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인숙, 초대, 장지에 채색, 90×53cm, 2008
난 아마도 하늘나라에 가서 죄를 심판받는다면 ‘말만 번지르르하게 한 죄’를 선고받을 것이다. 신문기자란 직업을 가진 덕분에 얄팍한 정보에는 밝아 이것저것 아는 척도 많이 하고 매우 정의로운 척하며 살지만 실생활에선 무능하기 그지없다는 사실을 고백한다.
아직도 운전면허가 없다거나 잘 놀고 뻔뻔해 보이는 겉모습과 달리 술·담배·춤·노래·운동 등 남들이 생활의 기쁨을 위해 즐기는 일들을 전혀 못하는 것은 그렇다 쳐도, 직장생활을 20여 년 넘게 해놓고 한 번도 건강검진을 받지 않았다고 했더니 주위사람들이 놀라는 것이 아니라 거의 원시인을 보듯 경멸에 가까운 눈빛을 보였다.
그동안 아이도 낳고, 천식에 걸려 몇 번 병원을 드나들긴 했지만 제대로 된 건강검진은커녕 여성들이 필수적으로 하는 유방암·자궁암 검사도 받지 않았다. 회사에서 해마다 무료로 검진을 해주는데 그때마다 아침에 아무 생각 없이 밥이나 커피 등을 먹어 검진을 받지 못했다. 또 항암식품이라는 마늘·양파·당근·파 등을 즐기므로 “만약 내가 암에 걸리면 한국은 물론 세계 암예방협회 및 음식관련 단체들을 다 고소할 거야”라는 뻔뻔한 소리만 했다.
“기계도 50년 쓰면…” 친구의 조언에 난생처음 받아본 건강검진
그렇게 반백 년 가까운 인생을 보내고서야 종합병원에 가서 처음으로 건강검진이라는 것을 받았다. 지난 봄 감기를 오래 앓고 난 뒤-감기도 늙은 바이러스가 침투했는지 두 달 동안 느리게 차근차근 온몸을 뒤지다가 떠났다- 갑자기 공포가 엄습했다. 모든 큰 병이 감기증세로 시작한다는데 이게 단순한 감기가 아닌 게 아닌가. 또 한 역술가가 전화를 걸어 “올해는 아주 건강이 나쁜 해이니 특히 건강에 신경 쓰세요. 수술이라도 해야 할지 몰라”라는 친절한 조언까지 해주니 더더욱 몸이 아픈 것 같았다. 치아까지 말썽을 일으켜 캐러멜을 씹다가 금으로 떼운 부분이 두 개나 날아갔다. 가슴도 괜히 찌릿찌릿한 것 같고 생리가 아닌데도 아랫배에서 미세한 통증이 느껴지기도 하고….
친구들끼리 만나도 예전과 대화가 너무 달랐다. 전에는 자녀교육에 관한 문제나 집 옮기기, 재테크, 연예인 스캔들과 최근에 산 쇼핑리스트 등등이 소재였는데 요즘은 모두 건강이다. 아무개는 자궁적출수술을 받았다, 아무개는 위암이란다, 갑상선 수술을 했다, 폐경기라 힘들다, 담석이 몇 개 있어 레이저 치료를 받아야 한다 같은 식이다. 흰머리야 염색으로 감추고 노안은 돋보기를 슬쩍 끼면 되고 주름살도 견딜 만한데 나도 모르게 내 몸 안에서 각종 병이 깊어가고 여기저기 고장을 일으키는 걸 모른 척할 수는 없지 않은가. 조금만 위에 통증이 느껴져도 위내시경 검사를 받는다는 친구는 특히 건강검진의 필요성을 누누이 강조했다.
“기계도 50년가량 쓰면 녹슬고 마모되고 고장나는데 어쩌면 몸을 그렇게 학대할 수 있니. 특히 넌 새벽부터 밤늦도록 종종거리고 다녀 과로하는데다가 술·담배는 안 해도 스트레스도 많은 직장이고 식습관도 좋지 않은데 말이야. 무조건 오래 사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살 때까지 건강하게 사는 게 중요한 거야. 제발 몇 시간만 투자해봐.”
그래서 드디어 건강검진을 받았다. 병원에 가서 놀란 건 검진을 받으러 온 사람들이 너무 많다는 사실이었다. 해마다 정기검진을 받는 성실하고 지혜로운 분들이 그만큼 많나 보다. 가운으로 갈아입고 엑스레이, 초음파, 채혈, 소변검사, 시력과 청력검사에 위내시경까지 3시간 가까이 샅샅이 뒤졌다. 물론 최첨단장비가 갖춰진 곳에서 뇌파 촬영까지 하는 고급검진이 아니라 가장 단순한 코스이긴 했지만 그 시간이 내겐 너무 길고 힘들고 무서웠다.
