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가도 달리다 사업실패, 이혼 등 불운 겪어
이번에 낸 음반이 특히 의미 있는 이유는 ‘비 오는 날의 수채화’ ‘매일 그대와’ ‘가시나무’ 등 전성기 시절 직접 부르거나 다른 가수에게 써준 곡을 모아 새롭게 녹음했기 때문이다. 기타 잡고 노래하는 대신 컴퓨터로 노래를 들려주던 그는 “목소리도 변했다.
시간이 많이 흘렀다는 걸 느낀다”며 “녹음실에 들어섰을 때 묵은 때가 벗겨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고 말했다. ‘때’의 의미를 묻자 잠시 머뭇거리던 그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갔다.
강인원은 ‘천재’ 소리를 듣는 미술학도였다. 하지만 적녹색약의 신체조건을 극복할 수 없었다. 스무 살 무렵 우연히 접한 음악동아리는 그에게 새로운 꿈을 줬다. 그때부터 강인원은 “오선지 위에 그림 그리듯” 악보를 그렸고, 79년 전인권 나동민 이주원과 함께 포크그룹 ‘따로 또 같이’로 데뷔했다.
홀로서기 한 뒤에도 그는 히트곡을 쓰는 싱어송라이터로 많은 사람에게 사랑받았고, 가수들은 그의 곡을 받기 위해 줄을 섰다. 그는 세상의 주인이 자신이라고 생각했고 능력과 재주가 소멸되지 않을 거라 믿었다.
“자신감과 교만함이 뒤범벅됐다고 할까요. 본래 성격이 직설적이고 남을 잘 배려하지 못해요. 노래실력을 갖추지 못한 후배를 혼내고 무시했죠. 모난 제 성격 때문에 상처 입은 사람도 많을 거예요. 시간이 흘러 음반시장이 변하자 음악이 무대연출을 위한 하나의 소모품처럼 느껴지더라고요. 또 음반이 예전만큼 성공하지 못하고 다른 가수에게 밀려나 ‘한물간 가수’ 취급을 받았어요. 기분이 상했고, 출연섭외가 와도 이일저일 핑계대면서 안 하게 됐어요.”
가수생활뿐 아니라 가정생활도 원만하지 않았다. 지난 96년 결혼한 그는 1년 만에 이혼한 후 사람에 대한 믿음을 잃었다고 한다. 만나는 사람이 손에 꼽을 정도였다. 노래도 뒤로했다. 그는 97년 수입브랜드 사업을 시작했다. 한때 엄청난 부를 축적했지만 사업한 지 4개월 만에 빈털터리가 됐다. 세상을 등지려는 생각도 여러 번. 신앙이 없었다면 자살시도를 했을지도 모른다고 했다.
“힘들었지만 마땅히 기댈 곳이 없었어요. 그러다 한 동료가수의 권유로 성경책을 집어들었어요. 성경구절을 읽는 순간 눈물이 나더라고요. 왜 음악을 등졌을까, 음악하지 않고 행복할 수 있을까…. 음악이야말로 제가 존재하는 이유며, 제 삶의 좌표라는 것을 깨달았어요.”
그 후로 술과 담배도 멀리했다. 교회에서 봉사활동하면서 흐트러진 몸과 마음을 추슬렀다. 운 좋게도 그는 2000년부터 한 대학 실용음악과 전임교수로 초빙됐다. 빚도 서서히 갚아나갔다. 그렇게 학생들과 함께하기를 4년. 하지만 안정된 생활은 그에게 점차 구속이 됐다고 한다.
‘가르치면서 배운다’는 말처럼 사운드와 창법이 그의 머릿속을 맴돌았다. 다시 음악이 하고 싶어졌다. 결국 사직했다. 그리고 곡을 만들고 후배가수를 양성하는 등 제2의 도약을 시작했다.
아내 임신 4개월째 갑상선암 선고받아
“하지만 연예인은 한번 대중과 멀어지면 다시 가까워지기가 힘들어요. 자괴감마저 들었죠. 이미 주변 관계가 허물어졌기에 외로웠고요. 그러던 중 지금의 아내를 만났어요. 아내가 없었다면 제 삶은 또다시 척박해졌을지도 모릅니다.”
열네 살 연하 아내와의 결혼생활은 그에게 새로운 위안이고 기쁨이었다.
