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객 여러분, 버자이너가 한국말로 뭔가요?”라고 물을 때까진 양반이었다. 털, 자위, 신음, 성폭행, 오르가슴…. 극이 진행되면서 무차별로 쏟아진 섹슈얼한 주제에 관객은 마른침을 꼴깍 삼켜야 했다.
1인극이던 ‘버자이너 모놀로그’가 8년 만에 토크쇼 형식으로 돌아왔다. 미국 사회운동가이자 극작가인 이브 엔슬러가 여성 2백여 명의 성기에 대한 인터뷰를 토대로 만든 작품이다. ‘맘마미아 3인방’인 이경미·전수경·최정원이 수다로 여성의 ‘거기’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냈다.
“섹스는 삽입이 아닌 소시지 하나 먹는 거야.”
연극은 크게 두 가지 맥락으로 진행된다. 3인방은 배우로서 7세부터 70세까지 여성의 성기에 대한 아픔을 연기하다가, 자연인으로 돌아와 유쾌하게 본인들의 섹스라이프를 들려준다. 화끈한 대사 중 단연 눈길을 끈 건 이경미(48)의 소시지 발언. 카리스마와 소름 돋는 연기로 관객의 가슴에 깊은 인장을 새겼던 그를 대학로에서 만났다.
“애드리브 부분은 다 사실이에요. 연극하기 전 셋이서 진실만 말하자고 약속했거든요. 그래야 관객도 마음의 문을 열 테니까요. 극에서 갑자기 ‘몇 살 연하까지 만나봤느냐’고 물었을 때가 제일 당황스러웠어요(웃음).”
연극의 흐름과 순서는 정해져 있지만 돌발질문과 그에 대한 답변은 대본에 없다. 출연배우 셋이 20년 지기라 당황스러운 상황도 웃어넘길 수 있었다고. 그는 23세에 결혼해 딸을 낳고 바로 이혼한 뒤 여태 싱글맘으로 살았다는 이야기로 눈길을 끌었다.
“대학 4학년 때 연애를 하다가 결혼했어요. 저는 모든 게 명확하고 인연에 끌려다니는 스타일이 아니에요. 좋은 만남이었지만 사랑이 식어서 헤어지기로 했죠. 한데 입덧을 하기 시작했어요. 왠지 아이를 꼭 낳아야겠다는 끌림에 그 친구를 다시 만나 결혼했죠. 아이를 낳고 함께 사는 동안은 친구 같았어요. 하지만 노력을 해도 잘 안돼서 얼마 지나지 않아 헤어졌죠.”
이후 그는 다시 결혼하지 않았다. 결혼을 반대하는 건 아니지만 꼭 해야 할 이유도 찾지 못했다. 무엇보다 상대와 가족의 비중이 3:7로 뒤바뀐 한국의 결혼문화가 부담스러웠다. 하지만 연애는 열심히 했다. 만날 때마다 마음을 다했고 좋은 인연으로 마무리지었다. 외모를 따지지 않는데도 공교롭게 모두 미남이었다고.
“나이를 먹으면서 사랑이 더 깊어지는 것 같아요. 사람에 따른 차이가 아니라 제가 그렇게 변하는 것 같아요. 나이 때문에 20, 30대의 사랑을 못할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아요. 첫사랑은 고등학교 때 만난 초등학교 동창생의 오빠였고, 마지막 사랑은 3년 전 만난 열네 살 연하의 남자였어요. 마지막 친구는 서로 첫눈에 반해 정말 좋아했는데, 그 친구의 친구가 부모님께 일러서 헤어지게 됐죠(웃음).”
성품, 외모, 말주변, 지성…. 사람의 매력은 여러 요소의 결합으로 결정된다. 이씨가 생각하는 본인의 매력은 ‘귀여운 섹시함’. 그는 “섹시함이란 성적인 매력이 아닌 본인에게 빠져들게 하는 뭔가”라며 “여자든 남자든, 특히 배우라면 무조건 섹시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의 이상형 역시 섹시한 남자.
