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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시련 그 후

‘학력 위조 파문’으로 맘고생한 정덕희

기획·김명희 기자 / 글·조정현‘자유기고가’ / 사진·조영철 박해윤 기자

2008. 05. 23

재치 있는 말솜씨와 ‘행복하소서’라는 유행어로 많은 사랑을 받았던 정덕희 교수. 그는 지난해 예기치 않은 학력 위조 파문으로 한 차례 고비를 맞았다. 힘든 시간을 보내며 지난 인생을 돌아보게 됐다는 그를 만났다.

‘학력 위조 파문’으로 맘고생한 정덕희

서울 서초구 우면동에 자리 잡은 정덕희 교수(54)의 집 앞에는 커다란 밴이 서 있다. 그는 이동거리가 많은 연예인들이 타고다니는 밴을 벌써 두 번이나 바꿨다고 한다. 전국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며 강연을 하는 탓에 자동차 엔진이 견뎌내지 못한다는 것. 지난해 여름 ‘학력 위조 파문’ 이후 방송활동을 중단했지만 여전히 그의 ‘행복 강의’를 찾는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모든 것에 감사해요. 지난해 ‘고난’을 겪은 후 제가 제일 많이 쓰는 단어가 ‘감사’라는 말이에요. 이렇게 오랜만에 인터뷰를 하니까 그동안의 일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가며 이 자리에 다시 서게 된 게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 새삼 생각하게 되네요.”

“고의로 학력 속인 적 없지만 잘못 떠도는 학력 적극적으로 고치지 못했던 건 불찰”
그에게 시련이 불쑥 찾아온 것은 지난해 8월 신정아 사건을 시작으로, 유명인의 학력 위조 파문이 걷잡을 수 없이 번질 때였다. 한 언론이 그의 학력에 대해 “방송통신대와 동국대학교 교육대학원(석사)을 졸업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이를 조사해본 결과 최종 학력은 예산여고 졸업이었고, 학력에 기재된 방송통신대는 다닌 적이 없는 것으로 확인됐다”고 보도하면서 그도 이 사건에 휘말리게 됐다. 당시 그는 “학력이 잘못 알려진 것은 사실이지만 스스로 이력을 위조한 적은 없다”고 해명했으나 의혹에서 벗어나기는 쉽지 않았다고 한다.
“전혀 생각지 못했던 일이었어요. 학력에 대해선 늘 솔직했거든요. 이 자리를 빌려서 다시 한번 정확하게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제가 명지대 사회교육원에 제출한 이력서에는 거짓이 없었다는 거예요. 강의를 맡을 때도 ‘저는 대학에 다니지 않았습니다’라는 말을 분명히 했거든요. 제 의지와는 상관없이 잘못 떠도는 이력을 적극적으로 고치지 않았던 게 잘못이었죠. 그러나 고의는 아니었어요. 용기가 부족했던 거죠. 사실 이름이 알려지면서 그럴듯하게 포장을 해주겠다는 제의도 받았지만 모두 거절했어요. 내세울 학력이 없어도 멋있게 사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자존심’이라고 믿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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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력 위조 파문’으로 맘고생한 정덕희

평범한 주부이던 그는 남편 사업이 어려워지자 생활전선에 뛰어들었다. 세일즈맨으로 활동하던 그는 사람을 끌어당기는 특유의 말솜씨로 가는 곳마다 환영을 받았다고 한다. 주변에서는 강연을 해볼 것을 권했다. 그는 직접 홍보 전단지를 제작, 기업체 5백곳에 돌렸고 세 군데서 강연 요청이 들어왔다고 한다. 그렇게 시작한 강의가 선풍적인 인기를 끌게 됐고, 그는 97년 한 방송 프로그램에서 주부를 대상으로 강의하면서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이 보통사람들의 삶을 주제로 강연을 했기 때문에 학력은 중요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학사, 석사, 박사 되기 어렵죠. 안 갖춘 것보다는 갖춘 것이 낫고요. 하지만 좋은 학력 믿고 그 자리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 많잖아요. 저는 배운 게 없으니까 콤플렉스를 떨쳐버리기 위해 많이 노력했어요.”