“아내는 가장 든든한 지원군이에요. 제가 영원히 노래하는 사람으로 남길 원하죠. 어쩌면 그 때문에 남을 위한 노래가 아닌, 제 노래를 다시 하게 됐는지도 몰라요.”
하지만 행복은 오래가지 못했다. 갑작스레 찾아온 병마가 그의 발목을 붙든 것이다. 지난 2007년 이유 없이 몸이 피곤하고 목이 가라앉는 듯해 정밀검사를 받은 결과 양쪽 갑상선에 종양이 생긴 걸 알았다. 뼈로 전이되기 직전 발견한 게 다행이지만 가수에게는 치명적이었다. 수술 후 1년간 목소리가 잘 안 나올 것은 물론이고, 전처럼 노래를 부를 수 있을지 아무도 장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내는 당시 임신 4개월이었다.
“‘왜 하필 나일까’ ‘왜 하필 갑상선암일까’ 그런 생각을 수차례 했어요. 미국 친정에서 출산준비를 하던 아내에게는 단순한 혹이라고만 둘러댔죠. 동료들에게도 말하지 않았고요. 처음엔 절망했지만 누굴 원망한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니 담담하게 받아들였어요. 그리고 가수로서 마지막 음반이 될 수 있다는 생각에 녹음작업을 시작했어요. 제가 가장 좋아하는 곡, 사람들이 저를 기억할 수 있는 곡으로….”
수술은 성공적이었지만 결국 음반작업은 조금 미뤄야 했다. 그러는 동안 아이가 태어났다.
“아내가 그러더라고요. 다 늙어서 시험관 아기로 어렵게 낳았는데 아프면 어떡하냐고, 건강해야 한다고. 그때 정신이 번쩍 들더라고요. 건강검진도 열심히 받고 있어요(웃음). 상처가 아물어도 흉터를 보면 다친 기억이 나는 것처럼 암 수술은 제게 평생 아픈 기억이 될 겁니다. 평생 약을 먹어야 하지만 어떻게 보면 다행이구나 싶어요. 흐트러지거나 교만할 때, 혹은 나약해질 때마다 저를 바로 세워줄 계기가 될 테니까요.”
그는 약병을 보여줬다. 호르몬제를 먹지 않으면 반나절 이상 버티지 못할 만큼 힘들지만 약을 먹을 때마다 “그래도 이만해서 감사하다”는 말을 되뇐다. 두 살배기 아들에 대해 묻자 지나치리만큼 담담하던 그가 환하게 웃었다.
“두 달 전 미국에서 왔는데 참 예뻐요. 음악에 재능이 있어요. 한 번 들려준 멜로디를 정확하게 기억하고, 투정 부리다가도 음악을 틀어주면 금세 해맑게 웃어요. 아내는 골프선수를 시키고 싶다는데 운동을 할지, 공부를 할지, 저처럼 노래를 할지 모르겠네요. 성장하는 동안 건강한 모습으로 지켜보고 싶어요.”
현재 중장년층을 위한 음악전문 포털사이트를 운영 중인 그는 “하얗게 센 머리카락에 청바지를 멋스럽게 차려입고 젊은이 못지않은 감각으로 노래하는 가수가 되고 싶다”고 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음악적 영감이 떠오른다. 사무실 책장에는 수북이 쌓인 악보뭉치가 주인을 기다리고 있다.
“음악에 대한 도전의식 같은 건 없어요. 그저 제자리에서 묵묵히 최선을 다하는 거죠. 간혹 가수들에게 ‘이거 어때?’ 하고 악보를 내밀면 ‘빠르고 신나는 곡은 없어?’ 하고 되물어요.
요즘은 전주, 간주, 후주도 필요없대요. 빠르고 격정적인 멜로디, 직설적인 가사만 찾더라고요. 으싸으싸하는 분위기도 좋지만 때로는 감흥에 젖는 것도 필요한데….”
강인원은 끝으로 “아름다운 멜로디와 노랫말처럼 살지는 못했지만 지금의 삶을 후회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파란만장했던 지난날을 ‘쉬는 시간’이라고 표현해요. 미련 두지 않죠. 올해로 데뷔한 지 30년 됐는데, 이제는 어떤 일이 있어도 쉬지 않을 거예요. 추억을 공유하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 노래할 겁니다. 일흔 살 즈음 되면 그땐 ‘노래가 제 인생의 전부예요’라고 떳떳하게 말할 수 있지 않을까요.”
