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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기사

유인경의 해피토크

몸으로부터 날아온 독촉장

2009. 02. 10

몸으로부터 날아온 독촉장

조현계, 덕유산의 새벽, 10호, 코튼 위에 워터칼라, 2007


지난해 말부터 청구서가 슬슬 날아오기 시작했다. 일종의 독촉장이었다. 그런데도 계속 모른 척하자 올 초 강제집행명령서가 떨어졌다. 세금이나 카드빚 이야기가 아니다. 나의 몸 이야기다.
언젠가 한 선배가 “40대 중반 이후에는 그동안 내 몸과 건강을 어떻게 보살폈는지에 대한 청구서를 받기 시작한다”고 했는데 그 말이 맞았다. 지난해 몇 번의 감기와 지독한 몸살, 경미한 위경련 등 내 몸이 경고를 보냈는데도 모르는 척하고 무식하게 버티다가 1월 초 드디어 응급실에 실려가 입원을 했다.
“알부민 수치 등이 거의 70, 80대 할머니 수준이어서 깜짝 놀랐어요. 대체 몸을 어떻게 하신 건가요?”
내 조카뻘로 보이는 젊은 여의사는 한심한 듯 나를 보며 걱정을 했다.
입원을 하자 주위 사람들이 경악했다. “죽어도 안 아플 것처럼 건강해보이더니 무슨 일이냐”는 반응부터 “지금껏 그렇게 바삐 살면서 여태 버틴 것이 기적이다” 등의 논평이 줄을 이었다.
사흘 밤을 꼬박 새워도 반나절만 자면 벌떡 일어나고, 비행시간만 15시간이 넘는 먼 곳에 여행을 다녀와도 시차를 느끼지 않고, 아무리 많이 먹어도 속이 더부룩하다는 느낌이 뭔지 모르고, 급히 먹어 체하면 묵직한 음식을 먹어 이식치식으로 다스리던 내가 왜 이렇게 부실하게 됐을까.

잃어버린 뒤 깨닫는 건강의 소중함

처음엔 감기로 시작했다. 콧물이 나고 가래도 끓고 으슬으슬 추운 것도 같았다. 보통 비타민을 부지런히 먹고 약국에서 약을 사다 먹으면 길어도 1주일이면 작별을 고하던 감기가 악질 사채업자처럼 내 몸에 들어와 나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조금 쉬면 괜찮아지나 싶다가 조금 무리하면 다시 증세가 악화되고…. 감기를 달고 사는 나에게 매일 콜라를 몇 잔씩 마셔도 치아가 튼튼하고 새벽까지 술을 마셔도 쌩쌩한 조영남씨는 이렇게 말했다.
“넌 감기가 아니라 숙환인 것 같다. 네가 죽으면 감기로 죽었다고 해야 할걸.”
아무튼 감기가 너무 악화되자 몸도 몸이지만 모든 의욕이 사라졌다. 연말연시에 대학 동창들을 만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만사가 귀찮았다. 생방송 도중에도 태연하게 문자메시지를 날리던 내가 안부를 묻거나 스케줄을 확인하는 지인들의 문자를 무심히 넘기고, 외국에서 모처럼 귀국한 선배들에게도 전화로 안부인사를 대신했다. 더욱 무서운 것은, 정말 죽을 만큼 아프고 괴로운 상황에서도 늘 먹고 싶은 메뉴를 떠올리던 내가 식욕까지 잃었다는 것이었다.
결국 4박5일간 병원에 입원해 온갖 검사를 다 받았다. 병원 측은 매일 아침저녁으로 내 피를 뽑고 대소변까지 요구했다. 게다가 겨우 잠들만 하면 간호사가 나타나 주사를 놓고, 담당 의사들이 우르르 몰려와 나를 훑어보고는 사라졌다.

