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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leb 인생 3막

전문 집필가로 나선 전 남영비비안 사장 김종헌

기획·송화선 기자 / 글·오진영‘자유기고가’ / 사진·조영철 기자

입력 2008.04.23 17:03:00

지난 2003년 억대 연봉을 받는 CEO 자리를 내놓고 강원도 산골의 북카페 주인이 돼 화제를 모았던 김종헌 전 남영비비안 사장이 이번엔 전문 집필가로 나섰다. 평생 모아둔 지식의 창고를 풀어 일년에 한 권씩 책을 쓰겠다며 ‘인생 3막’을 시작한 김씨를 만났다.
전문 집필가로 나선 전 남영비비안 사장 김종헌

강원도 춘천에서 북카페 ‘피스 오브 마인드’를 운영하고 있는 김종헌·이형숙 부부는 이 카페가 대를 이어 가업으로 이어지면 좋겠다고 말했다.


강원도 춘천시 석사동에 있는 북카페 ‘피스 오브 마인드’의 주인 김종헌씨(61)는 5년 전 ‘억대 연봉 CEO 출신 카페 주인’으로 화제를 모았던 인물이다. 말단 사원으로 입사한 (주)남영비비안에서 사장직까지 오르며 성공 가도를 달리다 지난 2003년, 불쑥 사표를 던진 그는 “매일 술에 쩔어 사는 생활을 끝내고 틈틈이 글을 쓰며 살고 싶다”는 생각에 강원도 산자락에 전원 북카페 ‘피스 오브 마인드’를 세웠다. 그의 새로운 도전에 함께한 사람은 젊은 시절부터 꾸준히 제과제빵을 익혀온 아내 이형숙씨(56). 독일식 호밀빵과 허브차 등 이씨가 개발한 독특한 메뉴 덕에 카페는 금세 입소문을 탔고, 고위 경영자 출신 주인과 빵 굽는 아내의 남다른 이야기는 당시 여러 언론에 보도돼 널리 알려졌다.
따사로운 봄 햇살이 내리쬐던 지난 3월 초, 춘천시 석사천 옆 산책길에 오붓하게 자리 잡은 카페 ‘피스 오브 마인드’를 찾은 건 그가 당시의 소망이던 ‘글 쓰는 삶’을 마침내 시작했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다. 김씨는 최근 일반인을 위한 서예책 ‘추사를 넘어’를 펴내고 본격적으로 전문 집필가의 삶을 시작했다.
카페 안에 들어서자 촘촘히 벽을 채우고 있는 서예 작품이 한눈에 들어온다. ‘어서오시라’며 반겨 인사하는 김씨 뒤로, 웬만한 집 서재 한 귀퉁이를 떼다놓은 듯한 집필 공간이 보이는 것도 이색적이다.
“저는 서예를 사랑하는 은퇴 서생이에요(웃음). 여기는 제가 책 보고 글 쓰는 곳입니다. 카페 청소하고 빵 굽고 손님께 서빙하다 시간이 남으면 이곳에서 조금씩 글을 쓰죠.”
널찍한 카페 안에는 책 1만5천여 권과 김씨 부부가 그동안 모아온 서화 3백여 점, LP 음반 3천여 점, 오래된 타자기, 재봉틀, 옛날 라디오 등도 비치돼 있어 고풍스런 분위기를 풍겼다. 김씨는 원래 강원도 홍천 공작산 아래 있던 카페를 지난 2006년 이곳으로 옮겨왔는데, 당시 트럭만 30여 대가 동원된 이사 행렬은 큰 구경거리였다고 한다.
“홍천 카페는 건물 네 면이 다 유리창이라 전망이 일품이었지만, 소장품을 마음껏 전시할 수 없었어요. 하루 종일 햇볕이 들어와서 고서적과 서화에 좋지 않았거든요.”
김씨는 “춘천으로 옮겨오면서 자연과는 조금 멀어졌지만, 지금 ‘피스 오브 마인드’의 모습이 지난 20여 년 동안 꿈으로만 간직했던 상상 속의 북카페”라고 자랑스러워했다. 그는 춘천에 와서 새로 카페를 꾸미며 곳곳에 서예 작품을 전시해 홍천 시절의 ‘베이커리 & 북카페’에 서예 전문화랑의 개념을 더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때부터 서예에 대한 글도 쓰기 시작했다.
김씨에게 서예는 삶의 굽이굽이를 함께한 소중한 존재. 서울 종로에서 나고 자란 그는 지금의 경희궁 자리에 있던 서울중·고등학교와 당시 동숭동에 있던 서울대 철학과까지, 모든 학교를 종로에서 다녔다고 한다. 등하굣길 인사동을 기웃거리다 고서화의 세계에 빠져든 그는 중학생 때 종로2가 골목의 한 서예붓글씨 학원을 통해 서예의 세계로 들어섰다. 그 학원 원장은 당시 꽤 이름이 알려진 서예가였는데, 김씨를 몇 달 가르친 뒤 “더 큰 스승 밑으로 가라”며 원곡 김기승 선생에게 소개해 주었다고 한다. 원곡은 당시 박정희 대통령에게 글씨를 가르쳤을 만큼 서예로 일가를 이룬 인물이었다고.

