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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도원’

한여름에 감상하는 눈 덮인 시골 역, 우직한 철도원이 주는 아름다운 슬픔…

기획·김동희 기자 / 글·민지일‘문화에세이스트’ / 사진·REX

입력 2007.07.12 10:38:00

‘철도원’

일본 작가들의 소설이 인기다. 특히 중견작가 아사다 지로의 글은 이야기가 쉽고 술술 풀린다. 상황도 일상에서 보통으로 마주치는 일. 개인의 고민 따위로 전전긍긍하지도 않는다. 그런데도 읽다보면 감동이 솟구친다. 그것도 아주 진하게…. 단편집 ‘철도원’에 실린 작품들이 대표적이다. 별로 길지 않은 8편의 글을 읽다보면 눈물이 줄줄 흘러 책장이 얼룩지기 일쑤다. 그러면서 가슴이 꽉 차는 느낌이 든다. 마력이다. 시중에서 흔히 보는 평범한 이웃과 그들의 삶을 슬픔과 아름다움으로 이토록 쉽고 편하게 버무릴 수 있다는 건 예삿일이 아니다. 이 사람, 정말 타고난 이야기꾼이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타고난 이야기꾼이 풀어놓는 외길 걷는 남자의 가슴 울리는 이야기
단편집의 백미는 단연 ‘철도원’으로 영화로도 만들어져 수많은 관객을 울렸다. 특히 철도원은 눈밭을 달리는 칙칙폭폭 기차와 고풍스런 역사(驛舍), 그리고 고집스러우며 투박한 역장의 인생사가 어우러져 한편의 아름다운 시로 피어났다는 평가를 받았다. 일본 북해도의 작은 탄광마을 호로마이로 가는 기차 노선은 승객이 급격히 줄어 폐선이 확정됐다. 그곳의 역장 오토마츠는 올해 꼭 육십. 정년퇴임을 눈앞에 두었다. 열다섯 소년 때부터 45년을 오직 호로마이 선과 함께한 그에게 열차 폐선과 퇴임이 겹쳤으니 회한이 없을 리 없다.
17년 전 눈 내리던 날 아침, 그는 낳은 지 두 달 된 외동딸 유키코를 아내의 팔에 안겨 병원으로 보냈다. 평소처럼 수신호를 하여 기차를 보내고 맞았던 그날 밤 유키코는 싸여 갔던 모포에 말려 차디찬 몸으로 돌아왔다. “당신, 죽은 아이까지 깃발 흔들며 맞이해야 되겠어요?” 아내는 눈 쌓인 플랫폼에 쪼그리고 앉아 죽은 유키코를 꼭 끌어안고 그렇게 말했다. 철도원 일이란 게 그렇다며 변명하는 그에게 아내는 울부짖었다. “다른 얘긴 다 그만둬요. 당신 아이가 돌아왔어요. 이 꼴로요. 눈덩이처럼 얼어서 돌아왔다고요!” 그 아내도 재작년 세상을 떴다.

정년을 맞는 새해 아침, 오토마츠는 역에 놀러 온 예닐곱 살짜리 여자아이를 보았다. 곧 학교에 입학한다며 빨간 책가방을 멘 아이는 오토마츠에게 차렷 자세로 경례까지 해가며 애교를 부렸다. 그날 밤 12시. 중학생 모습의 소녀가 찾아왔다. 동생이 셀룰로이드 인형을 잃어버리고 울면서 돌아왔다는 것이다. 눈 덮인 밤, 기차역사에서 역장은 소녀로부터 감사의 뽀뽀를 받고 감격한다. 그리고 다음날. 눈이 펑펑 쏟아지는 오후, 이번엔 역장실로 여고생이 찾아왔다. 단정한 모습, 어떤 직업보다 철도원이 좋다는 그 아이는 오토마츠가 상행선 기차를 보내러 나간 사이 저녁식사를 차렸다. 그 식사는 죽은 아내가 자주 끓여주던 된장국과 똑같은 맛이었다.

