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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장애·자궁암 고통 딛고 사랑 키워가는 이상온·이미옥 부부

기획·송화선 기자 / 글·오진영‘자유기고가’ / 사진·홍중식 기자, 조세일‘프리랜서’

입력 2007.10.23 18:21:00

불의의 사고로 시력을 잃고 절망에 빠졌던 이상온씨는 이혼 후 홀로 어렵게 살던 이미옥씨를 만나 단란한 가정을 꾸렸다. 하지만 행복한 나날을 보내던 두 사람은 지난 6월 아내 이씨의 임신 뒤 태아 검사를 위해 찾은 산부인과에서 자궁암 선고를 받았다. 배 속 아이를 살리기 위해 지난 8월 말 건강한 딸을 낳은 뒤 항암 치료를 시작한 이 부부의 남다른 사랑.
시각장애·자궁암 고통 딛고 사랑 키워가는 이상온·이미옥 부부

이상온씨(47)는 앞이 보이지 않는 시각장애인이다. 그는 8년 전, 친구들과 술집에 갔다가 다른 테이블에서 취객이 던진 병에 눈을 맞아 시력을 잃었다.
“오른쪽 눈은 희미하게 물체 윤곽을 알아보고, 왼쪽 눈은 빛과 어둠만 구별하는 정도예요. 멀쩡하던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두 눈을 다 못 쓰게 됐으니, 그 심정은 말로 표현 못 하죠. 이렇게 되고 나서 1년 정도는 방에 처박혀 술만 먹으며 세월을 보냈어요. 처음엔 정말 억울하고 속상했죠. 분노와 복수심에 친구들한테 분풀이를 해달라 부탁하기도 했는데 그 집에 다녀온 친구들 말이 쪽방에서 초등학생 아이 둘을 데리고 살고 있다고 하더라고요. 딱한 처지를 알고 나니 더 뭐라 할 수도 없어서 조금씩 제 마음을 추스르기 시작했죠.”
세상이 끝난 것 같은 절망과 어떻게든 다시 일어나야겠다는 의지 사이에서 오락가락하던 그에게 새 삶의 희망을 가져다준 것은 부인 이미옥씨(42)와의 만남이었다고 한다. 친구들과 한 식당에 갔다가 마침 그곳에서 일하던 이씨를 만난 것. 부인 이씨는 처음엔 친구들과 자연스레 웃고 얘기하는 그가 시각장애인인 줄 몰랐다고 한다. 두 사람은 몇 차례 더 인사를 주고받으며 조금씩 서로에게 관심을 갖게 됐고, 가끔 전화 연락을 하는 사이가 됐다고.
“남편을 처음 만난 건 2002년이었는데, 그때 전 18년간의 결혼생활을 끝내고 혼자 살며 식당 일을 하고 있었어요. 결혼생활 내내 불행했기에 남편을 알게 될 무렵 전 지치고 찌들어 있는 상태였어요. 그런데 시각장애인이면서도 밝게 사는 남편을 보며 관심을 갖게 됐죠.”
외아들로 태어나 어린 시절 부모를 여의고 홀로 지내다 시력까지 잃은 이상온씨에게 이미옥씨의 사랑과 배려는 큰 힘이 됐다고 한다. 그는 어느 날 이대로 살면 안 되겠다는 생각에 114 안내에 전화를 걸어 “인천에 사는 시각장애인인데 복지 재활기관을 소개해달라”고 부탁했고, 그곳에서 받은 인천 시각장애복지관 번호를 이미옥씨에게 전하며 그곳까지 데려가달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그 뒤 4개월 동안 이상온씨는 기초재활 과정을 충실히 이수했고, 그동안 묵묵히 그의 곁을 지켜준 이미옥씨는 과정이 끝날 무렵 “나를 다시 웃게 해준 당신에게 눈이 돼주고 싶다”며 청혼했다고 한다.
“처음에는 안 된다고 했어요. 나 혼자 감당하기도 벅찬 삶인데 어떻게 식구를 만드냐고요. 하지만 저도 이미 아내를 좋아하고 있었고, 그렇게 2년 정도 더 만나다 결국 지난 2005년 함께 살게 됐죠.”
두 사람은 아내 이미옥씨가 세차장에서 일하고 받은 40만~50만원의 급여에 매달 나라에서 23만원씩 나오는 기초생활수급비를 모아 방 하나를 얻어 살림을 시작했다고 한다. 이상온씨는 둘 다 마흔이 넘은 나이라 아이를 갖지 않을 생각이었지만 아내 이미옥씨가 “외로운 당신을 위해서라도 아이는 꼭 있어야 한다”고 우겨 이듬해 큰아들 준영이를 낳았다고 한다.
“그 뒤로는 좋은 일만 계속됐어요. 준영이가 태어난 뒤 바로 영구임대아파트에 당첨돼 우리 세 식구만을 위한 보금자리가 생겼거든요. 제가 2년 동안 계속된 안마사 훈련을 마쳐서 직업도 갖게 됐고요. 가족 3명에 대한 생활보조비가 매달 80만원씩 나오고, 저도 안마사 일로 한 달에 20만원씩 버니까 충분히 살림이 꾸려지는 거예요. 눈을 잃고 나서 처음으로 행복하다는 감정을 느꼈죠.”

