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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view

한때 우울증으로 자살 기도 이우재 판사

우울증 극복기 & 생명예찬

글 이영래 기자 | 사진 조영철 기자

2009. 06. 22

서울동부지방법원 이우재 부장판사는 지난 2006년 4월, 욕실 샤워호스로 목을 감고 자살을 기도했다. 고부갈등으로 집을 나갔던 어머니가 암으로 돌아가시고 난 뒤 생긴 불면증과 우울증 때문이었다. 병원으로, 산사로 헤매길 1년. 통곡 끝에 ‘그래도 살자’고 결심했다는 그의 생생한 고백을 들어보았다.

한때 우울증으로 자살 기도 이우재 판사


이력서만 들여다보면 이우재 부장판사(44)의 삶에도 숨은 우여곡절이 있을까 싶다. 경기고를 나와 서울대 법대를 졸업했고, 사법시험 또한 재학 중 합격했다.
사법연수원 성적도 상위권이어서 판사로 임용될 때까지 그의 인생은 순탄대로를 달렸다. 말 그대로 엘리트의 전형적인 성공적 삶이었다.
“여러 가지 일이 갑자기 터졌어요. 직접적으로는 주식에 투자했다 돈을 날린 게 계기가 됐죠. 처음 여윳돈을 조금 맡겼는데 제법 짭짤하게 수익이 나더라고요. 내가 부장판사인데 설마 내 돈은 알아서 잘 관리해주겠지, 하고 집을 담보로 전부 ‘몰빵’한 게 거덜이 난 거예요.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갑자기 처남이 저보고 장인, 장모를 모시라는 거예요. 내가 우리 어머니를 모시지 못했는데 어떻게 장인, 장모를 모시나, 그걸 하늘에 계신 어머니가 어떻게 생각하실까, 도저히 모시겠다는 말을 못하겠더라고요. 그랬더니 전세금을 만들어달라고 그러는데 돈은 없고….”
인생에 아무런 희망이 없는 것처럼 여겨졌다고 한다. 열심히 살아왔는데 왜 갑자기 인생이 처참히 망가진 걸까? 처가 문제로 부부싸움은 끊이지 않았고, 주식투자에 실패하면서 경제적으로도 어려움이 생긴 뒤였다.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죽어버리고 싶다”는 푸념이 많아졌고, 어느 날 부부싸움 끝에 부인이 “당신이 죽을 배짱은 있냐”며 독설을 퍼부었다. 온몸의 날카로운 신경들이 곤두섰고, 그는 바로 욕실로 들어갔다. 샤워를 하는 척 물을 틀어놓고 그는 가족들이 밖에 나가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샤워호스에 충동적으로 목을 감았다. 대롱대롱 매달리자 아득히 의식이 멀어졌고, 곧 이 모든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았다.
다행히 샤워호스가 빠지면서 그는 바닥에 쓰러졌고 샤워기에서 터져나온 물이 머리 위로 콸콸콸 쏟아졌다. 죽지 않았다는 사실이 기쁘기도 하고, 자살까지 기도해야 하는 자신의 신세가 처량해서 그는 넋을 놓고 그렇게 한참을 욕실에 앉아 있어야 했다. 2006년 4월 초파일의 일이었다.
“왜 괴로운지 몰랐어요. 주식투자에 실패해서 그런 것도 같고. 처가, 아내와의 갈등 때문인 것도 같고. 머릿속이 복잡했어요. 속은 답답하고 불면증에 시달리고, 심장은 벌렁벌렁 뛰고….”
거슬러 올라가보면 그의 마음속 깊은 곳에 자리한 죄책감 때문이었다. 대학시절 열애 끝에 결혼한 부인과 모친 사이에는 고부갈등이 있었다. 부인은 “따로 살자”고 주장했고, 그는 그래도 자신이 모셔야 한다고 고집했다. 그러다 결국 어머니가 따로 나가 살게 됐다. 어머니는 “내가 나가 사는 게 편하다”고 말씀하셨지만 그의 마음은 편치 못했다.

고부갈등 끝에 집 나가신 어머니 암으로 타계 후 우울증 시작
설상가상 어머니는 그렇게 따로 사신 지 얼마 되지 않아 암에 걸렸고, 병원에서 투병생활을 해야 했다. 지난 2004년 어머니는 결국 세상을 뜨셨고, 그는 불효에 대한 죄책감을 마음속에 쌓고 살아야 했다.