전문 집필가로 나선 전 남영비비안 사장 김종헌

“선생님 댁에 가서 서예를 배웠는데, 대부분의 학생이 군 장성 부인 등 중년 여성이었어요. 남자 제자는 저 하나여서 선생님이 아주 귀여워하셨죠(웃음). 그분 밑에서 정식으로 서예에 입문했고, 그 뒤엔 소지도인 강창원 선생, 송천 정하건 선생님께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그는 비록 서예가가 되지는 못했지만, 운 좋게도 당대 최고의 작가들에게 가르침을 받은 덕에 글씨를 보는 안목만큼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게 됐다고 한다.
“대학 졸업하고 취업한 뒤엔 세계를 돌며 일하느라 조금씩 붓과 벼루에서 멀어졌어요. 하지만 서예에 대한 사랑만은 변하지 않았죠. 책을 쓴 건 서예가 점점 일반인들에게서 멀어지고 있는 현실이 안타까웠기 때문입니다.”
김씨는 “요즘 젊은 사람들은 추사 김정희의 이름만 알지, 그의 글씨가 얼마나 위대한 예술작품인지에 대해서는 전혀 모른다”며 “책을 통해 추사의 글씨가 갖고 있는 높은 예술성과 그의 경지를 뛰어넘기 위해 노력했던 다른 근현대 서예가의 삶을 소개하게 돼 기쁘다”고 말했다.

“앞으로 매년 한 권씩, 20년간 책 20권 펴내는 게 꿈입니다”
‘추사를 넘어서’는 김씨에게 인생 3막의 출발점이라는 의미도 갖는다. 직장생활 30년을 마감하면서 인생 1막을 마친 그는, 북카페와 베이커리 운영으로 2막을 열었다. “평생 흠모해온 다양한 분야에 대해 책을 쓰고 많은 이들과 나누고 싶다”는 새로운 도전은, 그에게 세 번째 인생의 시작이다.
“북카페를 연 뒤 시간 여유가 생겨서 에세이 형식의 책을 두 권 썼어요. 카페에 대한 이야기를 담은 ‘피스 오브 마인드-빵 굽는 아내와 CEO 남편의 전원일기’와 직장생활 체험을 소개한 ‘남자 나이 마흔에는 결심을 해야 한다’였죠. 그런데 이렇게 두 권 써보니 요령이 생기고 재미도 납디다(웃음). 그래서 집필가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본격적으로 하게 된 거죠. 인생의 재미는 본인도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일이 전개되는 데 있는 것 같아요.”
김씨는 “다음에 쓸 책은 불교의 참 모습을 일반인에게 들려주는 내용이 될 것”이라며 “제목은 ‘나는 맨발의 빵 먹는 부처님이 좋다’로 미리 정해놓았고, 현재 3분의 1 정도 완성했다”고 했다. ‘추사를 넘어서’처럼 문외한에게 새로운 세계를 보여주고, 그 안의 ‘보석’을 알아볼 수 있도록 눈을 키워주는 입문서가 될 것이라고 한다.
“이 외에도 50~60년대 서울 종로통 사람들의 살아가는 이야기, 시·서·화에 능했던 한·중·일 3국의 지식인들에 대한 이야기 등 20권 정도 쓸 주제가 이미 다 정해져 있어요(웃음). 자료도 이미 카페 안 책장에 모으고 있죠.”
김씨는 책상 옆에 붙어 있는 ‘저작등신(著作等身)’이라는 글씨를 가리켜보였다. ‘평생 지은 책을 쌓으면 자기 키에 이른다’는 뜻을 가진 사자성어를 보며 그는 늘 마음을 다잡는다고 한다. 김씨는 “지금부터 내 키에 이를 만큼 쓰기는 힘들겠지만, 앞으로 큰 탈 없이 20년을 살면서 1년에 한 권씩 20권의 책을 써내는 게 내 목표”라고 말했다.
‘피스 오브 마인드’는 계속 운영하다가, 언젠가 딸 세경양(34)과 아들 형태군(33)에게 물려줘 가업으로 잇게 할 생각이라고 한다.
“아이들도 이 카페를 참 좋아해요. 아들은 엄마처럼 제과제빵을 공부하려 했는데, 제가 먼저 조직에 들어가서 사회생활을 배우는 게 좋겠다고 조언해 회사에 들어갔죠. 지금은 중국에서 MBA를 공부하고 있고요. 딸은 남편의 미국 유학길에 함께 올라 벌써 제빵을 배워왔어요. 우리나라에도 외국처럼 대를 이어 전통을 키워가는 베이커리 북카페가 있으면 멋있지 않겠어요?(웃음) 저는 ‘피스 오브 마인드’가 그런 공간이 되면 좋겠습니다.”
김씨의 젊은 시절 꿈은 ‘독만권서 행만리로(讀萬券書 行萬里路·만 권의 책을 읽고 만릿길을 간다)’. 그는 “인생 세 번째 막에서 비로소 그 꿈을 이룰 수 있게 될 것 같다”며 활짝 웃었다.

여성동아 2008년 4월 53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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