‘철도원’

그랬다. 세 아이는 죽은 유키코의 혼령이었다. 초등학교 입학 무렵, 중학교 진학 무렵, 그리고 살았다면 열일곱 여고생이었을 모습으로 차례차례 나타나 아빠에게 사랑을 보였던 것이다. 세 아이가 딸의 현신임을 겨우 알아챈 오토마츠. 셀룰로이드 인형을 만지작거리며 왜 진작 유키코라고 얘기하지 않았냐고 묻자 딸은 “아빠가 무서워하실까 봐서…”라고 대답한다. 울먹이며 제 가슴을 쓸어안은 역장은 “내가 왜 무서워하겠니. 세상 어디에 제 딸을 무서워하는 아비가 있겠니?”라며 말을 잇지 못한다. 셀룰로이드 인형은 아내가 울면서 딸의 관에 넣어줬던 것이었다. 17년 만에 다시 만난 아비와 딸이 안타까운 듯 펑펑 내리던 눈도 멈추었다.

이튿날 아침, 사람들은 호로마이 역의 오토마츠 역장이 플랫폼 끝의 눈더미 위에 쓰러져 죽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입에는 호루라기를 물고 손깃발을 꼭 쥔 채로…. “철도원은 무슨 일이 있어도 눈물 대신 호루라기를 불고, 주먹 대신 깃발을 흔들고, 큰소리를 내지르는 대신 호령을 뽑아야 한다”던 자신의 말처럼 죽은 것이다. 그 함박눈이 멈추던 밤, 호로마이 앞산엔 은빛 보름달이 떠올랐고 역장은 눈에 묻혀 죽기 전 역무일지에 “이상 없음”이라고 적어 놓았다.



애틋한 가족애와 삶의 애수를 시적으로 풀어낸 작품
이 소설의 주된 모티프는 크게 세 가지다. 우선 개인 일은 접고 제복과 호루라기, 깃발에 묻혀 사는 철도원이란 직업이다. 딸이 죽어 돌아온 날까지 깃발을 흔들고 호루라기를 불며 기차를 맞이한 오토마츠의 투철한 직업관이 이야기 전반을 관통한다. 그러나 사실, 그 못지않게 독자의 혼을 빼는 건 철도원 가족의 애틋한 사랑이다. 철도 일 때문에 딸과 아내를 먼저 저세상으로 보냈지만 아내와 딸은 그런 남편, 아빠를 원망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에게 무한한 사랑과 신뢰를 보냈다. 불과 두 달 동안 이 세상에 머물고 떠난 유키코의 혼령이 철도원 아빠가 자랑스러워 차렷 자세로 경례를 붙였으니 말이다.

마지막으로 눈여겨볼 대목은 빼어난 풍광과 덧없는 시간의 흐름이다. 지금은 박물관에서나 볼 수 있는 증기기관차와 낡아빠진 역사, 그리고 한도 끝도 없이 내리는 북해도의 눈이 철도원 일가 못지않게 이 소설에서 주연으로 등장한다. 오토마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 때마다 눈은 세상을 덮어버릴 듯 내리더니 끝내는 그를 죽음으로 이끈다. 증기기관차의 탄부로 시작해 기관사 역무원 역장을 거쳐 정년퇴임을 눈앞에 두기까지, 오토마츠에게 펼쳐진 세월의 흐름이 은백색 눈과 어우러져 장엄한 고독감을 불러일으킨다.

작가 아사다 지로는 한 인터뷰에서 “아름답게, 알기 쉽게 쓰는 것을 소설 쓸 때의 두 가지 원칙으로 삼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예술은 최고 형태의 오락으로 중졸 독자가 이해할 수 없다면 그건 가짜 예술”이라고 거침없이 내뱉는다. 아무려나 철도원이 주는 아름다운 슬픔과 그림처럼 펼쳐지는 영상미에 반한 독자라면 당분간 다른 글로 감동 받기는 힘들 테니 그것이 걱정이다. 문학동네 펴냄, 양윤옥 옮김.
작가 아사다 지로
‘철도원’
51년 도쿄에서 태어났다. 집안이 몰락하는 충격을 겪은 후 야쿠자 생활을 하다가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몰락한 명문가의 아이가 소설가가 되는 경우가 많다’라는 문장을 읽고 소설가의 꿈을 품었다. 91년 야쿠자 체험을 담은 ‘당하고만 있을쏘냐’와 ‘번쩍번쩍 의리통신’을 펴내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95년에 장편소설 ‘지하철’로 요시카와 에이지 문학상 신인상을 수상했고, 97년에는 첫 소설집 ‘철도원’으로 나오키상을 수상했다. 이밖에 ‘장미 도둑’ ‘천국까지 100마일’ ‘창궁의 묘성’ 등의 작품이 있다.


여성동아 2007년 7월 52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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