“단점보다 장점을 먼저 살피다보면 세상에 미운 사람은 없어요”
그는 파문에 휩싸인 후 마음을 비우기 위해 아들과 함께 설악산으로 향했다. 산에 오르기 전 식사 때가 돼 근처 단골 식당에 갔지만 들어가지 못했다고 한다. 사람들이 많은 곳에 나설 용기가 나질 않았던 것이다. 아들을 설득해 옥수수로 허기를 채우면서 그가 생각한 것은 단 하나.‘억울하다’며 남의 탓을 하기보다는 ‘내 탓’이라고 여기자는 것이었다고.
“남의 탓이라고 생각할 때는 죽을 것만 같았는데 내 탓이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편안해지더라고요. 제 성격이 원래 유별나요. 무슨 일이건 내 마음에 들어야 안심이 되는 스타일이거든요. 남편과 아이들이 저를 위로하느라 애를 많이 썼지만 위로를 받으면서도 결국은 제가 스스로의 마음을 다스려야 해결이 되더라고요.‘내 안에 너 있다’가 아니라 ‘내 안에 나 있다’를 알게 된 거죠.”
그가 새벽 4시에 일어나 가장 먼저 하는 일은 ‘감사하다’고 혼잣말하는 것. 아침 햇살을 받으며 하루를 시작하는 것도 감사하고, 큰일 이후에도 자신을 믿어주는 이들이 있다는 것도 감사하고, 강의를 할 수 있다는 것도 감사하다고 한다.
TV에 등장하지 않는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학력 파문 이전이나 지금이나 생활에 큰 변화가 없다고 한다. 그가 가장 감사하는 부분이다. 명지대 객원교수로 강의하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강의 스케줄이 빡빡하다. 오히려 방송에서 그를 볼 수 없게 된 탓인지, 강의 제의도 많아지고, 청중도 많아졌다고.
어느덧 나이 쉰넷, 10년 넘게 전국을 돌아다니며 만난 수많은 사람과 함께 부딪치며 느낀 경험들은 그의 전 재산. 재미와 감동이 있는 강의의 밑바탕이다.
‘학력 위조 파문’으로 맘고생한 정덕희

“교육학을 전공하지 않았기 때문에 전문가의 강의와 달리,‘내 맘대로’강의예요. 제 인생의 큰 산을 넘고 보니 나이는 헛먹는 게 아니고, 그 자리는 쉽게 가는 게 아니더군요. 인생은 S라인이에요. 굴곡이 있다는 얘기죠. 좋은 일이 있으면 나쁜 일도 생기기 마련인 것 같아요. 어려움을 만났을 때 그것을 잘 극복한다면 한층 발전하는 인생을 맞이하게 될 것이고, 극복하지 못한다면 주저앉고 말겠죠. 그래서 감사한 마음으로 늘 그래왔듯 앞만 보고 열심히 살려고 해요.”
그는 인생이라는 여행에서 어려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 사람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고 싶다고 한다.‘희망’을 담은 에세이 ‘그럼에도 행복하소서’(가제)를 준비하고 개인 홈페이지(www.jungduckhee.com)를 운영하는 것도 모두 그 때문이라고.
“책을 쓰면서도 감사했어요. 제 이야기를 통해 많은 분에게 희망을 줄 수 있잖아요. 돌이켜보면 세상에는 억지로 되는 일이 없는 것 같아요. 청중들이 원할 때까지 감사한 마음으로 강의를 하다가 불러주는 이가 없으면 오래전부터 준비해두었던 사회사업에 전념할 생각이에요. 물 흐르듯 그렇게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게 이치니까요.”
그의 집 냉장고에는 20년째 같은 문구의 메모가 붙어 있다고 한다.‘오늘을 충실히 산다는 것은 지난 과거에 대한 가장 큰 반성이며, 다가올 미래에 대한 가장 큰 준비다’라는 문구가 바로 그것. 인터뷰를 끝내며 갑자기 누구나 부러워할 인맥을 관리하는 비법이 궁금했다. 비법은 간단했다. 도움을 받으면 잊지 않고 보답하려 하고, 사람의 단점보다는 장점을 보려 노력하는 것이 바로 그것.
“제가 안티가 많잖아요. 그런데 안티였던 분도 저를 만나면 친근감을 느낀대요. 만나기 전에는 ‘오버’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실제 제 성격인 것을 알게 되는 거죠. 비록 안티는 많지만 저는 미워하는 사람이 없어요. 사람마다 장점은 한 가지씩 있잖아요. 단점보다는 장점을 보다 보면 세상에 미워서 미치겠는 사람은 한 명도 없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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