“사월 초파일도 가족들이 놀러 가자고 해서 싸움이 시작됐지요. 우리 어머니가 그렇게 가셨는데 내가 사월 초파일이라고 아이들 데리고 아내하고 어디 놀러 가도 되는 걸까? 내가 그렇게 알콩달콩 살아도 되는 걸까? 집사람은 우리 어머니한테 그렇게 했는데 내가 장인장모를 모셔야 하는 걸까? 생각이 끊이지 않았어요.”
2006년 그는 춘천지법에 근무하고 있었다. 서울에 가족들을 두고 그는 춘천관사에서 주로 머물렀다. 당시 그는 관사 창문을 모두 매트리스로 막았다고 한다. 혹시라도 충동적으로 뛰어내리지 않을까 싶은 우려 때문이었다. 밥을 먹어도 소화가 제대로 되지 않았다. 위내시경을 받아보니 헬리코박터균이 많아서 암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높다는 의사의 말에 스트레스는 더욱 가중됐다.
잠을 이룰 수도 없었다. 며칠간 불면의 밤이 계속됐지만 어떻게 해결할지 알 수 없었다. 선거사범 재판 문제로 대법원에서 회의가 있어 서울로 온 날, 그는 사흘밤을 못 잔 채 그 자리에 참석했다. 그러나 어떤 이야기에도 집중할 수 없었다. 결국 그는 회의 중간에 “도저히 못하겠다”며 자리를 박차고 밖으로 나와버렸다. 판사로서 경력관리도 위험해지는 순간이었다. 이대로는 삶에서 도태될 것 같았다.
“잠을 며칠 못 잔 상태에서 춘천까지 차를 몰고 가면서 이대로 교각이나 터널에 들이박고 죽을까, 몇 번이나 자살충돌에 시달렸어요. 시체가 너무 처참할까봐 그러지는 못했죠.”
그는 불면증 증세로 병원을 찾았고 한알 한알 수면제를 모으기 시작했다. 70개 정도 모았을 때 그는 또 한 번 자살을 결심했다. 유서까지 써놓은 상태에서 그는 잠이 들었다. 꿈속에 돌아가신 어머니가 나타나 그의 수의를 벗겼다. 어머니가 내가 죽기를 바라지 않는구나 싶은 생각이 들어 그는 어찌됐건 하는 데까지는 해보기로 결심했다. 그는 대법원에 보고하고 병원에 입원했다.
한때 우울증으로 자살 기도 이우재 판사


“독방에 넣어주더라고요. 그런데 독방이란 게 우울증 환자에게는 더 안 좋아요. 혼자 있으면 처량한 생각이 드니까. 25일간 입원해 있는 동안 매일 똑같은 일상의 반복이었어요. 밤 10시쯤 ‘주몽’을 봤어요. 그리고 잠을 자려고 눕죠.
잠이 안 오니까 새벽 2~3시까지 멀뚱멀뚱 누워 있다가 간호사를 불러서 수면제를 놔달라고 하는 거죠. 그리고 아침 10시까지 자요. 햇볕 쬐면 좋다고 해서 햇볕 쬐며 산책도 해보고 하는데 수면제 없이는 잠이 안 와요.”
그때 바로 옆 방에서 사람이 죽어나갔다. 암으로 죽은 환자라고 했다. 보호자 휴게실에 있다가 병실로 돌아가는데 마침 병실에서 시체가 나가는 중이었다. 어린아이가 시체를 따라가면서 “아빠, 눈좀 떠!” 하고 통곡하는 소리가 가슴을 땅하고 쳤다. 머릿속에서 아이의 통곡소리가 떠나지 않았고, 그는 더 우울해졌다.



병원으로, 산속으로 무작정 헤매던 1년
병원에 더 있어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에 그는 퇴원하기로 결심을 굳혔다. 담당의사는 2주에 한 번씩 치료를 받으러 오는 조건으로 퇴원을 허락했다. 그러나 그는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30일치 수면제를 가방에 담은 채 계룡산으로 떠났다.
“비 오는 토요일이었어요. 어디 가는지 찾지 마라, 마음이 정리되면 돌아오겠다 하고 가방 하나 달랑 들고 나선 거였어요. 버스를 타고 계룡산에 가서 마음수련회라는 데를 들어갔죠. 지푸라기라도 잡아보고 싶은 심정이었으니까 ‘마음이 편해진다’는 말에 그냥 간 거예요.”