“원래는 이상형이 없었는데 최근에 생겼어요. 결론은 위트가 넘치는 살짝 못된 남자. 털털하고 곰탱이처럼 웃긴 남자 말고 살짝 못되게 웃기는 사람 있잖아요. 그런 사람이 섹시해 보여요. 요즘에는 일에 바쁘다 보니 연애에 관심이 덜 갔는데 다시 연애할 타임이 왔나봐요. 지난번 대구에서 한 남자를 보는데, 그 사람의 매력이 보이더라고요. 청신호가 왔으니 ‘걸리기만 해봐라’ 하고 있죠(웃음).”
그는 ‘연애 능력자’다. 지금껏 한 번도 차인 적이 없다. “단 한 번도요?” 재차 확인해도 같은 답이다. 밀고 당기기? 카리스마? 비결이 뭘까.
“여성으로서 매력을 잃지 않으면 사랑의 불씨는 언제든 태울 수 있어요. 결혼하고 나이 들어도 긴장감을 주는 게 중요해요. 성형하고 마사지하며 외모를 가꾸는 것뿐 아니라 태도가 지나치게 편안해져서는 안 된다는 거죠. 또 관리와 구속을 멀리해야 하고요.”
“‘아직 못 느꼈거든, 잠깐만 있어봐’라고 말하세요”
‘버자이너 모놀로그’는 여성의 성을 이야기한다. 아는 내용이라도 드러내서 말하기 힘들었던 주제를 다른 이와 공유한다는 건 생경한 경험. 이씨는 “연극으로 큰 변화를 기대하지 않는다. 다만 여성이 성에 좀 더 자유롭고 당당해졌으면 한다”고 말한다.
“이론과 생각은 달라요. 여성과 남성이 평등하다지만 ‘걸레’ ‘창녀’라는 표현을 들먹이며 여성의 성적 주체성을 비아냥거리죠. 특히 유교문화의 영향으로 우리나라 여성은 더 그래요. 제가 하는 대사 중에 ‘수용성이라는 이름으로 여성을 약자로 설정하는 것은 곤란하지’라는 부분이 있어요. 모양은 수용적이지만 섹스에 소극적이거나 연연할 필요가 없다는 거죠. 나 같으면 과거를 걸고넘어지거나 그러면 가만 안 두지(웃음).”
남성의 성은 지나치게 까발려진 반면 여성의 성은 음지에 머물렀다. 같은 패턴의 섹스라이프라도 성별에 따라 전혀 다른 평가를 받았다. 이경미는 “섹스할 때부터 당당해야 성에 대한 태도도 그렇게 변한다”고 말한다.
“오르가슴 못 느끼는 여성이 많다고 알려졌죠. 가짜 신음을 내는 오르가슴 연기는 한번쯤 해봤을 거예요. 오르가슴은 사랑의 행위를 확인시켜주는 현상이에요. 할례도 하지 않았는데 그걸 못 느끼며 살아서 되겠어요. 일단 친구들의 도움을 받을 필요가 있어요. 내가 느끼는 게 오르가슴인가 아닌가, 이런 이야기를 공유하며 성생활을 진단하는 거죠. 그리고 상대방과 대화하고 원하는 걸 요구해야죠. 만족을 못했다면 ‘아직 못 느꼈거든, 잠깐만 있어봐’ 이렇게 신호를 하거나. 싫어하는 행위에 대한 생각도 나눠야 서로 감정이 상하지 않죠. 저는 ‘자기야, 나 귀는 싫어’라고 이야기해요(웃음)”
연극에서는 자위가 오르가슴을 느끼는 데 도움이 된다는 내용도 나온다. 매트 위에서 성기를 보거나 오르가슴을 위해 자위하는 섹스 워크숍의 이야기도 있다. 프리토크에서 그가 “마지막 자위 언제 했어?”라고 돌발질문을 던졌을 때는, 두 배우가 웃음으로 답변을 얼버무리기도 했다.
