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연재기사

유인경의 Happy Talk

가슴 뛰는 삶을 사는 용감한 그녀들

2008. 01. 16

가슴 뛰는 삶을 사는 용감한 그녀들

김두례, 보라옷 女人 130.3×162cm, 캔버스에 오일, 2002, 김두례, 빨강옷 女人 130.3×162cm, 캔버스에 오일, 2002, 김두례, 노랑옷 女人 130.3×162cm, 캔버스에 오일, 2002(왼쪽부터 차례로)


25년간 직장을 다닌 한 친구가 최근 25일의 휴가를 얻어 대대적인 얼굴 성형수술을 했다. 얼굴의 늘어진 부분을 들어올리고, 콧날도 부드럽게 바꾸고 입술도 도톰하게 만드는 등 그야말로 리모델링을 마쳤다.
“40여 년을 똑같은 얼굴로 살았으니 인생의 후반부는 좀 다른 모습으로 살고 싶었어. 무엇보다 거울을 볼 때마다 눈가의 자글자글한 주름살, 축 늘어지고 푹 꺼져가는 얼굴을 보면 슬프기도 하고 우울하기도 했는데 이젠 거울을 볼 때마다 즐거워. 물론 아직 내 스스로 달라진 모습에 잘 적응이 안돼 깜짝깜짝 놀라기도 하지만 앞으론 더욱 자신만만하고 당당하게 살 거야. 남편이나 아이들은 처음엔 너무 놀라고 어이없어하더니 이젠 적응을 했고, 동료들은 뒤에선 수군거리나본데, 뭐 남들이 내 인생을 살아주니?”
사실 말이 성형수술이지 전신마취를 하고, 얼굴의 피부를 잘라내고 꿰매고, 20일 정도는 미라처럼 붕대를 휘감고 있어야 하는 고통을 견뎌내야 한다. 수술이 꼭 성공하리란 보장도 없다. 수술비도 만만치 않아서 그 친구는 적금을 깼다. 대단한 용기(?)의 그 친구는 다시 팽팽해진 얼굴선과 아름답게 변한 용모에 매우 만족해했다.
또 다른 40대 중반의 한 직장여성은 20여 년간 다니던 직장에 과감히 사표를 던지고 ‘백수’를 선택했다. 유난히 완벽주의자였던 그 여성은 직장생활과 가정생활 모두에 최선을 다하느라 항상 긴장했고 스트레스를 받았다. 유난히 출장도 많고 야근도 많은 격무여서 두 번쯤 과로로 응급실에 실려가기도 했다. 하지만 20여 년을 쌓아올린 성을 하루아침에 떠나 한 달 동안 유럽여행을 다녀왔다.

20여 년간 잘 다니던 직장 사표 내고 새 인생 출발한 40대 여성
“내가 맡았던 프로젝트를 완성하느라 과로와 스트레스로 인한 급성간염으로 응급실에 실려갔다 입원한 적이 있어요. 병상에 누워 생각하니 이러다 죽으면 그뿐인데 내가 뭘 위해 이렇게 아등바등 살아야 하나 회의가 들더군요. 물론 계속 버티면 더 높은 자리로 승진도 할 테고 꼬박꼬박 월급도 나오고 퇴직금도 올라가겠죠. 하지만 그게 행복한 게 아니잖아요. 그래서 직장인으로 사는 삶에는 마침표를 찍기로 했어요. 조직 안에서 부속품으로 사는 것보다 좀 배고프고 불안할지 모르지만 내가 원하는 방식대로 살기로 결심했죠. 무조건, 아무 계획도 없이 유럽으로 떠나서 이곳저곳 걸어다녔어요. 지난 과거를 돌아보거나 앞으로 어떻게 살까 고민하지도 않고 그날 처음 바라보는 풍경에 감동하고 낯선 사람과 인사하고…. 아직 구체적인 장래계획은 없지만 별로 걱정하지 않아요. 다른 직장이 아니라 다른 직업을 찾아보려면 시간이 좀 필요할 것 같아요. 아니, 어쩌면 그냥 백수로 쭉 살지도 모르고요.”