몸으로부터 날아온 독촉장

조현계, 수국, 10호, 코튼 위에 워터칼라, 2008


하얗고 깨끗한 시트가 깔린 정갈한 병원 침대에 누워 조용하고 차분하게 인생에 대해 생각해보려던 막연한 입원 계획은 산산조각났다. 화장실 한번 가려고 해도 주렁주렁 달린 링거 줄을 끌고 다녀야 했고, 어렵게 구한 2인실을 함께 쓰는 옆 환자의 일거수일투족에 신경을 써야 했다. 그뿐인가. 보호자라고 나타난 남편은 “장염 증세도 있고, 아직 피 상태가 엉망이고…”라는 의사의 진지한 설명에 천진난만한 얼굴로 “그럼 언제 죽나요?”라고 물어 내 염장을 질렀다.
“상태가 매우 좋아졌다”고 밝은 표정을 지은 덕분에 닷새 만에 퇴원할 수 있었다. 낙천주의자 올림픽이 있다면 금메달감인 내 딸은 “엄마, 그래도 이번 기회에 이것저것 검사했는데 총체적 부실이긴 하지만 암이나 다른 중병이 아니니 얼마나 다행이야?”라며 즐거워(?)했다.

스트레스의 근원은 착각과 욕심



내가 결근한 사이 우리 신문은 더욱 근사하게 나왔고 내가 출연하는 아침 생방송은 차질 없이 방영됐으며 도우미 아줌마 덕분에 집안일도 문제가 없었다. 늘 신경 쓰고 스트레스 받던 요인들은 결국 나의 착각이자 욕심이었을 뿐, 나의 존재 이유가 아닌 것은 물론 큰 의미도 없었던 것이다. 나는 그동안 자신을 방전하고 소모하기만 했지 충전하거나 다독거려주지 않았다. 결국 참고 참던 몸이 반항하며 청구서를 보낸 것이다.
내 몸이 망가진 이유는 부질없는 나의 일과 잔돈에 대한 졸렬한 욕심과 몸에 대한 학대라는 것이 자명하니, 이제 몸에게 아부하고 잘 보살필 일만 남았다. 그런데 그게 또 쉬운 일이 아니다. 하염없이 몸에게 비굴해져 조금만 피로해도 일을 중단하고 몸에 좋다는 각종 건강식품에 눈독을 들이는 일시적인 조치만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다.
내가 아는 고령의 할머니 두 분이 계시다. 한 분은 80대인 지금도 매일 노래교실에 나갈 만큼 정정하고 흰머리도 거의 없다. 그렇다고 장기 보약 복용자나 헬스클럽 마니아도 아니다.
“난 참 단순한 성격이거든요. 누가 뭐가 좋다고 해서 따라 하면 부작용이 없는 한 계속해요. 검은콩과 검은깨가 흰머리 예방에 좋다기에 지난 20여년간 꾸준히 먹었더니 정말 흰머리가 안 나요. 또 중년 여성에겐 수영이 좋다는 얘기를 듣고 동네 수영장에 다니는 것도 30년째인데 그 흔한 신경통도 안 앓았어요.”
75세의 다른 할머니는 매일 새벽 기도에 나가고 밤 12시가 돼야 집에 돌아올 만큼 바삐 산다. 홍삼 예찬론자인 그분이 내게 추석선물로 홍삼액을 선물했는데, 나는 몇 번 먹다 말았다.
“새벽 기도도 홍삼 복용도 매일 꾸준히 해야 효과가 있어요. 세상에 공짜가 어디 있어? 기도하는 사람이 수백만 명일 텐데 하느님도 자꾸자꾸 기도를 해야 들어주시듯 아무리 몸에 좋은 것도 영향을 발휘하려면 적어도 몇 달은 계속 투여해야지.”
골골거리며 무조건 오래 살 생각은 없지만 살아 있는 동안은 건강하고 싶다. 나도 이 할머니들처럼 무엇이건 꾸준히, 착실하게 노력해야겠다.
그런데 참 신기하고 억울한 건 피를 한 바가지 뽑히고 1주일간 밥도 못 먹고 토하는 고생을 했건만 체중은 그대로라는 사실이다. 얼굴 살은 확실히 빠졌는데 그 살이 내려와 뱃살로 정착한 걸까. 남들은 아프면 다이어트가 절로 된다는데 왜 난 그 혜택(?)도 못 받는 걸까. 청구서에 지불한 비용이 만만치 않은데….




몸으로부터 날아온 독촉장

유인경씨는…
경향신문사에서 선임기자로 일하며 인터뷰 섹션을 맡아 흥미로운 사람들을 만나는 즐거움을 만끽하고 있다. 직장 여성에 관한 책을 준비 중인데 성공이나 행복을 위한 가이드북이 아니라 웃으며 타산지석으로 삼을 수 있는 실수담이나 실패담을 담을 예정이다. 그의 홈페이지 (www.
soodasooda.com)에 가면 그가 쓴 칼럼과 기사를 읽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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