이번에 낸 음반이 특히 의미 있는 이유는 ‘비 오는 날의 수채화’ ‘매일 그대와’ ‘가시나무’ 등 전성기 시절 직접 부르거나 다른 가수에게 써준 곡을 모아 새롭게 녹음했기 때문이다. 기타 잡고 노래하는 대신 컴퓨터로 노래를 들려주던 그는 “목소리도 변했다.
시간이 많이 흘렀다는 걸 느낀다”며 “녹음실에 들어섰을 때 묵은 때가 벗겨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고 말했다. ‘때’의 의미를 묻자 잠시 머뭇거리던 그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갔다.
강인원은 ‘천재’ 소리를 듣는 미술학도였다. 하지만 적녹색약의 신체조건을 극복할 수 없었다. 스무 살 무렵 우연히 접한 음악동아리는 그에게 새로운 꿈을 줬다. 그때부터 강인원은 “오선지 위에 그림 그리듯” 악보를 그렸고, 79년 전인권 나동민 이주원과 함께 포크그룹 ‘따로 또 같이’로 데뷔했다.
홀로서기 한 뒤에도 그는 히트곡을 쓰는 싱어송라이터로 많은 사람에게 사랑받았고, 가수들은 그의 곡을 받기 위해 줄을 섰다. 그는 세상의 주인이 자신이라고 생각했고 능력과 재주가 소멸되지 않을 거라 믿었다.
“자신감과 교만함이 뒤범벅됐다고 할까요. 본래 성격이 직설적이고 남을 잘 배려하지 못해요. 노래실력을 갖추지 못한 후배를 혼내고 무시했죠. 모난 제 성격 때문에 상처 입은 사람도 많을 거예요. 시간이 흘러 음반시장이 변하자 음악이 무대연출을 위한 하나의 소모품처럼 느껴지더라고요. 또 음반이 예전만큼 성공하지 못하고 다른 가수에게 밀려나 ‘한물간 가수’ 취급을 받았어요. 기분이 상했고, 출연섭외가 와도 이일저일 핑계대면서 안 하게 됐어요.”
가수생활뿐 아니라 가정생활도 원만하지 않았다. 지난 96년 결혼한 그는 1년 만에 이혼한 후 사람에 대한 믿음을 잃었다고 한다. 만나는 사람이 손에 꼽을 정도였다. 노래도 뒤로했다. 그는 97년 수입브랜드 사업을 시작했다. 한때 엄청난 부를 축적했지만 사업한 지 4개월 만에 빈털터리가 됐다. 세상을 등지려는 생각도 여러 번. 신앙이 없었다면 자살시도를 했을지도 모른다고 했다.
“힘들었지만 마땅히 기댈 곳이 없었어요. 그러다 한 동료가수의 권유로 성경책을 집어들었어요. 성경구절을 읽는 순간 눈물이 나더라고요. 왜 음악을 등졌을까, 음악하지 않고 행복할 수 있을까…. 음악이야말로 제가 존재하는 이유며, 제 삶의 좌표라는 것을 깨달았어요.”
강인원은 “젊은이 못지않은 감각으로 노래하는 가수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
그 후로 술과 담배도 멀리했다. 교회에서 봉사활동하면서 흐트러진 몸과 마음을 추슬렀다. 운 좋게도 그는 2000년부터 한 대학 실용음악과 전임교수로 초빙됐다. 빚도 서서히 갚아나갔다. 그렇게 학생들과 함께하기를 4년. 하지만 안정된 생활은 그에게 점차 구속이 됐다고 한다.
‘가르치면서 배운다’는 말처럼 사운드와 창법이 그의 머릿속을 맴돌았다. 다시 음악이 하고 싶어졌다. 결국 사직했다. 그리고 곡을 만들고 후배가수를 양성하는 등 제2의 도약을 시작했다.
아내 임신 4개월째 갑상선암 선고받아
“하지만 연예인은 한번 대중과 멀어지면 다시 가까워지기가 힘들어요. 자괴감마저 들었죠. 이미 주변 관계가 허물어졌기에 외로웠고요. 그러던 중 지금의 아내를 만났어요. 아내가 없었다면 제 삶은 또다시 척박해졌을지도 모릅니다.”
열네 살 연하 아내와의 결혼생활은 그에게 새로운 위안이고 기쁨이었다.