한때 우울증으로 자살 기도 이우재 판사


산중이라 전파가 잘 통하지 않아 가족과는 문자메시지로만 서로 소식을 주고받을 뿐이었다. 그렇게 산속 칩거 생활을 한 지 3주 후, 갑자기 아내가 아이들을 데리고 수련회로 찾아오겠다고 했다. 오지 말라고 만류했지만 결국 찾아왔고 그는 가족과 함께 갑사 주변을 거닐며 시간을 보냈다.
모처럼 만났지만 마음속에 진 응어리는 쉽게 풀어지지 않아 서먹할 뿐이었다. 저녁 7시쯤 수련원으로 돌아오면서 그는 뒤조차 돌아보지 않았다. 그때 갑자기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는 불도 켜지 않은 채 방 안에 드러누워 멍하니 천장만 바라봤다. 30여 분후, 열린 문틈으로 밖을 내다보자 아내가 몰고 온 차가 아직 앞 마당에 서 있는 것이 보였다. 빗물에 가려 차 안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가족들이 그렇게 오래도록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것을 발견하자 그는 갑자기 알 수 없는 격한 감정에 사로잡혔다.
“통곡이 터져나왔어요. 두 시간 넘게 그냥 엉엉 울었죠. 내가 왜 이런 꼴이 됐나, 내가 어쩌다 이렇게 살게 됐나 싶어서 그냥 엉엉 울었어요. 그때 옆방 수련생이 나한테 와서 그래요. ‘당신을 힘들게 하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들어가보라고. 그럼 해원(解寃; 원통한 마음을 풂) 선생을 만날 거라고.”
오전 6시에 일어나 아침을 먹고 수련에 들어가 밤 12시까지 참선을 했다. 그렇게 참선을 거듭하자 남의 마음이 보이기 시작했다. 마음이 조금씩 풀리며 비로소 다른 사람들과 터놓고 대화를 나눌 수 있게 됐다. 참선 속에 돌아가신 어머니가 등장을 하기도 했고, 갈등을 겪던 부인이 나오기도 했다. 도저히 풀릴 것 같지 않던 마음의 골이 풀리기 시작했다.
“네가 어머니 마음을 모른다. 비록 내가 며느리와 갈등을 겪긴 했지만, 나에 대한 미안함 때문에 네가 편안하게 살지 못하면 내가 떠나는 길에도 편하지 못하다. 나에게 죄를 졌다고 생각하지 마라. 이제 그냥 행복하게 알콩달콩 살아라.”
참선 속에 등장한 어머니는 한결같이 그렇게 그를 다독여줬다. 그때부터 먹던 수면제의 양이 줄기 시작했다. 4알에서 3알로, 다시 2알로 1알로. 그래도 선뜻 하산할 마음은 생기지 않았다. 미쳐서 산에 들어간 걸 세상이 다 아는데 어떻게 돌아갈 수 있을까 싶었다. 뭔가 큰 깨달음이라도 얻지 않는 이상 하산할 면목도 없고 명분도 없었다. 마침 추석이 다가오고 있었고, 어느덧 산속 생활도 넉 달이 지나 있었다. 가족들이 다시 그를 방문하겠다고 연락해왔다. 그는 그냥 마음을 편하게 먹기로 결심했다.
“내가 무슨 성철스님이나 원효대사도 아니고 언제 대오각성하겠나 싶더라고요. 수행을 평생 한다고 생각해야지 오늘 당장 깨달음이 오겠나. 부처님의 말씀 중에 ‘깨달음의 노예가 되지 말라’는 말이 있는데 그 말을 따르기로 했죠. 그래도 산에서 내려오는 길이 쉽지는 않았어요. 가슴이 두근두근거리고 손에 땀이 나고, 다시 심장이 뛰고. 집에 도착하니까 새벽 3시더라고요.”
그는 다시 병원을 찾았다. 의사는 그에게 ‘우울증’이라는 진단을 내렸다. 약을 먹으면 한 달 후쯤 다 나았다는 착각에 빠지기 쉽지만 1년은 먹어야 한다고 했다. ‘나를 치료하는 건 의사다’라고 생각하고 무조건 따르기로 했다. 그 이후 그는 1년 동안 단 한번도 약을 거른 적이 없다.