1년간 해외 오지로 자원봉사 활동 떠난 20대 여성
스물아홉 살의 한 여성은 남들이 다 부러워하는 다국적 기업의 안정된 자리를 떠나 1년 동안 해외에 자원봉사 활동을 떠날 예정이라고 했다. 남들은 그 나이에 결혼을 하거나 경력을 업그레이드시키기 위해 해외로 나가 MBA 과정을 밟을 텐데 언제라도 할 수 있는 자원봉사를 하러 오지로 떠난다니, 그것도 꽃 같은 처녀가 말라리아나 풍토병 예방약을 매일 먹어야 하는 곳으로 간다니 내가 더 걱정스러웠다. 하지만 그녀의 표정이 너무나 밝았다.
“직장 상사들도 저를 인정해주시고 또래에 비해 연봉도 높아요. 본사에서 일하게 해준다는 약속도 받았어요. 하지만 30세가 되기 전에 다양한 체험을 해보고 싶어요. 제 인생을 알록달록한 총천연색으로 살아보고 싶거든요.”
또 한 살 더 나이를 먹으면서 난 이렇게 용기 있게, 주체적으로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여성들 앞에서 한없이 초라하고 부끄러워진다. 한 친구는 성형수술로 뉴페이스를 만들었고, 또 다른 여성은 고위 전문직 여성에서 평범한 중년 여성의 길을 과감히 선택했다. 또 20대 후반의 여성은 자기가 원하는 다양한 빛깔로 삶을 채색하겠다며 오지로 떠났다.
늘 “지겨워, 지겨워”라고 궁시렁거리면서도 ‘가늘고 길게 사는 게 내 인생 목표’라며 비굴하게 살고 있는 내가 한심하게 느껴졌다. 직장인들의 경력 관리를 담당하는 한 선배를 만나서 “뭔가 새로운 변화를 찾고 싶다”고 했더니 이렇게 말했다.
“인경씨의 경우엔 연봉을 얼마 더 많이 주는 다른 직장을 찾는 것도 아니고, 다른 언론사로 옮기려는 것도 아닐 테니 정말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찾아봐요. 꼭 해보고 싶은 일, 자신의 가슴이 뛰는 일이 뭔지 알아야 그 방면의 일을 찾을 수 있지.”
꼭 해보고 싶은 일이 뭘까. 지금 제일 부러운 사람이 누굴까. 말 한마디에 수백만의 시청자가 감동하고 미국의 대통령 후보까지 좌지우지하는 오프라 윈프리? 아니다. 만약 오프라가 대한민국 사람이었으면 그녀의 재능과 열정에도 불구하고 뚱뚱하고 나이 들었다는 이유로 방송 진행자로 나설 수도 없었을 거다. 난 그녀의 엄청난 재산과 파워가 부럽긴 하지만 그녀 같은 카리스마도 없고 파파라치에 시달릴 배짱도 없다.
자신이 좋아하는 나라로 떠나 가장 흥미로운 주제의 책을 집필하며 부와 명성을 누리는 시오노 나나미? 54세에 시작한 ‘로마인 이야기’를 15년 동안 집필한 시오노 나나미는 내가 제일 부러워하고 존경하는 여성이지만 난 나나미 여사처럼 평생 매달려 공부하고 책을 쓰고 싶은 주제가 없다. 또 딸아이나 친구들과 수다 떨고 싶어 외국에서 말년을 보낼 생각은 더더욱 없다.
‘바람의 딸’이란 별명처럼 세계 곳곳을 다니면서 재난에 처한 곳이나 빈곤한 지역의 사람들을 위해 헌신하는 한비야씨? 인터뷰를 하면서 그녀의 엄청난 열정과 보통 인간의 청력으로는 해독하기 어려울 만큼 빠른 속도의 말, 그리고 70대까지 세워둔 확고한 인생 계획표에 감동했다. 하지만 난 봉사활동을 하는 이들에게 격려나 후원금을 지급하는 것은 몰라도 언제 지뢰가 터질지 모르는 이라크나, 마실 물도 제대로 없는 곳에서 매일 죽음과 결투를 벌이면서까지 헌신하는 숭고한 인생을 살고 싶지는 않다.
그렇다면 나처럼 용기도 없고, 욕망도 강하지 않으면서 인생 후반부는 좀 멋스럽게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하다가 드디어 해답을 찾았다. 역시 내가 존경하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 영감의 말씀이었다. “하루를 잘 살아내면 그날 밤 평화롭게 잠들 수 있듯, 평생을 잘 살아낸 이들이 잘 죽을 수 있다”란 말이다. 그렇다. 어제 후회로 날 들볶지 말고, 내일 걱정을 할 필요 없이 매일매일 새로운 날들이 올 때마다 잘 살아내는 것, 그것이 한 살 더 나이 들어서도 내가 할 일인 것 같다. 덕분에 두려움 없이 또 한 살을 더 먹는다. 생큐, 레오나르도.

가슴 뛰는 삶을 사는 용감한 그녀들

유인경씨는… 경향신문사 여성담당 선임기자로 일하고 있다. 최근 군가산점 문제, 성희롱 사건 등 여성 관련 민감한 사안이 많아 다양한 사람을 취재하며 바쁘게 지내고 있다. 그의 홈페이지(www.sooda sooda.com)에 가면 그가 쓴 칼럼과 기사를 읽어볼 수 있다.







  • 추천 0
  • 댓글 0
  • 목차
  • 공유
댓글 0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