시각장애·자궁암 고통 딛고 사랑 키워가는 이상온·이미옥 부부

항암치료를 뒤로 미루고 은채가 태어나기를 기다리던 시절에도 이상온·이미옥씨는 “지금이 우리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이라고 말했다.


내친김에 두 사람은 둘째를 갖기로 했다고 한다. 나이 많은 부모가 세상을 떠난 뒤 혼자 남을 준영이를 위해 형제를 만들어주기로 결정한 것. 다행히 올 초 두 사람은 건강한 둘째 아이의 임신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하지만 행복은 계속되지 않았다. 4개월 무렵부터 이미옥씨에게 이유를 알 수 없는 하혈이 시작된 것. 병원에서는 아기집이 아래쪽에 있어 그렇다며 안정하면 괜찮아질 것이라고 했지만 피는 멈추지 않았고 급기야 임신 28주가 되던 지난 6월 중순에는 핏덩어리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알고 보니 자궁암이었어요. 눈앞이 캄캄하고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죠.”

“눈이 보이던 시절에는 늘 불행하다고 생각했는데 가족이 있는 지금은 마냥 행복해요”
병원에서는 자궁암은 생존율이 높은 암이라며 바로 태아를 포기하고 자궁을 절제하면 완치 가능하다고 했다고 한다. 하지만 두 사람은 이미 배 속에서 28주나 자라 발길질을 시작한 아기를 죽일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아이가 조금만 더 자라면 조산을 해도 건강하게 클 수 있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35주 때까지 기다리다 지난 8월22일 제왕절개수술로 딸을 낳았어요. 태어날 때는 2.5kg으로 좀 작았는데 인큐베이터에 열흘 있다 나온 뒤부터는 보통 아이들처럼 무럭무럭 잘 자라고 있어요(웃음).”
이상온씨는 딸 은채만 생각하면 자신도 모르는 새 웃음이 나지만 은채가 태어나던 날엔 마냥 웃을 수 없었다고 한다. 딸이 태어난 뒤 바로 아내 이미옥씨의 암수술이 시작됐기 때문이다.
“집사람은 그날 은채를 낳자마자 7시간에 걸친 대수술을 받았어요. 이미 암이 많이 퍼져서 자궁과 임파선, 난소 한 개를 절제했다고 하더라고요…. 얼마나 힘들었을지 상상만 해도 마음이 아프죠. 그런데도 아내는 아이한테 초유라도 먹이고 싶다며 의식이 돌아오자 바로 은채를 찾는 거예요. 병원에서 수술 때 사용한 항생제가 독해 오히려 해가 될 수 있다며 말려서 먹이지는 못했지만요.”
이미옥씨는 수술 후 몸을 추스른 뒤 바로 항암 치료와 방사선 치료를 시작했다. 두 아이를 돌봐야 하기 때문에 평소에는 통원 치료를 받고, 3주에 한번씩 항암 주사를 맞을 때만 3일 정도 입원을 한다고. 그러면서도 딸 아이에게 젖 한 번 물리지 못하는 걸 못내 안타까워한다고 한다.
“그럴 때면 제가 ‘당신이 얼른 나아서 건강하게 오래 사는 게 진짜 은채를 위하는 길’이라고 말해요. 아직 어린 아이들과 아픈 아내를 생각하면 저도 가끔은 막막한 마음이 들죠. 하지만 다시 생각하면 이렇게 함께 있는 게 얼마나 큰 행복인가요. 병원에서도 아이가 자라나 머리로 암세포를 건드린 덕분에 자궁암을 조기에 발견한 거지, 만약 모른 채 지나갔으면 나중에 더 위험해질 수도 있었을 거라고 하더라고요.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모든 게 다 감사할 일이에요.”
그래서 이상온씨는 항암치료 비용과 두 아이의 양육 문제 등 걱정거리가 태산이지만 결코 절망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돌이켜 생각하면 살아오면서 지금만큼 행복한 적이 없었어요. 눈이 보이던 시절 옷 장사, 가방 장사, 식당 일 등 여러 가지 일을 했지만 늘 가난하고 불행했죠. 하지만 이젠 소중한 가족이 있고, 최선을 다해 열심히 살면서 우리 가정을 행복하게 꾸리겠다는 생각만 하니까 오히려 마음이 편안해요. 앞으로 아내와 두 아이를 위해 더 열심히 일할 겁니다. 우리보다 어려운 주위 사람들도 돕고요. 그리고 좀 더 살림이 나아지면 가족들 얼굴을 볼 수 있도록 시력 교정수술도 받고 싶어요. 오른쪽 눈은 수술만 받으면 0.1 정도까지 시력을 회복할 수 있다고 하거든요. 예전엔 엄두도 못 냈는데, 요즘은 아이들 얼굴이 보고 싶어서 욕심이 나네요(웃음).”

여성동아 2007년 10월 52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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