“아내는 가장 든든한 지원군이에요. 제가 영원히 노래하는 사람으로 남길 원하죠. 어쩌면 그 때문에 남을 위한 노래가 아닌, 제 노래를 다시 하게 됐는지도 몰라요.”
하지만 행복은 오래가지 못했다. 갑작스레 찾아온 병마가 그의 발목을 붙든 것이다. 지난 2007년 이유 없이 몸이 피곤하고 목이 가라앉는 듯해 정밀검사를 받은 결과 양쪽 갑상선에 종양이 생긴 걸 알았다. 뼈로 전이되기 직전 발견한 게 다행이지만 가수에게는 치명적이었다. 수술 후 1년간 목소리가 잘 안 나올 것은 물론이고, 전처럼 노래를 부를 수 있을지 아무도 장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내는 당시 임신 4개월이었다.
“‘왜 하필 나일까’ ‘왜 하필 갑상선암일까’ 그런 생각을 수차례 했어요. 미국 친정에서 출산준비를 하던 아내에게는 단순한 혹이라고만 둘러댔죠. 동료들에게도 말하지 않았고요. 처음엔 절망했지만 누굴 원망한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니 담담하게 받아들였어요. 그리고 가수로서 마지막 음반이 될 수 있다는 생각에 녹음작업을 시작했어요. 제가 가장 좋아하는 곡, 사람들이 저를 기억할 수 있는 곡으로….”
수술은 성공적이었지만 결국 음반작업은 조금 미뤄야 했다. 그러는 동안 아이가 태어났다.
“아내가 그러더라고요. 다 늙어서 시험관 아기로 어렵게 낳았는데 아프면 어떡하냐고, 건강해야 한다고. 그때 정신이 번쩍 들더라고요. 건강검진도 열심히 받고 있어요(웃음). 상처가 아물어도 흉터를 보면 다친 기억이 나는 것처럼 암 수술은 제게 평생 아픈 기억이 될 겁니다. 평생 약을 먹어야 하지만 어떻게 보면 다행이구나 싶어요. 흐트러지거나 교만할 때, 혹은 나약해질 때마다 저를 바로 세워줄 계기가 될 테니까요.”
그는 약병을 보여줬다. 호르몬제를 먹지 않으면 반나절 이상 버티지 못할 만큼 힘들지만 약을 먹을 때마다 “그래도 이만해서 감사하다”는 말을 되뇐다. 두 살배기 아들에 대해 묻자 지나치리만큼 담담하던 그가 환하게 웃었다.
“두 달 전 미국에서 왔는데 참 예뻐요. 음악에 재능이 있어요. 한 번 들려준 멜로디를 정확하게 기억하고, 투정 부리다가도 음악을 틀어주면 금세 해맑게 웃어요. 아내는 골프선수를 시키고 싶다는데 운동을 할지, 공부를 할지, 저처럼 노래를 할지 모르겠네요. 성장하는 동안 건강한 모습으로 지켜보고 싶어요.”
현재 중장년층을 위한 음악전문 포털사이트를 운영 중인 그는 “하얗게 센 머리카락에 청바지를 멋스럽게 차려입고 젊은이 못지않은 감각으로 노래하는 가수가 되고 싶다”고 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음악적 영감이 떠오른다. 사무실 책장에는 수북이 쌓인 악보뭉치가 주인을 기다리고 있다.
“음악에 대한 도전의식 같은 건 없어요. 그저 제자리에서 묵묵히 최선을 다하는 거죠. 간혹 가수들에게 ‘이거 어때?’ 하고 악보를 내밀면 ‘빠르고 신나는 곡은 없어?’ 하고 되물어요.
요즘은 전주, 간주, 후주도 필요없대요. 빠르고 격정적인 멜로디, 직설적인 가사만 찾더라고요. 으싸으싸하는 분위기도 좋지만 때로는 감흥에 젖는 것도 필요한데….”
강인원은 끝으로 “아름다운 멜로디와 노랫말처럼 살지는 못했지만 지금의 삶을 후회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파란만장했던 지난날을 ‘쉬는 시간’이라고 표현해요. 미련 두지 않죠. 올해로 데뷔한 지 30년 됐는데, 이제는 어떤 일이 있어도 쉬지 않을 거예요. 추억을 공유하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 노래할 겁니다. 일흔 살 즈음 되면 그땐 ‘노래가 제 인생의 전부예요’라고 떳떳하게 말할 수 있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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