지루한 걸 못 참는 사람이에요. 악역이든 진상 연기든 시키면 뭐든 하죠. 김민희는 패션을 좋아하고 연기도 열심히 하는, 일을 즐기려는 친구 같아요. 김옥빈은 럭비공 같은 매력이 있고요.”
이 영화는 여배우들이 제 의지로 베일을 걷어낸 집단행위다. ‘여신’보다 ‘사람’에 가까운 여배우를 관객들은 어떻게 바라볼까. 행여 떨떠름한 표정이라도 쿨~하게 웃어넘길 게 분명하다. 그들은 이미 자신을 세상에 드러낸, 용기 있는 여배우들이니까.

‘여배우들’ 속 여배우가 걸어온 인생
윤여정 66년 동양방송 공채 탤런트로 데뷔, 71년 드라마 ‘장희빈’에 1대 장희빈 역으로 출연하며 스타반열에 올라섰다. 인기절정이던 시절 결혼해 13년 동안 연기를 쉬다가 이혼 후 컴백, 친숙한 여배우로서 제2의 삶을 시작했다. ‘하나뿐인 최고 배우’란 말보다 동료 배우들로부터 ‘참 좋은 배우였다’는 말이 듣고 싶다고.
이미숙 79년 영화 ‘모모는 철부지’로 데뷔, ‘고래사냥’‘겨울 나그네’ 등으로 톱스타 자리에 오른 그는 갑작스런 결혼발표와 함께 활동을 중단했다. 하지만 10년 뒤인 98년 영화 ‘정사’로 화려하게 컴백하며 녹슬지 않은 미모와 연기를 펼쳐 보였다. 20대 여배우의 전유물이던 멜로라는 장르의 연령대를 높인 주인공. 2007년 돌연 20년 결혼생활을 정리하고 ‘돌싱녀’가 됐다.
고현정 89년 미스코리아 선으로 연예계에 입문, ‘모래시계’를 통해 전 국민여배우가 됐다. 재벌가와의 드라마틱한 결혼으로 배우 경력을 접었다가 이혼 후 컴백했다. 여전한 동안, 더 발전한 연기력으로 대중을 휘어잡은 그녀. 컴백 후 노출, 궁상, 표독스러운 캐릭터 모두 소화하며 더 자유로워졌다.
최지우 94년 MBC 공채 탤런트로 연기자의 길에 들어섰지만 한동안 무명 설움을 겪다가 2002년 드라마 ‘겨울연가’를 통해 한류열풍의 주역이 됐다. 그동안 맡아왔던 청순한 역할에 ‘지우히메’란 별명까지 더해지면서 우아한 이미지 속에 갇히는 것 아닌가 하는 우려도 있었다. 하지만 ‘여배우들’에서 욱하는 성격과 할 말은 하는 인간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김민희 99년 청소년 드라마 ‘학교’로 데뷔한 김민희는 연기보다는 세련된 옷차림과 톡톡 튀는 언행으로 주목받았다. 발성조차 안된다는 선입견, 톱스타 이정재와의 만남과 이별, 긴 공백으로 위기를 맞기도 했지만 드라마 ‘굿바이 솔로’를 통해 연예인이 아닌 배우의 길로 들어섰다.
김옥빈 ‘여고괴담’ 4번째 시리즈에서 주연으로 발탁되며 연기인생을 시작해 ‘다세포소녀’, ‘1724 기방난동사건’ 등 실험적인 영화를 거치며 단순히 얼굴만 예쁜 배우가 아님을 증명했다. 영화 ‘박쥐’에서 파격적인 모습으로 시체스 국제영화제 여우주연상을 거머쥔 떠오르는 스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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