마음을 바꾸면 모든 고민이 가벼워지는 법
약을 먹자 정말 한 달 후쯤부터는 마음이 안정을 찾기 시작했다. 그해 겨울, 그는 온 식구들과 함께 유럽여행을 떠났다. 주식투자로 거액의 손해를 입은 것 따위는 다시 벌면 되지 하고 생각하자, 마음이 편해졌다. ‘어머니를 그렇게 보내고 내가 가족들과 화목하게 살아도 되는 걸까’ 싶던 마음의 빚도 ‘어머니가 바라는 건 그게 아니다’라고 생각하자 더 이상 우울의 그늘이 되지 않았다.
“노트르담 성당 앞에 앉아 있는데 마침 크리스마스 시즌이라 어린아이들이 초를 팔고 있더라고요. 내가 크리스마스까지만 살고 싶다고 했는데, 벌써 크리스마스가 됐구나. 설명은 할 수 없는데 그 아이들이 밝혀놓은 초를 보고 있자니 자꾸 눈물이 났어요.”
2007년 2월21일, 그는 인천지방법원으로 발령을 받아 판사직에 복귀했다. 인천지검 엘리베이터에는 매일 오늘의 잠언이 붙었다. ‘당신은 모르지만 당신은 소중한 사람입니다’ ‘한쪽 행복의 문이 닫히면 다른 쪽 행복의 문이 열립니다’… 그 짧은 말 하나하나를 그는 매일 아침 출근길에 휴대전화에 담아 마음의 등불로 삼았다. 매일매일이 그렇게 새롭고 의미 있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2007년 9월, 그는 드디어 완치 판정을 받았다.
“자살이요, 사실은 자살하려는 사람도 두렵습니다. 그런데 살 자신이 없기 때문에 하는 거예요. 그런데 막상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오니까 그 다음에는 생각이 바뀌었어요. 마음을 바꾸면 아무 것도 문제될 게 없어요. 주식투자는 못하고 지난해 펀드에 돈 있는 걸 다 넣었거든요.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로 반토막이 났잖아요. 그런 꼴 안 겪으려고 주식 안하고 펀드 했는데 왜 또 이러나, 또 우울해지더라고(웃음). 그런데 내가 이런 일 한두 번 겪나 하고 생각을 바꾸니까 또 마음이 바뀌어요. 영화 ‘첩혈쌍웅’에 이런 대사가 나와요. ‘인생은 누구나 성공할 수 있다. 실패 또한 영원하지 않다’. 바로 그런 마음가짐이 중요해요.”
고통이었고 시련이었지만 많은 일을 겪은 덕에 인생 또한 더욱 성숙해졌다고, 그것이 꼭 나쁘지만은 않았다고 그는 의미부여를 했다. 가령 판사로서 재판에 대한 생각도 많이 바뀌었다고 한다. 재판이 3시간, 4시간이 걸리더라도 모든 이야기를 다 들어주려고 한다고. 법리적인 해결도 중요하지만 마음속에 억울함이 남지 않도록 배려하는 것도 그의 몫이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인터뷰를 마치고 돌아오는데 그가 다급한 목소리로 전화를 해왔다. 무슨 일인가 싶어 들어보니 그는 ‘진짜 중요한 이야기를 깜박했다’며 꼭 자신의 말을 적어달라고 했다.
“의사를 믿어야 해요. 그게 병이더라고요. 내가 한 거 따라 하려고 하지 말고 의사를 믿고 의사에게 치료를 받아야 해요. 그리고 또 하나, 이게 정말 핵심인데 무엇보다 가족이 중요해요. 내가 욱해서 죽으려고 했던 것도 따지고 보면 가족 때문이었고, 내가 이렇게 돌아와서 건강히 살아가는 것도 가족의 힘이었어요. 가족들이 잘해줘야 해요. 죽지 않고 살아야지요. 다 같이 살려면 가족이 도와줘야 해요. 조금 힘들고 지쳐도 짜증내지 말고 가족이 힘이 돼줘야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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