초음파검사를 하던 의사는 “담석이 2개 있군요. 뭐 별건 아니지만 나중에 문제가 될 수도 있어요”라고 애매모호한 말을 했다. 그토록 다채로운 음식을 먹어 혹사시켜놓고도 위 내시경을 할 때는 정말 고통스러웠다. 식도에 뭔가 들어가는 이상한 느낌도 싫었지만 내시경이 들어가 보여주는 위 내부 모습이 영화를 보는 것 같았다. 눈 다래끼만한 조그만 폴립(용종: 점막 일부가 두꺼워져 생긴 돌기)을 즉석에서 쏘아 없애는 놀라운 장면을 목격하면서 그렇게 불량음식을 들이 부어대고 폭식을 해도 이만큼 건강하게 버텨준 나의 위에 감사했다. 병원 측은 위내시경도 했고 12시간 정도 금식을 했으니 점심은 죽으로, 그리고 저녁도 부드럽고 가볍게 하라고 했지만 나는 위가 비교적 무사한 것을 자축하며 그날 밤 고기를 먹었다. 남편에게 굉장히 힘없는 목소리로 “아직 잘 모르지만 커다란 담석이 있다는군”이라고 말했더니 역시 그다운 답을 해서 내 속을 뒤집어놓았다.
“그거 맥주 많이 마시면 싹 사라져. 하루에 맥주 1000cc씩만 꾸준히 먹으면 다 녹아버린다니까.”
걱정을 해주기는커녕 술 한 방울도 안 마시는 마누라에게 이런 조언을 하다니 정말 남편이 아니라 웬수다. 원래는 닷새 후쯤에 검진결과를 알려주기로 했는데 갑자기 병원에서 전화가 왔다. 유방암 검사 판독이 늦어졌다며 4일 늦게 오라는 것. 혹시 나의 검진결과에 무슨 문제가 있는 게 아닌가 싶어 걱정했더니 전체적으로 판독이 늦어진다고 했다.
검진결과를 기다리는 동안 전혀 상상력이 풍부하지 않은데도 별별 생각이 들었다. 암이면 어떻게 하나, 수술은 언제쯤 받을까. 또 어느 병원에서 어떤 의사에게 받아야 하나, 혹시 이런 간단한 기초건강검진만으로는 나타나지 않는 병이 숨겨져 있는 것은 아닐까, 직장은 어떻게 하고 방송은 또 어떻게 하나….
혹사당해온 몸이 반란 일으키지 않도록 이제부터라도 관리를…
드디어 검진 결과를 들으러 병원에 갔다. 친절하고 착하게 생긴 남자 의사는 보고서처럼 만들어진 나의 자료를 보며 이렇게 말씀해주셨다.
“일단 암은 없습니다. 위에 역류성 위염 증세가 보이고 갑상선도 약간의 결절이 보이니 전문의에게 진료를 받으시는 게 좋을 것 같고요. 다른 건 괜찮은데 문제는… 비만이라는 겁니다. 과체중이 중년에는 다른 병을 유발할 가능성이 높으니 이젠 식생활 조절과 운동을 꼭 하셔야 합니다.”
검진을 위해 한 끼를 완벽히 굶었는데도 비만이라니…. 최근에 감기를 독하게 앓은 후 체력이 약해진 것 같아 이것저것 챙겨 먹고, 야식에 탐닉한 결과가 이렇게 똥배와 비만으로 나타난 것이다.
아무튼 걱정했던 암이 아니라는 것이 너무 기쁘다. 또 위염 등 그 밖의 질환들도 의사선생님 말씀 잘 듣고 약 잘 먹으면 회복되겠지. 그런데 생전 처음 시작한 이 검진을 이젠 6개월에 한 번, 혹은 적어도 1년에 한 번씩 해야 한다니 벌써부터 가슴이 답답해진다. 그동안 마구 학대한 나의 몸이 더 이상 반란을 일으키거나 복수를 하지 못하게 각종 아부를 해야겠다. 몸에 좋다는 것도 먹여주고, 마사지도 해주고…. 나이 드는 건 건강을 잃어가고 돈을 퍼부어가는 과정이란 걸 실감했다. 퍼부을 돈이라도 많으면 좋으련만….
※ 유인경씨는…
경향신문사에서 선임 기자로 일하며 인터뷰 섹션을 맡아 흥미로운 사람들을 만나는 즐거움을 만끽하고 있다. 직장 여성에 관한 책을 준비 중인데 성공이나 행복을 위한 가이드북이 아니라 웃으며 타산지석으로 삼을 수 있는 실수담이나 실패담을 담을 예정이다. 그의 홈페이지 (www.soodasooda.com)에 가면 그가 쓴 칼럼과 기사를 읽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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