“남성은 당연히 자위를 한다고 생각하는 반면 여성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여성의 자위는 드러내서 이야기하지도 않고요. 여자가 아이 낳는 동물도 아니고 남성과 마찬가지로 오르가슴에 대한 욕구가 있는데, 자위는 자연스러운 거죠. 남자친구 없을 때는 자위하면 되지만 요즘은 강아지들이랑 노느라 별로 생각이 안 나요. 왜 감정적인 상태에 따라 욕구가 달라지잖아요(웃음).”
그렇다고 밑도 끝도 없이 섹스에 ‘쿨’해지라는 것은 아니다. 이경미는 자유로운 영혼이 되려면 자신의 말과 행동과 경험에 책임을 질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사랑과 배려가 충만할 때 행복한 섹스가 이뤄진다고 강조한다.
“테크닉보다 마음이 맞아야 좋은 섹스인 거 같아요. 나쁜 섹스는 차근차근 과정을 밟는 것처럼 보였으나, 처음부터 끝까지 혼자만 좋은 섹스. 결과적으로 오르가슴을 느꼈느냐 아닌가는 별로 중요하지 않아요. 스트레스나 컨디션 따라 다를 수 있으니까. 역시 대화로 맞춰가는 배려하는 섹스가 즐겁고 행복하죠.”
‘귀찮다’ ‘너무 안 한다’ ‘매력을 못 느낀다’. 집집마다 섹스라이프도, 그에 대한 불만도 제각각이다. 이씨는 40대가 20대보다 더 매력적인 섹스를 할 수 있다고 말한다. 서로 좋은 점 싫은 점을 알다 보면 성숙하고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을 수 있다는 것.
이경미는 3인방의 맏언니이자 뮤지컬계의 대모다. 이혼 직후인 86년 국내 최초 뮤지컬 격인 ‘아가씨와 건달들’로 배우 생활을 시작했다. 그간 ‘그리스’ ‘웨스트사이드 스토리’ ‘맘마미아’ 등 굵직한 뮤지컬에 출연하는 것은 물론 MBC 일일시트콤 ‘거침없이 하이킥’으로 안방극장에도 얼굴을 알렸다. 그는 25년 넘게 싱글맘으로 사는 동안 누구보다 씩씩했다.
“아이 낳고 이혼한 뒤 집에서 노는데, 9개월쯤 지나 아버지가 나가라고 하시더군요. 종로에서 ‘아가씨와 건달들’ 포스터를 보고 오디션에 응해 합격했어요. 어릴 때부터 가무를 좋아하고 무용 전공에 연극동아리를 했거든요. 그 뒤로 부모님이 도와주셔서 일을 할 수 있었어요. 싱글맘은 아이 때문에 일을 못하고 그래서 경제적으로 힘든 악순환을 밟는데, 저는 부모님 덕에 운이 좋았죠.”
그렇게 키운 딸은 간호사로 성장했다. 모녀는 서로의 남자친구 이야기를 털어놓고 지낸다. 초등학교 때는 아버지의 자리를 채워주려 남자친구와 주말마다 놀이동산을 다녔는데, 딸이 “다른 집 아빠는 주말에 집에 있는다”고 말해 그만두기도 했다고. 그는 누구보다 딸이 스스로에게 당당하기를 바란다.
“아이에게 대놓고 성생활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는 않아요. 오히려 당황할 수 있으니까요. 자세한 성교육은 학교에서 받잖아요. 성인이 된 이후 지나가는 말로 ‘아이 가지지 않게 조심하라’라고 말한 적은 있죠.”
그는 성에 대한 사회적 분위기를 바꾸는 출발은 엄마라고 말한다. 딸에게는 거기가 소중한 곳이고 자신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는 이야기를, 아들에게는 남녀의 성은 동등하게 아름답다는 이야기를 들려줘야 한다는 것. 성에 대한 이야기를 누군가와, 특히 내 자녀와 나누기란 쉽지 않을 터. 이씨는 “어머니와 딸아이, 3대가 함께 손잡고 ‘버자이너 모놀로그’를 보면 서로 좀 더 가까워질 수 있을 것”이라며 “눈 딱 감고 연극부터 보라”며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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