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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leb 긍정의 힘

가장 좋은 나이는…

글·최순희‘작가·번역가’

입력 2007.09.10 14:31:00

목디스크로 동네 종합병원에 반 년째 물리치료를 받으러 다니고 있다. 서너 번 가다가 귀찮아지면 한 열흘 쉬고, 그러다 더 아파지면 다시 찾아가는 불량환자다.
어제는 핫 팩을 해주고 나가려던 물리치료사가 그런데, 정말 궁금하다면서 내게 직업을 물었다. 청바지에 운동화를 신고 민낯으로 부스스하게 찾아오는 동네환자인 나를 두고 어째서 그런 것이 궁금해졌을까. 나는 그의 호기심이 오히려 더 흥미로웠다. 분명 어떤 전문직이나 예술분야 종사자가 틀림없다고 단언하는데, ‘머리와 가슴을 많이 쓰는’ 사람 같다는 표현에 나는 그의 영리해 보이는 눈빛을 유심히 바라보게 되었던 것이다.
“직업을 알면 치료를 좀 더 효과적으로 할 수 있거든요. 정말이지 미술이나 문학 등의 창작활동을 하시거나 혹시 대학에서 그런 분야를 가르치는 교수님 아니세요?”
간간이 모르는 사람에게 비슷한 질문을 받을 때마다, 나는 괜한 분위기만 풍기고 다니는 딜레탕트(예술이나 학문 따위를 직업으로 하는 것이 아니고 취미 삼아 하는 사람을 이르는 프랑스어) 사기꾼이 된 것만 같아 곤혹스럽기 그지없다. 집요하게 묻는 품이 ‘그러면 그렇지’하며 ‘교수님’으로 만들어버릴 기세여서, 컴퓨터 앞에 많이 앉는 일을 해 목 디스크가 온 모양이라면서 글이니 번역이니를 언급하고 말았다.
그는 반색을 하며 자기 얘기를 했다.
“제가 원래 전문대만 나왔거든요. 3년 전에 이제라도 대학을 다시 다닐까, 너무 늦은 것은 아닐까, 4년제를 졸업한들 무슨 득이 있을까, 굉장히 망설이며 고민을 많이 했었어요. 제가 좀 동안이라서 잘 모르시는데 여기선 제일 나이가 많거든요. 그러다 결단을 내려 편입해서 올해 졸업을 했는데, 하고 보니 한 살이라도 젊을 때 시작하길 참 잘했구나 싶어요. 지금 이 나이에 하려면 몇 배 더 힘들었을 거 아녜요.”
일과 야간대학 공부를 병행했노라는 대견한 이야기인데, 듣다 보니 그가 말하는 ‘지금 이 나이’가 대체 몇 살을 가리키는 건지 궁금해졌다. 아직 이십대로 보이는데, 여기서 가장 나이가 많고 동안이라 그렇지 그토록 늦은 나이라면, 그럼 삼십대 후반쯤이라도 되었단 것일까?
나이를 물어보자 그는 말 대신 양 손가락을 몇 번 좍 펴 보였다. 그게 몇 살이라는 건지 잘 알 수가 없었다. 재차 묻자, 그는 옆 침대의 환자에게 들릴세라 허리를 굽혀 귓속말로 소곤거렸다.
“스물아홉 살. 내년에 서른이 돼요. 비밀이에요.”

나이듦의 매력은 지금 이 순간을 오롯이 아끼고 사랑하는 법을 배우는 것
나는 그만 폭소를 터뜨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귀여운 아가씨였다. 그에겐 스물아홉이란 나이가 아무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은 엄청난 나이인 것이다. 왜 안 그렇겠는가. 나도 스무 해 전쯤 서른 살 생일에, 이십대를 영영 보내버린 아쉬움과 엉겁결에 삼십 고개로 들어선 당혹감을 꾹꾹 눌러 적어놓기도 했던 것이다. 서른이 지나도 삶은 계속되며, 오히려 삶의 더 찬란한 화양연화는 앞으로 다가올 날 가운데 있다는 걸 그도 곧 알게 되리라.
얼마 전 외신에서 영국 여인들이 가장 행복하다고 느끼는 나이가 57세라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일견 수긍이 갔다. 늙긴 늙었지만 그래도 아직 완전히 늙은 것은 아니고, 자녀교육의 짐은 벗었지만 아직 배우자와 사별할 나이는 아니며, 경제적으로도 웬만큼 안정을 이루어 그런대로 평온한 일상을 누릴 여건이 마련되었을 나이일 법했다. 그러나 실은 그런 여건 자체보다는, 창공을 날아오르려던 날갯짓도 마침내는 수굿해지고 내가 가고 싶은 지점과 내가 지금 서 있는 지점 사이의 괴리에 순응하는 법을 배우면서 행복지수가 상대적으로 높아진 것이라는 해석이 보다 정확할 것이다.
나도 나이 앞에 비겁하지 않은 삶을 살고 싶었다. 그러나 ‘이 나이’가 되고 보니 그 나이가 어떤 나이인지 귓속말로도 굳이 속삭이고 싶지 않은 사람이 되고 말았다. 다만 한 가지 위로가 있다면, 어제를 후회하고 내일에 지나친 기대를 거는 대신 내가 지금 그저 이 한순간, 오늘 하루를 오롯이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이 돼 있다는 사실이다.
다가올 모든 나이들을 각각 가장 좋은 나이로 살면서, 그런 다음엔 모두 잊고 잊히면서 흘러가고 싶다.
최순희씨는…
가장 좋은 나이는…
한국외국어대 영어과를 졸업하고 미국 UCC에서 도서정보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로스앤젤레스 시립도서관에서 10년간 사서로 근무하다 1991년 수필계간지 ‘수필공원’을 통해 등단했으며, 2001년 여성동아 장편소설 공모에 ‘불온한 날씨’로 당선돼 작가로도 데뷔했다. 소설 ‘불온한 날씨’, 산문집 ‘딸이 있는 풍경’ ‘넓은 잎새길의 집, 그리고 오래된 골목들의 기억’ 등의 저서를 냈고, ‘비밀의 숲 테라비시아’ ‘바람의 문’ 등 다수의 책을 번역하며 전문 번역가로도 활동 중이다.


여성동아 2007년 9월 52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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